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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걷고 | 보덕사- 신선봉- ★영축산- 변봉- 종암산- 함박산- 만년교 1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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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걷고 | 보덕사- 신선봉- ★영축산- 변봉- 종암산- 함박산- 만년교 2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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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걷고 | 보덕사- 신선봉- ★영축산- 변봉- 종암산- 함박산- 만년교 3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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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걷고 | 보덕사- 신선봉- ★영축산- 변봉- 종암산- 함박산- 만년교 4 - Daum 카페
3분 후
"영산호국공원 1.6km" 갈림길
우측 직진으로
급한 경사를 내려간다.
"약수터 0.6km" →
15분 후
"약수사" 가 보이고
"영산호국공원 1.4km" →
잠시후
아래 보이는 체육쉼터
우측에 있는 너른 마당
"데크쉼터, 자외선 살균기"
밑으로 내려오면
"함박산 藥泉"
안내문
데크쉼터
"함박산 약수터의 유래"
본 약수터는 신라 경덕왕 때 발견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 지역에 홀어머니와
효성이 지극한 나무꾼 아들이 살았다는데
어머니께서 오래도록 속병을 앓게 되어
아들은 어머니의 속병을 고치기 위해
좋다는 약은 다 써봤으나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없고
몸이 점차 쇠약해져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어느날 효자 아들은
땔감을 구하러 함박산에 와서
나무를 한짐 해놓고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손뼉을 치며 부르는 꿈을 꾸다 깨어
사방을 살펴보니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하도 꿈이 이상해
꿈속에서 노인이 부르는 곳으로 가보니
바위 틈 속에 함박꽃이 피어있고
그 밑에 맑은 물이 흘러 내려
목이 말라 그 물을 마셨더니
물맛이 좋고 속이 편안하여
점심을 싸왔던 꼬막단지에
물을 가득 담아와서
병든 어머니께 드렸더니
그 물을 마시고선
정신이 맑아지고 속이 편안하다고 하시자
효자인 아들은 매일같이 물을 떠다 드렸고,
그 물을 마신 후로
어머니의 속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지역의 사람들은
이곳 함박산 약수를 이용하게 되었으며
많은 환자가 병을 고쳤다고 한다.
그 소문이 궁중에까지 전해져
당시 불치병에 걸린 왕자가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으나
병은 고치지 못하고 있다가
함박산약수터 소식을 전해 듣고
평민으로 가장하여 이 지역에 머물면서
약수를 매일 마셨더니
왕자의 병이 완쾌 되었다고 한다.
감사한 마음으로
함박산 신령님께 기도를 드리고
밀양 표충사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또한 함박산 약수는
마음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에게는
더욱 효험이 있다고 전해져 온다.
오랜 세월동안
약수터의 형태가 많이 바뀌었으나
한국관광공사가 조사한 결과
전국 청정 약수터 7선중
함박산약수터가 첫 번째로 뽑혔으며
(두번째 경북 청송 달기약수, 세 번째 강원 인제 개인약수,
네 번째 전북무주 선풍령약수, 다섯 번째 충남 부여 고란약수,
여섯 번째 전남 구례 당을샘약수, 일곱 번째 경북 청도 정상약수)
특히 영산 함박산약수는
전국 약수터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약수터로 유명하다.
1분 후
깨끗한 화장실
도로 옆으로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다.
1분 후
둥근 쉼터를 지나면
큰 조형물이 있는데
"함박꽃" 인 것 같다.
1분 후
"圓情臺(원정대)"
"함박산 공원 종합안내도"
"영산면" 일대 ~
"태자산" ~
"태자산, 영축산성"
"영축산성" 봉우리
당겨본 "태자산"
"영축산성" 봉우리
♠ 뒤돌아 보고
2분 후
우측에 있는
"석빙고" 로 들어간다.
아래로 내려오면
"창녕 영산 석빙고"
昌寧 靈山 石氷庫
석빙고는
봄여름에 사용할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로
겨울에 강이나 하천에서
깨끗한얼음을 떼어 내 저장하였다.
석빙고를 만들 때는
땅을 판 다음 돌로 벽을 쌓고,
바닥은 앞을 높이고 뒤를 낮게 하여
경사를 만들어 물이 잘 빠지도록 했다.
천장은 기다란 돌을
무지개 모양으로 쌓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돌을 맞추어
지붕을 얹고 구멍을 냈다.
석빙고 얼음은
일반 백성은 쓰지 못하고
양반이나 관에서 썼다.
현재 남아 있는 석빙고는
모두 경상도 지역에 있는데
전부 조선시대에 만든 것들이다.
창녕 영산 석빙고는
영산면 동쪽 함박산 자락에 있는데,
언제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른 석빙고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원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문은 잠겨있고
문 틈 사이로 본 내부!
2분 후
"약수터" 들머리를
♠ 뒤돌아 보고
"태자산, 신선봉" ??
안내도
4분 후
햇살 받은 "영산천"
얼음썰매장이 있는데
영업은 하는지? 안하는지??
주변에 있는
"영산호국공원"
2분 후
짙은 역사가 있는
"만년교"
그냥 끝내도 되는 산행인데
결국 저 위를 다녀온다.
"창녕 영산 만년교"
昌寧 靈山 萬年橋
창녕 영산 만년교는
호국 공원 안에 있는
길이 13.5m, 너비 3m의
무지개다리이다.
하천 양쪽의 큰 바위 위에
화강석을 반달 모양으로 무지개 처럼 쌓고
그 위에 돌을 올린 다음 흙을 깔아 길을 만들었다.
'만년교'는
만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다리라는 뜻인데,
다리 사이로 흐르는 개천이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南川橋)라고도 하며,
다리를 놓은 고을 원님의 공덕을 기리는 뜻에서
'원다리(院다리)'라고도 부른다.
정조 4년(1780)에
석공 백진기가 처음 다리를 만들었고,
고종 29년(1892)에
영산현감 신관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 다시 지었다.
다리 주변에는
'남천석교서병명(南川石橋序幷銘)'이라고 쓴 비석과
'만년교'라고 쓴 비석이 있는데,
두 비석 중 하나는
필력이 신통한 열세살 신동이 쓴 글씨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만년교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을 지닌 무지개다리로,
조선 후기 홍예교(紅霓橋)*를 세운 방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홍예교(紅霓橋) : 무지개다리
"남천석교 비문해석"
"만년교 수리기(萬年橋 修理記)"
만년교는 정조 4년(1780)에
처음 축조되었고,
고종 29년(1892)에 중수한 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하였다.
돌로 쌓은 다리는
개울의 돌과 흙 위에 자란 풀, 개울 주변의 숲,
물 위에 비친 반원 모양의 아치 구조 등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구조적으로 심하게 변형되어
현상대로 보존이 어렵다는
정밀안전진단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만년교의
원형 복원과 구조적인 안전을 위해
전면적인 수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만년교를 해체해 본 결과
다리 측벽의 내부에는 적심(積心)이 없었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 과정에서
불안정하게 쌓아 올린 강돌(川石)을
처음 축조 당시의 부재를 기준으로
가공돌(加工石)로 교체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로 교체된 가공돌의 이질감과
주변 경관의 변화로
보수 전후의 모습이 조금은 차이를 보인다.
■ ■
건너와서
♠ 뒤돌아 보고
"영산 만년교 (靈山 萬年橋)"
보물 제 564호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동리
영산면사무소 남쪽의 호국공원 내에 있는
길이 13.5m, 너비 3m의
무지개다리[紅橋]이다.
개울 양쪽의 자연암반을 주춧돌로 삼아
홍예(紅霓)라는 반원형 아치모양의
구조를 걸쳤다.
홍예는
아래쪽이 위쪽보다 좁도록 다듬은
화강암을 반원형으로 쌓아,
다리의 무게가 옆으로 작용하게 한
구조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지개다리나 석빙고의 천장을
만드는 기술로 사용되었다.
홍예석의 위는 자연석으로 쌓았고,
다시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정조 4년(1780)에
석공 백진기(白進己)가 가설하고,
고종 29년(1892) 4월에
영산 현감 신관조(申觀朝)가
석수 김내경(金乃敬)을 시켜
다시 지었다.
다리 옆에는
1780년에 세운 남천석교비가 있는데,
13세의 소년이
글씨를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돌로 쌓은 다리는
개울의 돌들과 흙 위에 자란 풀,
개울 양쪽의 숲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반원형의 곡선은
물 위에 걸린 무지개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다리이다.
"창녕 영산 만년교 수리기"
(昌寧 靈山 萬年橋 修理記)
보물 제564호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동리
만년교는 정조 4년(1780)에
처음 축조되었고,
고종 29년(1892)에 중수한 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하였다.
돌로 쌓은 다리는
개울의 돌과 흙 위에 자란 풀, 개울 주변의 숲,
물 위에 비친 반원 모양의 아치 구조 등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구조적으로 심하게 변형되어
현상대로 보존이 어렵다는
정밀안전진단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만년교의
원형 복원과 구조적인 안전을 위해
전면적인 수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만년교를 해체해 본 결과
다리 측벽의 내부에는 적심(積心)이 없었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 과정에서
불안정하게 쌓아 올린 강돌(川石)을
처음 축조 당시의 부재를 기준으로
가공돌(加工石)로 교체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로 교체된 가공돌의 이질감과
주변 경관의 변화로
보수 전후의 모습이 조금은 차이를 보인다.
● ●
"壬辰倭亂護國忠魂塔"
(임진왜란호국충혼탑)
"야외 공연장" 분위기
▶▶
▶▶▶
"영산 현감비군"
靈山 縣監碑群
영산 현감비군은
영산현을 관할하는 지방관의
선정비善政碑를 모은 것으로
현감 19기, 군수 2기, 병마사 1기,
관찰사 7기, 암행어사 1기, 좌수 1기,
미상 1기로 모두 32기이다.
선정비는
지방관의 공덕을 칭송하는
문자를 새긴 비석으로
유애비遺愛碑 거사비去思碑 청덕비淸德碑라고도 한다.
수령이 선정을 베풀거나, 청백리인 경우
수령의 정책으로
고을 사람들이 은혜를 입었다는
공론이 형성되면
왕의 칙령으로 허가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선정비를 세울 수 있었다.
비문에는 수령의 이름과 수령의 공적을
4구 16자의 구절로 요약하여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비석을 세운 연도인 간지를 적는다.
선정비는
고려시대 승평부사 최석의 팔마비가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개국 후
어느 시기에 건립이 금지되었다가
성종대 이후 다시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17세기 이후 많이 건립되었다.
◆ ◆
방앗간을 재현한 시설이다.
물레방아 안내문
"디딜방아"
에어건이 있어
묵은 먼지를 깨끗이 털어냈다.
남산호국공원
(南山護國公園)
영산(靈山)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현감 전제(全齊) 장군을 비롯한
충의용사들이 왜군을 물리친 전승지이고,
3ㆍ1운동때는
이 지방 독립 만세 운동의 중심지였으며,
6ㆍ25동란때
두 차례에 걸친 북한 괴뢰군의 침공을 격퇴하여
큰 승리를 거두는 등
국난을 극복한 조상들의 호국충절과
자유 수호의 높은 정신이 서려있는 곳이다.
이에 조상들의 거룩한 정신을 추모, 계승하고
국민정신을 진작시키는
교육의 산 도장(道場)으로 삼고자,
이곳에 호국공원을 조성하여,
1956년 3월 10일
3ㆍ1 독립운동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1978년 11월 30일
6ㆍ25영산지구 전적비(戰蹟碑)를 건립하였으며,
1982년 5월 15일
전제 장군의 충절사적비(忠節史蹟碑)와
임진왜란 충의용사들의 호국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창녕군 관광안내도
영산면 가볼만한 곳
위로 올라오면
"三一獨立宣言書塔"
(삼일독립선언서탑)
"영산3.1독립운동기념비"
삼일독립운동기념비
위로 보이는 조형물
"三一烽火臺"
(삼일봉화대)
"영산 3.1 봉화대"
■ ■
산행 이정표
행사 때가 되면
쓰일 것 같은 확성기
영산지구 전적비
관리번호 : 42-2-9
소재지 : 창녕군 영산면 동리 산4
관리자 : 창녕군수
영산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지역 공격을 위하여
북한군이 막바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국군과 유엔군의 결사 방어로
남침이 저지된 격전지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남으로 침공을 계속하여,
8월초에는낙동강을 끼고
최후 방어선을 구측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의 최정예 부대인 제4사단은
낙동강 돌출부 지역에서 기습적으로 도하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8월 11일에는
이 곳 영산지역까지 침공하였다.
이에 미 제24사단은
이들의 밀양지역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증원 가능한 부대들을 이곳으로 집중시켜
공방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을 강서쪽으로 격퇴하고
방어진지를 회복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전사에 길이 빛날 중요한 전적지이다.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산화한
전몰 장병들을 추모하고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교통부 주관으로
국제관광공사가 집행을 맡고
국방부의 후원을 받아
1979년 4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 ●
이 곳 창녕군 영산은 낙동강의 돌출부로서
1950년 여름 두 차례의 혈전 끝에
북괴의 침공을 막아냉 피의 전적지이다.
이 곳에서 미 제24사단, 제2사단,
그리고 해병 제5연대가 보여 준
백전불굴의 투혼이
오늘의 영산을 있게 한 것이니,
여기 이 비를 세우고
이 땅의 자유와 민주 수호를 위하여
산화한 거룩한 넔을 추모하여
빛나는 전공을
전 세계 자유민의 이름으로
기리는 바이다.
● ● ●
전사 약사문
1950년 한여름, 공산군은
부산 공략을 위한 막바지 대공세를 폈다.
이때 이곳 영산의 산야도
그 화력에 휘말려 시산혈해로 화했으나
우리의 혈맹, 미국의 젊은이들은
이 곳에서 용감히 싸워 끝까지 영산을 지켜
조국의 숨 가쁨을 가시게 했다.
제1차 전투 (1950. 8. 5 - 8. 18)
8월 5일 자정,
낙동강 돌출부에서 도강한
북괴군 제4사단은
이곳을 지키던 미 제24사단과 증원된 미 제2사단,
제9연대의 반격을 물리치고,
7일에는 중간 요지인
클러버 고지 및 오봉리 능선을 점령,
11일에는 일부 병력을 후방까지 침투시켜
한때의 위기를 빚게했으나,
예비 부대인 미 제5 해병 연대가
17일 영산 전투에 투입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아군의 반격에 쫓긴 적은
클러버 고지 및 오봉리 능선으로 퇴각,
여기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다음날까지 계속된
아군의 맹렬한 공중 폭격과
과감한 지상 공격에 지리멸렬,
간신히 살아 남은 자는
낙동강 서안으로 퇴각했다.
제2차 전투 (1950. 8. 31 - 9. 5)
제1차 영산 공격에서
북괴군 제4사단이 대패하자,
이번에는 제9사단이
8월 31일 심야에
훨씬 큰 규모의 공세로서
영산 정면을 방어하던
미 제2사단 제9연대를 물리치고
일거에 영산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이때 미 제2사단은
사단 전역 (영산, 창녕, 현풍)이
북괴군의 각각 다른 사단에 의하여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된 상황이라
그 위기는 제1차 때보다 더욱 심각했다.
그러나 영산 사수의 결의로 뭉친 사단은
공병 대대를 위시한 지원 부대까지 출동,
용감히 싸워 적의 남진을 저지했고,
마침내 미 제5해병 연대의 배속을 받은 사단은
9월 3일에
총반격을 개시하여
3일간 계속된 공방전 끝에
모두 실지를 회복했다.
이렇게 목숨을 바쳐
이 땅을 지킨 그들의 넔을 위로하고
자주 국방 의식을 고취하여
오늘의 난국을 극복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아야 하겠다.
● ● ● ●
건립개요
주관 : 교통부
집행 : 국제관광공사
후원 : 국방부
제작 : 최기원
준공 : 1979년 4월 30일
전망데크에 서면
"영산면사무소" 가 보이고 ~
공사 중인
"연지못" 이 보인다.
"신선봉" 라인
~ ~ ■
"원교" 에서 바라본
"만년교"
4분 후
주차해 둔
"영산면사무소" 에서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 한다.
◆ 등로가 어떨런지
많이 걱정하면서 시작했는데
예상보다는
그런대로 조금 수월했던 것 같고
"종암산" 에서 부터는
제법 오르내림들이 심하니
막바지에는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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