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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따라 구름 따라
-內雪嶽, 五臺山 순례 기행기- 신형호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는 것은 언제 생각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특히 都市文明속에서 늘 되풀이되는 생활과, 직장생활로 얻은 스트레스에서 잠시 해방되어 대자연 속에 몸을 던져 日常을 잊는 기분이야 어찌 나만이 겪는 즐거움이겠는가?
평소 안면이 있는 L양의 권유와 내설악과 오대산 속을 헤매고 싶은 나의 욕심이 맞아 떨어져 구도회(求道會)에서 주관한 ‘내설악, 오대산 사암 순례’라는 행사에 옵서버로 참가하는 기회가 생겼다. 아직 이렇다 할 내 나름의 뚜렷한 종교관을 가지진 못했지만 여러 행사에 참여해 견문을 넓히는 기회도 되고, 또 이런 순례 행렬에 동참하게 된 것이 어쩌면 불가에서 늘 말하는 因緣에 의한 것이라고나 할까?
첫째 날.
모처럼의 長期산행 여정에 설레는 심정을 선잠으로 새우고, 연한 회색 연막탄을 뿌린 듯한 짙은 안개가 깔린 거리 동쪽으로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하면서 아침이 열리고 있었다. 새벽 6시에 출발한 일행이 원주, 홍천, 인제를 지나 8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한 곳이 내설악 관문인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 百潭寺!
민족시인이자 승려요, 독립운동가인 萬海 韓龍雲선생이 오랜 세월 기거하시던 곳.
“님은 갔습니다 /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후략)”
그 유명한 <님의 沈黙>을 탈고한 이곳. 설레는 마음으로 萬海 선생의 자취를 더듬으며 난생 처음으로 맞는 여러 가지 예불의식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마침 내가 하루 묵을 방이 예전에 萬海 선생님께서 거처하시던 곳이라는 한 스님의 자상한 얘기를 들었다. 새삼 학창시절 졸업논문을 <‘님의 沈黙’에 대한 一考>라는 글을 작성한 나로서는 참 묘한 인연에 잠시 숙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문득 우리 국문학사의 큰 별인 春園 李光洙선생과 萬海 한용운선생 두 사람에 관한 지나간 한 일화가 생각난다.
1930년대 초반. 일제의 탄압이 절정에 이르자 많은 저명인사들이 변절을 했다. 그중 春園이 변절해서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소식을 전해들은 萬海는 “春園, 그 사람 아주 생각이 짧군 그래. 사천 년이나 끌어온 민족이 그래 아주 망할 것 같은가? 그 사람 꽤 재주가 있는 성 싶더니 이제 그만 미쳤군!” 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꿈속에서라도 혹시 만해 선생을 뵈올 수 있을까 하는 기대는 선잠 속에서 사라지고, 둘째 날 여정코스인 봉정암(鳳頂庵)을 향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간밤 내내 내린 비로 어제 저녁에 건너왔던 백담사 앞 개울의 나무다리가 떠내려가 버렸다. 할 수 없이 바지를 둥둥 걷고 몇몇 분들과 함께 물이 얕은 상류 쪽으로 올라가서 건넜다.
둘째 날.
오늘의 목적지인 봉정암까지는 약 11Km. 수천 년의 비경을 간직한 채 태고시대의 얼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계곡. 돌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원시의 신비가 싱싱하게 살아 있는 백담계곡을 걷는다. 골짜기 골짜기마다 흐느끼는 듯 울부짖으며 부딪치는 물소리가 제일 먼저 반긴다. 풀잎 위에 구르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고, 여기 저기 무심히 자리한 너럭바위 하나에도, 물살에 확 패인 물 속 바위를 감도는 물결도, 나그네에게 무엇인가 얘기를 해 주며 無言의 웃음을 쌩긋 짓는다. 계절보다 조금 일찍 예쁘장하게 물든 단풍잎 몇 장 물살 따라 흐르는 모습을 보노라니, 속세가 아닌 어느 무릉도원의 세계에서 내가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明鏡보다 더 맑아 한 번씩 내려 볼 때마다 마음속 생각까지 투명하게 비치는 푸르스름한 계곡 물빛. 뽀얀 물보라 날리며 내리쏟는 폭포의 울부짖음. 한 걸음 한 걸음 쓰다듬어 올라갈 때마다, 대자연 앞에 선 인간의 왜소함과 미미한 존재임을 절감하게 해 준다. 한 고개를 감아 돌면 마치 날카로운 작두로 깎아 자른 듯한 미끈하고 험준한 바위가 죽순처럼 솟아 구름을 뚫고 하늘을 찌르고 있고, 그 골짜기를 감돌며 내리 쏟는 물줄기의 서늘함이란 천상의 세계에서 노니는 기분이었다. 눈을 들어 건너편 숲을 보면, 아무 근심 없이 수백년을 살아와 쭉쭉 뻗은 각선미을 한껏 자랑하는 울창하고 짙푸른 老松들의 천연자연림. 푸른 숲을 헤쳐 가는 산행은 우리의 마음까지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해보면 울창한 솔숲 사이 언뜻 언뜻 내비치는 새파란 하늘, 근심 없이 살짝 피어나는 한 조각 흰 구름. 진정 설악산은 그 품에 한번 안긴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영원히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산이라고 하는 이유를 겪어 본 사람이면 알 수 있으리라. 여덟시간 남짓 더듬어 올라가면서 인간 본연의 순수하고 소박한 마음에서 逍遙하였다.
봉정암에 도착하니 하오 4시. 도중에 한 회원의 실종으로 다시 한 시간 정도 내려가서 어렵게 찾아오는 寸劇을 빚기도 했지만, 세파에 찌든 인간의 마음을 정말 순수하게 씻어준 비경의 계곡길이다. 진정 여건이 허락하면 언젠가 꼭 다시 한 번 찾고 싶은 백담계곡의 절경이여!
봉정암에서의 저녁 행사는 왼쪽으로 굽어 감도는 돌계단을 한참 올라가 산 정상에 우뚝 솟은 사리탑에서 진행되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오락가락하던 비구름이 어느 틈에 말끔히 사라지고 하늘에는 초롱초롱한 별님들이 어느 때보다 가까이서 우리의 마음속을 환히 비추어 주고 있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이 사리탑에서의 저녁 명상시간은, 구도자가 아닌 그 어떤 사람이라도 부처님의 덕과 엄숙한 말씀이 인간의 뇌리 속에 깊숙이 스며드는 무엇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행사가 끝나고 일행들은 거의 내려간 사리탑 앞. 몇 명만이 남아서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을 우러러 보며 저마다의 깊은 사색에 잠겼다. 솔바람 한 자락 지나가니 인간이 가진 온갖 추함과 잡됨이 말끔히 씻겨 가는 것 같았다. 오직 대자연이 주는 순수함과 영원함 속에서 天心과 佛心과 人心이 혼연 융합된 純一의 경지를 逍遙하는 기분이었다. 영원히 그 자리에 앉은 채로 하나의 돌이 되고 싶은 아쉬움과 미련을 뒤로 한 채 내일 일정에 쫓겨 잠자리에 들었다.
셋째 날.
봉정암을 출발한 지 약 1시간 반. 설악의 최고봉인 大靑峰에 앉았다. 東으로는 아득히 펼쳐진 동해의 수평선이 아스라이 보이고, 사방으로 눈에 걸릴 것이 없는 一望無際의 雲海와 樹海!
太古 이래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봉우리에 올라, 인생을 생각하고 예술을 얘기하고 종교를 思惟하였겠는가? 일행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千佛洞 계곡으로 하산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천불동계곡을 따라 희운각산장, 귀면암, 비선대를 거쳐 외설악 입구인 신흥사까지는 약 7-8시간 걸리는 거리다. 두어 시간쯤 하산하여 희운각산장에서 점심을 해 먹고 나니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였다. 조금 있으니 곧 눈앞을 가로막는 굵은 빗줄기. 조심조심 계곡사이를 내딛는 무거운 발걸음.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의 절경을 감싸 안고, 계곡 아래엔 으르릉 거리는 물소리의 굉음. 내리붓는 빗줄기 속에 피어오르는 비안개와 물안개의 조화를 玩賞하며 걷는 기분을 어찌 짧은 筆力의 형용사로 다 표현하겠는가? 李太白이 아니라도 감성이 충만하면 한 잔의 穀茶를 놓고 이 절절한 심경을 토하련마는, 다만 다물지 못하는 입만을 가진 이 鈍才의 虛虛한 심정! 누군가 얘기하기를 금강산이 수려하기는 하되 웅장한 맛이 없고, 지리산이 웅장하기는 하되 수려하지는 못한데 비해, 설악산은 웅장하면서도 수려하다는 말이 굳이 공룡능선이나 화채능선을 등반하지 않더라도 이 천불동계곡에서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비선대를 거쳐 新興寺에 도착하니 어언 저녁 8시경. 어렵게 저녁을 지어먹고 잠자리에 누우니 몸은 피곤하나 정신은 더욱 또렷하여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와 앉아 개울 건너 겹겹이 펼쳐진 먼 산의 원시림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였다.
대학 써클 후배인 J양과의 遭遇도 묘한 인연이었다. 그녀와의 몇 마디 대화 속에서 한 인간이 진정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가 절실히 생각이 났다. 한꺼풀의 껍질을 벗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 어쩌면 가장 쉬울 것 같기도 하지만 가장 어려운 自由人의 자세. 위선, 자만, 가식, 체면, 현실, 이상……. 이런 상념의 타래 속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輾轉하다가 다음날을 맞았다.
넷째 날.
오늘로서 설악산 일정을 끝내고 다음 목적지인 오대산으로 향했다. 대관령 굽이굽이 돌아가는 도중 申師任堂 시비를 볼 수 있었다.
“慈親鶴髮在臨瀛 身向長安獨去情 回首北平時一望 白雲飛下暮山靑”
(늙으신 어머님을 강릉에 홀로 두고 외로이 서울길을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오대산이란 이름은 원래 ‘다섯 개의 봉우리를 가진 불교의 성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름의 유래는 신라 때 월정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자신이 중국에서 수도했던 우타이산(五臺山)과 닮았다고 해서 오대산이라고 불렀다고도 전해진다. 대부분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강원도 다른 산과 비교해 오대산은 구릉형 산세에다 골마다 숲이 우거져 남한 최대의 樹林을 자랑하는 산이다.
오대산 月精寺의 팔각구층석탑과 여러 보물들을 본 뒤 여기서 8km 떨어진 상원사로 향했다. 내설악을 秘境을 보고 난 뒤라 어지간한 산세나 물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인간이란 원래 이렇게 간사한 것일까? 평소 같으면 감탄사가 계속 나올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도 이리도 무감각하다니. 사실 오대산의 단풍은 색상이 진하고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8km의 전나무 숲길은 10월 중순이 되면 단풍순례길이라고 할 만큼 장관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녹음이 한창인 7월 말. 두어 달 있어야 단풍순례길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상원사 동종은 국보 제36호로 신라 성덕왕 때의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종이다. 신라시대의 것으로 경주의 에밀레종과 함께 남아있는 유일한 것으로 꼽힌다.
상원사에서 약 3.5km 떨어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寂滅寶宮을 접견하고 내려오는 길은, 벌써 어둠이 조금씩 내리 깔리고 있었다. 맨 뒤쪽에 서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우리 일행은 마침 벌을 치는 어떤 아저씨의 트럭 뒷간에 同乘할 수 있는 친절을 입을 수 있었다. 덜컹거리는 트럭 위에서 갈수록 메말라 가는 세태 속에서도 훈훈한 인간미를 한껏 느끼게 해 준 순박한 산골 아저씨의 마음속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날은 오대산장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식사는 우리 K조장님의 엄명으로 피로에 지친 심신을 보충하고자 모처럼 외식을 하게 되었다. 숙소와 가까운 서울식당에서 곡차 한잔을 앞에 두고 K조장님의 재치와 익살로 우리는 배를 움켜쥐고 拍掌大笑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헤어진다는 아쉬움에 너무 아쉽다. 만나면 헤어지는 게 인생의 定理지만 인간의 정이란 이렇게 끈끈하고 진한 것일까?
다섯째 날.
새벽부터 굵은 비가 내리 붓고 있었다. 구보로 월정사까지 가서 아침예불을 마치고 예정에도 없던 소금강으로 향하였다. 小金剛! 이름 그대로 작은 금강이란 뜻으로 역시 오대산 국립공원 안에 있었다. 좋은 음식을 맛보고 나면 다른 어지간한 음식은 눈에 차지 않는 것처럼 내설악을 먼저 답사한 뒤라 내 눈에는 모든 것이 시큰둥하기만 하였다.
다시 마지막 목적지인 등명 해수욕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닷가 솔숲 옆 방가로에 여장을 풀고 백사장에 앉으니 그동안 쌓인 심신의 피로가 파도소리와 함께 말끔히 씻겨 가는 것 같았다. 내일이면 헤어진다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밤 해변에서 베풀어진 레크레이션! 저마다의 가슴을 활짝 열어놓고 젊음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밤 시간이 익어가자 절규하고 광란하고…….
여섯째 날.
아침부터 해변에는 파도가 산더미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여태껏 바닷가에서 본 어떤 파도보다도 더 높게 춤추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 가려는 듯, 인간의 온갖 허례와 가식과 위선과 자만을 깔아버려 물거품으로 만들려하는 흰 파도가 눈부시게 춤을 추고 있었다. 홀연 靑馬 유치환님의 ‘그리움’이란 시가 떠오른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날 어쩌란 말이냐 “ 아침부터 둘러앉은 백사장에서 파도에 홀려버린 몇몇 회원은 간을 안주 삼아 穀茶를 음미하고 있었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곶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중략)”
松江 鄭澈의 ‘將進酒辭’가 아니라도 11시쯤 떠날 무렵에는 20여 병의 穀茶병이 백사장을 뒹굴었고, 가슴속에는 새로운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루만 더 周遊하다가 가자고. 까짓것 이왕 온 김에 가까운 원주에 들러 雉岳山구경을 하고 가자고 몇 명의 회원이 마음속으로 선동하고 있었다. 진정 위대한 카타르시스 酒와 파도의 유혹이리라!
본진 일행이 탄 전세버스를 배웅하고 우리는 원주로 향했다. 밤늦게 치악산에 도착하여 어렵게 민박을 정했다. 오늘이 마침 주말이라 피서객과 행락객이 굉장히 많이 와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니 밤 1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곡차를 즐기지 못하는 체질 탓에 나는 일행보다 앞서 1시 반쯤 잠자리에 들었다.
일곱째 날.
아침에 일어나니 또 비가 억수로 퍼붓고 있었다. 이번 旅程에서 장마는 피했지만 자주 쏟아지는 비는 피할 수 없었다. ‘이런 빗속에 치악산에 올라 갈 수 있을까?’ ‘차라리 어제 집으로 가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것! 다행히 아침식사를 하고 나니 하늘이 언뜻 언뜻 조금씩 파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치악산 龜龍寺에 들러 치악산과 구룡사에 얽힌 전설을 얘기 듣고 산행은 포기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치악산 이름은 원래 적악산으로 불렸다. 그러던 것을 치악산의 남쪽 남대봉 언저리의 상원사에 전해 내려오는 ‘꿩의 보은 설화’로 인해 치악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원주시내에 들러 그 유명한 원주 통닭의 眞髓를 음미하고 다시 대전으로 향했다. 일행이 다시 대전 계룡산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누구든 집을 벗어나면 이런 무대책의 방랑벽이 발동하는 것일까? 갑자기 집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다가 일행들과 작별을 고했다. 다시 평범한 일상의 직장인 자세로 돌아 온 것이었다. 저녁 9시 28분 대구행 통일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속에서 이번 7일 동안의 여정을 곰곰이 되돌아보았다. 피곤에 지친 눈을 감고 있으니 온갖 想念이 꼬리를 문다. 일주일 동안 지고 다닌 배낭에 기대어 자신을 한번 훑어보았다. 깎지 못한 텁수룩한 수염, 때 묻은 옷차림, 하지만 마음만은 맑고 더욱 산뜻했다.
이번 산행이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삶에 대한 재충전의 기회가 되었다는 점을 느꼈다. 불교에 대한 관심과 인연이 조금 더 깊어진 점과, 그리고 人生에서의 만남과 헤어짐, 宗敎와 인생 이런 것들을 뒤섞어 생각해 보았다. (1987. 9.)
<이 글은 1987년 7월 20일 - 26일까지의 여정임>
첫댓글 35년 전 글을 찾아 올려 보며 그 때를 생각해 봅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