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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전도서 12장 9-14절
1. 올바른 기도
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말은 많이 해도, 기도를 바르게 하라는 말은 적은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기도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불교와 회교 등 모든 종교도 나름대로 기도가 있습니다. 무당도 기도하고, 서낭당에 가서도 기도하고, 고목나무에게도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한다고 해서 다 기도가 아니지요. 무엇보다도 “기도의 대상이 누구냐?”와 “무엇을 기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영적인 상황을 진단할 수 있지요. 기도는 곧 우리의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돈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고, 자기 자식만이 잘되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자식이 우상인 사람일 수 있지요. 그런데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가족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문을 가르쳐주시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지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삶의 목적으로 살도록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주기도문을 주문과 같이 암송하기도 하고, 예전의 순서로만 생각해서 습관적으로 아무런 생각이나 바람 없이 암송하고는 합니다. 기도에서 먼저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1) 기도의 대상
우리가 하나님께 바른 기도를 드리려면 기도의 대상에 대해서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예수님이라 부르며 기도하면 다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 예수님이라 부르며 기도해도 부처님에게 기도하는 것과 같을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을 보면, 세상에 인간이 만든 많은 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스스로가 신이라 부르는 존재에 초월적인 능력을 부여해서, 자신이 하지 못하고 할 수 없는 것들을 이루어 내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우상과 같은 하나님을 기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라 부르며 기도할지라도, 부처나 느티나무에 있는 고목 신과 같이, 내가 만든 신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신에게 자신의 소원만을 비는 신앙은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지요. 삶의 변화가 없으면 참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고, 교회 안에 하나님의 나라도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저 우연히 자신의 바람대로 이루어진 것들을 기도의 응답으로 생각하며 만족하다가, 또 다시 불만과 불평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2) 인간이 만든 신
반면에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살아있는 신을 믿는 신앙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계시해주시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신인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께 기도하면, 살아계신 신이기 때문에 일방적인 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대화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믿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지요. 하나님과 대화의 기도를 하게 되면 기도자의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면 기도자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변화가 있으면 삶의 환경은 변한 것이 없을지라도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되고, 이런 사람들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란 게 무엇인가요? 사실 인간 스스로 정한 기준이잖아요. 부자가 되어야 행복하다는 생각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이지, 부자라는 사실 자체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요. 인간들 스스로 기준을 만들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느끼는 행복은 감정일 뿐 행복 그 자체는 아니지요. 그러다 보니 행복한 감정이 사라지면 다시 불행하다고 여기게 됩니다.그렇다고 인간들이 만든 기준을 인간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러한 기준은 하나님을 만날 때만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가치의 기준이 변하려면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구약의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사야 같은 사람들이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기 기준이 무너진 사람들이고, 신약의 요한, 바울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는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마다 죽은 것과 같이 되었다고 하잖아요. 즉 사회적인 통념과 자신의 경험이 만들어낸 가치관이 포기된 것이지요. 바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면 능력 받는다는 잘못된 신앙적 전제를 갖다 보니, 마치 무당이 신 내림을 받는 것 같은 기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창조주와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창조주와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 때문에 울기도 하시고 고생도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의 결정적인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받아들이게 하는 표적이 예수님의 부활이지요.(‘인간이 만든 종교, 하나님께서 만드신 종교’에서 자세히 설명)우리를 향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행이고, 받아들이면 행복인 것이지요. 마치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아도 부모의 사랑은 변함이 없지요. 단지 자녀의 생각에 따라 행, 불행이 결정되는 것이에요. 부모는 자신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를 낳은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기 위하여 낳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사실을 모르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낳았다 생각하고, 그래서 우리가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불평과 불만만 가득한 삶을 살게 되지요. 반면에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낳았고, 우리 때문에 모진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생각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부모님으로 인하여 행복해지고, 올바른 삶을 살게 되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가 부모님의 본질을 만나게 되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에요.우리가 인간을 만든 신, 즉 창조주와 구원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이유가 이런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한 간구보다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많아지고, 미완료형의 기도보다 완료형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간구보다 영광과 감사, 미완료형의 기도보다 완료형의 기도를 드리게 되면,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미 이루셨는데도 우리가 미완료형의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 구원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기도를 한다고 다 기도가 아닙니다. 그 대상을 올바로 알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3)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 무엇보다도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소원을 들어주는 내가 만든 신에게 기도하면 스스로의 위안을 얻는 정도에 그치지만, 나를 만드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염려보다 오히려 기대를 하게 되지요. 그때 우리는 모든 인생의 짐을 내려놓는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사실, 우리 인생의 짐은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생기는 것이잖아요. 내일을 모르기 때문에 염려가 되고, 안다고 해도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지요.이러한 인생의 짐을 누군가 해결해줄 것이라고 막연히 믿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자위이고 자기 합리화이지요.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완전한 존재를,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셔서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그분을,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분명히 확인된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참된 자유와 평안을 얻게 되지 않겠습니까? 마치 우리가 어릴 때 부모님을 슈퍼맨보다 더한 존재로 신뢰하면서 누리는 평안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부모님으로 인한 평안은 커가면서 부모님 능력의 한계를 깨닫게 되어 깨지게 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은 신앙이 성숙하면 할수록 더 크게 깨닫게 됨으로써 더 완전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깨닫는 것이 거듭남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나, 죽어서 천국 가는 티켓을 따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천국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듭남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요한은 거듭난다는 것을 무엇이라 하나요? 과거 자연인, 즉 혈통적인 사람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지음 받은 한 가족임을 아는 영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요 1:11-13) 이렇게 거듭나면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나 혈통, 연고 중심의 집단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철이 들면 자기 입장보다 가족을 더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자녀들이 어릴 때는 가정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은 가져야 되고, 하고 싶은 것은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바라며 살지요. 그러다 철이 들면 자신보다 가족과 가정이 우선이고 부모님이 우선이 되지요. 신앙에서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신앙에서 공동체 중심의 신앙으로 변화되는 것이 거듭남이지요. (‘인간이 만든 종교, 하나님께서 만드신 종교’에서 자세히 설명)이런 거듭남이 있으면 기도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신앙이 가져다 주는 자유와 평강을 누리게 되고, 비로소 신앙인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기도의 대상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임을 분명히 알고 기도하면 모든 인류가 한 가족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지게 되고, 기도가 달라지면 비로소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주기도문
이렇게 거듭난 자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주기도문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유대교의 기도문에 비하면 참 간단하고 짧습니다. 살아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길게 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엄마!” 하기만 해도 우리의 필요를 다 아는 것이 우리 어머니이듯 말이에요.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있어야 할 바를 아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기도를 해도 마음에 고민이 있고, 왜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쓸데없는 걱정을 하나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대상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알고 기도하면,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은 사라지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되지요.
2. 하늘에 계신 하나님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보면 우리의 기도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저 멀리 우주 밖에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수사학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존재, 즉 우리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완전하신 분이란 뜻이지요. 우리는 기도할 때에 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내 생각, 내 능력보다 훨씬 더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면 쓸데없는 것만 기도하고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니게 됩니다. 저의 아버지가 목사님이셨는데,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장로로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과거에는 목사님이 부족해서 전도사나 장로들이 목회를 하기도 했지요.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병 고치는 은사를 받고, 고향 집 팔고 논 팔아서 고향에다 교회당을 짓고, 목회를 하신다고 전도사로 나서시는 바람에 어릴 적 저희 집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가 성장하자 노회의 목사님들이 교회의 중직자들을 부추겨서 아버지를 교회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 집에 드디어 위기가 왔구나.’ 생각하고 동생에게 자루를 하나 들게 하고, 저는 아이스께끼 통을 메고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에게 들켜 크게 혼이 났지요. 어머니는 “네가 이렇게 안 해도 부모가 알아서 할 텐데, 엄마 아빠를 못 믿느냐?” 하면서 혼을 내셨습니다. 내가 할 일은 그런 장사가 아니라 공부라는 것이지요. 저는 어머니, 아버지를 못 믿어서 쓸데없는 아이스께끼 장사를 해 집안을 일으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집안을 일으킬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 저의 본분은 공부를 하는 것이었지요.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지시는데, 능력도 없으면서 내 인생을 책임지려고 하니 자꾸 쓸데없는 것에 매이고 되지요.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런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지요. 전도서에도 사람의 본분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서로 사랑하는 것, 가진 것을 나누며 살라는 것이지요. 즉 열심히 일한 결과를 약한 이웃과 나누면서 더불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살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조차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쓸데없는 짓을 일삼으니 이 땅이 하나님 나라와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과 그분의 무한하신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쌓아만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하고 계신데 그 사실을 믿지 못하니 욕심을 부리고 남을 죽여서라도 자기만 살려고 하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능력을 믿지 못하니 초등학교 3학년이 아이스께끼 장사를 해서 집안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과 같지요.인간의 본분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에요. 이 시간 예수님께서 계시해주신 하나님,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늘에 계신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떼를 쓴다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신앙의 잘못된 전제는 떼를 써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오히려 떼를 쓰면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내려놓지 못하기에 더 탐욕적인 신앙인이 되기 쉽습니다. 인생의 여러 계획이 우리의 생각대로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훨씬 더 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제대로 부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대로 움직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게 되어 그분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지요.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며, 우리 계획대로 움직여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대로 움직여주시면,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없어지기를 바라잖아요. 우리의 계획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계획을 내려놓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신 분이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이 공산당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자기의 계획을 내려놓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였기에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 두 아들이 미국 유학가려다 미국보다 좋은 천국 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같은 집안에 순교자가 나오다니 주님, 감사합니다. 한 아들 순교자 되는 것도 영광스러운 일인데 두 아들을 순교자로 배출하다니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손양원 목사님을 보면서 그 안에 거하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보여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1) 아빠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저 멀리 천상에서 우리 인생을 바라보며 인간의 운명을 조종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내재하셔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어떤 인생의 짐을 가지고 오셨는지 모르지만, 모든 짐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그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빠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왜 우리가 기도하면서 고민을 하나요?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거나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 아닙니까? 기도하면서도 늘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왜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내 생각보다 훨씬 지혜로운 우리의 아빠 아버지라는 것을 인정하세요. 그래야만이 천국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드리기 전에 그 대상에 대하여 묵상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묵상 없이, 오자마자 무조건 하나님 앞에 떼쓰고 부르짖는 것만이 기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지도 못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는 능력의 삶을 살지도 못하는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보다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야기 해봅시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이 추석을 맞아 부모님 집에 왔는데, 식사 때가 되면 밥도 주시고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부모님을 믿어야지요. 그렇지 못하고 ‘내가 어떻게 해야 부모님께 밥이라도 얻어먹을까?‘ 이렇게 생각해서 부모에게 잘 보이려고 힘쓰고 노력한다면 정상적인 것입니까? 정상적이 아니지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모독이에요.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어미는 젖 먹는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 손바닥에 새겨 놓고 기억하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는 사실입니다. 마치 부모님의 사랑은 자녀들이 받아들이나 그렇지 않으나 변함이 없는 것과 같지요. 자녀들이 부모님을 믿지 못하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평안과 기쁨을 누리지 못할 뿐입니다. 자녀가 믿지 않는다고 부모의 사랑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부모님의 사랑으로 인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할 뿐이지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의 믿음과는 상관없는 것이고, 그 사랑을 믿지 않으면 우리만 불행해지는 것이에요. 바울의 변화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이 과거 유대교에 있을 때는 잘 보이면 복을 주시고 잘못 보이면 복을 거두시는 하나님인 줄 알았다가, 성령을 받고는 하나님이 아빠와 같은 분임을 깨달았다는 것이에요. 아버지라는 말은 헬라어이고, 아바라는 말은 아람어로 아빠라는 뜻인데, 바울은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신의 체험 때문이지요. 우리에게 성령을 받는 것은 초월적인 능력을 받는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서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이 아빠와 같은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늘의 모든 아름다운 것을 예비하시고 상속해주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기도할 때마다 그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기도하는 영적인 각성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 나라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를 드려 초월자의 사랑을 경험해야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내 생각대로 되는데 왜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을 경험해야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내 생각이 틀렸고 부모님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야 부모님을 존경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져야 되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사람의 본분을 지키고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문제이지요. 사람의 본분을 지키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나라이지요. 창세기 20장 11절에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기근이 와서 사라와 함께 그랄 지방으로 피난을 갔을 때, “이곳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함이 없으므로 당신 때문에 나를 죽일까 하노라”고 합니다. 그랄 지방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으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지요. 살인을 죄라고 규정하기 전에는 살인이 죄이지만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잖아요. 사실 모세 시대에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면서 살인을 죄라고 여겼지요. 그 전에는 사람들도 동물들과 같이 그저 본능적으로 자기 자녀와 가족은 사랑하면서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죄책은 없었지요. 정글의 세계, 약육강식의 삶이었던 겁니다. 그런 사회가 그랄 지방이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창세기 42장 18절에도 요셉을 노예로 팔았던 열 형제가 가나안에 기근이 심해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을 찾아왔을 때, 두려워 벌벌 떨며 그 앞에 엎드려 있는 형님들에게 요셉은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당신들은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1장에는 히브리인 중 남자아이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는 추상같은 바로의 명령에도 십브라와 부아라는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남자아이들을 살려 주었다”고 합니다. 십브라와 부아가 모세만 살려준 것이 아니라 “남자아이들”을 살려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세만 살려주었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만 역사하신다고 착각하지요.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시고, 모든 사람들의 삶을 주관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십브라와 부아를 통하여 남자아이들을 살리셨는데 그 가운데 모세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겠지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더라도 남을 살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정확히 이해해고 제대로 해석해야, 성경을 통하여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래야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다윗과 사울의 이야기도 잘못된 신앙의 전제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니 다윗 집안은 날마다 흥하고, 하나님이 사울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 집안은 멸망을 당했다고 하지요. 맞는 이야기이지만 무엇보다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결과만으로 성경을 받아들이면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하나님에게 아부해서 복 받으려고 하는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과 왕으로 살아가는 과정, 사울이 왕이 되는 과정과 왕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보면, 사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사람이었고,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 삼으려 하시자 사울은 행구 뒤에 숨었습니다. 그가 그만큼 겸손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셨는데, 나중에는 그가 교만해져서 제사장 대신에 제사를 드리고, 아말렉을 멸할 때 헤렘(하나님께 드려야 할 전리품)을 취했기 때문에 버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실은 맞지만 그 사실이 왜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없기 때문에 그저 목사님에게 불순종하면 망한다는 신앙으로 비약되지요. 그래서 목사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지 아닌지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고 맹종하게 됩니다. 사울이 왜 숨었나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왕 노릇하려는 불신앙 때문에 두려워서 숨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이고 자신의 힘으로 왕 노릇하려는 교만이지요. 그러다 왕의 권력을 소유하게 된 사울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이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다윗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왕으로서 행해야 할 모든 노력을 정적을 죽이는 데 쏟아 붓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보다 권력을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기도의 대상인 줄 알지 못하면 자신이 살려고 남을 죽이게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이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 아닌가요? 반면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했던 다윗은 자기의 왕권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했지 않습니까?
다윗은 왕이 될 때에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도 다윗은 원수인 사울을 아말렉 소년이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이 기름 부은 받은 자를 죽였다고 오히려 아말렉 소년을 처단합니다. 그리고 통일왕국의 마지막 걸림돌이 되는 사울 왕가의 이스보셋을 죽이고, 다윗에게 사울가의 왕권을 갖다 준 이스보셋의 반란자 2명도 처단합니다. 사울 왕가의 군장 아브넬을 죽이고 다윗 왕국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 요압에게 저주를 내리고, 아브넬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 다윗입니다. 다윗은 왕위가 보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 보인 것입니다. 이런 다윗이었기에 백성들이 존경하고 따랐던 것이지요. 백성들은 다윗의 능력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사람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다윗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은 사람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신앙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도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과 같이 존중히 여기는 기도입니다.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계시되는 사랑의 하나님, 부활을 통해 계시되는 창조의 하나님에 대한 호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할 때에, 우리의 생각과 뜻과 계획을 초월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그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사람을 살리는 인간의 본분을 지키며 살게 되고, 그로 인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주기도문을 암송합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을 자기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외우는 주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단순히 예배를 위한 예전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이 땅에 천국을 이루기 위한 기도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주기도문을 주문과 같이 암송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국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천국을 꿈꾸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주기도문으로 찬양을 하고 암송을 하는데도 교회에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 결과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며, 사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주기도문 강해를 통해 주기도문의 올바른 의미를 깨닫고 우리의 신앙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 교회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 하늘에 계신 하나님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 즉 천국을 만들기 위한 기도문을 보면,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 기도의 대상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분명히 가르쳐주십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천국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지요.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한 유대교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기보다 ‘시오니즘(Zionism)’이라 불리는 강한 민족주의적 집단 이기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천국의 특징인 평화와 공존보다는 독선과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은 유대교인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근원도 가만 살펴보면 역시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우리가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우주 밖에 멀리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표현은 유대인들의 수사학적 표현이지요.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표현의 의미는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시고 우리의 지혜와 능력을 초월하시는 분”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마다, 우리가 믿고 기도드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와 지식을 능가하고 시공을 초월해 계시는 초월자이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믿으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시험에 빠질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문제라고 인식하게 되지요. 사실 이 세상의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초월자 하나님을 믿으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시험에 들거나 좌절하는 일이 없어집니다. 유대교인들은 초월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그분께 기도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자기들 수준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좌절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 40년의 유대교이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유대교는 기적을 일으키는 초월자 하나님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할 때만 초월자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하였던 것이에요. 이런 모습은 구약의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 교회의 교인들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나요?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유대교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올바른 기도의 대상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국이 이루어지려면,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이루려고 하신 천국을 우리가 경험하며 살려면, 내 수준으로 하나님을 강요하거나 평가하지 말고 초월자이신 하나님, 내 생각으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에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좌절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할 일이 없어지고, 항상 기뻐하며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대하며 살아가는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1) 우리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두 번째 “우리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통하여, 초월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내재하셔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의 오해와 유대교의 오해는 나의 탐욕을 채워주는 나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왜 이렇게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프리카의 기근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북한의 굶주리는 동포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왜 이런 일들이 해결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초월자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나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초월자 하나님이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도 않는 일부 사람들이 탐욕을 부리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겐 양식이 남아돌고, 어떤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이 없어 굶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UN 보고서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가 약 70억입니다. 그 중에서 아프리카에는 한 끼 양식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지요. 한국만 하더라도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비용이 1년에 8조원이 넘게 들어가고, 선진국에서는 잉여 농산물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의 반대쪽에서는 한 끼 양식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많다니 얼마나 웃기는 세상입니까? 심지어는 보관연도가 지난 쌀을 굶주린 북한 주민들에게 보내자 하는데도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초월자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해서 생기는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음식이 남아 골치가 아프고, 다른 쪽에서는 음식이 모자라서 문제인 현상이 생기는 것이지요. 예수 믿는 자들만이라도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마다, 모든 인류의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것을 믿는다면 이 세상엔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면서 제일 먼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을 가르쳐주시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신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 전 국민의 심판으로 정권에서 쫓겨난 리비아의 독재자 가다피와 이집트의 독재자 무라바크의 뉴스를 들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가다피의 재산은 150조이고, 무라바크의 재산은 75조라고 합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상상도 안 가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지요. 가다피가 150조를 가지고 있는데, 리비아 사람들도 모두 부자입니까? 그럼 이집트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아마 리비아 국민들이나 이집트 국민들은 ‘조’라는 어마어마한 단위의 개념이 상상조차 가지 않을 겁니다. 가다피나 무라바크의 재산은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많은데, 많은 국민들은 하루 한 끼의 양식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지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가다피나 무바라크나 우리 모두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그들만이 아니라 예배 때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때마다 우리 모두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기도 제목도, 우리의 삶도 달라져야지요.
2)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그분에게 우리의 필요를 간구해야 하고, 간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 모두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도 걱정을 하고, 걱정이 되니까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염려가 쌓입니다. 염려가 쌓이기 때문에 당연히 탐욕적인 사람이 되지요.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국이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고, 인간이 바라는 천국에 대한 갈망만 존재하는 것이에요.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하지요. 교회 옆에 술집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교회는 매일 철야를 하면서 술집이 망하도록 기도했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날 술집이 망해서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자 술집 주인이 교회에서 술집 망하라고 기도해서 자기 술집이 망했다고 법원에 손해 배상 청구를 했다고 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술집 주인은 교인들이 기도를 해서 하나님이 자기 술집을 망하게 했다고 하자, 목사님께서는 재판장에게 “기도한다고 기도한 대로 다 됩니까? 기도해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재판장이 기도해서 술집이 망한 것은 아니지만, 술집 주인은 하나님을 믿고 목사님과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답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지요. 여러분,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은 닥친 현실 때문에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지나간 일들 때문에 걱정하지도 않지요.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은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 때문입니다. 그것은 미래를 모르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지요. 그리고 설령 안다고 해도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염려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염려를 합니다. 이런 염려 때문에 오늘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쌓아 놓으려는 탐욕적인 기도를 드리게 되지요.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조차 미래를 미리 당겨서 염려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염려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살자고 다짐한다고, 그 염려가 저절로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염려는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증상이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증상을 다스리려고 하기보다 원인 자체를 없애야 염려가 사라지지요. 염려의 근본 원인은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죄 때문입니다. 그 이면에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모든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불신앙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즉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불신앙이지요. 그러므로 염려하지 않으려면 먼저 염려가 되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찬송가에도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우리 모두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지, 나의 탐욕을 채워주는 신, 내가 만든 신에게 기도하면 염려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도를 하면서도 더 탐욕적인 삶을 살게 되어 이 세상이 공평해지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지요. 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더 탐욕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의 반복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알고 기도하는 것은, 열심히 기도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자기 능력으로 살아가려 하기 때문에 탐욕을 갖게 되고, 그 탐욕으로 자신뿐 아니라 모두가 공멸해 가는 세상, 기도의 대상을 올바로 알지 못해서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려면,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초월자이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많은 사람에게 증거해야지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초월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임을 믿게 되어, 탐욕을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고 서로 섬김으로써 모든 인류가 양식의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야지요. 이제부터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우리 모두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임을 믿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국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한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하여 천국을 맛보는 신앙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오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나의 문제들을 아시지요? 하나님 앞에 모두 내려놓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앞에 나의 주장이 포기됨으로써 내 속에 있는 모든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게 됨을 감사 드립니다. 어느 것을 선택해야 나에게 이익이 되고, 내 삶이 편해질까를 헤아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까를 생각하며 살아감으로써 많은 사람을 살리는 성도가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되도록 그 중한 고난을 겪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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