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카페 답사 100회 기념 대마도 탐방 자료 안내(2023. 9. 19~20) 일본 나가사키현에 속한 섬으로 행정구역상 쓰시마 시 1시(市)로 이루어져 있다. 한글로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쓰시마'라고 표기한다. 흔히 한국식으로 한자음을 그대로 읽어 대마도(對馬島)라고도 부른다. 일본어로 '섬'을 '시마'로 읽기에 '쓰시마'만 보고는 이를 직역하여 섬 이름이 '쓰' 라고 착각할 법한데, '쓰시마'의 '시마'는 '섬'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며, 무엇보다도 대마도를 이루는 한자는 '쓰'와 '시마'가 아닌 '쓰시(対)'와 '마(馬)'로 분리되어 있다. 행정구역이 아닌 섬 자체로 부를 때는 '쓰시마지마'나, '쓰시마토우'로 읽는다. 대마도(對馬島)는 글자 그대로 ‘마한(馬韓)을 바라보고 있는 섬’이라고 하여 그리 작명되었다는 가설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주는 것 같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50㎞쯤에다 쾌속정으로는 1시간 조금 더 걸리는 거리이나, 일본 본토 후쿠오카에서는 130㎞ 떨어진 거리로 2시간을 더 달려야 하니, 지리적으로도 우리와 가깝고 산세 또한 우리 땅과 비슷하다. 다만 지리지형상으로 평지가 좁고 산지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 밝은 낮에는 부산에서도 대마도가 맨눈으로 관측될 정도이고, 밤에는 대마도에서 부산의 환한 불빛을 볼 수 있고 부산의 불꽃놀이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대마도 인구는 3만 명이 채 되지 않지만, 2018년에 다녀간 한국 관광객은 41만 명이나 된다. 그들의 자국임에도 일본인은 거의 찾지 않은 섬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대마도를 이웃집 드나들듯 찾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대마도가 오랜 세월 동안 별로 달갑지 않은 기록을 보유된 곳이다. 주로 전쟁으로 점철된 땅인데 나당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이곳에 백제와 왜의 동맹군이 만든 쓰시마 카네다성(城)이 있고, 원나라의 공격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 세종은 이종무 장군에게 이 섬의 정벌을 명하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는 대마도가 조선 침공의 발판 노릇도 했다. 그리고 영조 때 조엄(趙曮)이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의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관법(保管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러•일 전쟁 때는 직접 교전 지역이면서 일본의 승리로 한국에 고통을 준 아픈 지역이기도 하다. 어쨌든 대마도는 우리와는 제일 가까운 일본이어서 외국임에도 외국 여행의 맛이 나지 않는 곳이다. 지금은 자국보다는 한국 관광객이 주를 이루는 통에 우리와 더 긴밀한 공동경제 지역이라고 할 정도이다. 첫날(9월 19일) 대구 반월당 출발 : 06:10 부산항 출발 : 08;40 히타카츠항 도착 : 09:50
이즈하라 이동 : 주로 시모시마[下島] 중심으로
1. 토노사키 공원(쓰시마 해전 유적지 : 토노사키 언덕) 하타카츠 항에서 2km 정도의 거리에 바닷가 동백나무 숲이 산책코스로도 유명하다. 특히 도노사키(殿崎)는 1905년 5월 27일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郎) 사령관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가 러시아 로제스트 벤스키 사령관이 이끄는 발티 함대를 격침 시키고,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곳이다. 이후 일본은 지난 2005년 5월 27일 미국 등 5대 강국과 동등한 위치로 올려놓은 러일전쟁 100주년을 기념해 전승기념비를 세웠다.
도노사키 공원
전승기념비에는 일본군에 체포돼 사세보 해군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로제스트 빈스키 사령관을 찾아와 악수를 청하는 도고 사령관, 사세보 해군 병원장, 일본 수뇌부 등과 함께 평화, 우호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러일전승기념비
또한, 전승기념비를 옆으로 두고 해변을 따라 올라가면 당시 전쟁에 패한 러시아 병사들이 운항할 수 없는 배를 버리고 이곳 토노사키로 피신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당시 섬 주민들은 부상한 러시아 병사들을 데려가 극진히 치료를 해주었다. 도고 제독은 ‘대마도 인의(仁義)를 높이 사야 한다.’라는 뜻을 담은 ‘은해의교(恩海義喬 : 은혜의 바다. 그 의로움은 고귀하다)’ 비석을 세웠다. 러시아 병사의 위령비는 1912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 의해 세워졌다. 전멸에 가까운 수준으로 러시아 함대가 격파되어 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쓰시마 해전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토노사키 언덕은 우리나라의 뼈아픈 역사가 시작된 곳이자 일본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 곳이었다.
2. 와니우라항(鰐浦 : 이팝나무군락지) 한국전망대 바로 아래 와니우라항(鰐浦)의 산기슭에는 이팝나무 3천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쓰시마의 시목(市木)인 이팝나무군락지에는 높이 15m, 둘레 70cm에 달하는 나무들이 엄청나게 많다. 일본에서 귀한 이팝나무이지만 쓰시마에선 여기에만 자생한다. 매년 5월 초 순경 축제가 열릴 때쯤 1.5~2cm의 꽃잎이 4개로 갈라진 순백의 꽃이 활짝 핀다. 마치 눈이 내린 듯한 풍경이 앞바다에 비쳐 마치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 1928년 이곳은 이팝나무 자생지로써 국가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특히 와니우라항은 백제의 왕인 박사 일행이 일본에 문물을 전하기 위해 처음 배를 댔던 곳으로 유명하다.
와니우라항구
이팝나무는 물푸레나뭇과(科)의 이팝나무 속(屬)은 주로 열대와 아열대 지역에 널리 분포한다. 이 중 유일하게 북쪽인 온대 지역까지 확산한 3종이 각각 북아메리카 동부에 2종,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에 1종 있다. 열대 수종인 이팝나무는 대부분 사계절 내내 잎이 푸른 상록수인 반면에 온대 수종 3개는 모두 낙엽성이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동*중*남부, 일본 본섬과 대마도, 대만 등이 원산지이기도 하다. 이팝나무의 꽃은 흰 쌀밥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이팝(이밥*쌀밥)나무'라 불렀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은 이팝나무 꽃이 피는 것을 보고 한 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짐작하였는데, 꽃이 풍성하게 피면 풍년, 드문드문 피면 흉년이 든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문화재청은 1967년 전북 고창 대산면 중산리 이팝나무를 시작으로, 최근까지 경북 포항 흥해향교 이팝나무군락 등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소중히 보호하고 있다.
3. 미우다 해수욕장 일본 해수욕장 100선에 뽑힌 해수욕장으로 비췻빛 바닷물을 자랑하며, 대마도 특유의 여유로움과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잠시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휴식을 취할 수 있어 마치 동남아의 유명한 휴양지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대마도의 자랑거리이다. 거기에다 대마도 특유의 여유로움과 자연경관과 더불어 그 멋스러움을 더한다. 미우다 해수욕장
특히 대마도는 천혜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어 캠핑을 즐기며 힐링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대마도에 있는 여러 야영장 중 미우다 야영장은 일본의 아름다운 해변 100대 해수욕장으로 꼽히는 미우다 해수욕장은 히타카츠항 국제터미널에서 약 2~3km 떨어져 있으며, 많은 관광객이 해변을 감상하며 물놀이까지 즐길 수 있어 찾는 곳이다.
4. 슈시 삼나무길(일명 : 슈시강 단풍길) 대마도의 둘레길은 총 105km로 한 구간이 평균 15km 정도로 모두 7개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어 대마도의 푸른 숲과 산 그리고 바다를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는 코스다. 슈시 삼나무길은 대마도 마지막 7구간으로 아름드리 삼나무와 편백이 어우러져 있다. 가을에는 멋진 단풍과 아름다운 계곡으로 인해 매년 가을에는 이곳에서 슈시 단풍축제가 열리며, 힐링 코스 산책길로 유명한 이곳은 대마도 여행을 온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찾는 곳이기도 하다. 요즘은 대마도 북쪽의 히타카츠항과 남쪽의 이즈하라항에 우리나라의 배가 닿지만, 조선통신사가 대마도에 첫발을 들인 곳은 서쪽 해안의 사스나항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조선통신사의 길은 통신사들이 대마도에 들어와 이동하는 초입인 셈이다.
슈시 삼나무길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햇빛도 잘 들지 않는다. 가을 단풍철이면 빨갛게 물든 아기단풍을 보기 위해 여행객들이 곳곳에서 몰려든다. 차도를 따라 걷다가 트레킹 길로 조성된 몇몇 흙길이 보인다. 다른 곳에 비해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가볍게 걷기 좋다. 벤치에 앉아 단풍과 함께 졸졸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슈시를 지나 히타카쓰로 넘어오는 길이기도 하지만 이번에 우리 나무카페에서는 시간 관계로 7구간 모두 종주하지 못하고 입구에서 원시림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5. 긴(琴)의 1,500년 묵은 은행나무 이번 나무카페 100회 기념 답사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긴노 오이쵸(琴の大銀杏)이다. 대마도 북쪽 끝에 있는 ‘가미쓰시마마치(上對馬町)’의 남쪽 구석에 ‘긴(琴)’이라는 조그만 마을 있다. 그곳은 한국전망대와 조선 역관사의 위령비가 있는 곳에서 얼마간 아래로 내려오면 장송사 경내에 일본에서 최고 오래된 은행나무로 수령이 1천500년이나 되며, 백제 사람이 심었다고 한다. 높이 23m 둘레 12.5m나 된다. 수령(樹齡)로는 일본에서 첫째, 크기로는 두 번째이며, 대마도의 고문서에서도 '바다에서 보면 산과 같다'라고 했다고 한다.
긴(琴)의 은행나무
1798년 벼락을 맞아 나무 속이 불타면서 가지가 부러지고, 1950년 태풍으로 또다시 줄기가 부러지는 불상사를 맞았으나 끈질긴 생명력으로 지금도 자람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하고, 663년 백제의 왕자 부여풍(扶餘豊)이 잃은 나라를 되찾고자 부흥군을 이끌고 백강 해전에서 다시 패하면서 많은 유민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중 일부가 대마도에 정착, 성(城)을 쌓은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때 고국 백제를 떠나면서 가져와서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백제인들이 망국의 한이 서린 나무이지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우리의 선조에 의해 심어졌다는 사실과 1990년에 열린 ‘국제 꽃과 초록의 박람회’ 때 기획된 ‘신일본 명목(名木) 100선’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전에는 대마시(對馬市)에서 백제인들이 심은 나무라는 안내판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백제'라는 단어를 삭제해버렸다. 이즈하라 금전산성 역시 백제 유민들이 만든 성이라는 표지판을 없애버렸다. 또, 전에는 배에서 내려 대마도 땅에 발을 딛자마자 울려주던 ‘고향의 봄’ 노래도 이제는 멈추어버렸다고 한다. 비록 안내판을 모두 갈아치워도 ‘대마도는 본시 한국 땅(?)’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1948년 9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은 외국 기자와의 회견 석상에서 대마도는 한국의 소유임으로 반환을 요구하겠다고 언명한 바 있다.
6. 타아라 쇼핑몰 타아라 쇼핑몰은 우리가 잘 숙소 근처에 있어 이용하기 편리하나, 이곳에서는 모두 엔화만 사용할 수 있고, 카드나 환화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로밍된 폰이나 와이파이가 있는 곳에서만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아니면 초과 요금의 폭탄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타이라 쇼필몰
10. 호텔 이동 후 석식 : 숙소 이즈하라펜션
이튼날(9월 20일) 호텔 조식 후
▣이즈하라 시내 관광 - 중식 때까지 거의 시내 도보 관광 : 시모시마[下島] 중심으로
1. 팔번궁(八幡宮 하치만구) 신사 신사(神社)는 일본에서 왕실의 조상이나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으로, 대마도에서 제일 큰 대표적인 신사인 팔번궁(하치만구)은 이즈하라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삼한을 정벌한 신공황후를 모신 신사이다. 일본서기(日本 古歷史書紀)에 따르면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출병하여 삼한 정벌에 나서 항복을 받아냈다고 한다. 신사 안쪽으로 들어서면 이렇게 제법 멋있게 생긴 토리이(가로로 뉘운 기둥)가 두 개가 있다. 하치만구 신사는 언덕 위에 지어져 있어 계단을 제법 밟고 올라가야 한다. 안내판에는 오진 천황, 진구황후, 주아이 천황, 하매 오카미, 다케노우치노스쿠네를 모시고 있다고 쓰여 있다.
팔번궁 신사 입구
도리이는 일본 신사의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나누는 관문이다. 두 번째 도리이에는 참배길 계단이 3개가 있는데, 왼쪽은 대마도 19대 도주의 부인 '이마미야'와 아들 '와카미야'를 모신 신사이고, 맨 오른쪽 계단이 팔번궁 신사 본당으로 가는 계단이다. 고마이누(狛犬)는 신사나 사찰 본당 정면 앞에 좌우에 놓여 있는 돌로 만든 짐승 모양의 상으로 고려견(高麗犬)이라고 적혀있다. 고마이누(狛犬)
신사의 ‘도리이’에서 '도리'는 새(鳥)를 나타낸다. 하늘 '天' 모양의 도리이는 일본에서는 새가 인간과 신을 연결해 주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에 새가 앉을 수 있는 모양의 구조물을 설치하며, 신사의 경내와 인간 세계를 구획하는 경계로 삼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로 끌려 와서 처음 3개월간 수용 생활을 했던 장소가 바로 이곳 하치만구 신사의 광장인데, 지금은 수용시설과 관련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금궁신사(왼쪽)와 하치만구 신사(오른쪽)
오른쪽의 신사는 하치만신을 모시는 하치만구 신사이고, 왼쪽 계단으로 오르면 금궁신사(今宮神社: 이마미야 신사)이다. 도리이 아래에는 양쪽에 고마이누(狛犬) 2마리가 마주 보고 신사를 수호하고 있다. 오른쪽에 입을 벌리고 있는 개는 수캐이고, 왼쪽에 입을 다물고 있는 개는 암캐이다. 왼쪽의 신사는 대마도 19대 도주의 부인과 아들을 모신 금궁신사(今宮神社: 이마미야 신사)는 일명 '마리아 신사'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무장으로 유명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딸인 마리아는 말년에 권력다툼에 패배한 아버지가 참수당하자 천주교에 귀의해 이름을 마리아로 바꿨다고 전해진다. 이 신사에는 마리아의 위령비가 있다.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딸이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아내 '고니가 마리아'와 그 아들 '소 요시나리(宗義成)'를 모신 신사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 정벌을 위하여 조선 지리를 잘 아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의 부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에게 정략적으로 결혼시켰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함께 평양성을 함락시킨 인물이다. 1600년 일본의 정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세력이 점차 강대해지자 이를 저지하려는 이시다 미쓰나리 세력과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시다 미쓰나리에 동조하여 싸우다가 패하여 죽임을 당한다. 고니시 유키나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자 소 요시토시는 대마도 주민의 안전을 위하여 고니가 마리아와 이혼을 한 후, 그녀를 나가사키로 보내 버린다. 이후 그녀는 남편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대마도 사람들은 악령의 재앙이 두려워서 권력의 희생양이 된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이 신사에 합사하여 제사를 지내준다고 한다. 일본에는 하치만(八幡 : 일본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을 모시는 신사인 하치만구(八幡宮)가 총 4만4000개나 있는데, 우사진구가 총본궁(総本宮)으로, 도쿄(東京)의 메이지 신궁(明治 神宮), 미에현(三重県) 남동부의 이세시(伊勢市)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과 함께 일본 3대 신궁으로 꼽힌다. 일반적인 신사 참배는 '2례 2박수 1례(二礼 二拍手 一礼: 2번 절하고, 2번 박수치고, 1번 절하기)지만, 우사진구에서는 '2례 4박수 1례(二礼 四拍手 一礼: 절 2번 박수 4번, 절 1번)' 예배를 한다고 한다.
2. 니카라이 토이스 기념관 여기는 5천엔 권 지폐에 그려진 유명한 여류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口一葉, 1872~96)의 스승이자 그녀가 흠모하였던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桃水, 1860~1926)의 기념관이 있고, 이 길로 조금만 걷다 보면 나카라이 토스이의 생가가 나온다. 원래 기자였으나 나중엔 소설가로도 활동한 토스이는 이곳에서 태어난 의사 집안 아들이었다.
나카라이 토이스 기념관
그의 아버지가 부산의 왜관(倭館)에서 일하고 있어 어린 시절엔 부산에서 자랐고 부산과는 인연이 많았다. 귀국한 후 영문학 학원에서 공부했고, 최초로 춘향전을 일본에 소개한 문학가로도 유명하였고, 그 후 우리나라의 고대 소설을 여러 편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일본 5000엔 지폐의 주인공인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이자 연모의 대상으로 그들의 애절한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나카라이 토스이 상
3. 히구치 이치요 기념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을 보다 보면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이야기가 나온다, "히구치 이치요(1872~1896)는 소설가 지망생으로 토스이의 지도를 받기 위해 그곳을 찾을 때는 토스이는 도쿄 아사히신문에 「코사후쿠카제」가 연재되고 있었던 메이지 24년(1891), 그때 이치요는 20살, 토스이가 32살이었다. 무엇보다 토스이를 연모하는 이치요의 마음이 25년이란 짧은 생애 동안이지만 이와 같은 사실은 사후 발표된 「니키(일기)」에 의해 밝혀졌다.
히쿠치 이치요 기념관
특히 히구치 이치요는 일본 근대 여성 문학의 선구자요, 여성 서사의 신경지를 개척한 인물이다. 2004년 일본 5000엔권의 도안으로 선정돼 화제를 모았다. 본명은 나쓰(奈津)로, 1872년 도쿄에서 하급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유년에는 중산층 가정에서 고전 문학을 접하는 등 비교적 모자람 없이 배우며 자랐으나, 큰오빠를 폐결핵으로 잃고,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마저 병사하며, 방년 18세에 파산과 동시에 파혼을 당한다. 이에 일가 호주로서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소설을 써서 돈을 벌기로 하는데, 이는 지인의 성공 사례에서 동기를 얻은 것이었다.
5000엔 지폐 주인공 ‘'히구치 이치요우'
1892년 「어둠 진 벚꽃」으로 문단에 등장한 이래 「파묻힌 나무」로 호평을 얻지만, 생활고는 여전했다. 급기야 요시와라 유곽 근처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가운데 「꽃 속에 잠겨」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집필에 매진하기 위해 폐업한 이후, ‘기적의 14개월’이라 불리는 동안 「섣달그믐」, 「가는 구름」, 「도랑창」, 「십삼야」, 「키 재기」 등 수작을 완성한다. 「배반의 보랏빛」으로 문학적 전기를 꾀한 듯하나 「바다대벌레」에 모티프를 제공하고 미완에 머물렀다. 1896년 11월, 25세에 폐결핵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4. 대마도 사무라이 거리와 방화벽 팔번궁 신사에서 약 200m 정도를 도보로 이동하면 사무라이 거리가 나온다. 막부시대의 사지카바라성 아랫마을에 무사들의 저택이 있었다는데 대마도에서 2010년에 이 거리를 정비하여 <관광지 사무라이 거리>로 만들었고 한다. 이곳을 ‘나카무라[仲村] 지구’라고도 부른다.
사무라이 거리와 방화벽
이 거리를 걷다 보면 다른 일본 지역보다 돌담이 잘 관리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워낙 일본은 산의 비중이 높다 보니 산불이 자주 발생하여 불길이 마을로 번지는 것을 차단시키는 방화벽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나카무라 지구는 예전에 사무라이들이 살고 있어 사무라이 거리였기 때문에 아직도 사무라이의 집들이 남아있다. 그래서 그 거리가 포근한 시골 마을 느낌보다는 조금은 긴장감을 느끼며 권위와 위엄이 있는 듯한 것도 사실이다. 또, 사무라이 집들의 대문은 반개방형 문살로 되어 있어 서로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막부시대의 사무라이는 전체 인구의 5% 정도로 다음과 같은 막강한 ‘3대 특권’을 가지고 있어 일반 백성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1. 성씨를 가질 권리 : 그 당신 일본인은 특권층이 아니면 성씨를 가지지 못하였음. 2. 두 자루의 칼을 차고 지닐 수 있는 권리 : 권력의 상징 3. 칼로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권리 : 특권층의 특권
5. 금석성(가네이시 성터) 유적 대마도 역사 민속자료관 입구에는 고려문(高麗門)이 있다. 대마도 번주(幡州)가 살던 '사지 키바라[금석관]' 성(城)의 제3문으로, 조선과의 선린외교를 위한 영빈문으로 사용되었다. 조선통신사의 비는 조선 시대 후기 한 일간 조선통신사 친선 교류에 공로가 컸던 일본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주창한 외교원칙인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 : 성실과 믿음으로 이웃 나라와의 사귐)’을 기리는 비석이다.
사지키바라성 앞의 조선통신사를 환영하기 위한<고려문>
금석성(金石城)은 일본 대마도에서 역대 대마도 도주들이 거처했던 관사(官舍)인 금석성(가네이시 성)은 1669년 소 요시다네가 건설한 곳으로 대마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문으로 꼽힌다. 금석성의 누각 문(야쿠라몬)은 1919년에 해체되었다가 1990년에 복원되었다. 조선의 속령인 대마도주의 거처이자 관청의 문치고는 큰 편으로 대마도에 있는 옛 건물 중 가장 왜색이 짙은 곳이다.
금석성의 문루
6.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 덕혜옹주는 고종(高宗)과 후궁 복녕당(福寧堂) 양씨(梁氏) 사이의 딸 태어난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고종의 고명딸로, 순종, 의친왕, 영친왕의 이복 여동생이다. 생모인 귀인 양씨는 본래 궁녀였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를 낳고 후궁이 되었다. '덕혜옹주(德惠翁主)'는 1921년에 이복오빠 순종이 내려준 작호인데,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 일신국민학교) 5학년이던 1925년 일제에 의하여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 동경 학습원(學習院)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정신질환인 조발성(早發性) 치매증으로 고생하였다.
그 이전에 따로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었다. 한국 측의 기록에는 그냥 '아기씨', '복녕당 아기', 일본 측의 기록에는 姬(ひめ, 아가씨)로만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훗날 대한민국 호적에도 '이덕혜'(李德惠)‘로 올려졌고, 덕혜옹주의 삶을 다룬 여러 매체에서도 '황녀 이덕혜'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
이 비석에는 '이왕가(李王家) 종백작가(宗伯爵家) 어결혼봉축기념비(御結婚奉祝記念碑)’라고 적혀있다. 1931년 19살 때 대마도(對馬島) 번주(藩主)의 아들인 소 다케시[宗武志] 백작과 강제 결혼하였다. 이에 대마도에 사는 조선인들의 성금으로 조선국 옹주가 대마도로 시집온다는 사실을 축하하고자 결혼봉축비를 세워 환영하였으나, 낯선 곳에서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결혼한지 3년 만에 딸(宗正惠)을 얻었으나, 1951년에 이혼을 당한 이후, 결혼에 실패한 딸마저 엄마가 조선인임을 알고 부끄러워 가출했고, 나중에 자살(실종?)하여 그녀의 병세는 더욱 악화하였다.
덕혜옹주와 대마 도주와의 결혼사진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朴正熙)가 미국 방문 도중 일본에 기착(寄着)하였을 때 영친왕(英親王)의 부인 이방자(李方子) 여사와의 면담으로 1962년 1월 26일 38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고, 귀국 직후부터 5년간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그 후 창경궁(昌慶宮) 낙선재(樂善齋)와 연결되어 있던 수강재(壽康齋)에 칩거하며, 계속된 치료에도 병세는 호전되지 않아 1989년 4월에 별세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소재한 홍유릉(洪裕陵) 부속림에 안장되었다. 이 결혼봉축비는 1953년에 두 사람의 이혼으로 없어졌다가,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이다. 여담으로 덕혜옹주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대한제국의 황녀였던 적이 없다. 따라서 '대한제국(또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는 그녀의 타이틀은 사실 틀린 셈이었다. 대한제국에는 황녀가 없었고, 조선의 마지막 왕녀는 철종의 외동딸인 영혜옹주였다.
7. 조선통신사비 대마도 이즈하라에 들어서면 400여 년 전 조선통신사의 기착지임을 나타내는 표지판이 곳곳에 눈에 띈다. 나가사끼 현립 역사자료관으로 들어가기 전 왼편에는 '조선인 통신사지비'가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후 대마도는 국교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그 길만이 대마도가 살길이었으므로),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 260년간(1697~1811)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들이 일본을 방문했다고 한다.
조선국 통신사지비
초창기의 통신사는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 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였으나,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가 주어지는 등, 외교적 활동을 넓혀갔다고 한다. 통신사 일행은 대개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한다. 당시 통신사 행사는 대단히 중요한 행사였다고 한다. 한번 사절단이 왔다 가기 위하여 대마도 도주는 그 앞뒤 3년간을 오로지 이 일에만 매달려 있어야 했다고 한다. 이러한 통신사의 방문을 통하여 일본은 학문과 예술의 발전을 가져왔고, 조공무역을 통한 흑자 무역을 꾀하였다. '조선통신사비'는 조선통신사 제도를 통한 조·일 양국의 우호 관계를 21세기 한일관계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로 세워진 비라고 한다. 400∼500명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 일행의 화려한 행렬을 담은 길이 16.58m짜리 두루마리 그림이 이즈하라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즈하라 시내를 가로지르는 하천의 다리 난간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묘사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또한, 사찰과 관공서에는 조선통신사가 묵었다는 표석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해마다 8월 첫째 토·일요일에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아리랑 마쓰리‘가 벌어진다. 조선통신사접우비(朝鮮通信使接遇碑)는 조선통신사를 막부(幕府: 12세기에서 19세기의 일본 군사독재 시대)에서 접빈했던 영빈관은 지금 그 자리에 접우비(接遇碑)만 남아있고, 한국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유적지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이 근처에는 조선통신사지, 조선통신사에 대한 발자취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조선통신사 막부 접우지
8. 만관교(万関橋 : 만제키바시) 대마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900년 일본해군 함대가 통과할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섬의 가장 좁은 부분을 땅을 굴삭해 두 개의 섬으로 나누어 만든 인공해협에 다리를 놓았는데 그 다리가 만관교(万関橋 : 만제키바시)이다. 다리 밑의 운하(運河)는 길이가 300m, 폭이 22m, 수심이 3m 정도이다.
만관교(万関橋, 만제키바시)
이 만제키바시(万関橋)를 기준으로 하여 두 개로 나누어진 북부의 윗섬을 가미시마[上島], 남부의 아랫섬을 시모시마[下島]라고 부르고, 이 두 섬은 아소만과 미우라만 사이를 연결하여 놓은 다리이다. 간조 시 형성되는 조류의 소용돌이를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관광객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일명 ‘대마도의 하롱베이’라고도 한다.
만관교(万関橋, 만제키바시)의 운하
만제키세토는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아소만에 있는 군함을 동쪽 해상(미우라만)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런 준비가 주효했을까? 러시아 발틱 함대는 9개월에 걸친 일본원정의 항해 끝에 맞닥뜨린 일본과의 '쓰시마 전투'에서 괴멸되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면서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강화조약은 일본 제국의 급격한 팽창을 경계한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대외적으로 한반도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였고, 조선은 을사늑약과 함께 일본 식민지의 길로 접어든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거리낌 없이 식민지로 삼는 데 크게 일조한 셈이다. 러시아제국은 일본 제국이 한국에 대해 정치와 군사 및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 조치를 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또한, 한국에 있는 러시아제국 신민은 다른 외국인과 같이 취급한다. 러시아는 한국 영토의 안전을 위하여 일본이 군사적 조처를 할 수 있음을 동의하였다.
9. 에보시타케 전망대(전망대에서 아소만의 조망) 아소만[浅茅湾]은 대마도를 2개로 나누며, 바다가 섬 쪽으로 움푹 들어온 듯한 형태를 보이는 튀어나온 곳이다. 라이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어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다. 그래도 그 복잡함이 오히려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또한, 아소만[浅茅湾]은 ‘곶’과 ‘만’이 많고, 낚시하러 많이 오는 장소이다. 뱀, 돔을 비롯하여 각종 어종이 많이 잡혀서 낚시꾼들 사이에는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에보시타케 전망대
그곳에는 대마도 내에서 유일하게 360° 동서남북 사면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여기에서 보는 아소만은 몇 겹의 산과 바다 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과 침식된 산지가 지반침하, 단층운동, 해면 상승 등에 의해 해면 밑으로 침수하여 형성된 불규칙하고 복잡한 톱니형의 리아스식 해안 등이 웅대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맑은 날에는 대한해협 너머로 부산의 산들도 볼 수 있다.
대마도에서 본 부산 수영구 해운대 모습
10. 와타즈미 신사(차창 관광) 와타즈미 신사는 아소만[浅茅湾] 입구에 있는 해궁(海宮)이다. 우미사치야마사치[海幸山幸]의 신화로 유명한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命]와 도요타마정[豊玉町]의 유래가 되었으며, 바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豊玉姫命]를 신으로 모신다. 바다에서 신사의 본전(本殿)까지 다섯 개의 도리이[鳥居 : 새가 머무는 자리라는 뜻으로 신선한 지역의 경계를 말하고, 우리나라의 홍살문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가 이어져 있으며 밀물이 들 때는 2m나 바닷물에 잠기는 도리이가 있다. 음력 8월 1일 오마쓰리[大祭]가 열리며, 봄 바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豊玉姫命)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옛날부터 용궁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음력 8월 1일 대축제[오마쓰리]가 열리며 무형문화재 춤(舞)사위인 봉납연예(奉納演芸 : 신불神佛에게 헌상하는 춤)와 후나구로 대회(船 : 배의 안전귀환을 기원하는 대회)로 붐빈다. 와타즈미 신사
11. 면세점 쇼핑 : 대마도의 일본면세점에서는 우리 카드나 원화로 모두 계산할 수 있다. 인터넷면세점에서 주문한 면세품은 출항일 부산항에 있는 면세품 인도장에서 수령할 수 있다. 그리고 항구 내 면세점에서는 그 자리에서 받아야 하고, 면세 한도는 600불까지이고, 그 이상이면 약 20% 세금을 내야 하므로 잘 계산해보고 유리한 만큼만 구매하는 것이 유리하다.
면세점
12. 히타카츠항 이동
히티카츠항 출발 : 16:30 부산 도착 : 17:40 대구 도착 : 20:00 ※기타 사항 기사/가이드 1인당 경비 2만 원 : 현장 지급(여행비에 포함) 국제관광여객세 1,000엔 : 현장 지급(여행비에 포함) 대마도의 마트에서는 원화나 한국카드 사용 불가, 엔화 준비 숙소 가전제품 전기 110V: 어댑터 준비(호텔 1실마다 1개씩 제공하는지 미리 확인 필요) 당일 早食과 이튿날 夕食은 우리 카폐에서 해결? 6. 개별 준비품 : 덧옷, 수건, 세면구, 화장품, 면도기, 내복약, 멀미약, 선크림, 모자, 우의, 개별 용돈 환전 등 7. 대마도 9월 중순 평균기온 : 2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