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과자
심득순/수필가
연말연시, 일본 열도 오사카 3색 테마 여행을 떠났다. 낯선 곳 여행길은 언제나 설렌다. 간사이공항에 내려 청사 밖을 나오니 색다른 이국 풍경에 심장 고동소리가 빨라졌다. 크리스마스 시즌 한차례 불어 닥친 혹한에 떨다가 찾아온 오사카 거리는 온도가 따뜻해 기운이 넘쳤다. 예약된 호텔에 여장을 풀어놓고 관광에 나섰다. 간사이 스루 패스로 지하철과 기차를 번갈아가며 타고 내리고를 반복했지만 오사카, 나라, 교토 구석구석 다 살펴보기에는 3박 4일 여정이 빡빡한 듯했다.
나라市 동대사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나라공원에서 생긴 일이다. 이방인 엉덩이를 냅다 들이박는 왕방울 눈을 가진 사슴 한 무리. 그냥 지나치기에는 참 맑은 눈빛이라 인근에서 과자 한 봉지를 사들고 한 조각씩 떼어 입안에 쏙쏙 넣어주었다. 더 달라고 어린애처럼 조르는 사슴이 정말 사랑스러워 또 한 봉지 사서 기분 좋게 인심을 팍팍 썼다. 날름날름 받아먹는 납작한 과자가 맛있어 보여 나도 한 조각 입에 살짝 넣어보았다. 입안에 착 달라붙는 그 맛. 유년의 찬란했던 그림자, 하얀 눈처럼 기억이 선명한 선베이라는 과자였다. 종작없이 기억에 깊숙이 파묻힌 그리운 옛날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 일을 마치고 늦게 집으로 돌아오시던 날, 이따금 노란 봉지에 옛날과자를 가득 채워 우리 4남매 앞에 내밀어주곤 하셨다. 참깨나 김이 한쪽 끝에 묻어있던 얇고 바삭바삭한 과자 한 봉지를 겨울 긴긴 밤, 뜨뜻한 아랫목 두터운 이불 밑에서 다리를 포개고 앉아 맛있게 먹던 일. 과자가 입에서 바스락거리며 녹아들 때, 찰랑거리던 우리 형제간의 애틋한 정이 어린 나에게도 철철 휘감겨들었다. 우리는 과자를 한 개씩 치켜들고 누가 빨리 먹나 시합도 했다. 이불 밑에서 발을 꼼지락거리며 내 다리 네 다리 우겨대며 차오르던 명랑한 웃음소리가 방안을 휘돌아 외풍에 이웃집 담을 넘어갔으리라. 그 시절 전력량이 부족해 걸핏하면 전기가 나가 캄캄한 방안에 촛불을 켜놓고 하던 손 그림자놀이. 큰오빠는 토끼, 작은 오빠는 강아지, 동생과 나도 곧잘 따라 흉내를 내곤 했다.
대학교를 졸업한 큰오빠가 취직해 첫 봉급을 받은 날, 큼직한 봉지 속에 넘치도록 과자를 사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와 입안이 궁금한 동생들 앞에 떡하니 부려 놓아 주던 날도 떠올랐다. 동생들을 몹시 아껴주던 큰오빠가 얼마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던지 내 친구들 앞에서 오빠자랑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우리는 그 날 질리도록 과자를 먹고 또 먹었는데 봉지에는 과자가 남아돌아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까지 먹던 날이 이제는 사무치게 그립다.
아버지께서 사주시고 큰오빠가 사 주던 옛날과자를 여행 길목에서 다시 만나 맛볼 수 있어 감개무량했다. 한 식구가 한 시절 오순도순 행복하게 지냈던 시간이 눈앞에 아롱거려 가슴이 벅차고 시려와 눈물이 차올랐다. 어렸을 때 접했던 그런 단편들이 이제는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추억거리로 남아 있다.
수년 전 부모님도 타계하고 큰오빠도 황급히 부모님을 뒤따라 가버렸다. 훨훨 날개를 단 세월은 여섯 식구를 반 토막으로 잘라버렸다. 작은 오빠와 나는 여기 부산에서 동생은 먼 타국에서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나의 현재를 더욱 깊게 해 주던 지난 날,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서로 얼마나 다르게 살고 있는지 때때로 마음이 딱딱해지기도 한다.
고소한 과자 향에 사슴이 떼로 몰려들어 내 곁에 바싹 따라붙었다. 한 봉지 더 사서 후하게 인심을 썼다. “아기들아! 많이 먹어라, 먹고 또 먹고 대한민국 부산 여자 잊지 말고 오래오래 기억해야 해!” 초롱초롱 빛나는 왕방울 눈빛에 내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거렸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싸구려 기념품이 아닌 정신의 생활필수품으로 낚아 올린 한 편의 좋은 영화 같은 여행이었다.
2011.01.5
첫댓글 심듣순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감명 깊게. 남의 과자 한 봉지로 추억을 곱씹게 되다니, 표현의 힘인가 싶습니다. 저는 며칠 전 4박 5일 괌에 다녀왔습니다. 바닷가에서 O Sole mio며 뱃노래를 불렀지요. 박수도 받았습니다. 원래 그렇게 만용을 부리는 사람에겐 동정(?)이라도 베풀기 마련이지요. 좋은 글 더욱 많이 쓰시고 새해엔 더욱 행복한 일상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원우선생님! 잘 계시는 모습 정말 반갑습니다. 괌에도 다녀오시고 노래도 부르시고 활기찬 생활 하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사모님도 건강이 좋아져서 손자랑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항상 선생님의 가정에 빛이 되어 앞으로 좋은 날 많으리라 믿습니다. 4월에 독일 동생 집에 다니러 갈 예정입니다. 충전! 재충전! 힘 내고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