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 칼럼 <생성지능시대와 창작의 진로>
김 유 조
21세기가 시작 된지도 금년으로 벌써 사반세기, 25년이 지나간다. 지난 세기에 학습기간의 대부분을 지낸 세대에게는 세기말이라고 하면 19세기말의 방황과 혼돈과 종말의식의 흐름이 인각되어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20세기의 말기에도 그와 같은 세기말적 요소와 분위기는 팽배했던 것 같다. 당시 인류의 종말, 지구의 멸망은 우선 환경과 생태의 위기라는 지속적 위기의식과 함께 마침내 Y2K라는 구체적이고도 위협적인 어휘로 집약되었던 것 같다.
Y2K 소동이 무엇인가. 컴퓨터 시계 표시 방법이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갈 때 앞의 두 자리가 19로 고정되어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가 일어난다는 경고였다. 그 결과 ‘고속 열차나 비행기 이착륙 시각 표시가 잘못되어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부터 심지어 ‘원자력발전소 타이머가 오작동해 폭발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전 세계가 긴장했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수많은 컴퓨터를 신형으로 대체하고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지나갔지만 인류사 초유의 컴퓨터 시대에 직면하여서 마치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종말 의식과 위식의식은 신 묵시록적 분위기를 세기말의 선물인양 전 인류에게 주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컴퓨터 기술은 성큼 더 발전하고 인류사 초유의 AI 곧 인공지능을 새천년 사반세기 만에 인류의 품에 덥석 안겨 주고야 말았는가 싶다.
수학자 튜링이 1943년 튜링머신에 기반을 한 콜로서스라는 디지털 컴퓨터를 완성한 이래 진공관 아날로그 시대를 거쳐서 오늘날의 제4세대 컴퓨터로 발전한 80년사는 가히 경이적인 궤적의 기간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산업이나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존전략은 혼돈과 불확실성에 따른 긴장의 연속이거나 차라리 애써 시대를 외면하는 무관심도 존재하는 판이었다. 예컨대 대학 강단에서도 컴퓨터 시대의 초기에는 정년을 비교적 가까이 두고 있는 학자들 중에는 컴퓨터 조작을 기피하는 현상도 적지 않았다. 설마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이 귀찮고 골치 아픈 괴물과 동거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하는 희망고문적인 기피현상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인류사의 이 비약적 변혁의 시대에 그런 달콤한 기대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연구 실적이 전산화되어 입력되지 않으면 평가도 되지 않는 엄혹한 현실이 닥쳐오고야 말았었다.
컴퓨터는 저장과 기록, 분석과 검색의 기능 정도는 이미 구식으로 삼으면서 인간의 지능을 완판 복제하더니 여기 더하여 새롭게 생성을 해내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경이적이면서도 무서운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것이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연 것은 기억과 연산, 분석과 복제의 장치를 만들어 낸 수학자들로서 이와 관련한 수많은 직업군을 위태롭게 하고 있는데 이제는 수학자 자신들의 위치도 위태롭게 된 시대가 도래 하였다. 예컨대 국제수학올림피아드의 창조적이고도 변형추구의 난제를 푸는 경기에서도 인공지능은 아직 금상 수준은 아니지만 벌써 은상 수준에는 도달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공지능이 복제의 수준을 넘어서 생성의 단계에 왔기 때문이다.
이 격랑의 시대에 인문학 내지는 창작에 몰두, 종사하는 문인들의 위상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벌써부터 통번역 쪽에서는 위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신형 폴더블 휴대폰은 이제 상대방과 실시간 통번역이 가능하다고 대대적인 상품선전이 나오고 있다. 통번역대학원의 교수진으로부터는 과제물 피드백이 어려워져서 교과과정을 바꾸어야겠다는 실제적 고충이 터져 나오고 있다. ‘통번역과 테크놀로지’라는 교과과정도 신설되었다고 한다.
창작을 하는 입장에서도 벌써부터 위기감은 도래하였다. 말하자면 고도의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작기능을 학습하여서 적당한 키워드만 제시해 주면 순식간에 새로운 문학작품을 제작해 내게 되는 시대가 오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위기감은 아직도 순진한 수준일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은 이제 인간의 창조적 수준을 완전히 복제한 다음 새로운 창조력을 가진 존재 혹은 괴물을 바야흐로 이 지상에 내어 놓기 시작한 듯하다. 인간의 사고 능력, 창조 능력을 뛰어넘고 인간의 통제력을 거부하는 신기원을 열어 간다는 예측이다. 아니 이미 이론적으로는 인간의 통제 선을 넘어서고도 있다. 아직 과학공상소설의 수준에 머문다는 반론도 있지만 엄청난 상상력이 실재화 되고 진정 인류사의 위기가 닥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에서 문단세계는 어떤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가지 가공할 상상력이 가능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창작의 영역을 문인들은 빼앗길 것이다. 지금도 키워드 수십 개를 생성지능도구에 입력하고서 자서전을 꾸미는 사람들이 실재로 많다고 한다. 이른바 자서전 대필 문인들이 일거리를 잃거나 수임 대필료가 바닥을 쳤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하물며 인공지능이 자기 멋대로 만들어낸 수퍼 창작 도구의 시대가 도래 한다면 문인들의 위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도 쳇GPT에 키워드만 주면 어설픈 수준의 시가 생성되어 나오고 있지 않은가. 일종의 창작공학 시대가 전개될 셈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통번역자가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상황이 남의 일이 아닌 바에야 문단의 재앙적 사태도 과한 근심은 아닐지 모른다. 작가와 인공지능의 협업이라는 안일한 상상을 해 볼 수도 있겠지만 문자 그대로 안일한 상상일 뿐이다. 수퍼 인공지능은 협업의 제의도 뿌리칠 것이다.
수퍼 인공지능의 창작세계는 독자의 가독성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기에 플롯의 구성도 종횡무진일 것이고 파격적이고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작가가 사람인 시절에는 적어도 막장 드라마도 마지막에는 도덕적 수습이라는 최후의 보루는 지켜졌다고 한다면 수퍼 인공지능의 향배는 어떻게 될 것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영원한 인본적 명제, 성선설과 성악설의 대립이항에서 수퍼 인공지능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인간이 풀지 못한 이 문제에서 생성지능은 과연 어느 쪽에서 자신의 필봉을 휘두를 것인지. 우리가 생각도 못한 어떤 초월적 생성의 해답을 주지나 않을 것인지, 묵시록적 위기 상황에서 너무 한유로운 사변유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