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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6~10(309) 낙심하지 말지니 2024. 7. 14.
‘지미 V’란 별명으로, 미국 대학 농구코치와 방송해설자로 유명했던 짐 발바노(Jim Valvano. 1946–1993)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던 스포츠 스타였고, 은퇴 이후에는 방송해설자로 스포츠전문 방송 ESPN과 ABC TV 방송에서 맹활약을 합니다.
방송해설자로 최고의 인기절정기에 있던 시기에 1992년 치료가 불가능한 뼈에 생기는 암(bone cancer, 뼈암)을 앓게 됩니다. 1993년 3월 4일, 지미 발바노는 ‘아서 애쉬 용기와 박애상’(Arthur Ashe Courage & Humanitarian Award)을 수상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섭니다. 종양이 온 몸에 퍼져 걷기조차 힘든 그는 어디서 힘이 났는지, 11분 동안 명연설을 합니다.
“저는 우리가 매일 해야 할 일이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웃는 것, 매일 꼭 웃어야 합니다. 2)생각하는 것, 가만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3)눈물이 날만큼 감성을 갖는 것입니다. 행복이나 기쁨의 눈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날마다 웃고, 생각하고, 울 수 있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당신 인생의 귀중한 시간을 즐기십시오. 매일 웃고, 생각하고, 감성적으로 되게 하십시오.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사십시오. 나는 1983년 챔피언이 된 선수들에게 교훈을 배웠습니다. 선수들은 포기와 낙심을 몰랐습니다. 우리 팀의 모토는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였습니다. 이것이 내가 배운 교훈이며,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저는 저에게 남겨진 나날을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혹시 저를 만난다면 보고 웃으며 꼭 껴안아주세요. 그것도 제게는 중요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투병중입니다. 점점 걷기도 힘들며, 또한 오래 서있기도 역시 힘이 듭니다. 암은 저의 육체적 능력을 빼앗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 정신과 마음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제 영혼(믿음)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 3가지는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그리고 두 달이 채 못돼서 47세의 한창 나이에 사망합니다. 발바노 감독의 인생에 대해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았고, 암 투병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매일 시간을 내어 생각하고, 웃고, 울자.’
짐 발바노는 악성암이 자신의 생명은 빼앗아 갈 수 있지만, 자신이 가진 기쁨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빼앗아 가지 못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죽음을 안겨다 주는 악성 암이 무섭지만, 악성 남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자신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고백하였습니다. 신앙인은 믿음안에서 이런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현제 캐나다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마크 부캐넌 (Mark Buchanan) 목사님은‘보이지 않는 것에 눈뜨다 (THINGS UNSEEN)’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일을 하면서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가장 빨리 중단하고 넘어지는 것이 바로 낙심하면서 하나님의 일 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넘어뜨리려 할 때 쓰는 강력한 무기가 낙심’이기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권면을 던집니다. 바울이 말하는 요지는 ‘성령 안에서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가끔씩 쉽게 판단하여서 종종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령의 일을 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일이 일사천리로 풀려 나갈 것’이라는 착각 아닌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고 말리는 세상 일이 아닙니다. 나의 정욕을 위한 것이나 나의 욕심을 채우려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일을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당연하게 복을 주셔서 만사형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만사형통이 되던가요? 하나님이 원하는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막히는 것이 하나 없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잘 풀려 나가던가요? 대부분의 경우에는 더 잘 안됩니다. 더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나서 내가 하는 하나님의 일을 가로 막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성도는 낙심하지 말고 꾸준하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요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즉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할 때에는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선을 행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다 보면 낙심할 조건과 환경이 많습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모두 다 지지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하다가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상반절에서 바울은 아주 명확하고도 단도직입적으로 확실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행할 때에 낙심해서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라고 한글 성경은 번역하고 있지만, 영어 성경 NIV에서는 ‘Let us not become weary in doing good(우리가 좋은 일을 하면서 지치지 말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NIV성경의 번역은 헬라어 성경 번역을 거의 직역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낙심하다(헬, 엥카코멘)’인데 “지치다, 싫증나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너희가 착한 일, 좋은 일,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할 때에 지쳐서 그만두거나 싫증이 나서 그만 두지 말라’는 뜻으로 권면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애시당초 ‘성도들이 선을 행하다가 쉽게 지치거나 포기하면서 뒤로 나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7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어려운 내용이 없는 7절의 말씀이지만,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문장입니다.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원어(헬, 우뮉테리제타이)’인데, 그 뜻은 ‘조롱받게 버려두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이 얄팍한 속임수와 간교한 잔꾀로 하나님을 속이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속임에 넘어 가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로 하나님은 인간의 속임수와 조롱거리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7절을 쉬운 구어체로 표현하면“자기를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신의 육체의 열망을 위하는 일하는 자, 자신의 욕심에 따라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둘러 대는 자, 이렇게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는 자들의 행위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잔머리 굴리고 잔꾀를 부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조롱을 받거나 업신여김을 받을 정도로 어리숙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심는 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인정해주지 않느냐?’라고 불평하며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왜 이런 고통 속에 나를 방치하느냐”라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나의 사정과 형편을 모두 아시는 분입니다. 나의 머리카락 하나도 세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일을 하다가, 또는 교회 일을 하다가, 또는 선한 일을 행하다가 발생하는 어려움 때문에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포기하면서 뒤로 물러가서 주저앉지 마시기 바랍니다. 포기하고 뒤로 도망가는 모습은 사탄이 원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이 결코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자 존 하갈 (John Hagal)목사가 하나님의 종으로 일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다음 날, 아들이 뇌성마비로 갑자기 쓰러집니다. 괴로운 심정으로 기도하는데, 마귀가 이런 생각을 하게 합니다. “너가 하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데, 너의 아들을 뇌성마비에 걸리게 하다니 하나님이 너무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분명하다. 설령 계신다고 해도 너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당신의 자녀도 돌보지 않는 무정한 하나님께 일생을 바치겠느냐?”
그러나 하갈 목사님은 아들의 뇌성마비를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지 않고 감사하면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들의 병으로 인하여 오히려 감사합니다. 아들로 인해 나를 겸손하게 만드셨고 남의 어려움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갈 목사님운 자신에게 부으시는 은혜를 믿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아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후 하갈 목사님은 역경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처지를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걱정과 염려를 멈추게 하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심고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이 있으니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본문에 보면 ‘심는다’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심다’라는 단어는 국어 사전에 보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심다, 1)(동사적 표현)초목의 뿌리나 씨앗 따위를 흙 속에 묻다. 정원에 나무를 심다. 2)(비유적으로)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하다.’
식목일이 되면 사람들은 나무를 심습니다. 그리고 봄철 모내기 때가 되면 농부들은 벼를 논에다 심습니다. 그렇게 심은 나무가 커서 과실이 맺히게 되고, 봄에 심은 벼는 가을이 되면 알차게 영글은 쌀을 수확하게 됩니다. 모두가 심는다는 좋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나쁜 의미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쁘고 악한 것이 나에게 심어지는 경우입니다. 어쩌다가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가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법을 어긴 악한 사람을 교도소에 수감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교도소 안에서 자신이 행한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면 새 사람이 되어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교도소 가서 정신 차리고 나오는 경우 보다, 교도소 안에서 더 나쁜 범죄자들을 만나서 더 못되고 더 악랄한 것만 배우고 나옵니다. 사기 치다가 걸린 사람은 교도소 안에서 사기전문가에게 법에 걸리지 않는 사기 수법을 더 많이 배우고 나옵니다. 이런 것이 교도소 안에서 더 악한 범죄 수법이 나에게 심겨진 결과입니다. 그러니 출소하여서 또 죄를 짓고 다시 감옥에 들어가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8절 본문에서도 이 양극단의 모습이 명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8절 다시 보십시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인생의 향락을 위한 육체를 심는 사람은 썩어질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게 됩니다.
술과 마약에 빠진 사람은 술과 마약 때문에 결국 인생을 송두리 체 다 허비하게 됩니다. 도박에 빠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박 때문에 모든 가산을 다 탕진해 버립니다. 그렇게 썩어질 것을 심었기 때문에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을 심으라고 말하고 있나요?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행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심는 모습입니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심어주시기 바랍니다. 입술에는 세상의 더러운 말이 아니라 용서하고 보듬어 주는 말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비수 같은 말을 한다고 해도, 나는 사랑의 말로서 상대방의 가슴에 심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행동의 모습을 심는 자가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행을 실천하면 나도 살고 상대방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살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심는 행위를 계속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타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내가 거두는 열매가 달라진다는 점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체를 따라 심을 것입니까? 성령이 원하는 대로 심을 것입니까? 그 결정에 따라 열매가 달라집니다.
어쩌다가 마트에 가면 입에 욕을 달고 사는 사람을 가끔 만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체, 입에 쌍욕이 주렁주렁 달려서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함부로 반말을 던지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고약한 심성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자신이 행한 댓가를 처절하게 치루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세상 법을 떠나서 거룩하고 올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내 자신을 낮추면서 겸손하게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 하나 하나가 내가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성령의 씨앗을 심는 농부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나의 선한 행동 하나가 결국은 세상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그러기에 절대 잊지 마십시오. 더러운 것, 악한 것, 썩어질 것을 절대 심지 마십시오.
이런 더러운 씨앗을 아예 뿌릴 시도조차 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심으면 믿음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소망을 심으면 소망의 열매를 거둡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를 거둡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미국계 유대인이며 종군작가 엘리위젤 (Elie Wiesel 1928-2016)이 1928년 ‘밤(Night)’이라는 책을 집칠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이 나치정권하에서 600만 명이나 학살을 당합니다. 학살을 주도한 중심 인물로 아돌프 아이히만 (Adolf Eichmann) 나치 장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히만은 장대 위에 어린 유대 소년의 목을 매달고 사람들로 보게 합니다. 당시 광경을 목격한 엘리위젤 기자가 아이히만에게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히만은 하나님을 비웃으며 “하나님은 지금 저 소년과 함께 죽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독일이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전쟁은 끝납니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자신의 범죄가 두려워 아르헨티나의 시골로 가서 이름까지 고치고 숨어 지내다가 체포되어 전범을 다루는 재판에 회부됩니다. 그때 엘리위젤 기자는 다시 아이히만에게“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때 아이히만은 “하나님은 지금 아이히만을 심판하고 계신다”라고 대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진리야말로 미래를 결정합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지식을 머리에 심습니다. 직장인은 열심히 근무하면서 알차게 커가는 가정을 키웁니다. 모든 것이 올바른 것을 심는 결과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무더위와 장마의 7월이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선행으로 충만한 나날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웃음을 심고 사랑을 심음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모습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