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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24)
염려하지 말라....
본문 ; 마6:25-34 (신 9)
(눅12:24, 27-28)
예수님은 산상수훈 가운데서
우리가 참된 신앙을 갖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
세 가지를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 그것은 첫째로 물질의 문제요,...
- 둘째는 염려의 문제요.....
- 셋째는 남을 비판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이 세 가지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자유롭고
겸손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금요기도회 시간에는
물질에 대한 가르침을 함께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은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시면서 ....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오늘은 그 두 번째로
염려와 걱정에 대하여
귀한 교훈을 주십니다.
성도님들 !
가운데 염려가 하나도 없으신 분은
아마 없으실 것입니다.
특히 의, 식, 주의 문제는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직결되기에
특히 염려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일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염려'란 '분열되다',
'나뉘다'는 뜻의 헬라어 '메리조'에서
유래한 단어로....
지나친 근심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근심과 걱정에 매몰되다보면 ......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불신앙 상태에 빠지게 되기에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쉬워도 사람이
‘염려’와 ‘근심’에서 헤어 나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염려’는 마약과 같다고 합니다.
마약과 같아서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해로운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자꾸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가 .....
제일 중요한 문제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머리로는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은연중에 그것을 세상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어떤 집에서 살고, 무슨 상표의 옷을 입고,
어떤 차를 타느냐에 따라
우쭐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의 죄된 속성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세상 일에 사로잡혀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단순한 권면의 말씀이 아니고
‘명령’입니다.
“나는 너희들이 될 수 있는 한
염려하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는
권면이 아니라 ....
단정적으로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
오늘 본문을 묵상해 보면 ....
왜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염려는 그 자체가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을 음미해 보면 .....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목숨)을 주셨는데
당연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또한 몸을 주셨는데
마땅히 입을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논리입니다.
당연히 생명을 주시고
몸을 주신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혀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32절b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데도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그 자체가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증거하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1) 새의 비유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지구상에는 조류가
약 1000억 마리 정도 산다고 합니다.
그 많은 새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 상상이 잘 안됩니다.
제비는 새끼 한 마리에게
하루 100번 이상 먹이를
물어다 준다고 합니다.
숫놈과 암놈이 번갈아 가면서
곤충을 잡아다가 100번 이상 먹인다고 하니 .....
제비 한 쌍이 새끼 다섯 마리를
키운다고 하면 하루에 줄잡아 500마리의
날파리 곤충을 잡아서 새끼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끼를 키우는 3주간 동안에는
무려 1만 마리 이상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안 먹겠습니까?......
우리보고 그렇게 제비에게
먹을 것을 주라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비가 한 두 마리입니까? ....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날짐승을 다 먹이고 키우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새들은 미래의 자기 생존에 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종자를 뿌리지 않고,
추수하지 않고,
창고에 모으지 않아도 다 먹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것입니다.
누가는 까마귀를 언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까마귀같이 천하고 부정한 동물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눅 12:24).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은 하찮은 새도
이렇게 기르시는데 ....
새보다 훨씬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육하시지 않겠습니까? .....
하늘을 나는 공중의 새들의 운명을
책임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
우리들의 삶을 책임지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지켜주십니다.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증거하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1) 새의 비유
2) 백합화 비유
28-29절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공중의 새들은 먹을 것을 찾아다니되
염려하지 않는데.....
새들과는 달리 식물은 전혀
이동하지 아니하고 노력하지 아니합니다.
사람들은 치장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꽃들은 옷을 만들기 위해 수고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를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심사숙고한다(consider)’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고
얼마나 섬세하게 도와주셨는가를
심사숙고해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불신에 빠져 염려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현실문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행복은 생각의 차이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행복해집니다.
생각은 선택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세상에 염려할 문제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재벌 총수도 대통령도
모두 염려할 문제는 많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모든 것이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7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맡기라” 라는 말은
‘다 버려서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즉 ‘떨쳐 버리라’는 것입니다.
염려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께 맡기고는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문제(무거운 짐을)를
그분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시라는
확신 가운데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증거하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1) 새의 비유
2) 백합화 비유
3) 들풀 비유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백합화처럼 대접받는 꽃이 아닌
이름도 없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 비유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새, 백합화, 들풀)
이것들이 다 사람보다 못한 것들입니다.
30절b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우리는 공중을 나는 새보다,.....
한 송이의 백합화보다,....
들풀보다.....
아니 ‘천사’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
그런데 어찌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된 자로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의심하고
염려하는 것 그 자체가 ....
불신앙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염려하는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0절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렇습니다.
염려와 믿음은 반비례합니다.
믿음이 커지면 염려가 적어지고,
염려가 커지면 믿음이 적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해 보면 ....
왜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염려는 그 자체가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염려가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1-32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러한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불신앙적인 사람들이나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위해
염려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특징입니다.
즉 ‘절대적인’ 믿음이나
진리가 없는 상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불안과 공포, 그리고 염려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에게는
‘실존적 불안’이 존재합니다.
죽음 이후의 해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대답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삶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32)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가장, 곧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의 책임은
가정의 필요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된 우리 믿는 성도들의
필요를 아시기에....
능히 채우실 것을 믿고 사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해 보면 ....
왜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염려는 그 자체가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염려가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매우 현실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27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며...
염려의 무익함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염려란 아무것에도 쓸데없는
비생산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염려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염려한다고 과거의 일이 바꾸어지지도,
미래의 일이 보장되지도,
현재의 일이 새로와지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사람의 뼈만 마르게 할 뿐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이 ‘염려’입니다.
<맺는 말씀 - 염려 대신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염려 대신에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40일 금식하신 후 사단에게 시험 당하실 때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욕심을 따라” 염려하는 사람이 아니라 ......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구해야 할
최고의 이상은 .....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소망해야 할 나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보상을 주십니다.
33절b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
왜 우리가 사는 일에
염려스러운 일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걱정하는 삶에서 ......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으로 변화하는 것이 .....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변화입니다.
오늘부터 저와 성도님들이 !
세상일에,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
사로잡혀 노예처럼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