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국권 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환상 속에서 길을 찾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ㅡ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갑부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ㅡ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출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98) 첫 발표 《개벽》(1926.6)
이 상 화 李相和 (1901~1943)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언론인, 교사로서 《백조》 동인 및 카프(KAPF)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병적 관능과 퇴폐적 경향이 도드라지는 작품을 주로 발표하였으나, 이후 민족 정서에 기반한 저항시 창작으로 시적 전환을 이루었다.
퇴폐와 저항,
현실 부정의 두 갈래 길
한국문학사에서 시인 이상화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에 자리한다. 하나는 퇴폐와 관능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 자리하고 있는 이상화의 대표작은 <나의 침실로>(1923)이다.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함께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혹여 날이 샐까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마돈나’가 자신의 침실에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화자의 달뜬 숨결엔 분명 관능의 흔적이 담겨 있다. 다른 하나는 이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담긴 투쟁과 저항의 세계이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마치 선문답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첫 시행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긴밀하게 조응함으로써 한 문장에 담기 어려운 묵직한 의미를 담아낸다.
등단 이후 《백조》 동인으로 시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던 이상화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의 영향을, 그중에서도 특히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조영복, 1999: 144-150). <나의 침실로>에 사용된 ‘마돈나’라는 호칭도, 1920년대에 유행했던 자유연애의 정사(情死) 모티프도, 이전의 한국문학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화자가 ‘마돈나’에게 함께 가자 말했던 ‘오랜 나라’란 단순히 과거 특정 시점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존재하는, 보다 원형에 가까운 어떤 세계일 것이다. 그가 처한 현실의 반대편에서만 성립하는 세계라고 설명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듯하다. <나의 침실로>는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은 오직 꿈 속에만 있어라”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이 화자가 진정 가치 있다고 여기는 어떤 것이라면, ‘오직 꿈 속에만 있어라’라는 진술은 그것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잔혹한 진실을 상기시킨다. 한편으로 작품 속에서 여러 차례 확인되는 ‘오랜’이라는 관형어는 그것이 언젠가 이곳에 존재했었음을 합의한다. 과거에는 있었던 것이 지금은 없기에, 욕망은 더욱 절실해진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첫 시행에 담긴 “지금은 남의 땅”이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은’ 남의 땅이라 하였으므로 한때는 나의 혹은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땅이었을 것이다. 어떠한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이제 이 땅은 화자의 것일 수 없다. 그러나 이 공간에 귀속되어 있는 과거의 따스하고 행복한 기억들은 계속해서 화자를 매혹한다. 화자의 기억 속에서 이 땅 위의 모든 존재는 ‘나’를 중심에 두고 온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묘사된다. 이것은 한낱 과거의 환상일 뿐, 현실이 아니다.
이처럼 이상화의 시세계에서 확인되는 ‘퇴폐’와 ‘저항’은 모두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을 전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이들을 완전히 분리된 대립적 시세계로 인식하는 것은 두 세계의 관계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퇴폐’와 ‘저항’은 저 깊은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ㅣ 현실과 환상, 그리고 현실
현실과 꿈으로 이분하여 전체적인 맥락을 살폈을 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상 전개는 고전 서사문학작품의 분석에서 주로 논의되었던 ‘현실-꿈(환상)-현실’의 환몽 구조를 연상시킨다. 다만 꿈(환상)에서의 강렬한 체험이 현실에서 인물의 각성을 끌어내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는 환몽 구조와는 달리, 이 작품의 처음과 끝부분에서는 인식의 극적 전환이 확인되지 않는다.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화자의 현실 인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은 1연과 11연인데, 이 두 연을 문답 관계로 이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보인다. 여기에 주목할 경우 이 시는 처음과 끝이 대칭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수미상관의 구조로 파악할 수 있다. 비단 1연과 11연뿐만 아니라 2연과 10연, 3연과 9연 역시 대칭 관계를 이룬다. 2연의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와 10연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는 문장 성분까지 일대일로 대응하는 형식적 대칭이다. 3연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와 9연의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의 경우는 문장 성분까지 동일하지는 않으나, 이들이 대칭 관계임을 인식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유사성을 보여 준다.
반면 4~8연에서는 이러한 대칭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나열되는 ‘바람, 종다리, 보리밭, 도랑, 나비, 제비, 맨드라미, 들마꽃, 흙’ 등은 모두 이 공간에서 화자와 마주하게 된 대상들인데, 이들은 살아 있는 것이든 살아 있지 않은 것이든 화자에게 더없이 친밀한 인격적 존재처럼 묘사되고 있다. ‘바람’은 옷자락을 흔들며 내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종다리’는 나를 보고 반갑게 웃고, ‘도랑’은 내 곁에서 노래하고 춤춘다. 한편으로 이들은 전통적인 여성상의 이미지를 나누어 가지고 있는데 그중 일부는 모성성, 즉 어머니의 이미지와도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삼단 같은 머리, 젖먹이 달래는 노래,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 살찐 젖가슴’ 등의 비유적 형상이 중첩되어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화자는 이들 사이를 부유하며 전체의 이미지를 구성해 나간다. 그것은 ‘들’, 곧 화자가 발 딛고 있는 이 땅 전체이다.
| 저항의 길, 절망의 길
들판에서 마주친 존재들에게서 느껴지는 정서적 친밀감은, “지금은 남의 땅”이라는 현실 인식에서 직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거리감과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화자가 봄 들판의 정경을 아름답게 묘사하면 할수록 그것을 잃어버린 현실에서 비롯되는 상실감도 커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라는 구절은 상반된 감정이 대등하게 공존하고 있는 역설적 상황을 표현했다기보다는,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이 구체화 될수록 더욱 커져만 가는 절망과 슬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절망과 슬픔의 정서가 부각되고 있다는 이러한 해석은 이 시의 메시지를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보는 일반적인 시각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다소 의문을 남긴다. ‘저항’이 지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이미지에 ‘절망’과 ‘슬픔’이 지닌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이미지가 겹쳐져 발생하는 위화감 때문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작품의 시상이 전개되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저항보다는 절망과 슬픔이 좀 더 설득력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1연과 11연을 각각 문답의 관계로 파악하고 그 사이에 놓인 내용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인식한다면, 작품의 무게중심은 자연스럽게 화자가 어떠한 답을 찾았는지에 실리기 마련이다.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는 화자의 진술에서 독자들은 빼앗긴 들에 봄은 오지 않는다는 비관적 전망을 어렵지 않게 끌어낼 수 있다. 이러한 화자의 인식과 태도를 ‘저항’과 연결시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아보인다.
이 시를 저항시로 보는 관점은 작가의 전기적 사실에 기대어 세워지는 경우가 많다. 시인 이상화는 또한 독립운동가 이상화이기도 하였다. 그는 사회주의운동에 깊숙이 관여하였으며 여러 항일활동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구금되거나 심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상화가 행한 모든 표현과 행동을 저항으로 의미화할 수는 없다. 저항에 상응하는 행위가 시에서 확인될 때 비로소 이 시를 저항시로 명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시가 저항시라면, 작품 속의 말하는 이는 땅을 빼앗은 무리를 물리치고, 잃은 땅을 되찾자고 외쳐야 한다. 그러나 이 시에는 이런 외침이 없다. 땅을 빼앗긴 것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절망할 뿐이다.”(이대규, 1996:522-523)라는 주장은 ‘저항’을 지나치게 좁은 의미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작품의 문면을 근거로 삼아 나름의 설득력을 가진다.
작품 속에서 절망을 읽어 내는 논리는 오히려 명료하다. 이 시는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봄의 환상을 노래하고 있다. 봄은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므로 화자는 과거의 기억들을 상기함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 봄의 정경을 구체적으로 그려 낼 수 있다. 봄이 시작되면, 이 겨울은 끝날 것이다. 그러나 봄은 빼앗긴 들에는 오지 않을 것이기에, 혹은 오더라도 그마저 빼앗길 것이기에 결국 겨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이 시의 주된 정서를 ‘절망’으로 파악하는 근거이다. 게다가 무엇을 찾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 것으로 묘사되는 화자의 이미지는 좀처럼 긍정적인 미래와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항 아니면 절망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 속에서 이 작품을 어느 하나로 귀결시키는 것이 적절한지를 고민해 볼 필요는 있다. 마지막 행의 의미를 다른 맥락에서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빼앗기겠네.’라는 화자의 진술은 아직 봄을 빼앗긴 것은 아니며,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하기에 비관적 전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빼앗기겠네.’라는 결언은 이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경고, 즉 지금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아름다웠던 봄조차 결국 빼앗기고 말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화자가 암울한 현실에 끝내 절망한 것인지, 아니면 그 안에서 희망의 계기를 상상한 것인지, 이렇게 해석은 다시 두 갈래 길로 열린다. ㅣ이종원
참고문헌
권유성(2010),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재고: 잡지 《개벽》을 중심으로」, 『어문학』110, 한국어문학회, 249-271.
이대규(1996),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저항시인가」, 『선청어문』 24,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515-524.
이상화(1998),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전집》, 미래사.
조영복(1999), 「동인지 시대 시 해석에 대한 몇 가지 문제」, 『한국학보』 25(4), 일지사, 128-151.
60 • 1부 국권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4. 29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