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보안법·신문지법 등의 악법을 만들어 반일적 색채를 띤 계몽운동을 탄압함에 따라, 사회계몽운동가들이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이다.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창립된 이 단체의 회원들은 대부분 1896년도에 결성되어 2년 동안 활동하다 와해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청년회원들이었다.
중심인물로는 회장 윤치호(尹致昊), 부회장 안창호, 유학자 출신의 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 청년장교 출신의 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 평양지방의 자산가인 이종호(李鍾浩)·이승훈(李昇薰), 그리고 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 등이었다.
신민회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政體)를 공화정체로 한다고 하여, 이전의 주장인 입헌군주제를 탈피했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었다. 또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의 양성을 주장했고, 실력의 양성을 위해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신민(新民), 신민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自新), 자신을 위한 신사상, 신윤리, 신학술, 신모범, 신개혁을 주창했다.
비밀결사인 만큼 엄격한 심사를 거쳐 회원을 받아들였으며, 조직은 총본부 산하에 감독부(1도에 1개소), 총감소(總監所:5군 이상을 합함), 군감소(郡監所:1군에 1개소), 반(班)의 종적인 형태로 구성했으며, 당사자 2명 이상은 서로 알지 못하게 했다. 회원은 전국에 걸쳐 8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서북지방의 그리스도교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신흥시민층과 신지식층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폭넓은 활동을 전개했다.
① 교육구국운동: 신민회 회원들에 의해서 설립된 학교는 수십 개에서 1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는 완전한 시설을 갖춘 중학교였으며, 강화에 중학교 본교를 둔 보창학교(普昌學校)는 강화군에만 21개 소학교 분교를 열었으며, 북부와 중부 각 지역에도 보창학교가 설립되었다. 신민회의 학교설립은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② 계몽강연 및 서적·잡지 출판운동: 계몽강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애국주의, 국권회복, 민권사상, 구습타파, 자발적 의무교육실시, 민족단합의식 등을 고취했다.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이용했고, 최남선을 중심으로 1908년 11월에 창간한 잡지 《소년》 역시 신민회의 입장을 대변했다. 또한 출판물 보급과 사업연락을 위해서는 평양·서울·대구에 각각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합법적인 활동을 했으며, 민족문화와 국사학에 관심있는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는 외곽단체로서 출판사업을 이끌었다.
③ 민족산업진흥운동: 민족산업 자본의 발흥을 위한 실업장려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일환으로 평양 마산동에 자기제조주식회사(瓷器製造株式會社)를 세운 것을 비롯하여 협성동사(協成同事)·상무동사(商務同事)·조선실업회사 등의 회사를 세웠으며, 사리원의 모범농촌 등을 주도했다. 이 사업은 신민회 재원의 확보에 도움을 주었지만, 취약한 자본으로 인해 일제의 대자본에 밀려 큰 성과를 낼 수 없었다.
④ 독립군 양성운동: 국권회복을 위하여 의병운동을 지원했으며, 의병운동의 현대화를 위해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설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이 계획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1910년 가을에 만주 일대에 후보지를 선정하고, 1911년 봄에는 만주 봉천성 유하현(柳河縣)에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해 단체 이주를 시작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는 4년제 본과 외에 3개월·6개월의 속성과정을 두어 애국청년과 의병들에게 현대적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신민회의 활동은 1909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한일합병을 마무리지으려고 애국적 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면서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일제의 주된 감시대상이던 안창호를 비롯한 이갑·이동휘·신채호·조성환(曺成煥) 등은 1909년에 이미 미국과 러시아령 연해주, 서북간도 등지로 망명했으며, 이회영·이시영(李始榮) 등 6형제와 회원 일부가 만주 독립군 기지로 이주했다.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신민회 본문 이미지 1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선언된 후, 신민회의 운동방향을 새로이 모색하려는 회의가 나라 안팎에서 열렸다. 양기탁·이동녕·안태국·김구(金九) 등 나라 안에 있던 신민회원은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나라 밖의 망명자들인 안창호·신채호·이갑 등은 중국 산둥성[山東省] 청도에서 모임을 가졌다. 두 회의에서 안창호의 준비론이 소수로 밀리고 독립전쟁론이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신민회는 ‘독립전쟁에 대비하는 만주 이민계획과 무관양성’을 위해 청년들을 모아 만주로 이주시키고 이를 지원할 자금조달 책임을 지역별로 분담하여 비밀리에 활동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을 계기로 신민회 조직이 드러나고 국내에 남아 있던 세력이 탄압을 받으면서 조직이 무너졌다. 신민회는 신채호가 비판하였듯이 비밀결사이면서도 스스로 비합법적인 반일활동을 회칙으로 부정함으로써 한말 계몽운동의 일반적 한계였던 합법주의와 문화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맹점이 있지만, 국권피탈을 전후하여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전쟁으로 운동노선을 전환함으로써 이후 만주와 중국에서 일어난 독립군전쟁의 실질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첫댓글 1911년 해체 - 105인 사건(데라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