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의 식탁
최해자
“어머님, 식사하실 때 꼭 이 찬기를 사용하세요.”
이태 전 딸네와 동거하다가 다시 집으로 이사 오던 날, 이것저것 짐 정리를 도와주던 새아기가 네 칸꼴로 만들어진 찬기를 꺼내 놓으며 하는 말이다.
요즘은 주방을 장식하는 도구들이 참으로 다양하다. 음식도 단지 먹는다는 개념을 넘어 식문화 예술을 가미하는 시대이니, 화려하거나 수수하거나 기품이 있거나 사용자의 취향에 따라 주방 깊숙이 들어와 있는 식기들이다. 새아기가 사 온 찬기에도 들여다볼수록 고아한 매화꽃 한두 잎이 조심스럽게 올라와 있다. 분토 재질의 특성상 약간 투박스러운 감은 있지만, 무엇보다 자연 친화적인데다 설거지의 간편성까지 곁들인 것이니 맘에 쏙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나저나 새아기는 어느 틈에 시어미의 취향까지를 읽어내었나! 생각할수록 기특하다. 때때로 반찬 만드는 일이 귀찮더라도 매끼 삼 찬 식사는 기본이라고 권하는 살가움이 고마워 당장에 식단표를 짠다. 김치 한 칸, 나물류 한 칸, 부드러운 생선조림 한 칸, 나머지 한 칸은 새아기의 효심을 안치려고 한다. 그리고는 목이 갸름한 호리병에 향 좋은 프리지아꽃 서너 송이를 꽂는다. 끼니마다 이 정도의 밥상을 차린다면 솔로의 식탁! 그다지 쓸쓸하지는 않겠다 싶다. 새아기가 다녀간 뒤 집안에 가득 차오르는 온기이다. 마음속에 일렁이는 감사와 더불어 주방 벽체에 걸린 작은 액자로 눈길을 돌린다. 이 그림 액자는 오래 전 우리가 광주로 이사 나올 때, 시골 교회를 담임하던 전도사님이 선물해준 의미 짙은 그림이다. 각별한 마음을 실어 믿음의 부피로 바라보면 예수님 초상이 나타나는 추상화이다. 버릇처럼 화폭 아랫부분에 새겨진 기도문을 묵상한다.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이사 오던 날 나는 이 기도문과 함께 현관을 들어섰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말없이 나의 손짓 발짓을 꿰뚫어 보시는 그분의 영적 배경을 믿고, 버젓이 솔로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더불어 여기에 남은 나에게 이만한 터전을 마련해주고 떠난 그 사람에게 하시라도 고마움을 잊지 않으리라 하며, 또 하나의 약속! 내 삶의 원소가 되는 자식들을 곁에 세운다. 직간접적으로 어미의 현실에 동참해주는 그들이기에 얼핏얼핏 스미는 외로움을 밀어낼 수가 있겠고, 자식은 부모의 노후에 찬란한 배경이 되는 것이니, 누군가가 “홀로 외롭겠어요?”하고 물으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화답할 수 있어서 그만이다.
하여튼 요즘은 잘 먹고 잘살자는 화두가 대세이다. 그러니만큼 매끼 꼭 서너 가지 이상의 반찬을 만드는 일을 일상화하려는 것이지만, 때때로 디지털시대 이전의 대가족 시절이 떠오르는 것을 제어할 수는 없다. 어린 시절에 책상 겸 밥상으로 썼던 좌식 동그란 식탁에서 채소 반찬이 주메뉴로 오른 그 소박한 입맛을 즐기며 뼈를 키우고 포동포동 살을 찌웠던 식탁 풍경인데 그 많던 가족들은 다들 어디로 갔나! 일과를 마치고 한 상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저녁 식탁을 마주한 유순했던 형제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세상 물정을 몰랐던 만큼 행복지수를 높이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결속할 줄 알았던 형제들의 토닥거림이 연신 돌아든다.
하지만 지금은 디지털 문명시대이다. 아무리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도 추억은 강물처럼 흘러간 뒤안길이다.
새아기가 사다 놓은 사각 찬기가 식탁 위에서 은은한 빛을 발한다.
요리조리 맛 내기를 한 삼색 찬을 찬기에 담아 놓고, 누구보다도 내 가난한 심령의 책임자 그 분께서, 보이지 않는 손님으로 좌정할 터이니, 새삼 고독하다거나 입맛 궁핍하다거나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솔로의 식탁! 이제부로 나는 혼자가 아니니.
첫댓글 [전남여류문학] 2022년 연간집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