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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8장은 우상의 제물 문제입니다. 고전7:25절의 처녀라고 하는
‘파르테논’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희랍의 파르테논 신전의 이름입니다.
이 신전에서 신녀, 그들이 말하는 성녀들이 포로노 행위를 했습니다. 이것은
일반화 되어 있던 일이며 창기와 합하는 것이 바로 그 당시 종교의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풍요의 신을 섬기던 이방족속들에게도 이런 의식이 있었고
일부 이스라엘 남자들이 여기에 미혹이 되었음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만약 그 당시의 사람들이 신전에 가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으면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일본 제국시대에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것과 같았을 겁니다.
행15:20절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는 먹지 말라 합니다.
이런 것은 유대인에게 결코 없는데 헬라 문화권 안에 사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이런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과 헬라 문화 속의 갈등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이 화근을 없애자는 것이 고전8장의 의도입니다. 자유를 남용하는
것은 지식이 주는 해악입니다. 그렇다고 외식하는 것은 더 나쁩니다.
1절은 지식과 사랑의 차이에 대한 말씀인데 3절과 4절을 참조해 보세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지식은 교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지식은
자신을 의식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 다른 사람을 의식하게 됩니다.
사랑이 점점 커지고 넓어져서 결국 하나님 사랑, 인간사랑, 자연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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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도 잘못하면 우상에 대한 지식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우상은 인정하고 식물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하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아예 우상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우상의 제물이라고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2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마땅히 알 것은 바로 3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3절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리라”
이 사랑이 없이 지식을 들이대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알았다고 생각하면 그건 지식이 되는 겁니다.
6절을 알면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습니다. 요3:8절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그러하니라’하십니다.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의 개념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만물도 나왔고 우리도 나왔습니다.
요한복음의 내용인 진리의 성령이 이루어지지 않고 지식의 내용만
알면 초대교회 그노시스주의처럼 되고 맙니다. 그야말로 영지주의입니다.
요즘 인터넷에 성경을 안다고 말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많이 보이기도 합니다.
5절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 우상은 인간이 만든 제품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을 신격화 시킨 것입니다. 특히 불상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물 중의 한 조각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마귀가 집어 넣은 신적인 의미는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에 대한 대답이 바로 6절입니다.
조심할 일은 우상을 신격화 시키면 악령에 감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귀신이 붙는다고 말을 해야 할까요. 천주교의 성당에 성당을 지키는
수호천사 같은 것도 다 우상입니다. 사찰 정문에 들어가면 으스스 하잖아요?
영은 성령이든 악령이든 다 우리 몸에 붙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잘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의 병기가 되어야죠.
박테리아나 세균은 스스로 존재하지만 바이러스는 반드시 생명체에
붙어 기생합니다. 영은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세요.
환자를 보면 육적 정신적 영적인 병이 있습니다. 유엔도 그렇게 인정합니다.
병원에 가 보면 아무 이상이 없는 병자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병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눈이 이상해집니다. 정상적인 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영을 가지고 지혜와
총명으로 눈을 보호해야 합니다. 눈싸움에서 밀리면 안 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하고 언제나 그리스도의 지식이 넘쳐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영적으로 공력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신이 나가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양식으로 채워줘야 합니다. 멍하니 있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귀신이 점령하고 있던 만큼의 치료기간이 필요합니다. 사실 혼과
육신을 사용하고 있는 지극히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다 귀신에 접해 있습니다.
다만 악령이냐 도덕의 신이냐 차이 일 뿐입니다. 사실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우상의 대상도 없애버려야 합니다. 우상을 바라보고
사람이 만든 말이지만 그렇게 되는 줄로 믿으면 귀신이 역사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하나님과 신들의 차이는 하나님은 인격적이며 사랑의 관계성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이라고 하면 사랑하는 남편같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신들은 항상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갖다 바쳐야죠.
6절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우상도 만물 속에 있을 뿐입니다.
다만 인간들이 그걸 신성화 했을 뿐입니다(고전10:19절 이하)
다 헛것들이며 인간이 부어 만든 것 바람이요 허탄한 것(사41:21,24,29)입니다.
마귀에게 제사,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들어온 새 신(신32:17)등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갈4:9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느니라’ 출33:12,17 하나님이 모세를 알고 계셨습니다.
렘1:5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복중에 짓기 전에 이미 아셨습니다.
민16:5 하나님은 자기에게 속한 자와 거룩한 자를 아십니다.
요10:14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양을 아십니다.
한 하나님과 한 주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우상은 그 분의 피조물인 만물이며 우리도 만물 가운데 그 분의 소속입니다.
하나님은 근원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근원과 연결되어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만물 가운데 있는 것들로 우상을 만드는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하나님 그 다음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나 이렇게 연결이 되어야
창1장이 회복이 되는데 그만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 다음 인간 사이에
만물이 끼어 버립니다. 만약 돈이 이 사이에 끼이면 그 돈이 결국 맘몬이 되는 겁니다.
7절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사람들이 6절의 지식이 없습니다. 만물로 인해 살고 있으므로 만물을 섬깁니다.
그래서 만물이 인간의 신적인 대상이 되고 맙니다. 재물과 식물 등등...
습관은 규례입니다. 스테판 역 ‘양심’은 거듭나지 않은 양심 곧 약한 양심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 믿으면 큰일 생기는 것 아냐 하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덕과 윤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약한 양심 때문에 규례를 만들게 됩니다. 예컨대 반드시 새벽기도를
해야 한다는 등의 기준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장성한 자에게는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능동적인 새벽기도가 되는 겁니다.
이 지식은 곧 6절의 내용인데 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만물이 났고, 우리는
그를 위하고(향하고) 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공급을 받고 우리도
그 분으로 말미암아 공급을 받는 이 구원의 지식을 알면 만물을 신으로 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상이나 우상의 제물은 아무것도 아니란 겁니다.
그렇지만 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우상의 양심과 습관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 일을 하다가 안 하면 거리낌이 옵니다. 예를 들면 조상제사 같은 것입니다.
잘못하면 하나님도 사람들에게 우상처럼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양심과 습관에 따라 숭배적으로 섬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8절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부족함이나 풍성함의 차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식물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9절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나 그 자유(권세)를 약한 자들을 위해 주의해서 사용하라입니다.
약한 자는 죄의식이 있고 거리낌이 있는 자들입니다.
9장에서는 바울이 자신이 권세를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부자가 돈돈 하는 것만큼 보기 싫은 것이 없듯이 신자가
‘믿음, 거룩, 기도’등의 신앙적인 용어를 먼저 사용하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먼저 인격의 감화를 주고 난 다음에 신분은 나중에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만 이 눈치 저 눈치 보는 소신이 없는 약한 그리스도인이 남에게
무슨 영향력을 줄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육신의 껍데기 때문에
낑낑 대느냐 그 안에 있는 알맹이 때문에 애통하느냐? 늘 생각해 봐야 합니다.
9절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권세를 잘못 쓰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됩니다.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고 강대상을 제단이라고 말하는 것이 거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권세를 자유 하는 자의 입장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기쁜 자는 기쁘지 않는 자와 같이, 유대인이면서 이방인인 것 같이,
할례가 있으면서 할례 없는 자 같이 사용하는 바울을 배워야 합니다.
10절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우상의 제물은 파르테논의 신전의 음식입니다. 바울은 이 음식을
약한 자들 앞에서는 먹지 말라 합니다. 그게 습관이 될 우려가 있다고 경고합니다.
11절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니”
먹어도 괜찮다는 지식이 약한 자들을 멸망시킵니다.
약한 자들의 현재의 양심은 구원을 받지 못한 멸망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약한 자는 일차적으로 율법으로 교육시키는 게 효과적이기
때문에 현대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테면 건드리면 큰일 나! 그러면 지옥 가! 이렇게 가르쳐 온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분과 연결이 끊어지고 공급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아담에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 시작이 안 되고 진행도
안 되고 있는 겁니다. 그 마지막은 불사름입니다. 흡사 전기가 끊긴 것과 같습니다.
12절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형제에게 짓는 죄가 그리스도에게 죄가 됩니다. 자유는 사랑과
섬김의 자유입니다.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은 자유입니다.
엄마들이 자식들만 먹으면 자신을 굶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섬기는 마음으로 연약한 성도들을 생각해야 하는데 지난 날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13절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고기 곧 육식입니다. 식물로 인해 양심이 약한 형제들을 위해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만약 식물로 형제를 실족시키는 일이 있으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합니다.
자유는 사랑을 가진 자들이 사용해야지 지식만 가진 자들이 사용하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인격적인 절제가 있어야 하는데 지식만 있었을 뿐 사랑이 결여되었습니다.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바울의 말이 제 가슴을 세차게 때립니다.
나는 먹을 수 있다고 먹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안 먹는 것이 참 자유인 것을... 지금의 주일 성수, 십일조 문제 등에 있어서
혹자들이 주일 성수나 십일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 주일 낮 아무 짓이라도
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지식을 악용해 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지금 연약한 사람들이 영향을 받아 교회가 곤란을 겪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있으나 사랑이 없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 그리스도와 한 떡, 한 몸, 한영이 된 사실을 계속 상기시킵니다.
왜 하나님은 이 섞임의 교제 속에서 우리들에게 사랑의 영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비밀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그 사랑 때문에,
그 가치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그 분의 열심 때문에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통제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 주님! 그렇지 못한 지난날의 저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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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