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문화를 알자] 오태의 풍수론-5 2. 망와와 귀면 Ⅰ. 선산객사의 망와 선산객사의 지붕 위에는 지붕을 치장하여 관아의 권위를 더하는 한편 어떤 믿음을 표상하는 잡상이 올려져 있다. 이와 함께 지붕의 네 귀퉁이를 마감하여 장식한 망와의 익살스런 표정이 또한 이색적이다. 기와를 구운 당시의 장인의 속내가 오늘까지 전해진다. Ⅱ. 선산객사의 귀면 선산객사의 기둥위에 힘을 받는 부분에는 코끼리, 개, 돼지 등 으로 보이는 다양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귀면이다. 용의 얼굴 같기도 한데, 보기에 따라 웃는 듯 화내는 듯한 표정이 무척 재미있다. Ⅲ. 단계 하위지 선생 유허비각의 망와 도깨비 인가? 귀신인가? 부라린 눈에 삐쭉한 송곳니는 모든 잡스런 것이 근접치 못하게 위협한다. 하지만 섬뜩한 무서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상전벽해, 개발의 현장 꼭 십년전의 일이다. ‘구미의 세시풍속’ 을 조사하기 위해 처음 봉곡동을 방문한 일이 벌써 먼 일이 되었다. 1991년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는 구미시의 의뢰에 따라 구미시립역사박물관 기본 계획 용역을 수행하였다. 나는 그 조사단의 일원으로 구미를 방문 하였다. 세월 만큼이나 봉곡도 변하고 나도 변했다. ‘뽕밭이 바다로 변한다’ 고 했다. 봉곡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된이후 봉곡의 변화가 그러하다. 봉곡에서는 사람의 눈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늘 확인 할 수가 있다. 봉곡 뒷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금오산이 눈앞에 바로 다가선다. 산을 내려 마을을 지나 들로 들어서면 금오산은 점차 멀어져 간다. 봉곡을 처음 방문한 날 처음 만난 봉곡의 노인은 “금오산 밥상 받은 듯 하다” 고 하였다. 늘 잊혀지지 않는 말이다. 초가의 바라지를 열면 금오산이 눈앞에 가로막아 선 모습을 말한다. 사라진 석장승과 의우총 묘비 홍역이나 마마를 물리치기위해 세웠다는 석장승도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지도 않고, 팔려간 송아지가 돌아와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죽은 것을 기려 세운 ‘의우총’ 이라 한 묘비도 어디로 사라지고 없다. 구획정리사업의 일환으로 공원을 조성하고 어딘가에 잘 유지하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어디에서 제자리를 잡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 다붓 또는 다복, 별남, 장고개, 갓골, 4개의 취락으로 이루어진 봉곡의 선주민은 연안 이씨, 밀양 박씨, 벽진 이씨, 안강(경주) 노씨 등이 차례로 입향하여 수 백년을 살아 왔다고 한다. 사람의 흔적이란 오래될수록 쉬 사라지고 최근 일은 뚜렷이 흔적을 남기기 일쑤이다. 별남에 새 비석이 하나 섰다. “뒷산이 무거운 것을 둘 수 없는 풍수 형국이라 묘비도 세우지 못했다.” 며 마을 입구에 비석을 세운 내력을 전해준다. 그 주인공은 마을 뒷산의 이름과 같은 북봉이란 호를 지녔던 이민선 선생이다. 벽진 이씨로, 선조 15년(1568)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학행으로 추천되어 비안 현감, 양천 현감을 지낸 후 성맘에 들어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고 전한다. 그 아들 상일의 벼슬이 높아짐에 따라 선생도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상일을 만나러 별남에 왔다고 하니 둘의 사이가 가까웠던 모양이다. 생육신 이맹전의 후손이었던 상일이 그 선조를 기려, 농암 김주, 단계 하위지, 경은 이맹전 세분의 사적을 묶어 <삼인록>을 발간 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효자와 호랑이 이 곳에 많이 모여 살아 이른바 ‘봉곡 박씨’ 라 불리는 밀양 박씨의 입향조 박수홍 선생은 북봉의 외손자이다. 그의 일대기를 간략히 살펴보자. 박수홍(1588-1644), 본관은 밀양, 자 언유. 1618년(광해군 10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이어 전적을 거쳐 예조 정랑으로 춘추관 기주관을 겸직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때 강화로 인조를 호종하고, 돌아와 금구현령으로 나가 전란의 피해복구에 힘썼다. 뒤에 예조참의 등을 거쳐 경주부윤으로 부임, 임기를 마치고 상주에서 죽었다. 이 때 부친의 위급을 접한 진환이 상주로 달려가 손가락을 깨물어 그 [ 자료출처 : 구미문화원 제공 ] [구미문화를 알자] 오태의 풍수론-6 아들, 사위 구별 없이 키운 전통 안강(경주) 노씨의 사위가 되었던 벽진 이씨가 자리를 잡고, 다시 벽진 이씨의 사위가 된 밀양 박씨가 봉곡에 뿌리를 내렸다. 벽진 이씨는 지난 호에 소개한 감사공 이상일의 등장으로 그 기틀을 확연히 다진다.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이 이상일을 만나던 날 밤, 남극노인성이 나타나 마을 이름을 별남이라 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뒤늦게 자리잡은 밀양 박씨는 경주부윤 박수홍, 그들 아들 효자 진환으로 이어지며, 그 아래대에서 8대손 선달(무과급제자)래민, 두명의 열녀(양주 조씨와 함종 어씨)등이 가문의 내력을 말해준다. 흉년 기근을 견디게 한 박 선달 박 선달은 경주부윤 수홍의 8대손이며 고종 25년(1888) 무과에 등제하여 용양위 부사과(군부대 종6품)를 지냈다. 특히 그는 고종 41년(1903) 큰 가뭄이 들어 주민들이 굶주리게 되자 곡식을 풀어 위기를 넘기게 하였다.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고종 42년(1904) 구황불망비를 세우고, 다시 1937년 기적비와 비각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벽진 이문 에도 효자를 기리는 정려가 있으니 그 주인공은 명준이다. 기존 문헌에서 그에 대한 소개는 의외로 간단하다. 단 한 줄로 ‘벽진인으로 조봉대부(종4품 둘째 품계) 사헌부(감찰기관) 지평(정5품)에 증직 되었다. 사전에서 증직을 찾아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죽은 뒤에 품계. 관직을 추증하여 영예를 누리게 한 일. 삼국시대부터 행하였으나, 제도화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988년(성종 7년)문무상참관 이상의 부조를 봉착한 이른바 추은봉증을 실시하면서 부터이다. 1391년(공양왕 3년) 도평의사사의 상언으로 2품 이상은 3대(代), 3품은 2대, 4-6품은 부모까지를 중직하는 제도를 확립시켰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추증의 대상과 범위를 확대 시켰다. 즉 고려시대의 추은봉증 이외에도 명유(名儒), 절신(節臣), 과거에 합격하고도 벼슬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 효행이 뛰어난 사람 등에게도 상당한 품계와 관직을 추증하였고, 이밖에도 증직한 경우가 많았다. 현직이 모자라서 자리(관직)를 두고 치열한 다툼이 있던 때, 증직의 매력은 어떤 것일까? 물론 증직자들이 자리를 바랐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사후에도 그 삶과 치적에 대해서 명예를 부여하는 것이 오늘날 공정치 못하게 훈. 포상이 남발되는 일련의 사태와 대비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고, 부모를 정성스럽게 모시고, 소가 주인을 따라 죽고, 남편을 따라 죽는 열녀가 태어나는데는 남다른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그 분위기를 읽기 어렵지만. 선주민의 삶과 문화를 모를 이주민 봉곡 마을의 변화를 초래한 구획정리사업은 취락은 크게 건드리지 안호 마을 앞들과 주변 야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아직 마을을 떠난 주민은 많지 않다. 장차 분양된 토지에 건물이 들어서면 선주민들이 살던 마을과 유적들은 가려져 쉽게 눈에 뜨이지 않게 될 것이다. 농토를 잃거나 넘겨버린 농민들이 선대의 유업을 어떻게 이어갈지 궁금하다. 구미의 명물이된 구획정리지구 내의 테마파크에는 따스한 휴일의 봄볕을 즐기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다. 이주민의 아이들이 또한 선주민의 역사와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하다. 4.버들은 물가에 살아야 고향을 용궁에 두고 ‘수류우향(水柳寓鄕)’ 물가에 버들이 의지한 땅이라면 표현이 거칠다고 나무랄컨가. 해평면 일선리, 지도에 없던 마을이 새로 생겼다. 일선리란 마을 이름도 워래 선산에는 없었던 이름이다. 전주 류씨인 이들 안동 사람들이 안동을 떠나 이곳 선산으로 이주 한 것은 “500년 역사가 물에 잠긴다.” 고 한 노학자가 개탄한 임하댐의 건설 탓이다. 개발의 돌풍이 전국 곳곳을 강타하여 이주민이 각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심지어는 안동댐 건설로 고향을 용궁에 바친 후, 이주하여 살던 어떤 이는 다시 임하댐 건설로 또다시 이주 하는 비운을 맞기도 한 웃지못할 사연도 있다. 이주 직전 한 할머니는 고향을 떠나면서 사향가(思鄕歌)를 지었다. 단지 단지 숱한 단지/어디 가서 사드라도/유가 본색 잃지 말고 제 2고향 건설하여/자손 유념 또 할세라(중략) 날에 주선으로/땅 넓고 물 맑은 땅/선산 해평 명기 잡아 낙동강 칠백리에/산 넘고 물 건너니/고향은 아득하다. 굽이굽이 다리 놓여/우리 살 곳 여기로다(중략) 삼촌의 우리 친척/형제같이 합심하고/서로 동정 아껴가며 무실 한들 박실이니/다 같은 자손으로/허물 말고 기탄 없이 일심동체 결의하여/보람차게 살아보세(중략) 서로 항상 조심하고/타향에 가서라도/안동양반 양반이라 호평 듣고 잘 삽시다. 지금도 노인들은 음 10월 묘사 때가 돌아오면 고향의 선영을 찾아 안동으로 떠난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이주 때의 애로사항도 많았다. 종가의 안 자제가 아주 당시의 사연을 조사, 연구한 논문이 두어 편 더 있다. “버들은 강가에 살아야 한다.” 물가에서 잘 자라는 버들이 성씨의 상징이듯이 이주시에는 물가라는 장소의 선정에고 관심을 기울인 듯하다. 낙동강으로 바라보며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배치를 하고 있으나 구획된 마을이라 전통적인 마을의 향취를 느끼기 어려운 점이 무척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