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선생님으로부터 온 이름 중, 산장 집에서 고른 이름... '박 종혁'.
이젠 법원에 가서 이름을 정식으로 고치는 절차가 그들에겐 남아 있었다.
물론 이 일은 '산장 아저씨'인 박 만석의 일이라는 게 정확한 말이었지만, 여기서 기로의 생각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기로 스스로 '우리의 일'로 생각하고 있다시피, ‘우리’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그건 기로 역시 자신도 공통분모로 엮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문맹인 박 만석이 전주 법원에 가서 그런 일을 하기엔 역부족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로가 자청해서 도움을 주려고 나섰던 것으로... 어차피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한 몫을 담당했던 그라, 호적을 바꾸는 그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지어주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게 혹시 박 만석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든 그렇지 않든, 기로는 이미 박 만석으로부터 ‘배를 타는 일’이란 커다란 은혜를 입고 있던 처지여서, 자신의 입장에서도 뭔가 그에 상응하는(?) 어떤 대가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이다.
굳이 강조하지 않는다 해도 특히 이런 일에는 주눅이 바짝 들어 있던 박 만석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박 만석에게는 장 기로라는 ‘믿을만한 후원자’가 함께 하는 일이어서, 그 어떤 때보다 가벼운 마음인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면, 기로와 박 만석은 이제 그런 일에 상호 보완작용을 할 여건이나 준비가 돼 있던 상태였다고 봐도 될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져 있었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만큼은 박 만석도 딴에는 바짝 긴장하는 눈치이긴 했다.
어쨌거나 산장집 가족의 만장일치의 합의로 정해진 외아들의 이름을 새로 호적에 바꿔 올리기 위해, 그들은 전주나들이를 했던 것이다.
늘 그랬듯이 아침에(만약 김 순임이 산장에서 자는 날이었다면 박 만석이 기로에게 아침부터 밥을 먹으러 오라고 난리였겠지만, 이날은 전주에 가서 자고 돌아오는 날이어서, 기로는 '夢想?'에서 스스로 아침을 챙겨 먹고) 산장으로 가니,
성격 급한 박 만석은 바로 기로에게,
본인의 차로 전주에 갈 건지 아니면 버스를 타도 괜찮은지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뭔가 기로의 눈치를 보듯한 태도였다.
물론 기로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그리고 쉽게, 버스를 타고 가자고 했다.
그런 일로 도심에 차를 갖고 가는 게 얼마나 신경 써야 하고 피곤한 일이라는 것쯤은 차가 없는 기로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엔 기로가 모르고 있었는데, 박 만석은 전주에 차를 갖고 나갈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로에게 그렇게 물어온 것에는, 딴에는 최대한 기로의 불편함을 없애주기 위한 그의 배려라는 걸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사실 박 만석도 그러고는 싶었던가 본데, 이 날 만큼은 본인의 가장 취약점일 수도 있는 관청(그것도 법원)에 가는 날인데다, 더구나 하나 뿐인 아들의 이름을 바꿔주러 가는 중요하고도 뭔가 격식을 갖춰야 하는 날이라는 인식이 되었던 듯, 옷도 평소와는 달리 제법 깔끔하게 차려입은 것으로부터 아침부터 바짝 긴장하거나 조심스러워 보이는 행동을 하고도 있었다.
그렇지만 기로는 가급적 소탈하고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물론 그런 일을 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도 않았지만, 또 그래봤자 '박 만석만 더 불편하게 만들 것 같다'는 그 나름대로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듯 그들 둘은 서로가 상대방을 위한 배려를 하고 있었지만, 기로가 일을 단순 간명하게 처리하려는 소탈한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박 만석도 마음 편해 하는 건 분명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막은댐 까지는 박 만석의 트럭을 타고 갔고, 거기서는 버스를 타고 전주로 향했다.
버스가 전주 시내에 진입하자마자 박 만석은,
"우리... 택시 타고 가야 허는 거 아녀?" 하고, '법원'이라는 곳에 가려면 마치 택시를 의무적으로 타고 가야 하는 것처럼 기로에게 물어왔지만,
기로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버스로 가도 될 겁니다." 하면서,
이미 그 버스가 전주 법원과 상당히 가까운 지점을 통과한다는 것을 알아두었던지라,
조용히 좌석에서 일어나 버스 기사한테 가서,
"기사님, 법원에 가려면... 어디서 내리는 게 제일 좋을까요?" 하고 조용히 묻자,
"많이 남지 않았는데, 가서 앉아 계시면... 제가 알려드릴 게요." 하는, 친절한 기사의 답을 듣고 돌아와 앉았다.
그러면서 박 만석의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로 두어 번 끄덕이자, 박 만석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법원 가까이에서 내린 그들은, 천천히 걸어서 법원까지도 걸어갔다.
그리고 법원에 가서 몇 가지 서류 작성을 한 다음(물론 이 일은 기로가 다 해야만 했고, 박 만석은 그런 기로 옆에서 도장과 신분증을 챙겨주는 일을 했을 뿐인데), 절차를 밟아 한 시간 반 정도 만에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법원에서 기로를 놀라게 했던 일이 하나 있었는데,
일단 서류를 작성한 뒤 담당직원에게 제출한 다음, 무슨 승인을 얻기 위해선 그 법원의 또 다른 건물로 넘어(옮겨)가야만 했는데,
거기 지형의 특징 때문인지, 그 건물의 3층을 통해 다른 건물의 1층으로 이어진 구름다리(육교 같은)를 건너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박 만석이 쩔쩔 매던 돌발행동이 나왔던 것이다.
"내가 '선엄증'이 있어서..." 하면서, 박 만석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던 것도 모자라, 마치 어린 아이처럼 기로 옆에 바짝 붙어서(게다가 거의 팔짱까지를 끼는 식으로) 기로를 잡더니,
한편으론 다소 떨면서도 팔짝팔짝 뛰어서 5-6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육교를 건너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하면서 기로는, 처음엔 박 만석이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왜 이러시는데요?" 하고 물었을 뿐인데,
"내가... 그려!" 하면서 절절 매는 것이었다.
그건 진실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박 만석에겐 ‘고소 공포증’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봤자 그다지 높은 건물도 아니었는데, 그 높이에서도 겁에 질려 벌벌 떠는 한 60이 된, 이제 노인으로 가는 사나이를 보았으니... 그것 역시 기로에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시골에서 평생 동안 그 험한 일을 하며 잔뼈가 굵은 사람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런 행동을 하는 것이며, 또 어린애처럼(정말 그날은 완전 어린애 같았다.) 자신의 팔짱을 끼면서까지 벌벌 떠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박 만석이 ‘선엄증’이라는 말을 할 때, 기로는 그 단어마저 난생 처음 듣는 것이었고,(정확한 단어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그 단어가 ‘고소공포증’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는 미쳤는데,
어차피 ‘법원’이란 그 양반한텐 그렇잖아도 다소 공포가 느껴질 법한 공간일 터라 내내 어린 아이처럼 기로 옆에만 붙어다녔던 건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었다지만,
그 육교를 건너면서 했던 행동은... 정말 산골의 순진한 어린 아이의 행동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아무튼 박 만석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된 기로는, 내심 깜짝 놀라고 있었는데,
'허기야 누구든 사람은 다 어떤 약점은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하면서 이해를 하려고 했지만, 기로가 굳이 이런 장면을 눈여겨 보면서 강조한 것에는,
이 날의 박 만석의 행동은 그저 나약하고 초라했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산장 아저씨의 다른 능력(생활하는 여러 방면)이 탁월한 것에 따른 상대적인 취약점(‘아킬레스건’이랄까?)을 보았던 것으로,
마치 '삼손'의 머리카락에 약점이 있듯이,
'산장 아저씨에게도 그런 취약점이 있구나.' 하고 이해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기로는 그것마저도 박 만석의 ‘약점’ 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산장아저씨의 비범한 ‘천재성’의 특징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으로,
한 쪽 방면으로 뛰어난 사람은 또 다른 면에선 의외로 허점이거나 약점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치를 여실이 본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이 양반이 다른 사람과 함께 법원에 왔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물론 그 사람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어떻든... 상당히 어렵고도 힘든 나들이가 됐을 것임이 분명하구나......' 하면서, 왠지 모르게 박 만석에 대한 연민의 정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무튼 박 만석과의 전주 나들이는 기로에겐 다양한 생각과 체험을 하게 해 준 사건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법적인 절차를 다 끝내고 법원을 나온 뒤에야, 박 만석의 말 대로... 그들은 택시를 잡았다.
'남문 시장'에 가서 다른 일도(뭔가 살 것도 있다는 박 만석의 의견에) 봐야 했고, 어차피 거기서 둔터니로 돌아가는 버스를 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남문 시장에서 내리자마자 박 만석은 역시,
"장씨, 점심을 먹어야 헐 틴디..." 하면서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기로는,
"그래야겠지요? 근데, 저는 소박한 것이 좋습니다. 굳이 어떤 떠들썩한 건 싫으니... 산장아저씨는 뭘 드시고 싶은데요?" 하고 박 만석에게 물으니,
"국밥은 어뗘?" 하고 다소 자신 없다는 듯 묻는 것이었다. 자신이 '국밥'을 좋아하는 게 기로에겐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그렇지만,
"좋지요." 하고,
여전히 박 만석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단순 간명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어차피 우리는 시골 사람들 이니까, 시골 장에 들렀다 국밥 한 그릇 먹고 돌아가듯, 우리도 그렇게 가면 좋을 듯하니까......' 그런 다소 여유 있는 생각까지를 하면서.
그래서 앞장서는 박 만석을 따라 가니, 시장 통 '순대국밥' 골목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박 만석에게 '국밥'은 '순대국밥'인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기로는,
''순대국밥'이면 어떻고, 여기 전주에서 유명한 '콩나물 국밥'이면 어떠랴?' 하면서 이번에는 박 만석을 졸래졸래 따라 갔는데,
"이런 디서는 막걸리 한 잔 혀도 좋은디..." 하는 것으로 보면, 박 만석은 기로가 아예 술도 못하는 사람으로 아는가 보았다. 그래서 또 천연덕스럽게,
"좋지요." 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해주자,
"장씨도, 막걸리를 마셔?" 하고 놀라면서 되묻기까지 하는 거 아닌가.
그러고 보니 지난 산신제 날 마을 남자들이 모두들 산장 집으로 몰려들 가서 술이 거나하게 취하도록 마실 때 기로가 그들과 어울려 가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그러니까 박 만석은, 기로가 술을 못 마시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그 패거리와 합류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거나 여기고 있을 걸로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또, 박 만석이 그런 것도 다 마음속에 넣어둘 정도로 기로를 파악했거나 관찰했다는 사실이 이렇게 드러나게도 된 것 같아,
'근데 왜, 그 당시엔 나에게 소 닭 보듯 냉랭했었냐고?'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럼요. 오늘 같은 날, 한두 잔 정도야... 뭐 못 마실 이유가 없지요. 이렇게 대처(?)에 나들이까지 나온 우리 같은 촌 사람들이......" 하고 즐거운 듯, 살짝 ‘촌 사람’이란 것을 강조하는 농담까지 하자,
"그려어? 그럼, 인자.. 나만 따라 와!" 하고 신나 하면서 기로를 다시 한 번 흘끗 쳐다보기까지 하는 박 만석은, 이제야... 어쩐지 이래저래 어리숙한 면모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기로는,
'어쨌거나 이 양반은, 참 단순 순진무구한 데가 있구나.' 하면서,
"이렇게 도시에 나와 시장에 나오니, 좋은데요?" 하며, 정말 약간은 들뜬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기로는 굳이, 자신이 젊었을 땐 술을 너무 마셔서 병원에도 몇 차례 실려 갔다 던지 하는, 지난날의 술에 대한 '무용담' 같은 건 아예 입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금방 자신의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하게 입이 근질근질하기도 했지만, 그저 입가에 웃음을 띠면서...
'아니, 내가 그깟 막걸리 한두 잔 못 마실 사람 같아 보입니까?' 하는 속말만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그들 둘의 전주 나들이에선, 박 만석이 찾아간 '순대국밥' 집에서... 순대국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잔을 마시게 되었는데,
반찬으로 나온 막 버무린 부추와 상추 겉절이도 상큼해서 좋았다.
역시 전주는 음식을 잘 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국밥집에서 내 놓는 그런 반찬 한두 가지만 있어도 입에 쩍쩍 달라붙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 만석은 역시 박 만석이었다.
역시 기왕에 전주에 나온 김에 그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알뜰하게도 시장을 한 바퀴 돌며, 호미 자루 몇 개와 농약 등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샀고,
마치 장을 보러 나온 시골사람들처럼 다시 둔터니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마침 버스엔 승객이 많지 않아서 그들은 개인 좌석의 앞뒤에 나란히 앉았는데,
막걸리 한 주전자에서 박 만석이 한 잔을 마시고 나머지는 기로가 다 마셨던 차라 살짝 취기가 올랐던 기로는,
'이거, 정말... 어디 시골장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네!' 하는 만족감에 젖어 있었는데,
날은 따스했고(오히려 더웠고) 기분은 나른했다.
길목에는 '목련'에 '벚꽃'에 '개나리' '진달래'까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이젠 정말 봄 꽃 세상이었다.
'저 꽃들도 한 철을 지내려고(아니, 단 며칠을 보내려고) 저렇게 꽃을 펴대는 것인가?' 물끄러미 그렇게 기로의 시선이 꽃을 따라 가자, 무슨 생각이었는지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박 만석도,
"저 꽃들이 지믄, 또 1년이 가는 거지..." 그저 혼잣말처럼 그런 말을 했다.
'그 말은, 저 꽃을 다시 보기위해선 1 년이 지나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그렇게 허무한 게 세월인데......' 하면서 기로도 나른해서, 그저 고개만 끄덕여 주었는데, 한 순간,
'근데, 진달래는 왜 응달에서 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전방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에도 보면, 진달래는 산등성이를 경계로 꼭 북쪽에서부터 그 아래로 이어서 피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왜 그렇지?' 그래서 그 얘기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박 만석은 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보니, 기로 자신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멀쩡하기만 했다.
'근데 내 몸이 왜 이리 상큼하지? 더구나 막걸리를 마셨는데도......' 그것도 신기한 것 같았고, 또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막은댐'에 내려 트럭으로 바꿔 타고 돌아오면서는,
"이 거, 나 땜시... 고마워서 어쩐디야?" 여전히 다소 조심스러워 하는 박 만석에게,
"에이! 너무 그러지 마십시요. 산장 아저씨도 저 많이 도와주고 계시잖아요? 특히, 배도 타게 해 주시고......" 하자,
"그게 뭐 별 거여?" 하는 박 만석에게,
"저에게도, 이게 뭐 별 건가요?" 하자,
박 만석이 몸을 다소 움찔하는 것 같더니,
"이왕에 함께 나갔다 오는 질(길)에, 집에 들러서 좀 있다가 밥이나 먹고 가." 하는 것이었다.
"아니, 대낮에 무슨 저녁밥입니까? 다음에 하기로 하지요. 그러니, 전 거기 식당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주세요. 오늘 우리 집 앞에 무슨 공산가 한다는 것 같던데, 어쨌거나 제가 집에 있어야 할 테니까요......"
'夢想?'에 돌아오니 격이 몸부림을 치며 난리였다. 하루 종일 주인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마을엔 엊그제 다시 심어놓은 높은 전선주에 고압선을 잇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기로는 그 쪽으로 다가가 작업반장이 누군가를 물어,
"저, 한 가지 부탁 겸 항의일 수도 있는데요. 지난번엔 일을 마친 뒤 여기다 쓰레기만 잔뜩 남겨 놓고 들 가셔서, 그걸 치우느라 얼마나 애를 먹고 약이 올랐는지 아십니까? 그러니 오늘은 일을 끝내고 쓰레기는... 꼭 챙겨 돌아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하고, 뼈 있게 경고 겸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는 알았다고 했다.
물이 적게 나와서 세탁하는 데 시간이 걸려 아침에 세탁을 끝내지 못한 상태로 나갔기 때문에, 기로는 세탁기 통에서 이불을 꺼내 빨래 줄에 널었다.
그러다 보니 지붕 위의 매화가 오늘은 더 화사하게 피어 있어서, 사진이라도 남겨놓고 싶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챙겨가지고 나와 사진 몇 컷을 찍고 보니, 오후가 어느덧 기울고 있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흐린 듯하던 날씨였는데 비가 몇 방울 떨어지기도 했다.
기로는 우산을 들고 호숫가로 나가 너른 호수 표면이 빗방울의 파문으로 변화되는 무늬를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래서 뛰어 가 받아보니, 박 만석이었다.
'이 양반이 오늘은 내가 호수에 있는 걸 못 본 걸까? 그리고 이런 이른 시간에?' 했는데,
"떡 먹으러 와!"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음력으로 ‘삼월 삼짇날’이라고,
그 집안의 운을 비는 간단한 고사를 지낼 거라는 말을 어제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기로가 지금 전주에 나가려고 준비 중이라고 하자,
박 만석은, 빨리 와서 아침을 함께 먹자며 그 뒤엔 자신이 막은댐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도 했다.
아무래도 어제 기로가 전주에 나가 법원 일까지 함께 봐주었던 것에 대한 박 만석 나름대로의 대응일 터였다.
그렇게 산장 집에 가 보니 어머니(산장 할머니)가 와 있었다.
어차피 애들은 학교 때문에 모두 전주에 가 있으니, 이런 일이 있어도... 이 집은 어른들 뿐이었다.
기로까지 네 명이 아침상에 앉아 간단하고 조촐한 식사를 했다.
물론 기로에게 아침을 같이 먹자고 했지만, 기로는 이미 간단하게 계란 후라이를 해서 먹은 뒤였기 때문에, 떡을 조금 집어 먹었을 뿐이다.
그런데 집에서 직접 찐 떡이라서 그런지, 쫀득쫀득했고 고소한 맛도 있어 좋았다.
'먹을 사람이 없어서 조금밖에 하지 않았다'면서도, 김 순임은 기로에게, 그래도 전주에 갔다 오는 길에 들러 떡 좀 싸가라고 했다.
그리고 박 만석의 트럭으로 기로는 막은댐까지 갔다.
"어저끄... 우리 일로 나갔다 왔는디, 무신 일로 또 전주에 나간디야?" 박 만석이 물었지만,
"예, 그저 개인적인 볼 일로요... 은행에도 한 번 들러 보고요......" 하고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거기선 곧 나오는 시내버스를 탔다.
사실 기로는, 말 그대로 은행에 가러 나가는 중이었다.
인터넷 뱅킹의 개인 인증자격이 기한을 넘어섰는데, 뭐가 문제가 있는지 다시 신청을 하면 잘 되기 않아서... 일단 은행에 들러 그 문제를 해결해 보고, 그 사이에 통장의 입출금(그런 일은 거의 없겠지만...) 현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전주에 다시 한 번 나가는 일이 귀찮아서, 그리고 그런 일쯤이야 어제 법원에 가는 길에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박 만석과 은행까지 가서 자신의 개인 속사정을 다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어서... 어제는 그저 박 만석의 일에만 충실했던 것이고,
오늘은 조용히 본인의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기로는 금전 문제 같은 걸 남에게 노출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목에 보니 산에는 진달래는 물론 어제는 없던 산 벚꽃도 피고 있었다.
세상은 하루 다르게 조금씩 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길가의 한 쓰러져 가는 집에는, 집 보다 더 큰 목련이 정말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한 그루가 얼마나 장관인지, 그렇잖아도 쓰러져 가는 집은 그 모습마저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가 않을 지경이었는데, 그 집은 비어있는 듯 폐허의 모습이었다.
'아, 저 나무를 심은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이 세상에는 살아있는 걸까? 아니면 꽃이 저렇게 피는데 그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 세상에는 이미 없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그 집은 너무 처참하게 폐허의 모습으로 남아 있어서, 그 집을 지어 살았던 사람 역시 그만큼의 나이보다 더 들었다면...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꽃을 보면 기쁨보다 그 지고 나면 남을 허무함이 더 크게 마음에 닿으니... 나는 아무래도 비관론자인가 보다......' 기로에겐 그런 생각도 이어서 들었다.
그렇게 나갔던 전주에서 본인의 일을 보고는 서둘러 돌아왔던 기로는, 바로 배를 탔다.
격이 싫어하는 것 같아서 집에다 놓고, 혼자서만 나갔던 것이다.
어제는 이래저래 시간이 안 돼서 못 탔지만, 그저께 보다는 조금 나은 실력으로 호수를 건너고 있었는데, 호수 가운데 쯤에서,
"격 ~ !" 하고 부르니,
다소 멀기는 했지만, '夢想?'의 검은 빛이 움직이는 게, 격이 주인 기로를 보긴 한 모양이었다.
당장 달려오려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기로의 눈에 들어왔고, 그러니,
'어저께는 싫어해놓고선......' 하긴 했지만, 그런 현상이 기로에겐 썩 반갑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내일은 데리고 타면 되니까.
그런 뒤 호수 반대편 기슭에 배를 대놓고, 기로는 바위에 앉아 둔터니 마을을 바라보다가... 준비해 간 하모니카를 꺼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첫 곡으론 '바람'을 불었다.
구름 낀 하늘 때문에 약간 쌀쌀하긴 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그러면서,
'이런 맛을 어디서 느끼겠는가. 여기 사는 동안 맘껏 누려보리라......' 하는 생각이었지만,
마음 같이 기분이 행복했던 건 아니다. 빚 문제가 자꾸만 신경이 써지는 요즘이었다.
그러면서 보니, 멀리 산장집에선 박 만석이 나무를 심고 있었다.
'좌우간 저 양반은 가만히 있는 법이 없으니......'
돌아오는 길에 기로는 배를 천천히 저어 박 만석이 일하는 곳으로 갔다.
'산장 아저씨, 지금 뭐 하세요?' 하고 배에서 기로가 묻자,
'응, 드릅 나무를 심는 중여... 이렇게 심어놓으믄, 나중에 누군가라도 오믄... 드릅 나물을 혀서 먹을 것 아녀?' 하는 것이었다.
'그래, 나무를 심을 때는 미래를 내다보고 심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근디, 장씨! 이제 노 젓는 게.. 제법 익어 뵈네?" 하기에,
"아직은요... 이런 식으로 몇 번 더 왔다갔다 저으면 좋아질 것도 같습니다......" 하며, 싫지 않은 내색을 하긴 했다.
그런 뒤, 배를 대려고 둔덕 쪽으로 가는데, 정미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인지... 격을 보러 '夢想?' 마당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정미야!"
"예, 안녕하세요?"
"응, 학교 갔다 오는 거냐?"
"예." 대답을 하면서, 아이는 쪼르르 배를 대는 쪽으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래, 잘 됐다. 이리 와 봐. 내가 배 태워서 니네 집까지 데려다 줄 게."
"정말요?"
"응. 이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러자 아이는 기슭 흙이 발간 곳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기로가 배를 대자 폴짝 뛰어 배에 올랐다.
자기 아버지(반장) 배를 많이 타 본 솜씨라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이제 가자."
"아저씨."
"응?"
"아저씨는 두 번째 ‘초보’ 같아요."
"엥? 두 번째 초보?"
"예."
"하 - 하 - 하 - 근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노를 제일 못 젓는 사람이라는 뜻이냐?" 하자,
"아니요. 더 못 젓는 사람도 있었어요. 배가 안 갔어요."
"그래?"
"예, 아저씨는... 이제 조금 빨리 가네요..."
기로는 웃고 말았다. 그러면서,
"하모니카 불어줄까?" 물으니,
"정말요?" 화들짝 반기는 기색이었다.
그러면서 기로는 젓는 노를 멈춘 채, 하모니카를 꺼냈다.
"응. 이게 하모니카야."
"아, 그렇구나."
"동요도 부를 수도 있고, 아저씨가 즐겨 부르는 음악도 있어... 근데, 너.. ‘해당화가 고옵게 핀...’ 하는, 그런 노래 알아?" 하고 물으면서, 아예 그 대목을 시범적으로 하모니카를 부니,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노랜데..." 했다.
애는 신기하다는 듯, 아니면 조금은 감동을 한듯 팔로 턱을 괴고 앉아서 다소곳이 음악을 듣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이뻐서 기로는 그 아이에게 하모니카를 불어주었는데, 연거푸 두 곡이 흘러나왔다.
하나는 열 살짜리 여자 애가 알 수도 있을 ‘엄마야 누나야’였고, 또 하나는 기로가 좋아하는 ‘바람’이었다.
배는 물결 따라 조금 움직이듯 호수에 떠 있었고, 기로 쪽에서 보이는 멀리 산 언덕 정미네 밭에선 할머니와 정미 부모가 뭔가 씨를 심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걸어오는 것보다 빨리 온 것 같아요, 아저씨."
"그래? 그렇진 않을 텐데, 니가 하모니카 소리를 들어서 그럴 거 같은데?"
그런 얘기를 하다 보니, 정미네 집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 배가 다 왔으니, 차비를 내고 내리세요." 갑자기 기로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하자,
애가 조금은 멋쩍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기로는,
"내일은 정각에 배가 출발하니, 늦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하자,
"내일은 학교 안 가는 날인데.. 식목일인데..." 하는 것이었다.
"흠, 그렇구나..."
내일은 '식목일'로 공휴일이었다.
그래서였나? 산장 아저씨도 나무를 심었잖은가 말이다.
아이는 내리고 기로는 다시 마을 입구 쪽으로 노를 저었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니 아이는, 자기 식구들 있는 쪽으로 가까이 가면서 기로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아, 이런 게 호숫가 마을 풍경이리라... 내가 이런 맛을 느끼며 살 줄이야......'
어쩐지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정미를 보내놓았는데, 문득, 기로는 자신이 산장 아저씨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자각이 오고 있었다.
그가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산장 아저씨의 멋진 모습이, 바로 아들과 개를 배에 싣고 노를 저었던 순간이었는데, 기로 자신에겐 있는 자식들까지 빼앗긴 상태이긴 하지만, 동갑내기라는 반장 딸내미는 어쩌면 자신의 딸로 쳐도 될 법했고... 또 격까지 태우며 배를 타는 요즘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던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던 것이다.
'아, 누군가 이런 내 모습을 보았다면, 그 사람도 내가 산장 아저씨한테 갖고 있었던 그런 멋진 사람으로 보였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 그럴 것만 같아... 기분이 아니 좋아질 수가 없었다.
'아, 게다가... 나는 하모니카까지 불었잖은가 말이다! 그렇담 내가 더 멋있었을 수도 있었겠네?' 하면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기분 좋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때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기로에겐 자신의 딸 '예은'이가 떠오르면서, 갑자기 기분이 180도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또 자동적으로(?), 그놈의 ‘이혼’ 문제가 떠오르고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