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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순간
나는 도라지꽃 앞에서, 싸리꽃 앞에서, 칡꽃 앞에서, 애기원추리꽃 앞에서, 이름도 모를 버섯들 앞에서 매일 똥을 눴다. 그러고는 삽으로 꼭꼭 덮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절밥을 먹고 똥을 땅에게 돌려주었더니 땅은 또 많은 것을 내게 선물하였다. 매미소리, 새소리, 계곡의 물소리, 소나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아침마다 나를 응원하는 듯하였다. 실상사 약사전의 부처님께 나도 무엇인가를 바치고 싶었다. 그리하여 시 한 편이 더 씌어졌다.
싸리꽃을 애무하는 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 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 울음 서른 되
-「공양」 전문⁹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향기들을 '일곱 근' '육십 평' '두 치 반 '칠만 구천 발' '서른 되'로 계량화한 것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었다. 2007년 7월부터 정부에서는 표준도량형 제도를 시행한다고 밝힌 바 있다. 도량형을 통일함으로써 여러 단위의 혼용에서 오는 국가적 손실을 없애고 그 편리성과 효용을 국민이 누리게 한다는 취지가 그것이다. 이른바 실용적인 필요성 때문에 법적 구속력이 있는 표준도량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는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시는 실용과 경제의 반대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 무엇이다. 때로는 어슬렁거림이고, 때로는 삐딱함이고, 때로는 게으름이고, 때로는 어영부영이고, 때로는 하릴없음인 것이다. 시는 실용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와는 다른 시적 가치를 요구한다. 그것은 세상의 미학적 가치를 탐구하는 일인데, 우리는 그것을 시작詩作이라고 부르거나 시적 순간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살다보면 시적인 순간은 쉽게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영감이나 시상이 떠오르는 시적 순간은 의외로 곳곳에 산재해 있다. 초보자는 시적 순간이 수시로 입질을 하는데도 그것을 낚아채는 때를 놓쳐버리기 일쑤다. "영감이 오는 순간에 당신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번득이는 첫 생각과 만나는 순간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존재로 변화한다.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과 연결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첫 생각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그동안 당신이 겪어온 감정과 사건과 정보가 밑바탕이 되어 발산되는 것이기에 엄청난 에너지에 물들어 있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이다.¹⁰
그렇다. 시인이란,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든 메모지와 펜을 챙기고 받아쓸 준비를 하라. 잠들기 5분 전쯤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아, 내일 아침에 꼭 그것을 써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잠들어버리지 말라. 영감은 받아 적어 두지 않으면 아침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해서 놓친 시가 수십 편이나 된다. 아쉬워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아예 메모지와 펜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 화장실에도 놓아 둔다. 속주머니에도 넣어 둔다.
한 편의 시가 나오기 전까지 나도 내 안에서 무엇이 나올지 모른
다. 궁금해서 기다려진다. 시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 시가 어린애 같
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이 녀석은 성질이 청개구리 같아서 꺼내려
하면 얼른 숨는다. 아무리 좋은 컨디션, 고요한 시간, 알맞은 분위기
를 준비해놓고 유혹해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무관심한 척,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하면, 그때서야 저도 심심하고 궁금하
니까 살살 고개를 쳐든다.‥ ‥ ‥ 그러나 시를 잡을 준비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그 녀석도 눈치가 빤해서 잡히려고 하지 않는다. 이
녀석은 내가 준비가 안 된 순간을 느닷없이 급습하여 난처한 상황에
빠져 쩔쩔매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¹¹
김기택이 시를 잡아채는 방식이다. 시가 오는 순간을 기다리며 조바심 내는 시인의 모습이 어린애 같다. 시와 시인과의 대결은 서로 잡고 잡히는 어린애들의 놀이와 다르지 않다. 옛 시인들은 시마詩魔가 있다고 믿었다.¹² 시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한다. 이 귀신이 몸에 붙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고, 몸과 마음이 온통 시에 쏠려 있게 된다. 시를 쓰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시를 한창 쓰고 있을 때 당신도 이 귀신을 만나야 한다. 이 귀신과 친해져서 이 귀신이 옮긴 병을 앓아야 한다. 당신도 시마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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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앞의 책, 10쪽
10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권진욱 옮김, 한문화, 2005, 30쪽.
11 김기택, 「놀이로서의 시쓰기」, 「시와시학』, 2005년 봄호.
12 이규보의 '시마를 몰아내는 글'이 있다. 그는 시마를 몰아낸다고 했지만 실은 시마를 불러들이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을 반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동산에 잡풀이 우거져도 베어낼 줄 모르고 집이 기울어져도 바로잡을 줄 모른다. 궁한 귀신이 온 것도 역시 네가 부른 것이고, 귀인에게 오만하고 부유한 사람을 멸시하는 것, 방종하고 거만한 것, 목소리가 공손하지 못하고 얼굴빛이 부드럽지 못한 것, 여색을 대하면 쉽사리 유혹되는 것, 술을 마시면 더욱 거칠게 되는 것은 정말로 네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 어찌 나의 마음이 그랬겠느냐? 그 괴이함을 짖는 개들도 아주 많다. 그래서 나는 너를 미워하며 저주하고 쫓게 되니, 네가 빨리 도망하지 않으면 너를 찾아내어 베리라."(「이규보시문선」, 민족문화추진회 편, 솔, 1997,212쪽)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시적 영감, 즉 시마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으로 『시마, 저주받은 시인들의 벗김풍기, 아침이슬, 2002)이 있다.
안도현의 시작법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중에서
2024. 9. 24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