쇼인은 분세이 13년 음력 8월 4일 하급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야마가류 병학사범인 숙부의 양자가 되었다. 양부 다마키 분노신에 의해 병법을 배우고 1850년 병학연구를 위하여 규슈에 유학하였다. 이듬해 에도에 가서 사상가 사쿠마 쇼잔에게 서양 학문을 배우고, 매슈 C. 페리의 흑선 외교를 계기로 도쿠가와 막부에 대해 분노를 느끼며 존왕양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외국 유학을 결심, 1854년 제자인 가네코 시게노스케(金子重之助)와 해외 밀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투옥되었다. 숙부 분노신이 설립한 쇼카손주쿠를 인수하여 1857년 자택에서 쇼카손주쿠의 숙장으로 취임하였다.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즉 천황 아래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주창하였다.[1] 또한 그는 한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정한론은 그의 제자인 이토 히로부미 등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1858년,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창하다 노중 수좌(막부의 고관) 마나베 아키카쓰(間部詮勝) 암살음모에 연루되어 안세이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고, 이듬해인 안세이 6년(1859년) 심문을 받다가 마나베 아키카쓰 암살 계획을 진술한 후 사형판결을 받고 음력 10월 27일에 참수되었다. 시체는 벌거벗겨져 나무통에 넣어진 채로 아무렇게나 매장되었으나, 후에 격분한 제자들이 막부에게서 시체를 빼앗고 예를 갖추어 이장했다. 존왕양이를 위해서라면 직접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행동파이기도 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야마토 다마시(大和魂ㆍ일본혼)'를 외쳤다고 한다.[1] 저서에 《강맹차기(講孟箚記)》는 맹자(孟子)를 실천적으로 해석하여 널리 알려졌다.
한편 존왕양이를 주창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훗날 커다란 정치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요시다 쇼인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1].
2006년 9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그를 가장 존경한다고 밝히기도 했다[1]. 일본의 우익단체 중에는 그의 이름과 그가 활약하던 학당인 '쇼(松)'라는 글자를 따서 그의 정신을 기리는 쇼콘주쿠(松魂塾)라는 학당이 있어 그의 학맥이 계승될 만큼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쇼카손주쿠 내에 쇼인을 모신 신사(神社)가 세워져 성역화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