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와 회전초
집시족(Gypsy, 집시는 짚시의 표준어임)은 원래 롬(Rom) 사람으로 불렸으며 북부 인도에서 기원한 민족이다. 집시족은 인도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 유럽 남동부, 서유럽으로 옮겨갔으며 20세기 후반에는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에까지 이주하였다. 현대 롬인의 대다수는 유럽에 거주하고, 동유럽에 그 수가 많다. 수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은 집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루마니아이다. 유랑민족으로 핍박을 받으며 살았고 나치 치하에서 약 40만 명이나 학살당했다. 그들은 주로 중고 자동차 중개, 자동차 정비, 이동 서커스 단원, 동물 조련사, 행상, 노점상, 점원, 점쟁이, 땜장이 같은 일을 하며 살았다. 고단한 삶이지만 그들은 전통적으로는 유랑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한 지역의 문화를 다른 지역으로 전파시키는 역할도 해왔으며, 음악과 춤 등에서도 독특한 발전을 하였다. 나라와 터전이 없는 유랑민족이기에 정확한 인구는 모르지만 대략 200만~3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집시와 같은 사회 관습에 거리낌 없이 방랑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거나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보헤미안(Bohemian, 유랑족)이라고도 한다. 실제 보헤미아는 체코의 서부 지방의 지명이다. 그러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춤과 노래를 즐기는 집시들이 보헤미아 지방에 많이 살았던 시절에 프랑스 사람들이 집시와 같은 유랑자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그런데 집시처럼 떠돌이 살이를 하는 식물이 있다. 바로 사막에서 바람에 뒹굴어 다니는 회전초(回轉草, tumbleweed)이다. 회전초는 비름, 엉겅퀴, 명아주처럼 명아주과 속하는 식물이고 특정한 종을 지칭 한다기보다 굴러다니는 풀은 다 회전초라고 부른다. 대륙마다 있다. 예를 들어, 사하라사막, 러시아, 미국, 멕시코, 중동, 고비사막, 황하변은 물론 한국에도 있다. 남아공에 있는 회전초는 다른 회전초와는 전혀 다른 수선화과의 식물이고, 부활초는 부처손과 식물이다. 따라서 회전초의 이름도 지역에 따라 목적에 따라 회전초, 러시안 엉겅퀴, 부활초, 부처손, 예리코 장미 등 다양하게 불린다. 대표적인 이름은 회전초(텀블위드, tumbleweed)인데 말 그대로 굴러다니는(tumbled) 풀(weed)이다. 회전초란 뿌리와 줄기가 끊어져 잎줄기 부분이 바람에 굴러다니는 식물이다. 회전초는 한 곳에서 뿌리박고 살기 힘든 사막 같은 건조한 지방에 많이 살지만, 온대지역에서는 1년 동안 자라다가 가을이 되면 뿌리와 줄기가 끊어진다. 뿌리가 끊어진 줄기는 죽지 않고 둥근 공처럼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뒹굴어 다닌다.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살기 위한 회전초의 생존 전략이다. 이런 회전초는 말라 죽은 것 같지만, 사막이나 건조지역에서 바람에 밀려다니고 뒹굴어 다니면서 사방에 씨앗을 뿌린다. 수분이 없을 때는 동그랗게 말고 있다가 비가 오거나 물이 있는 곳에 닿으면 다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녹색 줄기를 뻗으며 쑥쑥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회전초를 미국에서는 러시아 엉겅퀴라고도 한다. 러시아 엉겅퀴는 말라서 굴러다니기 때문에 회전초라 한다. 미국 북서부 사막지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러시안 엉겅퀴는 1873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이주한 오염된 '아마'와 '밀' 씨앗을 가져온 농부들에 의해 미국으로 옮겨졌다. 우연히 미국의 사우스다코타 주에 파종되어 급격한 속도로 퍼져나가 20년간 비교적 짧은 시기에 미국 대부분의 사막을 가진 주에는 바람이 불면 쉴 새 없이 날아다니며 회전초의 씨앗을 사방팔방 퍼트려 퍼져나갔다. 러시아 엉겅퀴는 강수량이 적고 토착종들의 방해를 가볍게 물리치고 넓은 농경지와 서부의 광활한 반사막 평야를 재빠르게 점령하였다. 나아가 1800년대 중반, 이 야생식물은 이미 대부분의 서북부를 가로질러 바람에 굴리고 철도로 운반되어 캐나다로 굴러 들어갔다.
회전초의 또 다른 이름은 부활초(復活草)이다. 부활식물에게 있어서 부활이란 죽음에 가까울 정도의 혹독한 자연환경을 견디며 다시 살아난다. 가뭄 끝자락에 사막에 쏟아진 비를 맞는 그 순간은 찬란한 ‘다시 살아남’의 순간은, 삶의 기쁨이 넘쳐나는 순간일 것이다. 그 짧은 기간에 그들은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포자를 만들거나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어 자손을 퍼뜨린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부활이다. 부처손과의 부활초의 원산지는 멕시코의 치후안후안 사막(Chihuahuan Desert)이다. 부활초는 건조한 사막에서 바싹 말라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부활초처럼 가뭄이 들면 생장을 멈추고 다음 비가 내릴 때까지 죽은 것처럼 지내는 양치류, 이끼류, 그리고 광합성을 하는 남세균류, 지의류 등을 부활식물(resurrection plant)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부처손과 바위손은 잎이 붙은 모양이 주먹을 쥔 것 같다고 ‘주먹 풀’ 또는 ‘권백(卷柏)’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부활초처럼 건조하면 잎이 오그라들고 건조에 강하다. 그리고 생긴 모양도 부활초와 흡사하다.
회전초의 또 다른 이름은 '예리코의 장미(rose of Jericho)'이다. 사막의 대표적인 식물인 회전 초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자유롭게 살아간다. '예리코의 장미’라고 불리는 부활초는 사하라 사막과 이스라엘, 요르단, 이라크 등 중동지역의 메마른 사막에서 살아간다. 중동지역 외에도 여리고의 장미는 멕시코와 미국 일부를 포함하는 치와와 사막에서도 서식한다. 이 식물은 양치식물이 아니고 15cm 정도의 키에 조그마한 흰 꽃이 피는 여러해살이의 십자화과 식물이다. 유다 광야의 예리코 계곡에서 자란다고 해서 '예리코의 장미'라 한다. 예리코의 장미는 물이 없으면 휴면상태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의 죽은 것처럼 광야를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물이 있는 곳에 도달하거나 비를 맞으면, 오랜 세월 동안 품에 안고 뒹군 씨앗이 떨어져 싹이 나고 수 주 만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다시 바싹 말라 씨를 꼭 끌어안은 채 열사의 바람에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다니며 물을 기다린다.
바람으로 뒹굴어 이동하는 회전 초를 본떠 로봇을 만들면 어떤 지형에서도 이동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 결과 2003년 미국 항공우주국은 바람이 불면 굴러다니는 행성 탐사 로봇을 만들어 그린란드에서 시운전에 성공한 바 있다. 앞으로 회전 초를 닮은 로봇은 바퀴달린 로봇이 접근하기 어려운 언덕과 굴곡이 많은 화성 탐사에 활용될 전망이다.
회전초가 땅에서의 삶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처럼 물에서의 떠돌이 삶은 부평초이다. ‘부평 같은 내 신세가 너무나 기가 막혀’라는 타향살이의 노래 구절이 생각난다. 부평초는 사람들의 덧없는 삶을 표현할 때 흔히 쓰인다. 역시 부레옥잠을 삶도 집시의 방랑 생활에 견줄 만하다. 부평초는 개구리밥과에 속하는 다년생초이다. 개구리밥은 논이나 못, 개천의 고인 물에서 자란다. 개구리밥보다 대표적인 부평초는 부레옥잠이다. 부레옥잠은 열대, 아열대 아메리카 원산지 잎자루가 공처럼 둥글게 부푼 모양이다. 그 안에 공기가 들어가 부레옥잠이 물 위에 떠오를 수 있다. 어류의 공기주머니 '부레'에 한자어 '옥잠(玉簪, 옥비녀)'이 붙여진 이름이다. 메콩강 위를 떠다니는 수상식물 부레옥잠의 생애가 회전초와 다를 수 없다. 부레옥잠은 뿌리를 박지 않고 물위를 부유하며 살아간다. 아니 구태여 뿌리를 밖을 필요가 없는가 보다. 수생식물 부레옥잠들이 긴 강줄기 곳곳에 군집으로 터전을 마련하고 질긴 생명력으로 강을 지키고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러시안 엉겅퀴의 광란이동도 있지만, 거칠고 황막한 사막을 굴러다니는 회전초의 삶이 애처로움에 숙연해진다. 회전초는 뿌리를 기억하지 않는지는 모르지만, 묵묵히 바람이 불어주는 대로 굴러다닌다. 살았던 곳에서 가깝게 갈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고 계곡이나 벌판이나 나무나 바위 밑이나 바람의 굴려주는 대로 굴러가고 머무는 곳이 자신의 터전일 뿐이다. 뿌리내리지 않으니 거처가 필요 없다. 씨내린 후대도 선대의 삶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이어진다.
땅에서 뿌리박지 못하는 회전초도 있고 물 위에 떠다니는 부레옥잠도 있다. 회전초나 부레옥잠이나 집시나 떠돌이 삶을 사는 것이다. 모두가 생명에 대한 신비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경탄할 뿐이다. 우리 인간들도 아무리 어려워도 역경을 헤치는 회전초에서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집시의 유랑살이처럼, 회전초의 떠돌이 삶도 나름대로의 존재의 가치가 있고, 생명의 영원함과 두려움을 보여준다. 집시나 회전초나 부레옥잠의 삶이 모두 각개의 팔자이기에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닌가 보다. [2021.07.24.]
[더보기: ‘내 팔자인데 왜 그래, 집시와 회전초’, 심의섭, 곰곰이 생각하는 수상록 3, 우민화의 떡밥, 노답의 타령, 한국문학방송, 2021.10.5.: 30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