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연평도 들개’
이원우(84년 <한국 수필> 추천/ 97년도 한글 문학 소설 등단/ 지은 책 16권)
일생을 통해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랴마는, 적어도 개에 관계되는 그런 직 간접 체험은 내게 가히 충격적이라 해도 괜찮으리라. 오래 전 잘 읽히지 않는 <애견 생활>이라는 잡지에 잡문이나 쓰던 내가 같은 책에서 이런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십 년도 훨씬 넘었으니 글쎄 상세한 내용이야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제목 하나만은 활자체까지 재생시킬 수 있다. 한라산에 들개 득실득실!
놈들은 줄잡아 1천 마리는 된다고 하였다. 무리지어 다니면서 노루(혹은 고라니?) 등을 사냥함으로써 먹이사슬을 끊는다는 것이다. 한창 개에 대해 갖가지 기상천외의 곁가지-예를 들어 수컷 늑대와 교배한 셰퍼드 사이에서 낳은 반(?) 강아지 사진 따위를 스크랩하는 등-에 몰두해 있던 터라, 내심 적잖이 흥분해 있었다. 내 목숨을 앗아 갈 뻔한 후로다가 저승으로 떠난 뒤에 나는 의식적으로라도 개를 내 머리에서 지워나가고 있는 참이었다.
물론,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숙명 같은 인연이 아직은 약간 남았다. 내가 심부름하여 가져다 놓은 삽살개 암수 한 쌍 사이에서 두 번째 새끼 여덟 마리가 난 것을 어제 오순절 평화의 마을에서 보고 왔으니----.
그러나 내가 한라산 들개의 존재에 대해 반신반의해 왔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다가 작년 신문과 방송 보도를 통해 놈들이 ‘득실거린다고’는 할 수 없지만, 민가 근처에서 가축들을 해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였다. 1천 마리는 허수라 해도, 그 1/10은 된다는 게 기자들이며 담당자들의 주장이었다.
사진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는 소위 들개라는 녀석들이 너무 나약해 보였다. 아프리카에 서식하면서 지금 멸종 동물로 지정, 보호를 받고 있는 들개, 즉 리카온에 비해서 오히려 너무 초라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리카온은 셰퍼드보다 키도 크고 체중도 훨씬 많이 나간다는데, 제주도 들개는 내 입에서 튀어나온 신음소리가 겨우 에계계 정도.
토사견이 우리를 뛰쳐나가서 야성화(野性化) 된 무리쯤으로 지레짐작을 해 오던 내겐 차라리 실망이었다. 내가 주먹으로 내리쳐도 제압할 수 있으리라 싶어 그 시늉을 냈더니 아내가 까닭도 모르면서 웃는 것이었다.
들개, 사전에 겨우 두어 줄로 풀이되어 있다. 주인 없이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개, 야견(野犬). 이를 요즈음 세태에 맞춰 부르면 다름 아닌 유기견(遺棄犬)이다. 주인이 기르다가 병들거나 먹일 게 없다 보니 내다 버린---.제주도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따라서 그런 경우가 생겼을 것이고, 그 놈들 중 암컷이 발정이 와서 자연 교배, 새끼를 출산할 수밖에 없다. 그런 악순환이이 결국 10대(代) 아니면 그 이상 뻗친 결과가 들개로 탈바꿈하게 된다. 산으로 쫓겨나 야성이 길러졌으나, 영양실조나 근친 교배로 인해 체구도 왜소할 수밖에. 놈들이 겨우 양이나 갓 태어난 송아지를 사냥감으로 삼는 이유가 그것이리라.
우스운 고백인데, 내가 이렇게 들개 야화(野話)의 메신저가 된 데는 또 다른 동기가 있다. 내 노인 학교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던 공군 어느 부대의 부사관에게서 들었다. 집에서 뛰쳐나왔거나 쫓겨난 듯한 개들이 부대 내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거길 보금자리로 삼고 있다는 것. 암컷과 수컷이 그렇게 어울리다 보니. 종족 번식이 자연히 이뤄질 수밖에. 병사들과의 불가근불가원 관계는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주식? 아마 잔반이었겠지. 아니면 조류의 알 등이든지.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녀석들이 영락없는 들개의 원조다. 후문은 못 들었으되, 지금까지 부대 내에 들개들이 남아 있지는 않으리라.
아무튼 제주도 들개는 골칫덩어리임에 틀림없다. 맹수 축에도 못 끼이는 멧돼지야 많을 테지만, 그 놈들은 잡식성이니 고라니나 노루 혹은 산토끼를 해칠 턱이 없다. 자연스레 들개가 먹이사슬의 정점에 올라 앉아 있는 것이다. 개가 들어도 웃지 않을까?
문제가 심각하다. 나 같은 초로도 까짓 몽둥이 하나만 가져도 한 놈쯤의 습격을 물리칠 자신이 있는데, 정작은 은근히 두려움에 떠는 사람도 더러 있다더라. 오죽하면 누가 이런 걸 인터넷에다 올려놓았을까. 올레길인들을 혼자서야 맘 놓고 걸어 다닐 수 있겠느냐고. 정답은 그건 기우(杞憂)이 지나지 않는다는 것.
들개,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애견 문화에 그 원인이 있다. 성직자들도 입으로만 생명 존중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개고기를 먹는다. 반려 동물이기에 앞서 그들을 비롯한 상당수 국민들에겐 먹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헌신짝 취급도 예사니, 녀석들의 ‘가출’은 자의든 타의반? 게다가 동물 보호 시설이나 단체는 턱없이 부족하고. ‘들개’와 맞닥뜨리게 된 것, 나는 자업자득이라고 풀이한다.
북한 군이 얼마 전 우리 연평도에 포격을 퍼부었다. 군인과 민간인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순간 내 머리에 나는 맨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이랬었다. 아, 그 곳 개들을 어쩌지?
남들은, 수십 년 몸담고 살아오던 집을 버리고 파란 길에 오르는 사람들을 보고 이 무슨 망령된 생각을 하느냐고 당연히 꾸짖으리라. 그러나 나대로는 다 사려가 있었다고 자부한다. 분명코 주민들은 급한 대로 옷가지나 패물 저금통장 등과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들만 지니고 배를 탈 것임이 분명하다. 비좁은 배에 개를 실었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질 테니.
나는 연평도에 남은 개가 재앙이 될 줄 예견하였다. 주먹구구 식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는 다 근거가 있어서였다. 아니나다르랴, 동물 보호 단체에 의하면 연평도의 개들이 상당수 포탄 파편에 맞아 다치거나, 먹이가 부족하여 그 참상이 목불인견의 지역에 이르렀다는 것. 그러다 보니 사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녀석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바람에 약육강식의 법칙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단다.
그뿐만 아니다. 가장 염려되는 게 우리가 녀석들 모두를 들개로 분류해야 할 염려조차 해야 할 형편이란다. 무너져 내린 빈 집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병약해서 뭍으로 못한 일부 노인들을 녀석들이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그저 아찔할 따름이다. 게다가 녀석들 중 일부가 광견병에 걸렸다 치자. 우리는 없는 곤욕을 치러야 한다. 제주도의 들개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서두르지 않으면 인간이 어떻게 반려 동물을 잃어버리는가 하는 그 불행한 역사의 현장에 서게 될지 모른다. 북한 군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이유가 내겐 따로 있다. 응징의 당위성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일은 들개와 같은 무리나 저지를 수 있다는 결론 앞에서 바야흐로 나는 묘한 정서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