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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진정 만천과해지계가 틀림없소이까?”
“이 보모가 장담하건대, 틀림없는 만처과해요.”
“보 대협 말이 맞소. 조정은 지금 후려의 강무세가의 후선군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소. 그런 조정에서 계골곡을 점거하는 쓸데없는 일을 꾸밀 여력이 있을지 의문이오. 게다가 계골곡을 점거한 무리들은 금위위에 필적할, 아니 어떤 면에선 능가할 만한 가공할 힘이 느껴졌소이다.”
고창골문의 가주 파옥지 골상찬, 신풍협 풍고, 섬도신영 소마태, 비성일지홍 요타, 추혼수사 보섭진 등 갑주를 대표하는 무림의 명숙(名宿)들이 모여 그동안 갑주에서 서제가의 기세에 눌려 발호가 없었던 인세로 추정되는 무리들이 계골곡을 점거한 일의 처리를 두고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히려 갑주의 서제가에게 알려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들을 조정의 군사라고 넌지시 흘리고 있소. 이는 우리로 하여금 흑자성에 그들이 조정의 군사라고 알리려는 수작임이 분명하오. 그럼 그들의 존재 때문에 서제가는 앙신성에서 후려군과의 전쟁에 그만큼 신경을 쓰지 못할 것이고 그럼 인세, 아니 마세의 무리들은 보의 패망 이후 잃어버린 시운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오.”
하나부터 열을 따지고 백을 따져보아도 그들은 절대 조정의 군사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100 중 60~70은 인세의 무리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10~20은 후선군이 자랑하는 특무대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확률이 희박했다. 일단 후선군에 조정과 마찬가지로 그런 전력을 뺄 여력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차라리 보(保)의 잔당과 인세의 무리라고 하는 것이 훨씬 이치에 맞았다.
라혼이 이들에게 만천과해지계(滿天過海之計)를 쓴 것은 맞다. 백호대가 조정이 파견한 천원군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라혼으로서는 천원군대부분이 포란산에 집결한 다음 백호대가 그곳으로 떠날 약 두 달 동안만 군사들이 백호대라는 것만 모르면 됐다. 이미 기병으로서 훌륭한 능력을 보유한 백호영의 무사 30기(騎)가 백호대가 물자를 싣고 별동금군을 잘 따르고 있는 것처럼 아군을 상대로 위병지계(僞兵之計)를 쓰고 있었기에 그거면 족했다. 아무도 에텔 스페이스의 존재를 모르는 이상 백호대가 어떻게 물자를 수송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백호대, 아니 평안천원군(平安天元軍) 참장(參將) 라혼(喇混)이 결정한, 보통 사람이라면 전혀 이해 못할 이유 때문이었다. 천하에 누가 보군을 마군으로 바꿀 생각을 할 수 있으며 그 훈련을 조정의 대군이 전장까지 이동하는 시간에 위병지계까지 써가며 시도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라혼이 생각하기에는 공금이었지만 고학이나 토사귀, 복천진 같은 백호대의 재정을 관리하는 군무관들이 보기엔 사비를 털어 6천두의 질 좋은 군마를 군사들에게 장만해줄 수 있단 말인가. 어떤 군대가 백호영 무사들처럼 1천의 절정 고수를 소리 소문 없이 거느릴 수 있단 말인가? 보통의 상식을 가지고는 눈으로 직접 보고도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을 추측해내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결국 아무리 의견을 나누어도 결론은 하나였다. 불측한 마음을 품은 인세(人世)의 무리이란 것이었다.
“아무튼 그들이 인세의 마도들이란 것은 확실하오. 그럼 앞으로 대책을 의논해봅시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 어쨌거나 그들은 정예군이 분명하오. 수천의 정예 군사들은 견제하기에도 버거운 숫자요.”
“아니요. 고작 견제만으로는 아무 의미 없소.”
“그럼?”
“닷새면 충분하오.”
“….”
“가주께서 떨쳐 일어나시면 전 갑주의 무림 호협들이 앞다퉈 따를 것입니다. 아니, 여기 모인 호걸들만으로도 계골곡을 휘저어놓기에 충분한 전력입니다. 많은 군병이 두려운 이유는 그들이 엄밀한 진형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기습을 하여 난전으로 만든다면 무공 고수들이 병졸의 머릿수 따위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좋소. 갑주에서 인세의 무리가 날뛰는 것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소. 일단 급한 대로 우리 골문의 500 정영을 기본으로 갑주무림맹을 결성합시다. 그리고 닷새 후 제가 선봉을 서서 계골곡을 칠 것이오.”
다른 곳에서 보기에 갑주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갑주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서제가(鼠帝家)는 후선군과의 전쟁 결과가 어찌 되었건 조정에서 벌이는 천림왕과의 권력 투쟁 때문에라도 무림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갑주엔 서제가가 워낙 설쳐대는 덕에 이렇다 할 초극 고수가 없었고, 고창골문이 있다 하나 갑주 전역을 아우르기에는 그 힘이 모자랐다. 서제가 때문에 인세의 발호가 없었지만, 인세가 발호하면 피해를 입을 문파가 한둘이 아니었다.
***
“그, 그럴 수가? 그러니까 그가 날 침상에 눕히고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그대로 나갔단 말이야?”
“예, 아가씨. 그분은 정말 도덕군자세요.”
호요요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 밤사이의 일이 기억나지 않아 무척 당황했다. 백호나한이 자신을 침대에 눕힌 것까지는 기억났지만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시비인 예예(芮芮)에게 지난밤 사정을 물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듣고 왠지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영활한 그녀의 머리는 백호나한이 뭔가 수작을 걸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잠이 들었을 것이다.
“수혈인가? 아니야. 수혈을 짚인 기억이 없어. 그럼 미약인가?”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호요요를 예예가 불렀다.
“아가씨!”
“응?”
“여기 씻을 물이오.”
“응, 그래!”
호요요는 세숫물을 챙겨주는 예예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장군을 시중드는 시비가 있어?”
“없는데요.”
“그렇단 말이지….”
호요요는 세수가 아닌 목욕을 한 다음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붉은 경장을 차려입고 백호나한을 찾아 나섰다.
“장군은 지금 어디 있지?”
“장군님은 지금 의막에 계신데요.”
의막(醫幕)이란 훈련 중 다친 자들을 치료하는 곳이었다. 호요요는 지체 없이 군막이 세워진 외곡(外谷)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호나한이 이끄는 군사들은 쉬면서도 그 기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예예의 말로는, 어제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셨음에도 아침 해가 뜨기 무섭게 기공 체조를 하고 기본적인 훈련을 하고 나서야 아침을 먹었을 정도라는 것이다.
“주군은 지금 이곳에 없소이다. 목욕을 하시겠다며 나가셨으니 상류에 있는 폭포로 가셨을 겁니다.”
“고마워요.”
의막에도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자신을 알아보는 군졸이 있어 그에게 다시 그의 소재를 알아 폭포가 있는 상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골곡의 외곡에 아무것도 없이 비워둔 이유는 이곳이 큰비만 오면 물이 가득 차오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가뭄이 계속되어 메마른 땅이었지만 그래도 항상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었다. 그 수원이 바로 백폭(百瀑)이 있는 이곳이었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그러나 호요요는 포기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며 그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곧 빨아 널어놓은 그의 옷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옷은 있어도 그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옷이 이곳에 있으니 언젠가 오려니 생각하며 자리를 잡고 앉아 느긋하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요요는 그렇게 찾아 헤매던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백폭연(百瀑淵) 한가운데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자신이 앉아 있는 곳으로 헤엄쳐 다가서더니 가만히 눈을 맞추자 호요요는 무척 당황했다.
“비켜주시겠소?”
―퍼뜩!
호요요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요요, 남자는 다 똑같아! 짐승과 다를 바 없어. 이 사내도 별다를 것 없어!’
호요요는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이 안색을 바꾸고 고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괜찮으니 그냥 올라오세요.”
“….”
라혼은 몸을 씻기 위해 이곳을 찾아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귀식대법을 펼치며 거의 한식경가량 수중에서 머물던 라혼은 물 밖의 인기척을 느꼈다. 그래서 라혼은 그녀가 자리를 뜰 때까지 수중에 머물려 했으나 호요요라는 여인은 자리를 뜰 기세가 아닌지라 결국 물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녀가 있는 곳, 정확히 옷을 널어놓은 곳으로 헤엄쳐간 라혼은 그녀에게 정중히 비켜줄 것을 요구했다. 백호나한부에서 여인천궁 여인들과 생활한 덕분에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라혼은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은 자기는 봐도 괜찮으니 나오라는 것이었다. 라혼은 잠시 침묵하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몸을 물속에서 빼냈다. 잘 발달된 근육 사이로 물이 방울져 흐르고 검고 긴 젖은 머리카락이 이상적인 무사의 몸을 하고 있는 라혼의 몸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라혼은 호요요가 보든 말든 물기를 털어내고 널어두었던 옷을 입었다. 바로 코앞에서 남자가 옷 입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호요요는 또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
라혼은 자기가 그냥 올라오라고 해놓고 침까지 흘리며 옷 입는 것을 구경하다가 이내 화를 내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쑥 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오?”
“예? 그, 그게….”
호요요는 가만히 침묵하다가 갑자기 물어온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 그저 이곳에 목욕하러 왔을 뿐이에요.”
“….”
라혼은 횡설수설하는 호요요에게 다시 물었다.
“나는 여인의 유혹을 받아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러는데, 지금 날 유혹하는 거 맞소?”
홍염미호 호요요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당황하게 만드는 상대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맞아요. 저는 당신을 유혹하고 있는 거예요.”
라혼은 그녀의 당당해진 태도에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호요요에게 다가가 그녀의 세류요(細柳腰) 같은 허리를 감싸안으며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그 유혹을 받겠소, 요요!”
“이미 아내가 있는 분이신데 이러셔도 되나요?”
“차려진 밥상을 가만둘 내가 아니오.”
“실망이군요. 나는 도덕군자인 줄 알았는데….”
호요요는 백호나한의 갑작스런 애무를 받자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여기서 쉽게 허락하면 값싼 여자가 될 뿐, 앞으로의 계획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요요는 힘주어 백호나한을 밀어내더니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말했다.
“급하시군요.”
***
―쿠릉~! 쿠르르릉~!
―쏴아아아아~!
벌써 사흘째 쏟아 붓는 굵은 빗줄기에 계골곡의 외곡평야는 완전히 호수가 되어버렸다. 백호대의 군사들은 사흘 전 내곡으로 군영을 옮겼지만 이 이상 호우가 계속되면 내곡에 머무는 것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비가 그치더라도 외곡에 고인 물이 빠지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터여서 사실상 백호대의 훈련이 끝나버린 셈이 되었다. 외곡에 고인 물이 모두 빠지더라도 바닥은 진창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고 참령의 연락이 왔나?”
“아직입니다. 비 때문에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라혼은 모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골곡주 호요각에게 물었다.
“곡주, 천원군은 어디까지 와 있소?”
“천원군의 선두가 열흘 거리까지 접근해 있습니다.”
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좀더 훈련을 시키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훈련도는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라혼은 아군을 상대로 위병지계를 펼치고 있는 참령(參領) 고우(膏雨)의 연락이 오면 제 위치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고 첨령의 연락이 오면 위치로 복귀할 것이다. 모두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질문 있나?”
“주군.”
고학이었다.
“말하라.”
“원래 저희가 수송하기로 한 물자는 어찌 되었습니까?”
라혼은 고학의 물음에 빨리도 묻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지도를 펴고 한곳을 짚으며 말했다.
“물건은 이곳 모언부(貌彦部)에서 인수받을 것이다. 참, 그리고 군사들에게 한 달 먹을 포육(脯肉)과 유락(乳酪)을 미리 지급하도록!”
“알겠습니다.”
라혼은 말린 고기와 발효시킨 젓을 지급하게 하고 계골곡 전역의 경계를 강화시켰다. 특별히 뭔가를 경계한다기보다 비가 오니 교대를 빠르게 하여 군사들의 체력을 보존하고 심심한(?) 나머지 엉뚱한 사고를 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옛말에 전투에서 진 군병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를 소홀히 한 군병은 용서할 수 없다,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야 누가 노릴 일은 없겠으나 만약 경계를 소홀히 해서 문제가 생기면 내가 직접 징계하겠다.”
“존명!”
그리고 라혼은 군관들과 함께 그동안 백호대에 들어간 유지비와 앞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의논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군대를 유지하는 데 드는 유지비는 엄청났다. 군마를 6천두나 구하는 바람에 1년 수입이 통째로 들어갔고, 만족할 만한 무장 수준을 갖추기 위한 자금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아무리 엄청난 자금이 소모된다 할지라도 목숨 값보다는 싸게 먹혔기에 라혼은 내심 빚쟁이가 됐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백호대의 군무관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주문서를 작성했다.
“주군, 지금 이런 것까지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까?”
“자네 동생이 입고 싸울 거다, 모원.”
모원은 지금 한여름인데 겨울옷을 준비하는 주군에게 잠시 미룰 것을 건의하려다가 막상 그 옷을 동생 모만이 입고 싸운다는 말을 듣자 사람 머릿수보다 넉넉히 계산하며 다시 주판을 튕겼다.
***
호요요는 당한 느낌이 들었다. 백폭연 사건 이후 거의 보름이 넘도록 백호나한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사흘은 그러려니 했다. 그 다음 나흘 동안은 ‘어쭈!’ 하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7일이 지나고 다시 하루가 지나자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알았다.
“예예, 장군은 지금 무얼 하시고 있니?”
“조금 전 회의를 끝내고 문관들과 다시 의논을 나누고 계셔요.”
“그래?”
호요요는 화려한 궁장으로 갈아입은 뒤 다기(茶器)를 들고 백호나한이 통째로 빌려 쓰고 있는 빈루(賓樓)로 향했다. 빈루의 가장 좋은 방에 들어서자 열댓 명의 문관들이 각자 주판을 들고 계산에 열중인 모습이 호요요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어느 순간 모조리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오자 호요요는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손수 차를 나누어주었다.
“허허허, 이렇게 고마울 데가….”
“고맙습니다, 호 소저.”
“아닙니다. 부군의 일을 돕는 여러분을 제가 챙겨야지요.”
“….”
문관들은 ‘부군’이라는 말에 한순간 얼어붙어버렸다. 세상 사람들이 주군을 호색한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주군이 얼마나 주모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주군은 자기들이 바친 충성을 주모에게 돌릴 정도로 주모인 천상천화를 아꼈다. 그런데 이 계골곡주의 딸 호요요의 입에서 부군(夫君)이란 칭호가 흘러나온 것이다. 중인들은 주군과 호 소저의 눈치를 살피며 차맛을 잊고 있었다.
“맛있군. 고맙소, 요요.”
“….”
“….”
이번엔 주군이 그것을 인정이라도 하듯이 대놓고 호 소저의 이름을 부르자, 중인들은 이젠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이번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호요요였다. 살짝 떠보려 부군이란 말을 흘렸는데, 그가 사람들 앞에서 다정스레―사실은 지나가는 말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험! 주군,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으니 저희는 물러가겠습니다.”
“아니, 조금 쉬고 다시 하지. 시간 있을 때 마무리하는 것이 좋아. 저녁 먹기 전까지 끝을 봐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다시 뵙겠습니다.”
호요요는 문관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모두 밖으로 나가자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좋아요. 제가 졌어요. 결국 처음부터 제게는 관심이 없었던 거군요.”
“요요, 그게 무슨 소리요?”
“아아~! 됐어요. 이젠 저도 더 이상 관심 없어졌으니까!”
라혼은 호요요가 생각한 것처럼 남녀 사이에 있는 밀고 당기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준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그녀가 별 행동이 없기에 그저 그러려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라혼은 호요요라는 여인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한 것과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 다른 여인이었다.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면서도 심드렁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새 장난감을 선물받은 아이 같기도 했다. 내심 당황스러우면서도 겉으론 당당했으며 불안하면서도 태연한 척했다. 그때그때의 기분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설화와도, 또 한결같은 여인천궁의 여인들과도 다른 여인이었다. 지금도 속마음과 다른 말을 하는 그녀를 보며 라혼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희들을 어찌할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계골곡 말이오?”
“그래요.”
“우리는 아마 열흘 안에 떠나게 될 것이오.”
“…?”
“우리가 떠나면 계골곡이야, 알아서 하면 되지 않겠소?”
“이곳에 아무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그렇소.”
호요요는 백호나한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는 지금 계골곡이 숨어서 훈련하기 위한 장소 이상의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거점을 두지 않을 셈이었다면 뭣 때문에 우리의 충성 맹세를 받은 거예요?”
“하기에 받았을 뿐이오.”
“오호호호호호호….”
호요요는 백호나한의 말에 교소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이런 사내를 유혹하고 뜻대로 조종할 생각을 했다는 자신이 너무 한심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도 유혹을 한다면 그는 당장 넘어와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일 것이다. 자신의 매력이나 사랑을 빌미로 해보아야 애당초 그를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
―쏴아아아아~!
해가 있을 동안 잠시 잦아들었던 빗줄기가 밤이 되자 다시 거세지기 시작했다. 억수같이 내리던 비는 새벽 무렵 조금씩 그 기세가 꺾이는 듯싶더니 곧 잦아들고 이내 비가 그쳤다.
“비 오는 날에 번을 서는 것은 정말 죽을 맛이구먼.”
“그러게나 말일세! 차라리 말을 타고 훈련하는 것이 낫지.”
“그보다 날이 좋아지면 이곳을 떠난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아까 제대로 듣지 않았구먼.”
“대장 말이야 나도 들었지만….”
원대식(垣大識)은 뒷말을 흐리며 말하는 동료 표승(標承)에게 아는 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도 백호영의 무사들에게 들은 얘기지만, 우리가 수송해야 하는 물자는 주군의 비선 조직이 대신 나르고 있다 하네. 듣기로 상경에서 우리보다 하루 먼저 떠났던 천원군의 선두가 열흘 후면 집결지에 도착한다 하네. 그러니 우리도 준비해야겠지.”
“그런데 우리 주군, 어디서 그렇게 많은 재산이 났을까? 말값만 해도 상당할 터인데?”
“글쎄? 주모의 여인천궁인가 뭐가가 큰 부자겠지.”
“그런가?”
“음?”
“….”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던 두 군졸들은 어느 순간, 서로 얼굴을 보며 자신이 들은 기성이 환청이 아님을 확인하고 서둘러 자신들의 직속상관인 십장(什長)에게 이상이 있음을 알렸고, 십장은 한 명을 대장(隊長)에게 보내고 휘하의 아홉을 이끌고 그 부분의 수색을 시작했다. 백호대는 모든 순찰과 보초를 열 명 단위로 했다. 열 명의 군졸들은 서로가 인지할 수 있는 곳에 있으며 간단한 수신호로 모이고 흩어질 수 있게 체계를 만든 것이다.
“토끼였나?”
“젠장, 뭐가 보여야지?”
“이상 없나?”
표승이 십장 노육(盧六)의 물음에 답했다.
“이상 없….”
“잠깐, 이게 뭐지?”
원대식이 창 끝에 걸리는 무언가를 손에 쥐려는 순간, 목이 화끈해지는 느낌과 함께 세상이 꺼져버렸다.
***
불측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인세의 무리를 도륙내기 위해 100명의 결사대와 함께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계골곡의 가파른 남쪽 능선을 넘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신풍협 풍고는 이런 곳에까지 번을 서고 있을 줄은 상상치 못했다. 빗소리에 기척을 숨기며 최대한 접근하여 틈을 노렸지만 저들의 경계 태세는 너무나 철저했다. 그러던 중 사람이 가장 피로한 시간이라는 새벽녘이 다 되어 비가 잦아들고 주위가 고요해지자 번을 서던 군졸들이 잡담하기 시작했다. 고수인 풍고는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사방에 친구가 있고 호기심이 많아 잡다하게 아는 것이 많은 풍고는 병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들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백호영과 여인천궁? 그럼 이들은 진짜 조정의 군사들이었단 말인가?’
이들은 최근 강시지존을 꺾어 천하에 이름을 날린 백호나한의 군사들이었던 것이다. 백호나한의 아내라면 천하에 미명(美名)이 높은 천상천화이고, 천상천화가 수인(獸人)이라는 사실은 이미 유명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기습은 뭔가 잘못된 것이었다.
―오로, 저들은 조정의 군사들이 맞다. 나는 이대로 물러나 본대에 그 사실을 알리겠다. 너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용히 친구들을 물려라!
―알았습니다.
그러나 풍고는 비웃음이 걸린 오로의 표정을 미처 보지 못했다. 다만 갑자기 열 명도 안 되는 군졸들이 결사대가 숨어 있는 쪽으로 다가서더니 수색을 시작하자 풍고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서둘러 몸을 숨길 뿐이었다. 그리고 결사대의 누군가가 수색하던 군졸의 목을 베어 그의 목이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혈향이 사방에 퍼지며 군졸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대식~!”
“적이다!”
―창~!
수명의 무사들이 결사대의 명령권자인 풍고의 명이 없었는데도 독단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군졸들을 베기 시작했다. 기호지세(騎虎之勢). 그러자 호랑이 등에 탄 나머지 100명 결사대의 군웅들도 몸을 일으켜 앞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일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풍고의 뇌리에 한 가지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간자(間者)다! 인세의 발호가 없다고 간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다니….’
차도살인(借刀殺人). 풍고는 이것이 갑주에 스며든 인세의 무리들이 꾸민 차도살인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 이곳을 치기 위해 모인 군웅들은 아마대부분 인세와 관련 없는 자들일 것이다. 인세는 이곳에서 조정의 군사들, 그것도 초극 고수인 백호나한의 군사들을 이용해 그들을 도륙할 속셈인 것이다.
‘늦었지만 막아야 한다!’
풍고는 어디선가 나타난 고수들에 의해 도륙당하는 100명의 결사대를 뒤로 하고 자신이 왜 신풍협인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몸을 날렸다. 저들의 목숨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본대와 조정의 군사가 서로 상잔하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괴인들의 습격에 백호영의 무사들이 올 때까지 십 수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한솥밥 먹던 백호대 군졸들의 목이 잘린 시신을 본 백호영 무사들은 눈에 불똥을 튀기며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크왕~!”
“캬오~!”
웅장모는 반인반웅의 상태로 괴인들을 찢어발겼고, 오차(烏此)는 반인반조 상태로 괴인들을 낚아 채 허공에서 떨어뜨렸다. 평상시 수인이 이런 난동을 부리면 국법에 의해 즉참(卽斬)이었지만 전장에서는 모든 것이 예외일 수밖에 없었다. 석은(席銀), 원복(願馥) 그리고 웅장모, 오차가 400명의 백호영 무사들을 이끌고 나타나 괴인들을 일방적으로 살육했다. 절정 고수인 백호십일걸 중 네 명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괴인들에겐 재앙이었으니 400의 백호영 무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자 견디지 못한 괴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이 도망가도록 가만히 놔둘 백호영들이 아니었다.
“웅 형, 배후를 캐야 하오. 몇몇은 살려두시오.”
“크릉~!”
“오 형은 도주한 적을 쫓으시오. 석 형, 난 이쪽으로 가겠소.”
“그럼 난 이쪽으로 가지….”
원복은 장내 정리를 웅장모와 군졸들에게 맡기고 다른 2인과 함께 도망친 자들을 쫓기 시작했다. 어차피 계곡을 넘어온 자들이었으니 도망치려면 다시 계곡의 가파른 경사를 올라야 했다. 이제 그들은 독 안에 든 쥐 신세나 다름없었지만 그대로 놔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자들이었다.
오차는 하늘 위에 뜬 채 궁(弓)을 꺼내 궁시를 날리며 도주한 자들을 추적했다. 이미 해가 떠오르고 있는 시간인지라 시야는 점점 좋아졌고, 오차는 작은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오차의 눈에 누군가 가파른 경사를 평지처럼 밟고 날렵하게 오르는 자가 눈에 띄었다.
“감히 이 신궁천조의 눈앞에서 재롱을 피우다니….”
1천개의 발톱을 가진 신궁이라는 뜻의 신궁천조(神弓千爪)라는 별호를 가진 오차는 들고 있는 궁에 세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메기고 내공을 실어 쏘아 보냈다. 그러나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뒤통수에 눈이 달렸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그 탄력으로 세 개의 화살을 모두 피한 것이다. 오차는 그 모습에 코웃음을 치고는 그곳으로 빠르게 날아가며 도망가려는 상대의 움직임을 막았다. 이렇게 하늘을 날며 동시에 화살을 날리는 비공탄전(飛空彈箭) 수법은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유롭게 하늘을 날며 거의 200보 이상 떨어진 상대를 농락했다. 그래서 백호영의 무사들은 그런 능력을 보유한 오차에게 ‘하늘에 떠 있는 오차는 백호 제일이다’라고 했다. 하늘에서 정확하게 내리꽂히는 진기를 머금은 1천개의 벽력전(霹靂箭)을 모두 피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드물었다. 웬만한 신법 조예 없이는 동시에 세 개가 날아오는 그 화살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신풍협 풍고는 뒤통수가 쭈뼛한 느낌에 궁신탄영(弓身彈影)의 식으로 몸을 튕겼다. 그러자 세 개의 암기가 날아와 자신이 서 있던 자리와 피할 방위를 점한 곳에 뭔가 날아와 박혔다. 그리고 그것이 화살이었다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금 엄청난 경력(經力)을 품은 화살이 재차 날아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살이라는 느낌만 있었는데 단단하기 그지없는 땅속으로 스며들듯 박히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한쪽 방향에서 날아오던 화살은 이제 머리에서 날아들었고, 풍고는 화살을 날린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상대는 거대한 검은 날개를 펴고 활공하는 반인반조였다.
“평생 피하는 재주만 배운 놈이로구나! 과연 이것도 막을 수 있을지 보겠다. 비공탄전 만천백우(滿天白雨)!”
세 개의 화살을 연거푸 세 번 쏘고, 한 번 쏠 때마다 궁(弓)에 서른세 줄기 경력을 실어 쏘는 총 108개의 화살을 날리는 만천백우는 그것을 당하는 자에겐 마치 화살이 소나기처럼 내리꽂히는 느낌을 주었다. 풍고는 새 인간이 작심을 한 듯 쏘아오는 화살이 혼비백산하여 필생의 신법을 펼쳤다.
“만천분광신보(瞞天分光神步) 피취우(避驟雨)!”
하늘을 속인다는 절세 보법인 만천분광신보에 소나기를 피한다는 피취우(避驟雨)였지만 그 경지가 약간 모자랐다.
“크악!”
어깻죽지에 화살이 박혀버린 것이었다. 뼈를 관통한 화살은 풍고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고, 풍고는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검은 날개를 가진 인간이 그대로 뚝 떨어지듯 내려서서 그의 마혈을 제압했다.
“고수였군. 순간, 놓쳐버릴 줄 알았는데….”
오차는 사내를 안고 그대로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렸다.
***
수백 척의 편주(片舟)와 뗏목을 타고 1천여 명의 무리가 호수가 된 계골곡의 외곡을 건너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이미 양엽구(良獵狗) 구만혁(狗巒赫)에게 일찌감치 포착되어 백호대의 군사들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라혼은 그들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말로써 설득하기로 하고 사람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편주를 모으고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말에 그 생각을 잠시 미뤄두었다. 외곡을 가득 채운 물이 전부 빠지려면 보름은 걸린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백호대가 계골곡 밖으로 나가려면 내곡 뒤편의 좁은 샛길을 이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야 그냥 걸어나가면 되지만 7천두 이상의 말을 끌고 나가기에는 힘든 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갑주무림맹이 구한 편주와 만들고 있는 뗏목은 백호대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오해지만, 무리를 모아 조정의 군사를 치려 했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건 당연했다.
“주군, 괴인들이 곡의 남쪽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 웅 참위와 오차, 원복, 석은이 그들을 토벌키 위해 떠났습니다.”
“남쪽은 별동대인 모양이군. 그곳은 곧 수습되겠어. 우리는 전면에서 오는 손님들이나 맞자!”
“존명!”
고창골문의 가주 파옥지(破玉指) 골상찬(骨相贊)이 직접 이끄는 1천의 고수들은 자신들의 행동 하나하나 모두 간파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내곡으로 들어서서는 입구 둔덕에 내려섰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풍고가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았나?”
“아무리 호우가 내렸다지만 화톳불 하나 밝히지 않고 있다니,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군.”
―와아~! 와아~!
―화르르….
“헉!”
“이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사방이 환해지고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와 함께 수천의 정병(精兵)들이 튀어나와 갑주무림맹 1천의 군웅들을 포위했다. 날카로운 창검과 화살이 군웅들을 노리고 있었고, 배후마저 물속에서 걸어나온 인영들이 틀어막고 있었다. 군웅들은 저마다 병기를 뽑아들었지만 눈빛이 흔들리고 있어 얼마나 놀랐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너희는 무엇 때문에 조정의 평안천원군이 머무는 이곳에 무리를 지어 왔느냐?”
“….”
포위한 쪽에서 그렇게 물어왔으나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물어온 쪽도 굳이 대답을 바라지 않았는지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어느새 하늘이 밝아오고 계곡 안에도 해가 비칠 무렵이 되자, 어둠 속에 있던 군사들의 위용이 드러났다. 질서정연하게 진을 갖춘 그들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군웅들을 포위했다. 라혼은 그들과 어떤 대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시끄럽게 떠들어봐야 득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혼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그들이 타고 온 배와 뗏목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지 고민이 있다면 그들에게 피해입지 않고 어떻게 제압하느냐일 뿐이었다. 저들이 항복해온다면 별 문제 없겠지만 무인의 기개랍시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 경우에는 문제가 컸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군, 남쪽의 소요가 제압됐습니다. 열둘이 죽고 서른이 상처를 입었답니다. 그리고 소요를 일으킨 자들은 82인을 주살하고 24인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누가 죽어?”
“예, 우리 쪽 열두 명이 그만….”
모석은 라혼의 반문에 상경에서 떠나 최초의 사상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그들을 가르쳐 금군으로 만든 모석은 죽은 열두 명의 이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왔다. 전쟁터에 싸우러 나가므로 누군가 죽고 또 다칠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막상 누군가 죽고 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만력!”
“예!”
“구만혁, 달성모, 표상치, 초강남!”
“예!”
“전부 참하라!”
백호영 최고수들의 이름을 연달아 부른 라혼은 모석에게 고개를 돌려 명했다.
“모석, 활을 쏴라!”
갑작스런 주살령(誅殺令)에 일순 당황한 모석은 자신이 들은 명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살기 어린 주군 라혼의 표정에 안색을 굳히고 명을 전달했다.
“화살을 쏴라!”
모석이 호령하자 붉고 검은 깃발을 가진 신호수가 쏘라는 의미의 깃발 신호를 보냈고, 백호대의 궁수들은 신호를 본 부장들의 구령에 따라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저들은 무림 고수다! 너희들은 백호영을 이끌고 전면에 나서라!”
“존!”
“주공, 나도 도우리다!”
흑산자 또한 100구의 철강시 군단을 움직였고, 라혼도 몸을 날렸다.
―핑! 피피피피핑!
―땅! 띵!
“흥! 이 비성일지홍 요타가 이대로 죽을 것 같으냐!”
“요 대협, 조심하시오.”
―띵!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한 군웅들은 고수들이 전면에 나서서 각자 무기나 성명절기(??)로 화살을 튕기며 방어하자 피해가 경미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런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안 되겠소! 이러다간 모두 죽겠소. 내 전면이 약해 보이니 전면을 뚫읍시다.”
“부탁하오, 소 대협!”
“섬도대는 나를 따라 전면에 혈로를 연다. 가자!”
―와아~!
섬도신영 소마태는 전면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쌍도를 휘둘러 쳐내며 긴 모(矛)를 마치 고슴도치처럼 치켜든 진형을 형성한 적도들에게 뛰어드는 순간, 뭔가 번뜩이는 느낌과 함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멍한 느낌과 함께 자신의 가슴속에 손을 파묻고 있는 아름다운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이 시리도록 냉정한 얼굴로 가슴속에서 아직도 펄떡이는 심장(心臟)을 뜯어내며 뭐라 고함을 지르자 수비 진형을 굳건히 하고 있던 모를 든 군사들이 돌진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라혼은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사내 앞에 [블링크Blink]로 나타나 그의 심장을 거칠게 뽑아내 던진 후 검을 빼들고 외쳤다.
“백호돌격!”
“백호돌격!”
―와아~!
사람의 가슴에서 심장을 뽑아낸 붉은 손으로 보검을 빼들고 외친 주군의 돌격 명령에 백호대의 군사들은 그 자욱한 혈향(血香)에 취해 광기 어린 돌격을 개시했다.
“저럴 수가! 섬도신영이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하다니….”
“맹주,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다소 피해가 있더라도 후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으음!”
고창골문의 가주 골상찬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추혼수사 보섭진은 군웅들에게 후퇴할 것을 명했다.
“모두 배로 돌아가시오!”
추혼수사의 퇴각령이 떨어지자 군웅들은 일제히 몸을 돌려 배로 가기 시작했다. 비록 그곳에도 지키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비교적 소수였다. 파산권(破山拳) 진월(秦越)은 나무토막처럼 멍하니 가만히 있는, 검은 천으로 전신을 둘러싼 흑의인의 가슴에 성명절기인 파산일권(破山一拳)을 내쳤다.
―파앙!
―주르륵!
“…!”
멍하니 있다가 파산일권을 얻어맞은 상대는 뒤로 몇 걸음 밀려났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칼을 휘두르면서 군웅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캉!
―탕!
“이럴 수가! 전원이 금강불괴?”
“아니요. 강시요! 강시들이오!”
“강시?”
―크악~!
―와장창창~!
강시들과 드잡이질하는 동안 어느새 후위에 돌격해오던 적도들이 충돌했다. 그와 동시에 좌변과 우변에서도 충돌해 그야말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1천의 갑주무림맹의 군웅들 전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 하나 둘 쓰러져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라혼은 적이 원진(圓陣)을 형성하며 방어에 들어가자, 앞으로 나서서 그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라혼의 뒤를 따르던 백호영의 무사들이 전장에 발을 디뎠다. 라혼이 선두로 해서 쐐기 모양에 봉시진형으로 원진을 가르자 무림인들이 형성해놓은 원진이 갈라지며 전투는 다시 일방적인 도륙이 되어버렸다. 라혼은 흑사와 더불어 고수만 골라 상대했고 백호오걸들도 자신과 실력이 맞는 자를 찾아 그들의 손발을 묶었다. 그렇게 진행된 한식경가량의 전투는 계골곡을 습격해온 갑주무림맹의 한 무사가 만력의 언월도에 목이 잘리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크흐흐흐흑!”
“누군가?”
“예? 예! 남쪽을 습격해온 자들을 이끈 자입니다.”
“그런가?”
오차는 붉게 물든 땅과 호수를 보고 멍해 있다 마혈이 봉쇄된 사내의 정체를 밝혔다.
“어찌, 어찌하여 무고한 저들을 저렇게 무참히 살해할 수 있단 말이오?”
라혼은 절규하는 그를 무심한 눈으로 보며 만력에게 명했다.
“만력!”
“예!”
“참하라!”
“존!”
―푹!
“남쪽을 습격한 무리 중 24인이 잡혀 있다. 그들도 전부 참해라!”
“….”
라혼은 무심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시신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는 흑사에게 갔다.
“아깝군. 강시로 만들기에 딱 좋은 재료들인데….”
“그럼, 만드십시오.”
“만들고 싶어도 이곳에는 재료가 없고, 재료를 구한다 해도 재료를 구하는 동안 이것들이 부패하면 그 질이 떨어지니 그것 또한 어렵소.”
“그럼 흑막의 흑산에는 재료가 있을 거 아닙니까?”
“주공의 말대로 그곳까지 이것들이 임시로 처리해서 끌고 가는 방법도 있지만….”
“아니, 제 말은 흑산에 1천구가 넘는 이것들을 강시로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있느냐 묻는 것이오.”
“흑산이라면야 가능하지만 이들 전부를 강시로 만드는 것은 생각해보아야 하오. 이들 중 쓸 만한 놈은 고작 300을 넘지 못하오.”
라혼은 품에서 지도책을 꺼내 펼쳐들더니 물었다.
“이것은 흑막의 지도인데, 흑산이 어디쯤 있습니까?”
“지도?”
흑산자는 주공이 내민 지도책을 보고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주공이 지닌 지도는 정말 세밀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도는 지도, 아무리 세밀한 지도지만 지도를 보는 데 익숙지 않은 흑산자는 그 지도 안에서 흑산(黑山)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주공, 제평이 어디 있소이까?”
“제평은 여기 있소!”
그래서 흑사가 쓴 방법은 주공이 잘 아는 제평에서 흑산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덕에 흑산의 위치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이오. 이곳 북쪽 능선에 노부의 거처인 흑부가 있소.”
“그렇군.”
라혼은 흑사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흑산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헉! 여, 여긴….”
“흑산이오. 흑부는 어디 있소?”
흑산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암회색 바위와 쌀쌀하기 그지없는 험산이었다. 한참을 어리둥절해하던 흑산자는 이곳이 흑부(黑府)와 매우 가까운 곳이란 것을 깨닫고 주공을 흑부로 안내했다. 흑부는 단순한 흑산자의 은거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하나의 세력이었다. 십이0여 명의 인원이 상주하는 흑부는대부분의 주민이 나병(癩病)을 앓고 있는 자들이었다. 흑산자는 원래 의원이었다. 의원이기 이전에 나병을 앓던 부모에게 태어나 태어날 때부터 흑부에 살았던 자였다. 그러다 우연히 멸망한 강시교의 일맥이 이곳에 스며들어 자질이 뛰어났던 흑산자는 그들에게 사사했다. 그러나 그들이 흑부의 주민들을 다루는 방식은 나무토막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젊은 흑산자는 그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렇게 강시교의 비전을 계속 익힌 흑산자에게 또 하나의 기연이 있었다. 바로 고루혈존의 진전(眞傳)을 얻은 것이다. 그렇게 10년 동안 고루혈존의 무공을 익힌 흑산자는 강시교 내에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며 강시교주의 후계자로까지 거론되었다. 강시교 내부에서는 흑산자가 자신들이 나무토막 취급하는 흑부 출신이란 이유로 흑산자를 견제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흑산자가 절정 고수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어느 날 강시교의 장로들이 흑산자를 죽이려 수를 쓰다 도리어 몰살당하고, 흑산자는 그 길로 자신을 도모하려 한 자들을 묵인한 강시교주 등 강시교 인물들을 참살해버린 뒤 그들의 몸으로 철강시를 만들어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흑산자가 세상에 나간 이유는 자신이 몰랐던 강시라는 것이 있으니 나병도 치료될 수 있겠다 생각하고 흑부를 나섰던 것이다.
“어르신 오셨습니까?”
“그래 그간 별일 없었는가?”
“가레이가 죽었습니다.”
“저런!”
“잠자리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으니 복이 많은 친구지요. 그런데 이분은?”
“인사드리게. 이번에 내가 주공으로 모신 분일세!”
“예?”
반오(伴伍)는 자신의 귀가 의심스러웠다. 저 괴팍한 흑산자가 주공을 모셨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반오라고 합니다.”
“반갑소. 흑사, 계골곡으로 돌아가 그것들을 챙깁시다. 흑사도 챙길 것이 있는 듯한데!”
“그러지요. 반오!”
“옛!”
흑산자는 반오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라혼과 함께 계골곡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동안 라혼과 지식을 나누며 기록한 서책과 소지품을 챙겼다. 라혼은 무림인들의 시신을 에텔 스페이스에 넣고 준비가 끝난 흑사와 함께 다시 흑산 흑부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라혼은 흑부 지하에 있는 흑산자의 작업실에 시신들을 쏟아놓고 금 1천냥을 흑사에게 주었다.
“이 자금은 이곳에서 쓰고, 이 반지는 ‘피아링’이란 반지요. 진기를 주입하면 바로 나를 호출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습니까?”
피아전환(彼亞傳環). 이것은 라혼이 그동안 흑사와 씨름하며 겨우 만들어낸 마법 물품이었다. 곤옥(崑玉)이 마나에 반응하는 것을 보고 시험 삼아 만든 것이었다. 시드그람에서 사용하던 피아링보다 성능이 훨씬 떨어졌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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