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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둘째 딸에게
이 못난 아빠는 정말 먼 길을 돌고 돌아서 너의 앞에 섰단다. 그냥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갔다면 너에게 아무런 고통과 궁핍을 주지 않고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나약하고 안락한 회색인의 소시민으로만 살기에는 아빠의 가슴은 너무 허전하고 그 심연의 깊은 곳이 미식거려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단다. 그래서 가진 것을 다 버리면서까지 중원의 대륙을 방랑하며 몇 년이란 세월을 보냈단다.
중국 땅 대련의 노후탄이란 바다에서 05년도 추석을 보냈단다. 동해에 떠있는 달을 보노라니 아름다운 보름달은 저 수평선 멀리로 사라져버리고 홀로 계시는 너희 할머니와 아무런 세상물정 모르는 순하디 순한 너의 엄마, 가람이 언니, 우리 예쁜 딸 가배 너와 세상에서 가장 순진한 우리 종손인 네 동생 두혁이의 얼굴이 내 영사막에 맺혀서 두 눈에서는 죄스러움과 그리움이 혼재된 눈물만 흐르더구나.
아빠는 천성이 부박하여 역마살을 타고 태어났단다. 이제 그 역마살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너희들이 아닌가 싶다. 특히 아빠를 가장 많이 닮은 네가 아니었나 싶다. 아빠는 재복은 없어도 자식복은 타고 태어났다고 자부한다. 일단 너희 세 명이 다 건강하니 복이요, 천성이 맑고 그 성품들이 모나지 않은 것이 복이요, 저마다 특출한 재주는 없어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 머리를 타고 태어났으니 그 또한 복이 아니겠나 생각한다. 하여 언니도 일류대는 아니어도 지가 원하는 서울성신여대 사범대에 가고, 너도 어린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하고, 두혁이는 지가 좋아하는 한문과 역사를 열심히 하고 성실한 청년으로 성장할 것 같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둘째 딸 가배야
아빠는 우리 선인들 중에서 다산 정약용선생님을 가장 존경한단다. 너도 익히 알고 있듯이 다산선생은 백서사건 사건으로 인하여 그의 형과 함께 18년간의 기나 긴 세월 동안 절역의 강진 땅에서 유배생활을 했단다. 다산선생은 유배생활의 고달프고 외로운 나날을 한숨과 원망으로만 보내지 않고, 방대한 저술활동으로 승화시켜 꽃다운 이름을 만세에 날렸단다. 선생은 평생 엄청난 양의 책을 집필하였는데, 그중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목민심서니 경세유표 같은 작품들이 모두 유배생활 때 저술된 것이란다. 아빠는 특히 선생이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가 너무 감명 깊었단다. 자식을 가진 이 중 이 작품을 읽고 감동과 죄스러움을 느끼지 않은 이는 하나도 없을까 한다. 아빠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알았단다. 따라서 우리 가배도 감각적인 책들에서 벗어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만은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빠가 새삼 정약용선생 애기를 하는 것은 사람이 어려움이 있어야 성공이 있고, 인생이 성숙된다는 것을 애기하고 싶은게다.
가배야
너희들은 기운 집안의 자식들이다. 집안이 기울었기 때문에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은 책을 읽어 학문을 하는 일이다. 학문을 하여 네가 가는 길을 확고하게 다지는 것이다. 혹자는 기술만 연마하면 되지, 아니면 실질적인 것만 하지 무슨 구닥다리처럼 학문을 하느냐고 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란다. 소설을 빗대서 애기해보자. 학문적 깊이가 없는 작가의 작품은 고전이 되지 못 한단다. 즉 사상이 없는 작품을 이야기이지 소설이 아니란다. 자신의 철학이 없이 소설을 쓰는 자는 이야기꾼이지 진정한 소설가가 아니란다.
이런 사상과 철학을 가지려면 아니 학문을 하려면 독서를 해야 한다. 학문의 맛을 알면 산해진미도 필요 없고, 오직 독서의 맛에만 빠진단다. 이 맛을 알게 하는 것이 아빠가 가배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두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그 하나는 머리요, 둘째는 뜻이란다. 오직 머리가 있고 그 뜻을 강직하게 한 자만이 독서를 하여 학문을 세우고 나아가 입신양명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둘째 너는 머리가 좋고 글재주 역시 뛰어나단다. 아빠는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고, 20년간 학원 강단에서, 대학 강단에서 문학을 강의했지만 우리 가배의 글재주와는 비길 바도 못 된단다. 이는 중학교 3학년 때 소설책 세 권을 출간한 것만으로 충분히 증명된단다. 그러나 재주가 승하면 자만과 나태에 빠져서 그 재주를 드러내지 못 하는 게 보편적인 인간의 심성이란다. 재주와 성실한 노력이 함께 경주될 때 그 사람은 성공한단다. 재주와 성실 중에 어느 것이 성공의 열쇄일까? 당연히 성실이다. 따라서 가배야! 사랑하는 내 딸아! 제발 성실하게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공부에 전념해다오. 네가 희망하는 연세대 국문과를 합격하고 또 소설가로 그 문명을 날린다면 아니 네가 바라는 소설가의 길을 뚜벅 뚜벅 간다면 틀림없이 박경리나 박완서 최승희, 양귀자, 신경숙 같은 작가가 될 것을 확신한다. 네가 그런 길을 간다면 이 아빠가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끼며 너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살다가 죽더라도 보람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빠는 아빠의 타고난 역마살을 죽이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접고. 때론 그것들이 그리워서 가슴이 미식거리더라도 꾹꾹 참으며 너희와 너의 엄마 곁에서 여생을 봉사하며 살 것을 맹세한다.
사랑하는 내 딸아!
다시 정약용선생의 말을 인용하자. 사실 아빠도 실천하지 못하는 점이 있는데 너에게 당부하려니 민망하구나.
첫째, 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이는 아빠도 올빼미 체질이라 지키지를 못하는 말인데, 동트기 전에 일어나지는 못 하지만 6시에는 일어나자. 농부들은 식전에 하는 일이 하루일의 반절을 한다는구나. 특히 새벽에 일어나면 하루가 길어서 가슴이 뿌득하고, 또 맑은 정신에 공부에 전념할 수 있어서 좋지. 그러나 너는 자식들 중에서 아빠를 제일 많이 닮아서인지 모르나 잠이 많고 게으르단다. 하지만 올해는 수험생이니만치 네가 과부하에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한번 뻑세게 공부해보자구나. 알았지?
둘째, 항상 기록해라. 이 말도 참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지? 정약용선생은 저술 작업을 너무 많이 했기에 엄지 검지에 군살이 배기고 너무 오랜 시간을 방바닥에 앉아서 글을 썼기에 엉덩이에 종기가 생겼단다. 그래도 선생은 저술활동을 멈추지 않고 서서 글을 썼단다. 이는 초인적인 집념이지. 우리 딸에게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이런 마음으로 올 한 해 동안 아빠랑 같이 공부했으면 한다.
셋째, 무릇 독서할 때 도중에 의미를 모르는 문구를 만날 때마다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본 뿌리를 파헤쳐 글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아빠나 엄마, 우리 딸 가배가 꼭 명심하여 실천할 말이 아닐까 한다. 우리 는 문학을 했기에 글을 읽을 때, 스토리 위주로 일고 흥미본위로 글을 읽지 그 행간에 감춰진 내용을 간과하는 병폐가 있지? 특히 아빠가 엄마의 책읽기 습관을 싫어하는 것도 바로 이 이유란다. 엄마가 흥미 위주의 독서를 하기에 관념적인 것, 철학적인 것, 사상적 깊이가 있는 책읽기 훈련이 안 된 게 아니겠니? 하여 앞으로는 속독 위주의 글 읽기를 지양하고 깊이 있는 글 읽기를 하자. 예를 들면 최인훈의 「광장」같은 작품이 좋은 텍스트가 될 것 같구나. 이 작품에서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유사점 비교라든지, 주인공 이명준이 왜 방황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 그 시대적 배경(해방 전후의 시대적 상황)을 통해서 이해하기, 이명준이 사랑하는 여인 은혜와의 사별이 무엇으로 극복되는지를 꼼꼼하게 되새김질하며 읽는다면 너의 사고력과 지능은 일취월장하리라고 확신한다.
사랑하는 내 딸 가배야!
아빠가 생업을 방기하고 저 중국 대륙을 횡단한 것이 한 순간만의 치기가 아니란다. 그렇게 하지 않고 생활의 노예가 되어 늙어 죽는다면 너무 원통해 한이 될 것 같았단다. 물론 엄마는 아빠를 많이 원망하고 너도 피폐해진 생활을 고단해했다는 것을 아 아빠는 잘 알고 있단다. 그러나 우리는 굶지 않았고 그래도 그럭저럭 살았지 않니? 또 너희들도 아빠가 집에 없다면 어떻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아울러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혁이가 아르바이트해서 용돈 모은 것을 보고, 또 가배 네가 책 써서 어렵게 벌은 돈 인세를 생활비에 보탰다는 것을 보고, 가람이 언니도 한 달이나마 아르바이트한다는 것을 듣고 아빠는 무한한 감동을 먹었단다. 특히 생활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네 엄마가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 아빠는 무척 뿌듯했단다. 엄마가 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을 갖고 주체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척 대견하더구나.
가배야
조개가 암을 앓아야 진주가 된단다. 정철의 그 우수한 작품들도 유배생활이란 고통의 산물이며, 고산 윤선도 선생 역시 유배란 눈물이 없었다면 고산의 어부사시사가 나올 수 없었겠지. 현대 작가로는 이문열 역시 분단의 민족사의 질곡 속에서 피눈물로 얼룩진 가족사를 갖고 있단다. 양반의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란 동경유학생인 아버지가 코뮤니스트가 되어 월북했기에 이문열은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가난에 찌든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단다. 그래서 이문열은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모두 중퇴하고 말았단다. 하지만 그 아픈 가족사와 고통, 고뇌들이 녹아서 문학작품으로 승화되었단다. 박경리선생도 마찬가지야. 선생은 29세 때에 남편이 딸 하나를 남기고 저세상으로 먼저 갔단다. 그야말로 청상과부가 온갖 형극을 헤치고 딸 하나를 잘 길러서 그 유명한 시인 김지하에게 시집보냈는데, 그 사위가 박정희정권 때 사형선고를 언도받고 수감되었단다. 그 아픔을 달래려고 원주시 치악산자락으로 들어와서 쓴 작품이 토지란다.
가배야!
아빠가 일부러 고난의 삶을 살려는 것이 아니라 대학입시의 수험생 시절이 너무 고달프다고 엄살 피우지 말라는 거야. 엄마 곁을 떠나서 독서실에서 혼자 생활한다고 너무 외로워하지 말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거야. 이곳에는 학원의 언니 오빠들이 있고, 아빠가 곁에서 챙겨주잖아. 알았지?
나는 누가 뭐래도 우리 딸 가배를 믿는단다. 너의 착하고 밝은 성품을 믿으며, 너의 좋은 머리를 믿는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앞에서 염려하는 것, 게으름과 성실성과 노력의 결여이다. 아빠가 다시 한 번 부탁하자. 올 한 해만큼은 아빠를 믿고 아빠의 지도하에 공부하자구나. 아빠가 학원원장으로 복귀한 것은 우리 딸내미 교육 때문이었단다. 네가 열심히 하여 너의 희망하는 대학 연세대 국문과만 간다면 아빠가 잃었던 모든 것이 회생되는 거란다. 알았지?
그리고 가배야! 항상 두혁이를 사랑해다오. 더도 말고 지금처럼 말이다. 세 명의 자식 중에 항상 두혁이가 눈에 밟히는구나. 막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이 험난한 세파를 잘 이겨 나가며 사회생활을 잘 할지 어쩐지 불안해. 두혁이는 너를 존경하고 잘 따르니 잘 부탁한다. 간혹 네가 꿈도 주고, 간혹 매도 주고 알았지.
그래 가배야
이 아빠는 가배의 아빠라는게 너무 자랑스럽단다. 너도 아빠의 자랑스러운 딸이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밤도 거의 종착역에 다달았구나. 밖에는 눈이 내린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밤이면 러시아의 영화 닥터 지바고가 생각난다. 우리 가배가 없었다면 올해는 눈 내리는 시베리아의 백양나무 숲 속을 거닐고 있을건데........
그러나 시베리아를 못 가도 좋다. 이렇게 똑똑하고 사랑하는 딸이 있으니까? 내년에 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작품 활동을 하여 원고료 받으면 아빠 시베리아 횡단열차 티켓좀 사다오. 알았지?
그럼 편지 읽고 답장 바란다. 안녕
07년 1월의 마지막 날에 아빠가
첫댓글 병훈이 국어 선생님 답게 장문의 글을 따님에게 보냈군.... 우리도 이젠 자식만 잘 자라 주어도 더 바랄 나위가 없는 쉰세대 지.... 고맙게 잘 읽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