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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동 전설의 전승양상과 사회사의 인식
임 재 해
1. 오미동의 풍부한 설화 전승력
설화의 전승력은 공동체의 문화적 폭과 깊이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의 문화적 폭이 다양하고 역사가 깊으면 설화도 풍부하게 전승되며 그 전승력도 강하게 지속된다. 공동체문화의 양과 질이 설화의 전승에도 고스란히 반영되는 셈이다. 따라서 문화가 풍부한 공동체에는 설화의 갈래와 목록이 다양하고 풍부하며, 역사가 오래된 공동체에는 설화의 역사적 뿌리도 깊고 내용의 질적 수준도 높게 마련이다. 실제로 시군 단위로 구비문학을 조사한 경험을 생각할 때, 경주와 안동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료들을 풍부하게 수집할 수 있었다. 경주와 안동은 다른 시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문화적 전통이 두드러진 곳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특정 마을공동체를 대상으로 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마을에 따라 전승력의 차이가 난다. 오미동은 최근에 일련의 조사를 해온 다른 마을들과 견주어볼 때 설화의 양적 풍부성은 물론 질적 우수성도 뛰어났다. 현재 농촌공동체는 해체위기를 맞고 있을 정도로 급격히 쇠퇴하고 있어서 새로운 문화의 창출은커녕 오랫동안 이어오던 전통문화마저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이 인구의 노령화이다. 노인들만으로는 전통문화를 유지할 수도 없으며, 전통문화를 이어받을 젊은이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전통문화를 전수할 수도 없다.
설화라고 하여 예외가 될 수 없다. 이야기를 들어줄 손자손녀들은커녕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젊은이들조차 없기 때문에 설화는 더 이상 전승될 기회가 없다. 어른들도 모이면 침묵한 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이 고작이고, 더러 이야기를 나누어도 설화가 아니라 세간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로 나눌 따름이다. 공동체도 쪼그라들었으며 소일거리로 삼는 문화양식도 크게 달라진 터이다. 그러므로 농촌마을의 해체와 고령화, 문화적 변동 등의 원인으로 설화의 전승력은 크게 쇠퇴될 수밖에 없다.
오미동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뜻밖에 설화가 아주 풍부하게 전승되었다. 마을의 설화 조사는 조연남 석사와, 대학원 석사과정의 김진형, 김현하가 거들어 주었다. 2005년 1월 26일, 27일, 30일 모두 사흘 동안 조사를 했는데, 그 분량이 대단하다. 대충 통계를 내어 보면, 지명전설이 30 편, 인물전설이 13편, 풍속전설이 11 편, 동제 전설이 36 편, 그리고 민담이 105 편으로 모두 195 편이나 된다. 물론 구비문학으로서 전설다운 줄거리를 온전하게 갖추지 않은 구비전승자료까지 포함해서 채록했기 때문에 분량이 상대적으로 많다고 할 수 있으나, 3일만의 조사자료로는 만만치 않다. 특히 동제관련 전설과 민담이 풍부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지명전설은 물론 인물전설과 풍속전설들이 다양하게 전승되고, 특히 민담이 아주 풍부할 뿐 아니라 내용도 질적으로 우수하여 주목된다. 오미동은 풍산 김씨 동성반촌으로서 50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일반적으로 반촌에서는 인물전설이 풍부하고 민담은 빈약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민담까지 풍부해서 구비문학의 창조력과 전승력을 뒷받침하는 문화적 역량이 상당히 두드러진다는 사실을 포착할 수 있다.
인물전설이 많은 것은 납득이 간다. 동성반촌일수록 훌륭한 조상들이 많고, 그에 따른 조상의 일화를 이야기로 전승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서당에서 배우고 어른들에게 들은 명현거유나 역사적 인물들을 많이 알게 마련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반촌에서는 인물전설을 풍부하게 전승하게 된다. 그런 반면에 민담은 잡성스러운 이야기라 하여 하찮게 여기며 애써 전승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오미동은 동성반촌의 정체성을 지니면서도 다양한 민담을 아주 풍부하게 전승하고 있어 흥미롭다.
민담이 풍부한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생각된다. 하나는 민담을 즐길 만한 마을 전체의 문화적 경향성이며, 둘은 이야기를 잘 하는 개인의 역량이다. 먼저 마을의 문화적 특성을 보면, 양반문화의 편벽성에 빠져들지 않고 인간다운 건강한 문화들을 다양하게 수렴하고 향유하는 문화적 융통성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근거로는 동신신앙이 확실하게 전승되고 동신의 영험담이 널리 이야기되는 것이다. 동신의 영험을 굳게 믿는 공동체신앙은 유교적 합리주의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상이다. 따라서 동성반촌일수록 동신신앙이 약화되거나 단절되기 일쑤이다.
그런데 오미동은 동신신앙이 아주 드세게 전승되고 있다. 당도 원당, 중당, 하당의 3당체계일 뿐 아니라 제관으로 선정되면 100일 기도를 하고 제관들은 ‘도가’에서 사흘간 합숙을 하며 재계하는 등 동제에 관한 정성이 지극하다. 아랫사람들이 지내던 동제라 하여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받아들여서 정성껏 제의를 올리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융통성과 포용성이 설화의 전승에도 나타난 셈이다. 인물전설만 가려서 전승하지 않고 민담도 흥미롭게 즐겼던 셈이다.
다음은 마을사람들 가운데 이야기를 특별히 잘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민담의 경우에는 특히 이야기를 입담 있게 잘 하는 뛰어난 할머니 이야기꾼이 있어서 주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송후남(78세) 할머니와 허숙남(80세) 할머니가 특히 많은 민담을 들려준 대표적인 이야기꾼이다. 두 할머니는 마치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듯이 한 자리에 앉으면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송할머니가 이야기하면 허할머니다 거들고 허할머니가 이야기하면 송할머니가 거드는 식으로 두 할머니가 함께 이야기하는가 하면, 제각기 자기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허숙남 할머니는 “이야기도 들어야 이야기를 하고, 머리가 좋아야 이야기를 하고 배와야 이야기를 하지, 얘기도 안 듣고 안 배왔는데, 이야기가 있나 없지”하고 사양했지만, 뜻밖에 이야기 목록도 아주 다양했거니와 이야기도 상당히 길고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이야기꾼도 이야기를 하면서 즐겼다. 자연히 다른 할머니들도 나서서 이야기를 거들었다. 평소에 이야기를 하고 듣는 문화가 살아 있었던 셈이다.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 생산되는 것은 타고난 재능으로만 돌릴 수 없다. 여러 사람이 들어주지 않으면 이야기꾼이 재능을 발휘할 수 없다. 자연히 이야기꾼 덕분에 다른 사람들도 이야기를 많이 듣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두 이야기꾼 외에 다른 분들도 이야기를 상당히 잘 했다.
설화가 풍부하게 전승되는 데에는 이야기꾼 못지 않게 문화적 자원이 풍부해야 한다. 한 마디로 이야기 거리가 많으면 이야기가 풍부하게 생산되고 다양하게 전승될 수밖에 없다. 이야기 거리는 이야기의 소재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증거물이기도 하다. 마을에 이야기 거리가 될 만한 증거물이 많으면 이야기도 많게 마련이다. 증거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특히 전설이라 한다. 먼저 전설의 전승양상부터 주목하기로 한다.
2. 지명전설에 나타난 지리적 입지 인식
마을 전설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물은 마을 자체이다. 마을의 형상과 마을의 이름풀이는 곧 마을 지명전설과 만난다. 오미동이라는 독특한 지명이 지명유래전설을 생산한다. 마을에 세거한 풍산 김씨 선조들 가운데 5형제가 모두 급제를 하여 ‘오미동(五美洞)’이라 일컬었다고 하는데, 전설답지 않은 말풀이 수준의 유래라 할 수 있다. 5형제가 모두 등과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사실이기 때문에 지명화된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이야기 줄거리가 지명과 연관되지 않아서 별도의 전설을 만들지 않았다. 마을 이름은 특별한 사건과 연관되어 있지 않으면 으레 지명유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지명유래를 보면 마을사람들이 인식하는 공간적 지표들이 잘 드러난다. 지명유래에서 문제된 지표들을 주목해 보면 마을사람들의 지리 인식을 헤아릴 수 있다. 첫째, 마을의 풍수지리와 관련된 지명유래가 대표적이다. 풍수 요건을 잘 갖추게 하여 명당이 되게 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는 아미산, 바람막이로 조성했다고 하는 북정재의 소나무숲,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왕이 난다는 한소나무둑, 5형제가 등극한 대지산에 있는 재사 등은 모두 마을의 입지조건을 말한다.
관련 지명유래를 보면, 아미산을 중심으로 좌청룡우백호의 풍수조건을 잘 갖추었지만, 서쪽이 허하기 때문에 소나무숲을 조성해서 바람을 막았을 뿐 아니라 북정재가 있어서 마을의 기를 잘 모아주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오미동은 자연적 입지조건도 좋지만 비보풍수로 조림을 하여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 해당하는 보금자리를 만든 셈이다. 그러므로 외지 사람들도 ‘소쿠리형’이나 ‘포란형(抱卵形)’이라고 하며 오미동의 풍수를 예찬한다.
[조: 아까 전에 마을의 형국이 소쿠리형이라고 했는데요?] 예. 터는 좋지요. 여는 저 알고도 한 20년 전에 여 참 누가 지내가다도 여기 어떤 동네로 그런께. 참 이래 보더이만은,
“하이고 터는 좋으이더. 저짜 저 복판 정도 저 참 좋으이더.”
그 소리는 해요. 그 저 참 저 어떤 동 (나는) 모를 시더. 그런 사람들은 철학 정도 배운 사람인데,
“동네가 참 좋으이더.”
소리는 하는데.
지나가던 사람들도 마을 형국을 보고는 참 살기 좋은 동네라고 한 마디씩 하고 갈 정도이다. “밖에서 보면 안 보이고, 동네 안에 드가면 다 보이기 때문에 그래 암들이라도 터가 좋다”고 여기거나, “참 오붓한 게 동네 좋다” 소리를 듣고 산다. 따라서 풍수 공부하는 사람들은 답사의 대상으로 삼는다. 관광버스를 타고 여러 사람들이 와서 둘러보고 간다는 것이다.
동네서 알기로는 앞에서 이래 보면 동네가 안 보이고 동네에 들어오면 동네가 크기 때문에 이거는 뭐 소 그릇 긑따나(같다나) 그래가지고 동네가 잘, 큰 동네는 터가 좋다 그러고, 큰 동네는 현재까지 집터가 안나요. [조: 아, 터가 안나요?] 예, 집 질라 그면 모두 객지에 가가지고 돈 벌어가지고 안동네 와서 집 질라 그면 집터가 안 나요. 현재까지도. [조: 집터가 안 난다는 얘기가 안 파신다는 거예요?] 예. 안동네는 집터가 모두 안 팔라 그지요, 모두.
오미동 가운데서도 특히 안동네 큰 마을에는 팔려고 내놓은 집이 없다고 한다. 객지에 나가 돈을 번 사람들이 명당으로 알려진 안동네에 집을 짓고자 하지만 집터가 나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터가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터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명당으로서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명당을 뒷받침할 만한 성공한 인물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따라서 “터가 좋으면 뭐 벼슬이라도 나야 되는데 그건 없으니깐.”하며 다소 회의적이다. 세간의 풍수지리적 평가와 마을사람들이 실제로 느끼는 인식은 다르다는 것이다. 명당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사람에게는 회의적 인식이 있게 마련이나, 명당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어른들도 있다. 그런 어른들은 “오백여 년 이상을 우리가 그래도 벼슬하고 서로 번족(繁族)하게 살고 있지.”라고 하며, 안온한 소쿠리 형국 외에 “소백산, 태백산 지맥이 소백산으로 흘러서 다시 학가산으로 내려와서” 마을에 지기가 머문 것으로 해석한다. 학가산 갈래가 다시 수십 리를 남으로 뻗어내려 죽자봉(竹子峰)을 이루고 동쪽으로는 아미산(峨嵋山)이 굽어 돌아 마을을 감싸고, 서쪽으로는 멀찌기 도인산(道仁山)이, 남쪽으로는 곱게 솟은 검무산(劍舞山)이 바로 보인다. 특히 안산 구실을 하는 검무산의 자태는 밑변이 아주 넓은 삼각산을 이루고 있어 예사롭지 않다.
마을 모듬살이로서 안동네와 같은 넓은 터가 아니라 한층 구체적인 지점을 한정해서 지적하는 진짜 명당이 별도로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예사 명당이 아니라 거기다 묘를 쓰면 왕이 난다는 것이다.
저 한소나무둑에 마을 새로 집진 데, 그 집에 뒤에 가면은 느티낭기 큰 게 있어요. 그게 큰 게 있는데, 그게 젤 명당자린데, 거다 산소를 짓든 동 집을 짓든 동 하면은 참 왕이 났다 그는데, 그 왕이 남으로써 동네가 망한다 그니까, 니도 못쓰고 나도 못쓰고. 그래다 보니까 그기다 낭글 하나 갖다 숨아 놨는데, 누가, 아무도 쓰지 못하도록 하느라고 낭글 숨어놓고 키우고 있지요.
왕이 날 수 있는 명당이라면 그야말로 최고의 명당이다. 그러나 어느 지역이든 그러한 명당은 두 가지 사실 때문에 정확하게 밝히지 않거나 밝혀져도 묘를 쓸 수 없어서 사실상 무용지물의 명당 구실을 한다. 하나는 왕이 날 명당에 묘를 쓰는 것은 곧 역적이 될 것을 꿈꾸는 것이므로 반역의 뜻이 없다면 결코 묘를 쓸 수 없다. 반역의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공연히 묘를 쓰지 못한다. 역적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둘은 왕이 날 명당에 묘를 쓰면 왕이 나는 대신에 마을사람들은 모두 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리적으로 왕이 나는 대신 마을 운이 다하여 동네가 망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마을에서 왕이 나면 조정에서 반역으로 몰아서 마을을 없애는 까닭에 동네가 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왕이 난다고 알려진 명당에는 누구라도 묘를 쓸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그냥 두면 누군가 몰래 묘를 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묘를 쓰지 못하도록 명당자리에 느티나무를 심어두었다는 것이다. 느티나무가 크게 자라고 있는 까닭에 아무도 그 자리에 묘를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미동은 누가 봐도 살기 좋은 동네이고 왕이 날 만한 대단한 명당도 있으나, 왕과 같은 특출한 인물은 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다만 선비들이 많이 났을 따름이다.
우리가 현달하게 국가적으로 누구 말따나(말처럼) 유명하게 나온 그런 분은 없고. 그런 거는 없고, 아주 뭐 글 잘하시는 분들이야 많았지. 옛날 선비들이 모두 글 안하고 되나. 글이야 뭐 참 많이 내려오고 전해지고, 과거 급제도 많이 하고, 벼슬도 많이 하고 그랬겠지 뭐. 특히 인제 지금 말하자면 머 송강이다. 무슨 뭐 도산이다. 이렇게 들어내게 그러한 분은 없고, 여게가 요새 근세에 와가지고 독립운동, 독립투사를 많이 배출했고.
역사적으로 아주 두드러진 인물은 나지 않아도 글 잘 하는 선비와 독립투사들은 많이 배출했다. 명당에 관한 과도한 기대가 오히려 마을에서 배출한 인물에 관해 적극적인 평가를 하지 않는 셈이다. 문인이라고 하면 송강 정철 정도는 되어야 하고 선비라고 하면 도산서원의 퇴계 정도가 나야 하는데, 그런 인물은 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마을 주변의 지리적 경관들에 관한 지명유래들이 보인다. 돌로 쌓은 석성의 흔적이 있다고 여기는 검무산(劍舞山), 천지개벽할 때 비가 많이 와서 잠길 뻔했던 ‘담방산’, 의상대사가 다녀갔다고 하는 광석산의 선유암, 죽암정이 있는 독지미와 세덕사 아래의 보포림, 오미동을 두고 권씨와 김씨가 장기를 두었다고 하는 장판재, 특효가 있었다고 하는 약물탕 등이 있다. 태초의 역사를 말하는 담방산에서 왜적의 침입을 대비한 고대의 석성 유래, 그리고 이 마을에 풍산 김씨들이 처음 들어오게 된 입향의 역사들이 지명유래 속에 갈무리되어 있다. 지명유래를 통해서, 천지개벽 시기의 태초의 역사에서부터 의상대사를 통해 불교가 유입된 역사, 입향시조가 마을에 터잡은 상황, 그리고 질병 치료에 여러 모로 효험이 있었다고 하는 최근의 생활사까지 전승하고 있는 것이다.
3. 인물전설에 나타난 마을사와 다양한 인물배출
마을과 관련된 지명전설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이 특정한 성씨가 마을에 들어와서 산 내력이다. 다시 말하면 입향시조에 관한 유래담이다. 사람들이 터잡고 살아온 내력이야말로 마을사에서 중요하다. 인물전설이 중요하게 주목될 만한 자료이다. 그런데 마을에는 입향시조 일화가 뚜렷하지 않다. ‘장판재’의 지명전설과 더불어 전승되는데, ‘안동 권씨와 풍산 김씨가 오미동을 걸고 장기를 두었던 장판재’ 전설이 입향시조의 입향상황을 잘 알려준다. 원래 안동 권씨가 세거하던 마을인데, 입향조인 풍산 김씨가 장기에 이겨서 이 마을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우리가) 영주 유연당에 있었는데, 유연당에서 여 와가지고 요 넘에 행갈 와가지고, 행갈서 또 장성해가지고 전설에는 장판재에서 장기, 안동 권씨하고 (장기를) 떠가지고 우리가 이겨가지고 (안동 권씨는) 저 아래 동네 풍산 밑으로 가고, 우리는 여게 풍산 김, 저기 안동 권씨한테 터를 받아가지고 여게 우리 본토를 잡아. 그래가지고 우리가 여기 살잖아.
풍산 김씨 입향시조가 영주에서 행갈을 거쳐 오미동으로 자리잡는 과정이 소상하다. 오미동의 본디 토박이는 안동 권씨였다. 전설에 의하면, 오미동은 원래 임란때 혁혁한 공을 세운 권장군의 마을이었다. 과거에는 마을 재사(齋舍)에 권장군의 투구와 갑옷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권장군의 묘터도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권장군의 마을을 풍산 김씨가 차지한 것은 8백년 전의 일인데, 구체적인 내기 방식과 경과가 생생하게 이야기로 전한다.
이 마을 김씨는 말을 한 필 놓고, 저 뱅개미 권씨는 [조: 뱅개미?] 어, 뱅개미라 그는데 저 너메 동네 쪼매난 게 있어. 거는 이 터를 놓코 그래 산에서 장기를 떴데.
“내가 지면 말을 주고, 너가 지면 터를 날 다고.”
그래 장기를 떴는데, 그래이 이말(이 마을) 김씨가 권씨를 이겠지. 이기께 구체 없이 터를 줘야지 뭐. 그래가지고 이 터를 김씨가 차지하고, 뱅개미 권씨는 이 터를 뺏기고 저 산밑에 조그마한 동네로 이사를 가고 그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풍산 김씨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고 안동 권씨는 좋은 터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 말과 마을을 걸고 내기를 하여 풍산 김씨가 이긴 까닭에 오미동을 차지하고, 안동 권씨는 산밑의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래가주고 안동 권씨 배판에, 풍산 김이 여기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마을을 내주고 또 마을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두 집안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안동 권씨에 대한 인식도 엇갈리며 또 그에 대한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한다.
권장군이 뭐 누가 그는데, 살아서 장군 못하고 죽어서 장군 됐다 그드라. 죽어서 장군이라는 명패만 써 붙였지, 살아서 장군질을 못하고. 그래 (장군) 감이라는 거지. 장군감이께네 명의를 못 얻고 죽었으이, 죽었어도 명의를 낸다는 게 장군이라는. 바로 요 앞산에 올라서며 저 너메 묘가 있는데. 그래 그 사람들이 그러잖아. 풍산 김씨하고 우리는 서로 괄세를 못 한다 그러잖아. 터를 뺏기기 때문에.
권장군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장군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살아서 장군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죽어서 장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새롭다. 장군감이기 때문에 죽어서 장군으로 추증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살아서 장군 노릇을 하지 못하고 죽어서 장군 명패만 얻었다고 하는 것은 인물평가에서 상당한 차이가 난다. 말이 권장군이지 사실은 장군이 아니었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마을 터를 두고 두 집안이 다투었기 때문에 서로 괄세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실감난다. 선주민 집단과 입주민 집단 사이의 역사적 갈등이 아직도 남아 있는 셈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할아버지가 여게 오미동에 세거한 지가 800년”이 되었으며, “인조대왕이 오미동을 가주고 그래 동명을 만들어 줬던 것”이다. 세거는 8백 년 전에 했지만, 오미동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인조대왕 때라는 말이다. 왕이 마을이름을 하사했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으로서 그 경과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인종 때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을 지낸 김의정(金義貞)의 손자인 김대현(金大賢)은 현감을 지냈는데,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시에 합격했고, 그 가운데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 소문을 들은 인조임금은 오형제가 문과급제를 했다는 뜻을 기려서 종래에 오릉동으로 일컫던 마을을 오미동으로 고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경상감사를 시켜 마을 어귀에 봉황려(鳳凰閭)라는 문을 세워 그 징표로 삼았다.
임금이 알아줄 정도로, 마을에서 많은 인물들이 났지만 그 태몽이나 출생담이 전하는 것은 흔하지 않다. 그런데 제보자 김재위 어른의 5대조부 출생담은 상당히 흥미롭게 전승되고 있다. 며느리가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蘇湖里)에서 시집온 한산 이씨인데, 어릴 때부터 친정집 별당에서 아기를 낳으면 큰 인물이 출생한다는 말을 듣고 몸풀 달이 되어서 바쁘게 친정으로 찾아가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이다.
인제 시아버지한테 고했단 말이다.
“아, 참 친정에 가서 해산을 하겠다.”
고 말이지,
“왜 그러냐?”
이래, 아이 뭐 여러 가지 인제 이유를 댔겠지. 그래가주고 그래 인제 허락을 받아가주고 여서 친정을 가자면, 소월리 가자면 하루에, 아침에 가마를 타고 가면은 하루 종일 걸린다꼬. 가마를 타고 인제 종 둘을 데리고 친정 드가면서, 드가면서 바로 그만 그 안으로(집안으로) 안 드가고,
“별당으로 바로 드가자.”
고, 이랬단 말이야. 그 사랑에서 인제 그 친정 아부지가 이래 내다보니깐. 어 갑자기 미동 갔던 김실이가 아이 막 온다고 말이지. 막 야단났거든.
“아. 어쩬 일이냐?”
고, 당월 임부가. 그래가주 인제 야단이 난 거라. 그래 인제 그것도 아량없이 고만 별당으로 드갔어.
“아. 니가 어쩐 일이냐.”
고, 막 그러니깐. 그래 인제 약하약하 그래서 해산으로 왔다 그래 하니, 그래 마침 그 집에서도 친정 올케가 당월이었어. 친정 올케도 해산을 해야 되는데 한 집에서 해산을 둘이 할 수 없잖아. 옛날에 또 그런 금기가 있는가봐. 할 수 없이 친정 올케를 고만 친정으로 또 보내버렸잖아.
그 날 저녁에 거서 해산을 했잖아, 가시가주고. 그래서 인제 해산을 하시가주고서는 거서 인제 그 분이, 거서 인제 뭐 삼칠 지내고 아마 뭐 백일 정도 돼서 오싰는지, 오싰단 말이야. 떡 오싰거든. 오싰는 걸, 그걸 알고 큰집에서 오셨는 걸 대번에 옆에 거 일광문이, 옆에 일광문이 옆으로, 동네 큰 집, 작은 집 간이니깐 문이 있어. 그 문을 대번 나와가주고 들오는 애를 바로 받아가주고 드가싰어.
“이건 내가, 내 아 해야 되겠다.”
어이, 큰집에서 달라 그는데, 옛날에는 양자를 달라 그면 안 줄 수가 없거든. 결국은 애기를 뺏긴 거야 인제. 그래 인제 그 분이 대과하고 급제해서 그래 했다 그는 얘기가 하나의 일화로 남지.
이 이야기는 두 가지 주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시집온 며느리가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하여 몸풀 달이 되자 가마를 타고 친정의 명당 태실에 가서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며, 둘은 조카 며느리가 친정에 가서 아들을 낳아 온다는 말을 듣고 큰집에서 기다렸다가 아기를 데려 가서 양자를 삼았다는 것이다. 하나는 큰 인물을 낳는 여성의 슬기이며, 둘은 큰집의 양자제도에 관한 사실이다. 큰집에서 양자로 삼으려 하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면 명당 태실로 알려진 별당을 두고 시집과 친정 사이에 갈등이 조성된 사실도 문제된다. 시집 간 딸이 아이를 낳으러 왔으므로 며느리는 친정에 보내서 몸을 풀도록 했는데, 딸이 낳아서 안고 간 아이가 나중에 대과에 급제해서 큰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명당 태실을 딸에게 내 준 것은 곧 큰 인물을 사돈댁에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지금도 그 집에서는 우리 미동(오미동)을 보고, 대과 도둑놈이라고 그래 얘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오미동에는 대과에 급제한 인물이 많이 낳기 때문에 이러한 일화도 전한다.
효자 되시는 분이 너무 (효성이) 지극해가주고, 당시 왜 옛날에 거 유명한 어사 박문수라는 어사 있잖아. 그 분도, 그 분이 여겔 다녀갔어. 다녀가서 동네 그 참 그 얘길 듣고 다녀 가가주고 나중에 저거한 일인데, 효성이 얼마나 지극했나 하면, 반찬을 항상 그 아버지 반찬을 늘 참 걱정을 하고 말이지.
항상 저걸(걱정을) 하는데, 하루는 반찬이 똑 떨어져서 반찬을 할 길이 없단 말이야. 그래 반찬을 할 길이 없어가주고 늘 걱정을 하던 차에 밖에 좀 나가보니깐. 이 울 안에 꿩이 들와 있거든. 꿩이. ‘아, 저걸 잡아가주고 반찬을 해야 되겠다.’ 해서 그 꿩을. 그 꿩이 사람이 가면은 날아가야 되는데 안 날아갔단 말이야. 그래 이 놈의 반찬을 하도록 일부러 꿩이 와가주 기다려서, 그래 그런 얘기를 듣고 어사 박문수가 나중에 인제 상소 올려가주고 한 그런 얘기도 있고.
김서운이라는 분의 효행담이다. 오미동 같은 마을에서 효자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하도 아버지를 극진히 섬기며 반찬을 정성껏 차린 까닭에, 어느 날 반찬이 떨어져서 걱정을 하자 꿩이 집안으로 날아 들어와서 날아가지 않고 반찬을 장만하도록 하였다는 이야긴데, 예천의 도효자 전설과 쌍벽을 이룰 만하다. 그런데 이 어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른이 “편찮으실 때, 변의 맛을 보고, 병세를 체크했단” 얘기도 전한다. 그러므로 박문수가 효행사실을 알고 상소를 올려서 표창을 했던 것이다.
근세에도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독립지사들이 많이 났다. “독립운동 하셨던 분도 상당히 많지요. 대표적으로 추강(秋岡) 들어 봤지요? 김지섭(金祉燮) 선생!”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이다. 일제강점기에 의열단에 가담하여 일본천황이 있는 궁성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金祉燮)의사를 말한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일본 총영사 등 10여 명을 사살하고 자결한 김만수(金萬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오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전국 사림에 배포하고 음독한 김순흠(金舜欽)도 오미동 인물이다.
마을의 인물은 안동 권씨 권장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풍산 김씨 입향시조의 장기 솜씨에서부터 8진사5급제를 배출한 명문가를 비롯한 대과 급제자들, 큰아들을 낳기 위해 친정의 태실을 차지한 며느리의 슬기, 효자 김서운, 김지섭을 비롯한 독립운동가까지 다방면에 걸친 인물들이 시대상황과 맞물려 널리 배출되었다. 특히 독립지사들이 많이 나온 것이 주목된다.
4. 풍속전설에 나타난 동신신앙과 동제의 전승
동성반촌답지 않게 오미동에는 민속문화도 풍부하다. 그러한 민속문화의 전승양상이 풍속전설을 통해서 잘 드러나 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이 동제 관련 전설이다. 동제가 독특하면 이야기 거리도 많다. 그러나 온전한 전설이라 할 만한 것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동제 관련 구비전승으로서 동제 정보를 알려주는 정도이다. 문학적 흥미나 사서적 허구성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동제 관련 경험담이나 구비전승 되는 동제 지식이 중심을 이룬다.
동제당이 원당과 중당, 하당으로 3당 체계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동제의 영험에 관한 이야기들이 풍부하여 동제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자료 구실을 한다. 동제전설이 많다는 것은 동신신앙의 전통이 잘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다음은 기우제 전설이다. 가뭄이 심하면 독지미에서 기우제를 지내거나 5일장을 모래사장으로 옮겨서 기우제 행사를 할 정도로 기우풍속이 드셌다. 그 밖의 가마 매는 풍속이나 새댁 가슴 훔쳐본 풍속도 흥미롭다. 먼저 동제에 관한 전설부터 보기로 한다.
우선 당이 셋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원당은 상사나무 둑이라고 하는 마을 듬에 자리잡고 있다. 오미 2리와 경계지점이기 때문에 동제때 원당 제사에는 오미 2리 사람들도 참여한다. 서낭당에 해당되는데 마을 어른들은 주로 원당이라고 일컫는다. 원래 3백년 이상 되는 수령의 소나무 고목이 서낭당의 신체였다. 서낭목이 30년 전에 태풍으로 쓰러져서 다시 은행나무를 심어 두었다.
중당과 하당은 함께 논 가운데 있는데 바윗돌이 신체 구실을 한다. 중당은 윗 조산당, 하당은 아래 조산당이라고 일컬었다. 원래는 중당에도 느티나무가 동수나무로 있었는 모양인데, 경지정리하면서 논 주인이 나무를 베어버리고 돌만 남겨 두었다. 이 과정에, 하당의 조산당 돌을 중당에 가져와 합당을 한 상태이다.
논 복판에 있어요. [조: 논에 있는 게 나무예요?] 아이, 낭기 아이고, [조: 서낭당이에요?] 예, 낭기(나무가) 옛날에 있었는데, 나무 비뿌리고(베어버리고) 지금 돌만 갖다 세웠구요, 요 중간에 한 기(개) 있었는데 농지 정리 되라고, 고 돌글(돍을) 빼다가 고(거기) 한테(함께) 갖다 모셔놨어요.
삼당은 원당이 남편 서낭신이고 중당과 하당은 서낭신의 본처와 첩에 해당된다. 따라서 마을사람들은 이들 서낭신 부부를 한꺼번에 일컬을 때 ‘삼내외’라 한다. 하당의 돌을 빼다가 중당에다 합해서 세웠는데, 그렇게 한 까닭은 경지정리 때문이다. 원래 느티나무가 있었지만 경지정리를 하면서 논임자가 바뀌게 되자, 전과 달리 자기 논 옆에 당나무가 있어 그늘이 진다고 베어버렸다는 것이다. 논에 그늘이 진다고 당나무를 베는 사람이나, 이를 두고도 말리지 않은 마을사람이나 당나무를 영험한 신목으로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경지정리는 새마을사업과 더불어 진행되었는데, 새마을운동의 하나로 동제를 중단하고 서낭당을 허물었던 일과 무관하지 않다. 오미동에도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동제가 한참 중단되었다. 그러니 당나무를 베는 일도 가능했다. 특히 경지정리를 하고 토지를 재배정하는 과정에 이전과 달리, 자기 논이 당나무 밑으로 들어가서 그늘이 진다고 생각하는 지주로서는 당나무를 곱게 받아들일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경지정리, 새마을사업, 동제중단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당나무를 베고 잠잠하지만은 않았다.
낭기 엄청 컸는데, 그거 비고 야단 났디래. 그걸 빘으이께네. 막 뭐 종손이 마 불러다가 혼을 내고, 말하자면 뭐뭐 야단 났디래. 그 동신 나무 비가주고.
마을 종손이 당나무 벤 사람을 불러다가 혼을 내는 바람에 마을에 야단이 났다고 했다. “예전에 누대로 니리오던 거를 그래 하니” 야단을 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동신에 대한 종교적 신앙 때문이라기보다 마을의 전통 때문에 더 문제된 것 같다. 당나무를 벤 자리에 김용범 어른이 자기 집에 있는 은행나무를 그 자리에 옮겨 심어서 현재는 이 은행나무가 당나무 구실을 하고 있다.
김: 은행나무가 거 제일 오래 가이께네, 동네 그 위해서 숫나무 거 갖다가 고마 우리 집에 있는 거 그래 갔다 놨는 거래.
허: 거 숫늠 잘 갔다 숭궜다. 암놈 숭궈봐야 니 은행 한 개 얻어먹도 못하고 숫늠 잘 숭궜다.
김: 에헤. 아이래요. 숫늠(숫놈), 할매도 자꾸 숫늠 자꾸 놓으라이께네. 소는 숫늠 놓으만 안돼. 암놈 놓으만 더 좋은데.
서낭당의 고목이 쓰러지자 새로 은행나무를 심은 이야기이다. 소나무가 3백년 정도 되니까 고목이 되어서 넘어지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일 수명이 긴 은행나무를 가려서 심었다는 것이다. 은행나무는 암수의 성별이 분명하다. 암놈을 심지 않고 숫놈을 심은 것을 두고 티격태격한다. 나무를 심은 어른이 동네를 위해서 자기 집에 있는 숫나무를 가져다가 심었다고 하니, 은행 한 개도 못 얻어먹을 바에는 숫나무를 잘 심었다고 한다. 그러자, 심은 이는 다시 소는 수놈보다 암놈을 놓으면 더 좋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서낭당이 남서낭이자 서낭할배이기 때문에 숫나무를 심어야 옳다.
허: 야야 저거는 저게 서낭 넘에 동신제사 지내는데.
김용범: 서낭대이. 서낭대이라 그래.
허: 거를 뭣이라 그랬노? 거를 남자라 그랬나? 여자라 그랬나?
김: 어 하하. 그 숫늠 아닌교. 으하하하하.
원당의 서낭당을 할배, 중당과 하당의 서낭당을 할매라 일컫는다. 때로는 숫놈과 암놈이라 하기도 한다. 은행나무 가운데 숫나무를 서낭목으로 심은 것도 이유가 있다. 할배서낭을 모시는 서낭당에 암나무를 심는 것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마을 동제도 여느 마을처럼 정월 열 나흗날 자정에 지낸다. 서낭당이 셋이기 때문에 삼제관을 뽑아 제사를 올린다. 어른들이 모여서 누구를 제관으로 지목하면 그 사람이 지냈다. 상주 아닌 사람은 누구나 제관 자격이 있다. 그런데 옛날에는 아랫사람들이 동제를 맡아 지냈다. 농막에 사는 타성들이 주로 담당했던 것이다. 풍산 김씨들이 지내기 시작한 것은 10년 정도 된다. 그러므로 오미동 동제의 역사는 사실상 타성들이 주체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반촌마을 동제 주체의 일반적인 양상이다. 하회마을에서도 별신굿의 주체는 각성받이들이었고, 문경 현리마을에서도 과거에는 하배들이 동제를 담당했다.
저 알기로는 지금 한 10년 후부터는 우리들이 지내지. 그 전에는 참 타성들이 지내요. 타성들이 죽 들어오면, 타성이 누구냐면 농막살이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면은 참 우리는 어른들이 씨기면은(시키면),
“하이고 누구 집에 누굴 하니깐 좀 지내라. 지내주게.”
그면은 그 사람이 살기위해가주고 참 주인이 그카이 참 뿌리를 못 칠, 뿌리칠라 그면 그 뜻을 거역을 못 해가주고 그래 지내거든요.
양반들은 동제 지내는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동제 지내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하급에 속한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제사 지내는 게 제일 하급이라고 봐요. 상급이라 그면 양반들이 서로 지낼라 그지만 하급이다 치니깐. 그래다 보니깐 그 유래 때문에 서로 안 지낼라 그지요.”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양반들이 맡아서 지낸다. 농막을 사는 타성들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제관을 뽑는 날짜도 점점 늦어지고 있다.
옛날에는 정월 십일 경에 안 그러면 음력 초엿새 (제관을) 뽑았는데, 요즘은 (모두) 안 할라 그니께네, 열 사흘, 열 이튿날 이래 정도에 뽑아요. 제사 지내기 2,3일 전에 뽑아요. [조: 마을 어른들이 모여서 뽑나요?] 우리가 모두 모여가주고 (지목을 하면서) 지내라, 누구 지내라 그지 뭐. [조: 옛날부터 그렇게 하셨어요?] 예, 옛날에도 계속 그랬어요. [조: 무당한테 묻지는 않았나요?] 그거 없구요. 상주 아닌 사람은 다 지낼 자격이 있거든요.
제관을 보름 열흘 전에 뽑다가 닷새 전에, 사흘 전에 뽑는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따라서 제관 뽑는 날이 음력 초엿새, 열흘, 열 이틀, 열 사흘로 자꾸 밀린 셈이다. 그만큼 제관을 서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까닭이다. 뽑는 날짜를 늦추는 일과 제관을 기피하는 일이 연관되어 있다. 제관으로 뽑히면 그 날부터 재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늦게 뽑을수록 제관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관을 서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만큼 최대한 제관을 늦게 뽑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틀 전에는 뽑는다. 제관이 정성을 들이려면 적어도 이틀 정도는 재계를 해야 한다고 믿을 뿐 아니라, 그래야 제관으로서 마음의 준비도 하고 실질적으로 동제 장을 보아서 제수를 장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제사를 지내면은 100일 기우를 해요. 참 동네 초상이 났다던가, 초상집에 안 가도 괜찮고요, 이 암거를(아무거나) 해도, 어른 모싰다고 해가주고 그 사람을 일에 특혜를 봐 주신 거죠. 그래 본인도 그런 거 하면 해롭다 해가주고 안 가고요. 그런 거 참 갈 거 겉으면(같으면) 먼저 번에 매로 참 아이 죽는다든가? 이런 (일이) 혹이 있으이까네.
석 달 전에는 (나쁜 일이) 있으면은 이거 부정 탔다 그러기 때문에 그래고 본인, 본인이 잘 될라고 본인이 스스로 가리요(가려요). 그리고 동네도 백일 동안은 가리라 그러고요.
옛날에는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100일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동제 100일 전에 제관을 뽑았던 것이다. 제관으로 뽑히면 그 날부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이며, 제관으로서 특별히 재계를 하여 부정탈 만한 일은 엄격하게 삼갔다. 마을에 초상이 나도 문상을 가지 않고, 마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참여하지 않는 특혜가 주어졌다. 부정 타면 제관에게 피해가 있는 것은 물론 마을에도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제관으로 뽑힌 사람 스스로도 삼갔으며,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 것을 이해하고 허용하였다.
100일 동안 재계하는 일은 제관으로서 의무이자 특권이었지만, 아무래도 의무가 문제되어 요즘은 점차 단축해서 아예 제관을 2, 3일 전에 뽑게 된 것이다. 현대생활에서 제관으로 뽑혔다고 하여 석 달 이상 재계한다는 것은 엄청난 시련이자 속박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삼일 기우 그면서 삼일동안 궂은 사람 상주 긑은(같은) 사람 안 봤는데요. 요즘 뭐 그게 있습니까? 당일 기우하고 하루에 소독하고 아침에 가가지고, 옛날에 집에서 찬물에 싹 다 목욕재계를 했는데, 요즘은 고마 저 저런데 여관에 가 소위 가가지고 목욕하고 장 봐가지고 와가지고 같이 꿇어 앉아가 제사 지내요.
옛날에는 집에서 서이가 모여가지고 찬물로서, 도가집이라고 정해가지고 그 집에서 외부 안 나가고 삼일간 그 집에서 자야 돼. [조: 그면 제관이 도가 집에 갑니까?] 차리는 집을 도가집이라 그래. 삼일 간 그 집에 합숙을 했는데, 요즘 그런 게 없고, 귀신이 있니껴, 어디?
제관이 원래 석달 열흘 곧 100일 재계를 하다가 다시 사흘 재계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사흘 재계도 하지 않고 당일 재계를 한다는 것이다. 전에는 집에서 찬물에 목욕을 하고 몸가짐을 정갈하게 했으나, 요즘은 장터 목욕탕에 가서 목욕하고 제수 장을 봐와서 동제를 지내는 정도로 아주 간소화되었다. 과거에 사흘 재계를 할 때에는 상중하 세 당의 제관 세 사람이 모두 제수를 장만하는 도가에 모여서 합숙을 하며 재계를 했다. 물론 도가 주인도 재계를 같이 한다. 이처럼 합숙을 하며 공동으로 재계를 하기 때문에 외부 출입을 삼가고 더 엄격하게 재계를 할 수 있었다.
동제 제수를 장만하는 데 일정한 경비가 든다. 장보기를 할 때 제수만 사는 것이 아니라 제기(祭器)도 구입한다. 한 번 쓴 제기는 두 번 쓰지 않기 때문에 해마다 구입한다. 동제 비용 가운데 제기를 사는 것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밥솥과 떡시루까지 새로 사는 까닭이다. 다른 마을에서는 제수를 차리는 그릇만 사는데, 오미동에서는 동제와 관련한 기물을 모두 새로 사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사용한 제기는 모두 도가의 몫이 된다. 동답이 별도로 없기 때문에 해마다 동제 경비를 추렴해서 쓰지 않을 수 없다.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초열흘 경에 풍물을 치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걸립을 했다.
[조: 지금도 굿을 치신다면서요?] 그 제물 거둘 때 즐겁게 그냥. 맨손으로 댕기께 쓸쓸하거든요. 여럿이 어울려 대녀가지고(다녀서) 한 되박 나오면,
“한 되박 더 주소! 소지 하그러 돈 좀 주소! 떡 좀 하그러 쌀도 주고.”
그고 그래 굿하는 거지 뭐.
옛날에는 한 십일 경에 했는데, 초열흘 경에 했는데, 요즘은 뭐 그것도 없어요. 반장들 댕기면서 (그냥) 훌 거두이께네. [조: 요즘에는 안 하세요?] 예, 안 해요. [조: 안 한지는 한 몇 년 됐어요?] 한 4년. 제사 당일 날 (굿을) 해요. [조: 당일 날 해요?] 예, 열 나흘 날 저녁에 열두 시 넘어가지고. 열두시 넘으면 제사 지내러 열두시 반, 한 시경에 우- 나와 굿 뚜들고 우리 나와요.
동제 경비를 과거에는 현물로 거두었다. 그냥 모곡(募穀)을 하러 다니는 것은 재미가 없으므로 풍물을 치면서 걸립을 했던 것이다. 풍물패가 풍물 치는 일을 이 마을에서는 굿친다거나 굿 뚜드린다고 한다. 풍물도 굿물인 셈이다. 정월 열흘 경에 풍물을 치며 집집마다 찾아다니면, 주인이 쌀을 한 되박 내주면, 한 되박 더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은 다 옛말이다. 4년 전부터 반장들이 책임지고 현금을 거둔다. 동제에서 굿이 사라진 것이다.
굿을 칠 때는 걸립만 한 것이 아니라 동제를 지낼 때도 굿을 쳤다. 굿패는 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자정이 되면 나와서 굿을 친다. 도가집에서 합숙하는 제관에게 동제 시기를 일깨워 주는 구실을 한다.
인제 징물을 칠 때 왜 징물을 치느냐 하면은 요즘은 시계가 있지만 예전에는 시계가 없었는기라. 그르이 한 시간에 한 번씩 징물을 두르려 주는 이유가 제관들 잠 못 자그러 두드려 주는 기라. [조: 한 시간에 한 번씩 두드려주는 거에요?] 어. 예전에는 시계가 없었으니까, 모이 있으면 잘 못하면 시간을 놓칠 수도 있고, 시간을 놓칠 수가 있거든. 그러니까 모이가주고 제관들한테 시간을 알려주는 기라.
굿은 제관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구실만 하지 않는다. 서낭당에 가서 동제를 올리는 동안에도 굿을 친다. 제관들은 굿치는 것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들을 수는 있다. 풍물굿의 전통이 상당히 남아 있다. 안동시 풍산읍 소산동이나 도산면 가송리의 경우에도 풍물을 치면서 동제를 올린다. 소산동에서는 풍물패를 굿패라 하고 굿 친다고 하는 것이 오미동과 닮았다. 굿패의 역할로 봐서 가송리 동제가 가장 적극적이다. 동제의 제의가 전적으로 풍물가락에 따라 진행될 정도이다. 그러나 소산동에 오면 굿을 치는 소리에 맞추어 상당과 하당의 제관들이 동시에 제의를 올리는 정도이다. 따라서 굿패의 역할이 중요하다.
오미동에서는 굿패들이 제관에게 동제 시기를 일깨워주고 동제를 지내는 동안 풍물을 울려 주는 구실을 한다. 풍물이 동제 절차에 직접 개입하는 기능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동제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굿패들의 풍물을 따라 원당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 나면 풍물을 쳐서 지신밟기를 한다. 동제를 지낼 때는 한겨울이라 몹시 춥다. 따라서 제관들은 당에 가면 먼저 나뭇가지를 모아서 불부터 피운다. 당에 불이 오르는 것을 보면 풍물을 멈추었다. 그리고 제사가 끝이 나면 당을 돌면서 지신밟기 풍물을 친다. 그리고 중당으로 이동을 한다.
결국 제관들이 당으로 이동하여 불을 피울 때까지 풍물을 치고 제사를 지내는 동안 멈추었다가 제사를 마치면 다시 풍물을 쳤던 셈이다. 그러므로 굿패들은 제의에 직접 참여하지 않지만, 제관들이 풍물을 쳐서 동제의 진행을 도우며, 이동 중에 공포감을 줄이고 제관들을 환영하고 맞이하는 구실을 하는 셈이다. 이러한 굿패의 활동은 독축고사 형식의 동제가 아니라 굿패들이 풍물을 치면서 가무오신 형식의 마을굿을 했던 과거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세 번째 당에 가서 불을 올려 주는 거야. 그래가지고 인제 여서 지신을 올려가지고 죽 돌아가지고 세 번째까지 지신 다 밟고 도가집에 가는 게라. 도가집에 가면은 도가집에 가서도, 예를 들어 우리 집이 도가 긑으면은(같으면) 제관들은 여 드가서 음복을 하고, 여 방(에) 들 앉어 있지만은 저 우리 집 안에 들오지를 못해. 엄연히 제관들이 여 음복을 다 하고 나서 징을 치는 사람들한테 안내를 해, 들어오시라고. 안내를 해야 그 사람들이 들어 와.
동제를 모두 마치고 도가집으로 돌아올 때도 풍물을 친다. 도가에 함께 와도 굿패들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제관들이 먼저 도가집 방을 차지하고 앉아서 음복을 하고 있으면 굿패들은 방에 들어오지 못한다. 제관들이 음복을 다 하고 나서 굿패들을 들어오라고 해야 비로소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만큼 제관들을 높이 섬겼던 것이다. 풍물은 마을 젊은이들이면 누구나 칠 수 있었지만, 제관들은 어른들로부터 선정된 사람들이다.
(굿패들이) 인제 방(에) 들어 와서 음복할 때, 그래 들어와서 음복, 제관들한테 인사를 하고, 그냥 들어와 앉는 게 아니고, 들어오면은 제관들 이래 앉아 있어. 앉아 있으면은 예전에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참 글때만 해도 어른들이 갓을 쓰시고 이래 오시가지고, 젊은 사람이 제관을 해도 맹 인사를 하지. 글 때 동네를 위해가지고 동네 최고 어른이라. [조: 아, 제관이.] 그래 인제 밤새 수고를 많이 하셨다고, 그래 인사를 하고 나면 인제 그 온 사람들한테 제사 올린 떡하고 음복을 하지.
제관들이 들어오라고 해야 비로소 굿패들이 밖에서 방으로 들어올 수 있는데, 들어와서도 그냥 자리에 앉으면 안되고 모두 제관들에게 큰절을 올리며 인사를 해야 한다. 굿패는 물론이고 마을 어른들도 음복을 하러 도가집에 오면 추운 겨울이지만 얼른 방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밖에 불을 피워 놓고 서서 기다리다가 제관이 들어오라고 해야 들어갈 수 있다.
도가집에 가면은 인제 참 저 집에 먼저 제관이 음복을 하고, 그 다음에 나와가지고 우리한테 ‘들어 오라!’ 그래야 우리가 들어오지, 아니면 우리가 그 집에 함부로 못 들어가요. 한데서(바깥에서) 불 놓고, 추와가지고 불 놓고 계속 있으면, 한 시간씩 있으면 본인들이 전부 다 음복 다 하고 술 한 잔 먹고 난 뒤에, 우리를 초청한 뒤에 들어가요. 그러면은 같이 절을 하고 그 집에서 음식을 내놔 음복을 하고 밤새도록 놀다가 나오지.
제관들이 전부 음복을 한 뒤에 마을사람들을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그 동안 한 시간 정도 밖에서 불을 피워두고 기다려야 한다. 제관의 청에 따라 방에 들어가면 제관에게 먼저 인사부터 해야 한다. 갓을 쓰고 두루막을 입은 점잖은 어른들도 도가에 오면 먼저 제관에게 “밤새 동제 지내느라 수고를 많이 하셨다”고 인사를 한 다음에야 비로소 음복을 할 수 있다. 제관은 자연인이 아니라 동제를 올린 제관으로서 마을 최고의 어른으로 떠받들려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동제 다음날 아침에 어른들이 모여서 음복을 하고 대동회를 하는데, 오미동에서는 제관들이 제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이어서 음복을 한다. 따라서 마을어른들도 음복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자시가 지나 제관들이 동제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도가로 찾아간다. 제관과 굿패, 마을어른들이 모여서 음복을 하며 꼬박 날을 새는 셈이다. “그 날 저녁부터, 그 이튿날 모여가지고 하루 종일씩 먹고 윷 놀고 징 치고 놀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없어. 사람이 없는데 뭐.” 따라서 요즘은 당일 음복 외에 파젯날 음복은 별도로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아-들 부시럼 안 나고 복 받그러 떡 한 조각 주소.”라고 하며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떡을 나누어준다.
[조: 제사떡 훔쳐 먹으러 오는 사람은 없었어요?] 옛날에 있었지요. 있었는데, 여꺼(여기 거) 갖다 아-들 주면은 참 일년 내내 부시럼 안 난다 그랬어요. [조: 아! 부시럼 안 난다.] 부시럼, 그 피부병. 그거 안 난다고.
동제 지낸 음복떡을 먹으면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서 과거에는 떡을 몰래 가져다 먹으려는 이들이 있었으나, 요즘은 사라졌다. 흥미로운 것은 제수로 장만하는 시루떡이다. 동제를 올릴 때마다 떡시루를 세 개 새로 구입하는 것도 독특하지만, 정작 시루떡을 찔 때에는 시루 두 개만 사용한다. 한 시루의 떡이 둘로 자연스레 갈라진다는 것이다. 나머지 시루 한 개는 쪄낸 시루떡을 차릴 때만 쓴다.
이제 떡을 두 시루 해. 떡을 두 시루 하는 데 원이 한 시루, 한 시루는 해가주고 두 군데 농겨(나눠) 쓰거든. 농겨 쓰는 떡을 칼로 비지(베지)를 안 해. (저절로) 딱 따게(나눠) 지는 게라. 자체에서 따게 지면은 인제 처음에 장보기 할 때는 인제 떡시루는 세 나(개)를 사는 기라.
그래 시루떡을 찌기는 두 시루를 찌되, 원이는 고 시루대로 기냥(그냥) 갖다놓고, 하나 갈라지는 거는 두 군데 농겨야(나눠야) 되거든? 칼로 이거를 삐져가 갈라 쓰는 게 아니고 이거를 손을 넣어가주고 이 손이 드가도록 떡이 갈라지는 게라. 그래가주고 갈라졌는 거를 반을 꺼내가주고, 이쪽 시루에 얹어놔가주고 가서 인제 지내는 기라.
동제의 영험은 제물을 장만하는 과정에서부터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떡시루가 갈라지는 일이다. 시장에서 떡시루를 세 개 사지만 실제로 시루를 찌는 것은 두 개다. 원래 3당이기 때문에 3 시루에다 떡을 제각기 쪄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시루 하나는 반드시 떡이 둘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시루 하나는 원당의 떡을 찌고 시루 둘은 중당과 하당의 떡을 함께 찌는데, 이렇게 함께 찌는 까닭은 중당과 하당의 시루에 찌는 떡은 칼로 가르지 않아도 자연스레 둘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둘째 떡시루는 손이 들어갈 만큼 반드시 떡이 둘로 갈라져 있어서 갈라진 절반을 꺼내서 빈 시루 곧 세 번째 시루에 담아서 제수로 쓴다는 것이다. 결국 시루 세 낱을 다 쓰긴 하지만 떡이 갈라지기 때문에 실제로 떡을 찌는 데 사용하는 시루는 둘 뿐이라는 것이다.
옛날부터 저거를 하면은 시루를 안치면은 (원당 시루는) 안 갈라지고요, 중당 하당은 시루를 안치가지고 다 찌고 나면은 (저절로) 반이 딱 갈라져요. 손이 드갈 정도로.
그러면 한 쪽은 여기 쓰고, 한 쪽은 갖다가 여기 쓰고. [조: 그거는 왜 그런 거예요?] 모르겠어요, 현재까지도 그래 갈라져요. [조: 자동으로 갈라지는 거예요?] 예, 자동으로 그래 갈라져요. 칼 안 들이고 자동으로 딱 갈라져요. 일정하게 반은 아니지만은 손이 들어갈 정도로 갈라져요.
할배서낭인 원당 시루떡은 갈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떡시루 채로 고스란히 제물을 차려서 동제를 올린다. 그러나 중당과 하당은 갈라진 시루떡을 나누어서 나머지 두 시루에 제각기 담아 동제를 올린다. 할매서낭인 중당과 하당의 시루가 갈라지는 이유가 있다. 3내외를 모시기 때문에 남편인 할배서낭에게는 온 시루떡을 차리지만, 아내인 본부인과 둘째 부인은 한 시루의 떡을 둘이서 나누어 차리는 까닭이다. 서낭신 내외 사이에도 가부장적 체계가 있는 셈이다.
떡을 찌는데 시(세) 시룰(시루를) 안 찌고, 둘 시룰 찌는데, 온 실근(시루는) 맹 할배 해 택이고, 한 시루는 쪄가주고 반썩(반씩) 농게이(나누니), 위동서끼리 농게고(나누고) 맹 그렇겠지. 원래 두 시루를 쪄가주고 두 군델 놓고 지내이께네. 그래 온 시루는 맹 물론 할배해께고, 한 시루 해가주고 농기는 거는 할매네 해 께고 그렇지.
할배는 온 시루, 할매는 반 시루를 차지하도록 자연스레 시루가 갈라진다는데,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모두 신이한 현상으로 여기면서도 당연한 사실로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이 마을만의 것은 아니다. 어떤 마을에는 3당을 모시는데 시루를 찌면 시루떡이 저절로 세 조각으로 나뉘어진다고 하는 일도 있다. 특히 당의 존재양식과 떡시루의 양상이 일치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있는 원당의 시루는 떡이 나뉘어지지 않는데 비하여, 중당과 하당을 합쳐 놓은 시루는 둘로 갈라진다는 사실이 퍽 흥미롭다. 칼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갈라지는 시루떡은 동신의 영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신의 영험은 동제에 사용한 종지불과 한지를 통해서 한층 구체화된다. 제관들이 동제를 지낼 때 종지에다 참기름을 담고 한지로 심지를 만들어 불을 켜는데, 제사를 지내고 이 불을 두고 가면, 사람들이 다투어 종지불을 차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지불을 가져 가는 사람은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종지불을 가져가는 사람은 손자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손자를 보고,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은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다.
[조: 종지불을 가져와서 효험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옛날에 그런 전설이 있으이께네 또 그렇게 하지. [조: 실제로 종지불을 가져오나요?] 고고 가주와가주고 하는 이는. 아들 놔. 대번 아들 놔. [조: 그런 예가 있었어요?] 몰래. 우린 이래 겪어보이 그렀드라. [조정희: 그거도 안 들키그러 가만히 가주 와야지.] 그래 가마이(가만히) 가주 오고. 또 그거 호롱불 가주 오만 공부도 잘하고.
종지불을 가져 오면 대번에 아들을 낳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아들을 낳은 집을 보기로 들지는 못했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 몰래 가져 와야지 남에게 들키게 되면 효험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의적 영험은 비의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사례를 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러한 사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제관은 누가 불종지를 가지고 가는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불을 안 꺼트리고 집에 가서 이래 갖다 놓면 기름 다 탈 때까지 놓으면은 그 해 한해 운수가 대통한다니더만은.
[조: 언제까지 그렇게 했나요?] 몇 년 전 내가 지낼 때도 한 사 년 됐나? 한 사람 여 와가지고 안어른이 와가지고 불종지 주(주워) 갔어요. 주가가지고 그걸 모시고는 그 사람이 육십 살에 그 운전면허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 됐어요.
불종지를 가지고 가는 데도 요령이 있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가지고 가는 동안 불을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 정성껏 싸안고 가야 가능한 일이다. 제보자 김재위씨가 4년 전에 제관이 되어 동제를 지냈는데, 그때 어떤 아주머니가 불종지를 가지고 가서 덕을 봤다는 것이다. 60살이 되는 아주머니가 운전면허 시험을 쳐서 두 번이나 떨어졌지만, 불종지를 가지고 가서 세 번째 시험에 붙었다는 것이다. 불종지뿐만 아니라 동제에 썼던 한지도 가지고 가면 좋은 효험이 있다고 하여, 한지도 다투어 가지고 갔다고 한다.
소지 아니고 한지. 여 한 그득(가득) 말아가지고 놔두면은 옛날부터 이걸 갖다가 글을 쓰면은 문필이 난다 그랬어. [조: 소지하고 남은 종이를?] 소지는 따로 있고요. (한지를) [조: 한지를 가지고 와서 어디 둡니까?] 거 여기 걸어 놓는데, 누가 와서 그걸 비껴가서(베껴서) 가주 가서 거기다 대고 글을 쓰면 글씨가 그래 명필이 난데.
동제를 지낼 때 서낭당에 한지를 걸어둔다. 한지는 소지로 쓰는 것 외에 제물을 놓거나 싸거나 덮거나 할 때 쓰기 위해 두루마리로 넉넉하게 준비해 간다. 그리고 쓰고 남은 한지를 서낭당 금줄이나 신목 가지에 걸어둔다. 한지의 주술적 영험을 겨냥해서 의도적으로 걸어두고 가는 것이다. 이 한지를 벗겨 가서 글을 쓰면 글을 잘 써서 문필가도 되고 명필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종지불과 더불어 한지도 다투어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나 동제와 관련해서 좋은 영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정을 타서 가축이 죽는가 하면 사람까지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매도할매네가 동신제사를 (암소가) 새끼 낳는데 채려가(차려서) 지냈잖아요. 그래가주고 우리 소가 죽어부랬어. 그거 부정이라요! [조: 옳게 못 지냈다.] 소 새끼 놨는데 그런 거는 안 해요. 그래 소가 부정을 해가 그래 죽었다꼬.
송아지를 낳은 집에서 도가를 차려서 어미 소가 죽었다는 것이다. 제보자가 우리 소라고 하는 것은 도가를 하는 집에 소를 빌려준 까닭이다. 과거에는 농막을 사는 타성들이 동제를 지냈기 때문에, 풍산 김씨 논도 부치고 소도 빌려서 길렀다. 매도할머니 댁에서 그런 일이 있었지만 이야기를 하는 제보자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자기네가 빌려 준 소가 죽었기 때문이다.
원래 신성한 제의에는 피부정을 크게 가린다. 피부정에는 생리부정과 출산부정이 있다. 신성 공간에는 생리가 있는 여성도 범접하면 안되고 출산한 산모도 가까이 하면 안 된다. 이처럼 출산부정이 큰 까닭에 동제 기간에 몸을 풀 부녀가 있으면 친정으로 보낸다. 친정으로 가지 못하는 섬 지방에서는 마을 바깥에 ‘해산막’이라고 하여 지어 놓은 움막으로 보내서 출산을 하도록 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소가 새끼를 낳아도 부정을 탄다. 그래서 송아지를 낳은 집에서 도가를 했기 때문에 공연히 어미 소가 부정을 타서 죽었다.
그 집에서 도가를 했지. 음식 만드만 안되지. 그러먼. 소 새끼 놨는데. [조: 죽어부랬어요? 새끼도 죽고?] 그 때 새끼어미가 죽었는동 그래요. 도가집에서 그러면 그게 큰 부정이래요. [김: 제관보다 도가집이 더 무섭다.] 으이 더 무섭지.
제관만 부정을 타는 것이 아니라 제수를 장만하는 도가의 경우도 부정을 탄다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제수를 장만하기 때문에 도가에서 부정한 일이 있으면 같은 부정이라도 제관집보다 도가집이 더 무섭다는 것이다. 음식부정이 크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내는데 부정타는 경우도 흔히 제수를 장만할 때 머리카락이 들어가거나 제삿밥에 돌이 들어가는 경우이다. 조상신들은 밥에 들어 있는 돌을 바위로 받아들이고, 음식에 들어 있는 머리카락을 뱀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음식에 이런 것들이 들어 있으면 손자를 떠밀어 버려서 화상을 입게 하거나 다치게 만든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제사부정은 대부분 제물을 장만하는 사람의 정성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동제부정도 도가집이라 하여 다를 까닭이 없다. 제관의 금기도 마찬가지로 엄중하다. “그 사람이 동제를 한번 지내다가 뭐 잘못 됐는동, 그거 지내고 한 달 후에 어린애를 한번 없앴어요. 그래가지고, ‘아이! 나는 다시는 안 지낸다.’” 하고 더 이상 제관을 맡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동제에 문제가 생겨서 마을에 피해가 나면 동제를 다시 지내기도 한다.
옛날에는 동신제사 잘 못 지내가 글타(그렇다) 카고 다시 지내는 수도 있고 이래. 혹시 동네 옳잖은 사람이 있으면은, 그래 인제 다시 지낸다 그래. [정혜춘: 짐승도 뭐 해코지 했잖는가? 소도 없어지고 뭐.] 그래. 그래가주 또 정성을 디래가주고 다시 지내만 고마 괜찮애요.
마을에 젊은 사람이 공연히 아프거나 죽게 되면 동제부정 탓이라 여긴다. 동제를 잘못 지내면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도 피해를 입는다. 동제를 지낸 뒤에 소가 죽거나 없어지면 동제에 부정이 탄 까닭으로 생각한다. 이럴 때는 동제를 정성 들여 다시 지내서 문제를 해결한다. 어떤 마을에서는 동제부정이 나타나지 않아도 혹시 동제과정에 부정이 탓을 것을 염두하고 동제 사흘 뒤에 동제 부정을 씻기 위해 다시 동제를 지내기도 한다.
이 동네도 (동제를) 없앨라고 이 저 새마을 나고 없앴잖아. 없애고나이 안 돼가주고 다시 지내. [조: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동네 재수가 없어. 짐승도 죽고, 사람도 젊은 사람이 죽고, 소도 믹이다가 뭐 이 집에도 어에다(어떻게 하다가) 죽고, 저 집에도 우에다 죽고 하이 동네가 편찮으이께네. 아마 그래 그랜가 싶어서 그래 또 새로 지내.
오미동에서도 새마을운동과 함께 동제를 없애려고 하였다. 그래서 동제를 지내지 않았더니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계속 일어나서 할 수 없이 다시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소를 비롯한 가축도 죽고 젊은 사람도 죽고 하여 마을이 평온하지 못했는데, 이러한 불행한 일들이 거듭 일어나는 것은 동제를 중단한 탓이라 믿고 다시 동제를 지내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른다. 그러므로 송후남 할머니는 “새로 (동제를) 그래이께. 시방 뭐 짐승 겉은 거는 뭐 그쿠(그렇게) 죽는 일이 없고, 마음을 그래 먹으이께네. 조심하이, 뭐 지(제)를 지내이께네. 뭐 (서낭신이) 돌봐 줘 괘않는가 보다” 싶다고 하였다.
동제를 지내면서도 반신반의하는 태도가 있다. 따라서 동제 중단을 시도했으나 마을에 사고가 나자 다시 지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전적으로 믿는 것도 아니다. 자연히 동신의 영험에 대하여 티격태격한다. 당나무를 두고도 영험성을 검증하려 애쓴다. 그런데 베어낸 당나무를 줄포댁이 가져다가 불에 때어도 아무 탈이 없었다고 한다. 영험성을 지켜본 결과이다.
송후남: 근데 저게 서낭나무 엎어진 거 다리(다른 사람) 모도 갖다 때는 이 없고 줄포댁이가 다 갖다 때었다 그대(그러대)?
조정희: 거는 그래 예수를 믿으이 글치 뭐.
김용범: 나도 아부지 믿는데 뭐.
허숙남: 다리이는 때기 싫어 못 때나? 죽으까봐 겁이나 못 때지. 줄포는 예수를 믿으이 귀신을 쫓으이 갖다 땠지. [조: 아.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 믿는 집은 탈이 없거든..
김용범: 나는 암꺼도 안 믿어.
허숙남: 안 믿어도 까짓거 보짜이(베짱이) 크먼 탈 없어. 어제도 내 사당 쳐댔는 이야기 했지만 사당 쳐댔부이 암꺼도 없는데 뭐.
김용범: 내 톱 큰 거 가주고 우에 비도 괜찮드라. 내 열심히 비봤잖니껴 여태까지. 아무 관계없어. 나무하고는 관계없어.
조정희: 없다 그래도, 안 믿는 사람은 그걸 겁나 못 때.
좌중의 제보자가 다 같이 한 마디씩 한다. 송후남은 줄포댁이 당나무를 가져다 때어도 별 탈이 없다고 한다. 조정희는 그 사람은 예수를 믿으니까 그렇지 다른 사람이 때면 탈이 날 수도 있다고 맞선다. 허숙남이 조정희와 같은 생각을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들은 죽을까봐 겁이 나서 당나무를 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집은 귀신을 쫓아주니 탈이 없다고 한다. 김용범은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지만 톱으로 당나무를 벴는데, 아무 일이 없다고 하며 송후남을 지지한다.
허숙남이 다시 나서서 예수를 안 믿어도 베짱이 큰 사람은 괜찮다고 한다. 어제 며느리 사당 태운 이야기를 근거로 댄다. 시집을 가니 2월 초하룻날 사당에 제사를 지내라고 하자, 새며느리가 사당을 태워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신이란 믿으면 있고 안 믿으면 없다는 말이다. 김용범이 다시 동신하고 당나무하고는 관계없다고 하면서 당나무를 베도 지금껏 아무 일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조정희가 다시 맞선다. 아무 탈이 없다고 해도 다른 신앙을 믿지 않는 사람은 겁이 나서 당나무를 가져다 때지 못한다고 한다. 마을의 당나무를 두고 영험이 있다는 사람과 없다는 사람이 맞섰는데, 결말이 나지 않은 셈이다. 그러자 다른 마을의 사례를 들고 나왔다.
저 고평 동네는 저 사랑 앞에 느티낭기 아주 오래된 게 있었거든요? 그래가 거 학방이래가주고(서당이라서) 아-들도 글선생, 그 할배가 글선생으로 앉았으이, 그거를 고만에 고 손자가 고만에 반은 비다(베다) 둬부래가(두어 버려서) 할 수 없이 다빘거든요, 느티낭글! [조: 예.] 그래 고만 뭐 그 손자가 고만에 저게 뭐이껴? 다리 그 (병) 이름이 있는데, 그걸 알아가주고 고만 못 곤쳐. 암데 가가(아무데 가서) 저래도 그 나무 빘는 탈이라.
앞에서 줄포댁이 당나무를 가져다 때고도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하던 송후남의 이야기이다. 고평동네 큰 느티나무를 어떤 아이가 베다가 말았는데, 하는 수 없어서 훈장 노릇을 하는 그 할아버지가 다 베었더니, 나무를 벤 아이가 소아마비에 걸려서 아무데 가서도 고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목을 벤 까닭에 생긴 병이라는 말이다. 앞에서는 사실을 전달만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당나무의 부정을 두고 다투자 다른 사례를 통해 당나무와 같은 큰 나무는 함부로 베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러자 조정희도 맞장구를 치며 다시 나서서 자기 생각을 입증하는 이야기를 했다.
옛날에 갑돌이라고 안 댕기디껴? 갑돌이라고 뭐 빼딱빼딱 빼딱 그메 댕깄지? 동냥 얻으러? [송후남: 몰래. 흐흐흐흐.] 눈이 뺄간(빨간) 게 갑돌이라고 있었어. [송: 갑돌이와 갑순이 헤헤헤.] [김용범: 어떻게 행동을 보이조야(보여줘야) 되지.] 그래 이래잖나 빼딱빼딱 그러잖나. 모간지를 이래. 자꾸 댕기면서, 그기 그걸 낳아 놓고, 하회 돌고개 거 서낭낭기 양짝이 있잖니껴? [송: 음.] 하도 (먹을 것이) 없어 놓으이 거 낭글 끊어 땠단다. 사흘만에 그래가주고 그 병시이가 됐다 그러. [조: 아. 여기 사람은 아니고?] 하회. 하회사람이래.
조정희는 앞에서 당나무를 때고도 탈이 나지 않은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탈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증으로 다른 마을 곧 하회사람의 보기를 들었다. 하회사람 갑돌이가 하도 가난해서 당나무를 잘라다가 때었더니 사흘만에 병신이 되어서 걸인 행세를 하며 떠돌았다는 이야기이다. 제보자는 본 듯이 이야기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자, ‘이 동네는 안 왔던갑다’고 하고 이야기를 마쳤다. 갑돌이를 보지 않은 사람도 송후남과 조정희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더 이상 당나무의 영험을 부정하지 않았다.
당나무의 영험성을 믿는 정도는 곧 동제의 지속성과 연관되어 있다. 영험성을 인정하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이 거의 맞선다. 다른 동네의 사례를 끌어오지 않으면 마을의 서낭신을 중심으로 영험을 인정하기 어렵다. 실제로 오미동에서 동제를 계속 지내는 것도 꿋꿋한믿음 때문이 아니다. 중단하는 것이 불안해서 지낸다. 그러므로 조사자가 동제를 계속 지내는 이유를 물었을 때도, 다른 마을의 사례가 기준이 된다.
그 이유는 뭐 괴정이라든가 딴 동네 이래가주, 그걸 안 지내면 뭐 해롭다. 해롭다 그니깐. 우리도 만약에 어떨까 싶어가주고는 임내(흉내)라도 내자, 그래 하는 거지요. 특별히 그걸로 해가주고 해 봤다 그런 거는 없고, 그거 또 십시일반으로 지내가주 뭐 참 해도 안 되고, 득도 안 되이께네. 무해무득(無害無得)이 안 좋나. 그래, 그래 지내요.
이웃마을 괴정동에서 동제를 안 지냈더니 탈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해서 마을이 해로우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심리 때문에 계속 지낸다. 공연히 동제를 중단하고 해를 보느니 좀 힘들어도 동제를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동제를 지내서 득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해를 보지 않기 위한 것이 이유이다. 상당히 소극적 처지에서 동제를 지내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계속하고 있어). 뭐 5․16 혁명 나고 딴 동네는 그거를 없애기도 했지만은 우리는 없애지는 아네(안해). 계속 제사를 올랬지.
이유는 내려오던 동네를 갖다가 우리가 그만큼 그 저 위했으니까 그거 없앨 수 없지. 딴 동네 같으면은 없던 데도 그 뭐 발굴 해가지고 뭐 저거를 할라고 저거를 하는데, 우리는 있는 거 없애지는 못하고 유지를 해 나가야 되는데. 그래 유지를 해 나가자면 사람이. 동네에 사람이 많아야 되는데 사람이 없어.
5.16 이후에 다른 동네서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동제를 많이 없앴지만, 오미동에서는 계속 지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앞의 이야기와 달리 상당히 적극적이다. 내려오던 전통을 없앴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동네는 없던 것도 발굴해서 이어가는데, 우리는 있던 전통을 이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통에 대한 뚜렷한 명분을 가지고 동제 전승의 의의를 상당히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서낭신에 관한 영험이나 동제의 전승에 대하여 마을사람들의 처지에 따라 상당히 다른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풍속전설에 나타난 기우주술과 기타 풍속의 전승
풍속전설 가운데 동제 관련 전설 다음으로 두드러진 것이 기우제 전설이다. 기우제 방식이 독특하고 최근까지 전승되었기 때문에 기우제 관련 이야기들이 제법 많다. 물론 구비문학으로서 전설의 꼴을 갖춘 것보다 기우제에 관한 구술정보에 치우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다른 마을에서는 듣기 어려운 내용들도 있어서 주목된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동장부인에게 물을 뿌렸다는 기우주술에 관한 것이다. 먼저 기우제에 관한 구술부터 들어보자.
[조: 옛날에 비가 안 오고 가물면 어떻게 합니까?] 그거는 그때 그게 내가 칠십 년대 동무(洞務)를 볼 때에 기우제를, 우리가 저 저 독지미 그는데, 죽암정에 거 올라가지고 그때 제사를 (지냈어). [조: 어떤 식으로 지냈습니까?] 그때 그거는 하도 저게 되니까, 마 비가 안 오니까, 가서 올리는데, 그때는 내가 기억나기를 그 어른이 벌써 돌아 가셨는데, 어른 분들이 축을, 축문을 하셔가지고 그 시키는 대로 했는데, 내가 잘 기억이 안나.
제보자 김재진 어른이 70년대에 동장 일을 할 때, 어른들을 따라 가서 기우제를 지낸 경험담이다. 죽암정이 있는 독지미에 올라가서 축문을 읽고 기우제를 지냈다는 사실 외에 다른 내용은 알지 못했다. 독지미는 마을 뒷산을 일컫는데 지명유래는 전하지 않는다. 기우주술에 관해서 물어보았으나 알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그 어른들이 전부 선비래. 그 어른들이 축을 참 써가지고, 제문을 써가지고 어른들 시키는 대로 우리는 따라 할 일이지.”라고 하는 걸 보면, 기우제문을 읽는 것이 가장 중요시되었던 셈이다. 선비마을의 특징이 잘 드러난 기우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할머니들의 기억은 좀 다르다. 다양한 기우주술을 전승했던 것이다.
조정희: 무제는 안 지낸다. 무제는 안 지내도 한 해 언제 가물 때 동장댁이를 덮어씨이(덮어씌워) 놓고 물 퍼붓는 거 동네사람 그거는 있지. 아이 거도 장도 물려 봤지만, 동장댁이도 그랬어. 시방 동장댁이, 마다아서(마당에서) 저걸 덮어 씨이(씌워)놓고 동네사람이 몇이 가가 물을 퍼부었어. ‘비 온다 비 온다.’ 그고. [조: 지금 동장댁이요?] 시방 동장댁이래. 동장댁이를 그랬어.
허숙남: 그거는 몰래.
조사자: 할머니 그 덮어쓰고 물 뿌리는 거는 뭐에요? 동작댁이. 그거는 어떻게 했어요?
조정희: 그거는 비오라꼬 했지.
송후남: 비오라꼬 그게.
할머니들의 기억 속에는 기우제가 없다. 김재진 어른이 들려준 기우제 전통은 할머니들의 생활세계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셈이다. 따라서 아예 무제는 안 지낸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지금 무제를 지내지 않는다는 뜻도 있지만, 이미 오래 전의 기우주술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면, 할아버지들이 뒷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조정희 할머니가 아주 인상깊게 여기고 있는 것은 동장부인에게 물을 뿌리며 기우주술을 행한 일이다.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제물을 차리고 절을 하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고, 동네 사람들이 동장댁을 찾아가서 물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30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동장부인에게 우장이나 우의와 같은 것을 덮어씌워 놓고 “비 온다! 비 온다!”고 외치며 물을 막 퍼부었다는 것이다. 허숙남 할머니가 잘 알지 못하자, 제보자 조정희 할머니는 “비 오라꼬 그랬잖니껴, 모르니껴? 동장댁이 시방(지금 동장부인) 그 덮어 썼는 거?” 하면서 당시 상황을 거듭 설명했다.
비가 오는 상황을 조성함으로써 실제로 비가 오기를 기대하는 일종의 유감주술을 실행한 셈인데, 동장부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기우의 책임이 나라의 경우 왕에게 있고 고을의 경우 사또에게 있는 것처럼, 마을의 경우 동장에게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동장댁을 찾아가서 기우주술을 하는데, 동장이 아닌 동장부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특히 비 오는 상황을 조성하는 유감주술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영험이 있다고 여기는 셈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대지를 상징하고 비를 내리는 남성은 하늘을 상징한다. 따라서 비를 내리는 주체이자 남성 상징인 하늘은 지모신을 상징하는 여성에게 비를 내리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동장이 아닌 동장부인을 대상으로 비가 내리는 유감주술을 행하는 것이 주술적인 논리에 맞고 영험도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허숙남: 무지(무제)는 지내면은 집에 모도 무지 지내는 형상해서 처막 끝에 미루나무 꺾어서 꼽고, 그랬잖아 이? 두룽두룽 나와가메 미루나무 꺾어가 무지 지내는 형상 했어. [조: 아, 처마 끝에?] 예. 처마 끝에다가 미루낭글 그래 꺾어가 줄줄 나가메 모도 꼽고.
조정희: 그 무제사는 몰래도 나는 동장댁이 덮어 씌이놓고 물 퍼붓는 거 그거는 나는 알아. 그거는 얼마 안되이께네 알고.
조사자: 처마 끝에 미루나무를 꽂고 어떻게 해요? 거 가만 놔둬요?
허숙남: 그래고 비 오드로(오도록) 며칠을 공을 모도 마음으로 디리지. [조: 아. 미루나무만 그냥 꺾어가 걸어놓고.] 비 오만 처마 밑으로 이래 물 흐르라고.
조사자: 미루나무에 물 떨어지는 것처럼 비가 오라고 하는 겁니까?
송후남: 글치(그렇지)! 초가집이께네 예전에는.
조사자: 할머니 미루나무 꺾어서 꼽는 걸 갖다가 언제까지 하셨어요?
허숙남: 비 올 때까지 꼽아 놔두지 뭐. [조: 할머니 연세가 몇 세까지?] 아. 몇 년 전까지 됐느냐고? 그기 시방 한 4, 50년 될끼래.
무제에 대한 경험이 서로 다르다. 허숙남은 조정희와 다른 기우주술을 이야기한다. 허숙남은 기우제를 지내는 동안 집에서는 미루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지붕 끝에 드문드문 꽂아두었다는 것이다. 비가 올 때까지 미루나무 가지를 꽂아두고 비가 오도록 마음으로 정성을 들렸다고 한다. 비가 오면, 추녀 끝의 미루나무 가지를 타고 빗물이 떨어지라고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기우주술에는 물병에다 버드나무 가지를 꽂아서 거꾸로 매달아 비가 내리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지붕 끝에다가 미루나무 가지를 꽂아서 기우주술을 행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지붕 끝에 길게 드리워진 미루나무 가지가 마치 지붕으로부터 빗물이 떨어지는 상황을 나타낸 것이라면, 비오는 상황을 연출한 유감주술이라 할 수 있다. 허숙남의 이야기에 대하여 조정희는 여전히 동장댁에게 물 뿌린 경험만 이야기한다. 기우주술의 역사적 층위가 드러나는 셈이다.
아무래도 허숙남이 80세로 조정희보다 6살이 앞설 뿐 아니라, 지금부터 4,50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조정희는 30년 전에 동장댁에게 물을 뿌린 일을 했다. 따라서 마을에서 산 역사와 남녀 사이의 관심이 다른 까닭에 기우제에 관한 인식의 차이도 존재한다. 할아버지는 뒷산에 올라가 기우제문을 읽고 기우제 지낸 이야기만 하는데, 할머니들은 기우주술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할머니들도 세대 차에 따라 4, 50년 전의 기우주술과 30년 전의 기우주술을 서로 다르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상당히 의미가 깊다. 개인적인 진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우제 자료에 머물지만, 여러 사람에 의한 서로 다른 진술은 기우제의 온전한 면모를 입체적으로 설명하는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제보자의 성별과 계층, 연령에 따라 기우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계급 및 성별 정체성과, 기우제의 변화양상을 통시적으로 포착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뒷산에 올라가서 기우제문을 지어서 읽는 독축고사 형식의 기우제는 마을의 양반남성 집단이 주도했다면, 미루나무 가지를 지붕 끝에 꽂아서 기우정성을 들인 유감주술은 마을 안에서 집집마다 하다가 40년 전까지 전승되었으며, 여성에게 물을 뿌려서 비 오는 상황을 조성하는 유감주술은 30년 전까지 전승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을의 전통을 조사할 때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양하게 조사해야 입체적인 문화인식이 가능하다.
허숙남: 그라고 시장을 보면 저 모래사장에다 장을 내다보이고 그랬지 뭐. [조: 사람들이 장에 가서 직접 장을 차리는 거예요?] 장터 사람이 채리면 우리는 거 가가 장 보지. 거가 (정말 장처럼) 사고 팔고 이래지.
조정희: 모래장은 몇 번 내 보있을 껄? 한 번 뿐도 아니고? 아이고 몇 년만꿈 한 번쓱 내 보이고.
가뭄이 들면 마을에서 기우제를 올리고 기우주술을 하는 것과 함께 읍내 장터에서 시장을 강바닥으로 옮기는 경우가 있다. 오미동은 풍산읍에 속하기 때문에 오미동이 가뭄에 시달리면 이 지역이 모두 가뭄을 겪는다. 따라서 풍산장을 강바닥으로 옮겨서 장을 보게 한다. 물론 오미동 사람들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서 오미동 기우제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뭄을 겪는 것은 지역공동체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풍산 사람들은 장에 오게 되면 모두 함께 참여하는 셈이 된다. 풍산장은 강가의 모래사장으로 옮겨서 보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강바닥이나 다름없다.
시장을 강바닥으로 옮기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강에 사는 용신을 자극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강바닥에 와서 장을 보게 되면 용이 서식할 수 없다. 용이 있는 신성한 곳을 사람들이 모여서 오염시키는 것이다. 용의 서식지에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들어서 장을 보게 되면 용이 온전하게 버티기 어렵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비가 와야 하고 강에 물이 흘러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기상황을 막기 위하여 용신이 비를 내린다고 믿는 것이다.
둘은 가뭄이 아주 극심해야 강바닥으로 장을 옮길 수 있다. 물이 있으면 강바닥에 장터를 옮기려고 해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시장을 옮기는 것은 강바닥이 마을 정도로 가뭄이 극심하다는 위기상황을 나타낸다. 그런데 사람들이 강바닥에 모여서 장을 보게 되면 마치 강에 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멀리서 보면 사람의 무리들이 강을 따라 띠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물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이처럼 강에 물이 흐르려면 비가 많이 와야 한다. 그러므로 유사의 법칙에 의한 기우주술 구실을 하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시집올 때 가마 타고 온 상황을 잊을 수 없다. 멀미도 심했고 또 오줌 누기도 곤란했기 때문이다. 고평마을에서 시집 온 송후남 할머니는 가마를 타고 오다가 가마군이 흔드는 바람에 멀미를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가매 타고 참말로 그 마한 가매를 미고 얼매나 잡아 흔드나 뭐. 그까짓 차는 암꺼(아무것)도 아니래. 죽을 지경이래. 그래가주고 이 쉬는 데가, 주막거리에 가 들다(들여다) 보시더라만은,
“아이고 가매를 얼매나 흔드는지 못 가겠다.”
그카이께네.
[청중: 가매 멀미가 나면 더 못 베긴다 그래.] 그래, 그래가주고 “더 못 가겠니더.” 그카이께네. 이 어른이, 어른이 “여 모도 들와가주고 술 한 잔씩하고 가라”고. 술을 한 잔씩 믹이 놓으이 그만 안 흔드잖애. 아이고, 고러 맹 그래 술 얻어먹을라고. 술 한 잔씩 받아 주이까네. 고만에 아 흔드잖애. 하이고 그렇더라고.
송후남 할머니는 예천읍 고평리에서 시집온 고평댁이다. 시집올 때, 마을에서 예천역까지 가마를 타고 와서 기차를 갈아타고 용궁까지 와서 내린 뒤에, 다시 가마를 타고 오미동 시집까지 왔다. 그 과정에서 겪은 이야기이다. 가마군들이 의도적으로 가마를 세게 흔들어서 신부인 자기를 멀미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다가 주막걸에 쉬는데, 친정아버지가 가마를 열고 들여다 보길래, “가마를 얼매나 흔드는지 멀미가 나서 못 가겠다”고 했더니, 눈치를 채고 가마군들을 불러서 술을 한 잔씩 대접했더니, 다음부터는 가마가 평안했다고 한다. 가마군들이 술을 얻어먹으려고 일부러 가마를 심하게 흔들었던 것이다. 제보자의 경험담이어서 한층 실감이 난다.
이야기를 듣던 권준칠 할머니는 “가마 타고 있다 멀미나면 차멀미보다 더 해요.” 하고 그 고통을 거듭 강조했다. 멀미가 나도 내리지도 못하는 까닭에, “요강에 찹쌀 담아 가주고 달걀 시(세) 개하고” 가마에 준비해서 탔다고 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멀미를 막는 데 어떤 구실을 하는지 확인은 못했지만, 긴요한 구실을 한 것 같다. 그러나 다른 마을의 사례를 고려하면, 찹쌀과 달걀은 신부가 가마에 내릴 때 들고 내리는 일종의 주술물이다. 쌀은 풍요를 상징하고 달걀은 출산을 상징한다. 닭이 알을 낳아 병아리를 까듯이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유감주술의 뜻을 담고 있다.
권준칠 할머니는 가마 타고 가는 풍속에 관해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오줌 누라고 요강에 명씨 여 가주 간다 그데 옛날에?” 하고 좌중에게 확인을 했다. 좌중의 반응이 시원하지 않으니까, 스스로 “소리 안 나라고 요강 안에 명씨 여가주(넣어서) 간다 그래요.”하고 자문자답을 한다. 그러나 허숙남 할머니는 “나는 명씨 옇는단 소리 첨 듣네. 명씨를 왜 옇나?”하고 되물었다. “가매 안에서 오줌을 누면 소리나지 말라고요.”하고 대답을 한다.
가마를 오랫동안 타게 되면 신부의 가마멀미도 문제지만 소변을 해결하는 것도 문제이다. 가마군들이 여럿 있는데 가마에 내려서 어디 가 소변을 볼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아예 아침부터 물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소변이 마려울 때를 대비하여 가마용 작은 요강을 준비해 간다. 가마군들이 가마를 내려놓고 쉴 때에 가마 안에서 몰래 오줌을 누는데, 이때 오줌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요강 안에 무명씨를 넣어간다는 것이다. 가마를 타고 시집 온 할머니들만 아는 풍속인지 허숙남 할머니는 알지 못했다.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풍속이 있다. 가마 풍속도 그런 셈이다. 어릴 때 풍속들도 경험담으로 이야기된다. 경험담은 사실상 설화가 아니라 실화에 해당되지만, 당시 풍속을 아는 데는 중요한 구비전승 자료이다.
우리는 저 배낭기 우물 지내가주고 산 밑에 배낭기 많이 있는데, 거 청년들 하고, 딸네들 하고 모이가주고,
“우리 배 따러 가자.”
그래가주고 뭐도 모르고, 꾀가 있나. 요새도 꾀도 없지만 그래 간다꼬 따라 갔다. 우리 6촌들하고, 여 6촌들하고, 여자 너덧이 되고 남자는 몇 명 많고 그래 갔는데, 꾀운다(꼬여서 말한다.)
“너들이 우리 요래 올려주꺼이 낭기(나무)에 올라가가 따라. 배 따고, 우리한테 내라주고 받아가주고 저거하고, 배 따러 올라가라.”
못 올라가만 떠 받쳐가주고 올려놓네. 그 어에 따는고? 하만 캄캄해가 못 따. 저녁에 배가 안 비잖아. 저녁에 이래 하만 배가 만치지. 만치거든. 그래 인제 산에 갔다 그래 따는데, 따다이께네 뭐가 노루가 쾡자쾡자 카메 내려오네. 거기에. 고마 시골에 그메이(그런 거) 천지지 뭐. 내려오이,
“어메야 내 죽는다.”
마구 그르이 배 임자도 있잖아. 동네 배 임자가. 고마 남자들은 배 다래끼 해들고 다 냈뺐부네. 내하고 가하고 둘이가,
“죽는다 어메야!”
하고 울어가 고마 산이 떠나가거든. 동네서 왜 못 듣노? 배 임자가 다 듣지.
“에 요년들이 뭐하니라고 산에 가가 저쿠 난리가 나노?”
그카고 배 임자가 왔다. 와가주고 그이 남자들은 우리한테 노루가 오고, 산에서 우이께네, 남자들은 멀리도 못 가고 동네 인제 와가주고 망을 보는 거야.
“저것들이 어에노?”
싶어, 남자들은 겁이 나가주고 남자들은 고 지키고 섰어. 그리 임자가 와가주고
“요년들 요 왜 왔노?”
“아이고! 아무것이 하고 배 따러 가자 그래가 왔다이께네.”
“요년들 그 말 듣고 어에든동 노루 여 데루 와야 될다. 너들 델다(데려다) 놓고 내빼야 될다.”
“아이구! 할배요 다시는 안 금씨더(안 그러겠습니다).”
맹 우리하고 동갑짜리인데 장개도 안 갔는데 항렬이, 할배 항렬이이께네,
“아이구 할배요! 다시는 안 그럴꺼이 다시는 안 그럴꺼이.”
“예이 요년들! 다시는 안 그러지?”
“다시는 안 그러이 내라죠! 내라죠!”
그래 마카 내라조가(내려줘서) 갔다. 가이 그 집 동생들도 같이 마카 배 따러 갔어. 배 따러 가가주고 동생도 이만한 다래끼 들고 있고 섰거든. 고 마중을 왔어. 배 다래끼 해들고.
“아이구! 요것들 때문에 배 따야 될다.”
그메(그러며), 주인 둘이 형제하고 오늘밤에 가서 밤새도록 배를 실컨 먹고, 또 그 이튿날도 실컨 먹고 그래 글쎄. 동네 놀래가주고 안죽도 그 얘기래.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승되는 이야기라면 비록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도 구비전승 자료로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마을에서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자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이웃 오빠들의 꾀임에 빠져서 밤에 주인 몰래 배서리를 하기 위해 산에 있는 배 밭에 가서 겪은 이야기이다. 청년들이 여동생들을 배나무에 올려주고 배를 따라고 하기에 더듬거리며 배를 찾아 따는데, 산에서 노루가 내려오자 청년들이 놀라서 자기들끼리 배 다래끼를 메고 도망가 버렸다. 배나무에서 내려올 수 없는 여동생들은 배나무 위에서 죽는다고 우는 바람에, 배나무 주인에게 들켰다는 것이다.
배나무 주인은 총각이었지만, 항렬이 할아버지 항렬이기 때문에 “아이구! 할배요 다시는 안 금씨더.” 하고 싹싹 빌어서 다짐을 받고 풀려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배를 따러 가자고 함께 참여한 오빠들도 도망을 가다가 여동생들이 노루에 다치거나 할까 싶어서 멀리 도망 가지 않고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배밭 주인의 동생도 함께 끼어 있었다. 배 다래끼를 들고 서 있는 동생을 본 주인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두 배 따러 가자고 하여 배를 따서 이틀 동안 배를 실컷 먹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지금도 전승되고 있는 실화이다. 당시의 서리 풍속을 실감나게 이야기한 셈이다.
소녀시절 풍속으로 주목되는 것은 새댁들 젖가슴 훔쳐보며 장난 쳤던 이야기이다. 그때 저고리가 짧았다는 사실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성들의 옷치레를 짐작할 수 있다. 소녀들의 호기심도 잘 드러난다.
처녀 때 그 때 옛날에는 저구리(저고리)가 짤막했잖아. 짤막하고 치매 입고 그랬는데, 새댁네들 물동이 요래 (머리에) 이만(이면) 젖이 보이거든. 따라 댕겼어. 젖 볼라고. [조: 동네 남자들이요?] 우리가. 클 직에 아가씨가 한 여 남은 살 먹고 하만, 며늘네들 물동이 이만 저구리가 짧으고, 요새 긑이(같이) 내복이 없거든. 옛날에는, 그이 젖이 보있어(보였어).
그르이 새댁네들 물 내리로 댕기는데 따라 댕겼다이께네, 여 남은 살 먹은 게 (새댁) 젖 볼라고 하하하. 젖 볼라고 따라 댕기이 며늘네들 미와가주고(미워서) 야단도 못 치고 시누들이래 놓으이.
소녀 시절에 시집 온 올케언니들 젖을 보기 위해서, 우물에서 물을 길러 물동이를 이고 오는 새댁들을 따라다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자면 저고리 자락이 아주 짧아야 가능한 일이다. 두 손을 위로 올려 물동이를 잡게 되면 짧은 옷자락이 위로 따라 들려 올라가기 때문에 자연히 젖가슴이 드러나게 된다. 요즘처럼 젖가리개를 착용하지 않은 상황에서 물동이를 이게 되면 젖가슴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여남은 살 먹은 소녀 시절에는 성숙한 새댁의 젖가슴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 젖이, 색시 젖이 왜 그렇게 보고 접든동. 동네 우리 매이(또래)는 다 그랬지 뭐 따라 댕기고.” 하며 그 때 간절했던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소녀시절의 성적 호기심 못지 않게 새댁들조차 젖가슴을 드러내야 할 정도로 그때 옷차림 모습을 짐작할 수 있어 흥미롭다. 옷자락이 짧아서 그럴 수 있다고 하는 데 대해 정순자 할머니 생각은 달랐다. 따라서 “그래도 형님, 옛날에 그렇게 안 짧았어요. 저구리 그렇게 안 짧았어요”라고 하자, “아이고! 우리 클 직에는 그게 몇 번 둔갑이 되고, 짧았다가 길었다가.” 하였다. 저고리 옷자락 길이가 상당히 역동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정희: 우리끼리 모이(모여) 있어도 지서로(곱게) 안 있어요. 그 늠 잠 안 자고, 잠이 저쿠 오네.
아구 그 늠으 친구 젖 볼라고 나대고 뭐. 내중에는 보면 뭐 잠 시게 와가주고 자면 가슴
을 다 휠쎠(헤쳐) 놨네. (잠에서 깨면) 분해가주고,
“이 늠으 기지바(계집애)들! 내 젖을 봤노?”
약이 올라서 막 구불러(굴러).
김후경: 그러다가 막 젖 휠쎠 놓고 보고, 이름 쓰고 뭐, 붓으로 이름 써놓고 그러면.
정순자: 그래 보면 거 이름 다 써놨거든. 분해가주고.
김후경: 아이구 분해가주고.
조사자: 이름을 왜 썼어요?
김후경: 아무것이 김후경 긑으만 김후경 젖 굵다 하하하하. 그래도 한잠이 들어서 몰랬어. 장난치
니라고. 요새사 뭐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옛날에는 왜 그쿠 그랬을까?
처녀 시절에 친구들끼리 밤에 모이면 잠을 안 자고 오래 참고 기다렸다가 다른 친구가 잠이 들면 몰래 앞가슴을 헤쳐서 젖가슴을 다 드러내 놓는 놀이를 했던 모양이다. 뒤늦게 잠이 깬 친구는 친구들이 몰래 자기 젖을 보았다는 사실에 약이 올라서 분을 참지 못하고 방바닥에 몸을 구르며 난리법석을 떨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젖가슴만 그냥 드러내 놓는데 머물지 않고 붓으로 ‘아무재 젖 크다’고 글씨까지 써 두는 장난을 쳤다고 한다. 잠이 아쉬운 계절에 죽은 듯이 잠에 빠진 친구들을 대상으로 상당히 심한 장난을 친 셈이다. 요즈음은 그러한 장난이 없어졌다는 아쉬운 마음도 깃들어 있다.
특히 할머니들이 어린 시절이나 처녀 적에 놀았던 풍속, 또는 장난치던 일은 마을에 젊은 또래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풍속들이다. 이제 여느 마을들이 다 그런 것처럼 오미동에는 어린이도 없고 소녀도 없으며, 처녀도 없다. 따라서 젊은이들이 즐겼던 놀이들이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즐겨하던 풍속들이 지속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름이면 약수탕에 물 마시러 가던 풍속은 진작 사라졌다.
거무산(검무산)에 물탕 산꼭대기 물이 있을 때는 거기 인제 땀 빼. 여름에 더워가 땀때(땀띠)가 많이 나잖에요. 그리 그거 등물하면 땀때 가시고. 그래가지고 예천에서 안동서 사방서 약수물 먹으로 왔지. 지금은 관리를 안 하이께네 물탕 고 뭐시기는 있지만은 그게 없어요.
검무산에는 땀띠에 특효가 있는 약물탕이 있는데, 여름에 땀띠 난 사람들이 등물을 하면 땀띠가 나았다고 한다. 소문이 나서 예천과 안동 등지의 사람들까지 약물탕에 많이 찾아왔으나, 지금은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땀띠를 쉽게 치료하는 약이 널리 보급된 까닭이다. 또 찾는 사람이 없으니 약물탕을 관리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정살미 물탕은 사정이 다르다. 길을 포장하고 물탕을 정비해 두었더니 사람들이 새로 많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업소 주인이 시설을 잘 해 둔 까닭이다. 약수터도 업소에서 관리를 하고 영험하다는 소문을 내면 새로 각광을 받을 수 있다.
마을공동체가 전승하고 있는 전설은, 이처럼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일정하게 갈무리하고 있는 한편, 새로운 문제의식도 일깨워 준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주고 사라진 문화들을 되살려 주는가 하면, 앞으로 전통문화를 어떻게 가꾸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도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을사를 이어주고 마을문화의 전통을 설명하는 데 구비전승되는 이야기만큼 기능적인 자료가 없다. 그러므로 오미동의 여러 전설 외에 민담 자료들까지 모두 빠짐없이 분석하는 작업이 기대된다. 다음 과제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