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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이해
사랑을 찾아ⅰ: 1,1-8
아가 1,1은 제목이다. 1,2 여자가 등장하여 남자의 사랑을 갈망한다. 친구들은 여자와 그 사랑을 기쁨으로 지지하고 기린다.(본문에서 친구들은 여자에게 진정한 친구이다. 마치 이스라엘 역사에서 구원자, 예언자, 의인들을 연상하게 한다) 여인의 인물이 가무잡잡하게 된 것은, 여러 오라버니가 ‘골’(주변국 강대국의 폭력)을 내어 ‘혹사’했기 때문이다. ( 이 대목은 여자) 이스라엘이 여러 주변국에 차례로 침략당하고 심지어 강대국 아시리아와 바빌론에 유배살이한 정황을 연상하게 한다(1,2-6). 이런 과정을 겪은 여자는 더 이상 잘못된 사랑을 찾아 헤매지 않고, 참 된 연인 참 된 사랑을 소망한다. 친구들은 남자를 찾는 일급 정보를 알려준다. 일단 양 떼의 발자국을 찾아가다 풀을 뜯고 있는 염소 떼를 만나면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1,7-8). (남자는 목자처럼 비유된다. 성경에서 멀어진 하느님을 다시 만나고 축복을 받는 것은, 말씀=계명=가르침을 마음,힘, 정성을 다해 지키는 것이다.)
연회장) 만남ⅰ: 1,9-2,7
연인은 서로에게 경탄한다. 남자는 여자를 ‘준마’로, 여자는 남자를 ‘몰약’과 ‘꽃송이’로 비유하며 예찬한다. 이렇게 일반적 성별性別 비유가 아닌 것에서 아가서가 남녀 사랑 이상을, 즉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과의 사랑을 지향함을 감지할 수 있다. 반면 2장 1-2는 여인을 꽂으로 남자를 ‘사과 나무’로 비유한다. 여자는 남자를 사과 나무로 비유하는데, 사과나무는 구약성경에서 요엘서 단 한 번 등장하고 여기 아가서에만 나온다. 이후의 본문에서 여자는 사과나무 사명에 대해 추가한다. 여자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남자를 깨웠고, 남자의 어머니는 사과나무 아래서 남자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또한 여자는 이러한 남자) 사과나무 그늘에 앉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라고 한다(2,3). (그리스도교에서는 사과를 지혜의 나무 선악과로 보는 전승이 있다. 악을 뜻하는 라틴어 ‘말룸’이 사과라는 뜻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가서 본문은 아직 그리스도교 탄생 전이다. 그럼에도 지혜문학의 하나인 아가서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진다) 연인의 상호 경탄 후, 1차 연회장 만남이 성사된다(2,4). 연인은 한껏 사랑에 도취되어 있다. 남자는 예루살렘 아가씨들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방해도 깨우지도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단 그 사랑(여자)이 원할 때까지라고 단서를 제시한다.(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만나는 곳, 하느님은 완전한 사랑으로 여인)이스라엘의 사랑하고 여자에게 사랑받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그 사랑을 강제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시고 존중하신다. 사랑은 강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남녀의 사랑도 하느님과 인간 사랑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았다면 창세기 3장에서 에덴 사건 이후 바로 강제로 구원해주셨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그런 까닭에 구원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러한 통찰 때문에 아가서도 사랑의 미완성을 제시한다).
사랑을 찾아ⅱ: 2,8-17
연인은 같이 있지 못하고 헤어져 있다(구세사에서 하느님과 그 백성도 만남 헤어짐을 무수히 반복한다). 남자는 여자의 집 창가로 찾아와 자신을 맞아달라고 여자를 부른다. 그런데 여우들이 등장하여 연인의 만남과 사랑을 방해한다. 그러자 여자의 어머니가 나서서 그 여우들을 잡으라고 지시한다(2,15) (여우는 누구일까? 여우는 아사서 이곳에서 단 한 번 등장한다. 구약성경 이스라엘 역사에서, 야훼 신앙을 버리게 하고 우상으로 유혹하는 주변국 강대국들일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더 나아가 사탄,마귀,세상,자신이 가장 악질적인 여우라고 가르친다. 아가서 본문에서 여자도 남자와의 결합을 방해하는 세력은 자신임에도 반복하여 외부 요인으로 돌리고 있다.(참조 에제 13,4;느헤 3,35;루카 13,32) 여자의 어머니는 하느님과 같다. 하느님은 구세사를 방해하는 세력들을 필요에 따라 꾸짖고 벌하시기도 하신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지만 여자는,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2,16=6,3=7,14)라고 선언하며, 남자가 와 주기를 청한다. (성경의 허다한 곳에서 하느님께서,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계약’을 표현한 레위 26,12절과 동일한 (표현)어휘를 사용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김명숙 소피아); 여자의 이 사랑의 고백과 선언은 세 차례나 제시된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 선언은 이제와 오래도록 미완성용이다. ).
혼례) 만남ⅱ: 3,1-5,1
여자는 용감하게 사랑을 선언한 후, 헤어진 남자를 찾으러 나서고 가까스로 찾아낸다. 여자는 남자를 자기를 잉태한 어머니의 집(지혜*말씀)으로 인도한다. (아가서 8,5절에 의하면 어머니는 여자를 가르치는 말씀 ‘지혜’이다. 본문에서 남자를 뜻하는 ‘사과나무’와 ‘어머니’ 또는 ‘어머니의 집’은 다른 표현이니 같은 의미 같다). 남자는 예루살렘 아가씨들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3,1-5). 여자가 광야의 여정을 거치며 남자를 찾고 붙잡았기에 이제 성대한 결혼행렬이 이어진다. 여인은 온갖 향료로 치장한 연기 기둥처럼 광야에서 올라온다. (광야는, 여자가 남자와 헤어졌다가 찾아 다닌 지난한 연정 여정을 의미한다. 그것은 흡사 광야의 상황과 같다(3,6). 그러나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결혼의 행렬이 이어진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호화찬란하고 장엄한 혼례식은 전성기 솔로몬의 결혼식이었을 것이다.(3,6-10). 연인의 결혼식은 마치 솔로몬의 결혼식과 같이 장엄하고 성대하다. )
이제 두 연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다. 남자는 여자의 흠 없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경탄하며 사랑을 향유하고자 갈망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레바논’에서 떠나자고 한다. 아가서 본문에서 레바논은 일곱 차례 언급되며 그 빼어남을 예찬한다.(4,1-7;9-11). 그런데 이곳을 ‘사자 굴’과 ‘표범 산’으로 언급하며 떠나자고 권유하는 것을 보면, 레바논은 연인이 머물 이상향의 장소가 아니다(4,8). (예언서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을 망국과 유배에 처한 바빌론은 버리고 떠나야 하는 곳으로 제시하였다. 이사야 48,20; 예레 51,45; 즈카 2,10-11). 장소로서의 레바논은 탈출해야 하는 곳이지만 여자는 존재는 남자에게 레바논 같다. 남자는 닫혀진 정원 봉해진 우물 같은 여자를 찾아 정원으로 온 뒤 이곳에서 결합이 이루어진다. 여자는 남자에게 정원이기도 하다.(4,12.15;5,1) 두 연인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그 정원에서 거창한 축하연이 베풀어진다.
사랑을 찾아 ⅲ: 5,2-8,14
연인의 혼례와 축하연 뒤 직면한 현실…. 연인의 상황 사랑의 일치가 아닌 분리이다. 남자는 여자를 찾아와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한다. 남자의 애원에 여자의 대답이 생뚱맞다. “옷을 다 벗었는데 어찌 입으며 발을 씻었는데 어찌 다시 더럽히겠냐?” 라고 냉담 반응하여 남자를 떠나가게 한다. 여자는 한발 늦은 후회로 문을 열고 남자를 찾아 헤매지만, 거리의 야경꾼들에게 매 맞고 겉옷마저 빼앗겼다. 여자는 예루살렘 아가씨들을 향해, 혹시 자기 연인을 만나거든 자신이 과오를 후회하고 있음을 전해달라고 한다.(’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라는 5,6절은 사랑의 부재이다. 반면 2,5은 사랑의 충만한 임재로 그 내용을 달리한다. 또한 5,6-8절 이 부분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배신한 탓으로, 망국과 유배의 고통을 겪으며, 비로서 하느님의 참 된 사랑에 눈을 뜨는 아이러니를 연상하게 한다).
여자의 친구들은 여자에게, 네 연인이 특별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여자는 연인) 남자가 만인 중에 뛰어난 존재임을 예찬한다(4,10-16). (만인萬人 중에 뛰어난 남자와, 만유萬有 위에 가장 특별하신 하느님이 연관된다). 그러자 여자의 친구들은 연인이 어디로 갔는지, 함께 찾아주겠다고 한다. (여자의 친구들은 구원자,예언자,천사와 같은 존재?) 여인은 남자가 자기 정원으로 갔다고 대답 한다. (본문에서 9회 이상 등장하는 ’정원‘은 때론 남자의 것(6,2)이기도 하고, 때로는 여자의 것(4,12-16), 또는 여자 자신을 뜻하기도 한다) 여자는 ‘남자는 자기 것이고, 자신은 남자의 것이라고”라고 두 번째로 사랑을 고백하며 선언한다. (그러나 이 고백과 선언은 여전히 불완전한 고백이며 선언이다.)
남자는 앞서 혼례 행렬에서(4,1-6)처럼 여자를 예찬한다. 그 모습을 왕조시대 수도였던 티르차와 예루살렘의 위용, 그리고 깃발을 든 군대등 남성적 면모로 비유하며 예찬한다.(6,4-9). 이것은 1,9절의 ’준마‘에 호응한다. 여자는 그 어머니가 가장 아끼는 하나 뿐인 딸이다. (이는 성서와 이스라엘 역사에서 회자되는 자칭 선민사상을 엿보게 한다). 친구들도 여자를 해와 달 그리고 군대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 남성적 면모로 제시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오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병거‘에 올라탔다. (여기서 병거는 전쟁용이 아닌 이동 수단이며, 병거를 탄 사람은 특별한 위치에 있음을 암시한다.(탈출 4,6). 아가서 1,9절에서 남자는 여자를 두고 ’병거를 모는 준마‘에 비유했다. 병거에 탄 사람과 여자의 관계를 유추하게 한다. 병거를 탄 사람은 하느님이다. ’자신도 모르게 올라 탄‘ 모습에서 하느님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을 희미하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상황의 여세를 몰아 남자를 찾아주겠다고 했던 친구들은(6,1) 약속한대로 “돌아오라 돌아오라 술람밋이여”라고 간절하에 외친다. 술람밋의 뜻은 무엇인지 모르나 남자를 뜻하는 호칭 같다. 남자는 또다시 여자를 예찬한다(7,2-9). 여자도 남자의 경탄에 화답한다. 남자는 여자의 입이 포도주 같다고 하고 있다. 1,2에서 여자는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콤하다”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자신은 연인에게 곧바로 흘러가고 흘러드는 포도주‘라고 한다. 또한 나는 내 연인의 것’이라고 세 번째 선언한다(7,11). (사랑은 다소 진전이 되었고 여자의 사랑 고백과 선언이 이어지지만, 이 사랑은 불완전하며 유한하다. 이 사실을 8,1-3절까지 여자의 가정법적 독백이 추가로 증명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오세요~”라고 초대한다. 그들은 화려한 도시 레바논에서 떠났기에 이제 함께 시골과 들로 가자고 한다. 여자는 거기에서 자기 사랑을 바치겠다고 한다.(이전에 연인들의 만남 장소는 화려한 연회장(2,4) ,화려안 레바논(4,8)이었다).
남자는 세 번째로 예루살렘 아가씨들을 향해, 자신들의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그 ‘여자가) 즉 사랑이 원할 때’까지 라고 제한한다(8,4). 연인의 사랑은 미완성이다. 여자는 사랑의 결합) 입맞춤 조건을 외부에서 찾고 그 희망을 가정법으로 제시한다(8,1-3). 여자는 누구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남자와 입맞춤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8,1;2,1).(사실 진실한 사랑의 가장 큰 방해 요인은 여자 자신이다. 남자는 여자의 사랑을 원하지만 강제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에게 기대어 광야에서 올라온다.(3,6에서 여자는 향료 가득한 연기 기둥처럼 그러나 광야에서 ‘홀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남자에게 ‘기대어’ 올라온다. 그러나 아직 사랑의 결합은 광야 여정에 있다). 여자도 남자와 사랑의 결합이 더할 나위 없이 열렬하고 온전하기를 갈망은 한다. 문제는 바라기만 하던지 아니면 최소의 노력만 하다가 이내 배신을 무수히 반복한다는 것이다.(이스라엘도 하느님께 늘 마음은 간절했다. 다만 몸의 수고와 희생이 온전히 성실하게 함께하지 않았다. 심신의 하나되지 못하는 불일치, 이것이 유한한 하느님 백성의 딜레마이다)
본문 2,3에서 여자는 남자를 ‘사과나무’로 비유하며 그 그늘에 앉는 것을 갈망했다. 사과나무는 8,5에서 다시 제시되고 있다. 남자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잉태되었고. 여자도 사과나무 아래에서 남자를 깨웠다. 사과나무는 구약성경에서 요엘서에 단 한 번외에 아가서에만 두 번 나온다. 여자는 남자) 사과나무 그들에 앉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라고 한다(2,3). ( 사과는 하느님의 말씀 또는 지혜를 뜻하는 것일까? 그리스도교에서는 사과를 지혜의 나무 선악과로 보는 전승이 있다. 악을 뜻하는 라틴어 ‘말룸’이 사과라는 뜻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본문은 그리스도교가 창립되기 훨씬 이전에 씌여진 텍스트이다)
일부 성서학자들은 아가서가 8, 7절로 종결되고, 8,8-14는 부록이라고 한다. 여자의 오빠들)주변인들은 다시 한번 연인과의 격렬한 사랑을 시도하려는 여자를, 성벽과 문으로 방해하고자 한다. 여자는 성벽과 문은 불필요하고 자신은 남자와 ‘평화’를 청할 것이라고 한다. (남자는 한결같이 성실하게 사랑의 평화를 지켰지만, 여자는 번번이 그 사랑을 깨트리고 불화를 일으켰다. 여자는 이제 사랑의 회복 즉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
여자는 아직 남자와 함께 있지 않고 정원에 있다. 여자의 친구들은 여자가 남자에게 집중하지 않도록 유혹하고 있고, 남자는 여자가 오직 자신에게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려주기를 바라고 있다. 여자도 남자에게 자신에게 서둘러 오기를 청하며, 완전한 회복은 과제로 안고 아가서는 종료된다. (인류의 구세사,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사랑도 여전히 미완성 중에 있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4년 12월 17일 PM 21:20
참조:성경;가톨릭 성경주석서; 안소근 수녀 아가서 강의록.
덧붙임 1: 아가서 등장 인물
연인:주인공 남자와 여자
여자) 어머니:연인의 사랑을 방해하는 세력들을 물리쳐준다(2,15)
남자) 어머니(8,5)
여자 친구들 1: 여자의 친구들로 여자가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을 준다(1,4외)
여자 친구들 2): 여자의 친구들로 연인의 사랑을 방해한다(8,12)
오빠) 오라버니들:여자와 남자의 사랑을 방해하는 외부) 세력(1,6;8,8-9)
예루살렘 아가씨들: 여자와 남자의 사랑을 방해하는 내부) 세력(8,13).
..................이 부분은 아가서를 좀 더 깊이 보기 위해 임의로 분류해 보았습니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4년 12월 17일 PM 21:37
참조:성경;가톨릭 성경주석서; 안소근 수녀, 아가서 강의록
덧붙임 2:
'아가서 이해'라는 위 내용은, 입력자가 아가서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임의 해석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결코 만만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아가서의 이 비범한 내용에 대해, 개인 공부 병행 약간의 공유를 희망하는 바이니, 편하게 읽으시되 복사나 인용은 마시옵소서. (아가서 저자, 경전 목록에 포함시키고 극찬한 유다교 아키바와 그리스도교 성서학자들에게 뜨거운 감사 간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