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선조 때의 사람이며 경북 경산 용성에 살았다. 자는 희로이고 호는 관란이라 하였다. 경주 이씨 판서 양지의 5세손이다. 삼족당 김대유의 문인으로서 8세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홀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게 되니 친히 약시중을 들었고 똥을 맛보아 병세를 확인하였고 끝내 돌아가시자 3년을 여막에서 묘를 지키었다. 당시 살인과 약탈을 강행한 도적에 팔룡이라고 있었는데 이 도적떼도 효자의 여막을 지날 때는 서로 경계하여 효자를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관찰사가 장계하여 정려를 내렸으며 또한 그림으로 삼강록에 올리도록 명령하였다. 1558년(명종 13)에 사마 시험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더는 벼슬에 오를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은퇴하여 용성 금학산 아래에 우거하였다. 그곳을 관란대 또는 맹구대라 하였는데, 갈매기에 맹서하여 벼슬하지 않고 야인으로 세상을 보낸다는 뜻이었다. 도의를 강론하고 학문을 논하여 많은 후학을 가르침을 낙으로 삼았다.
조정에서 그 행동 거지의 고결함을 듣고 건원 능침랑 또는 직장 별제 등 전후 여섯 차례나 벼슬로 불렀지만 한결같이 사퇴하였다. 그러니 징사라고 불리었다. 이미 다 늙어서 임진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지어 가지에 보내고 의거를 부르짖었다. 사후에 관란대 자리에 사당을 지었다. 즉 관란서원으로 회재 이언적을 모시었고 유생들이 배향하기를 누차 건의하였다. 경주의 지곡, 문호 양원에 모시었고 그의 행적이 여지승람 명신록에 실려 있다. 저서에 이기논문집 2권이 있다.
다음은 맹구대에 붙인 그의 칠언절귀이다.
기러기 한소리는 가을을 알리는데
갈대꽃 눈송이인 양, 푸른물도 흐르네
이 좋은 경치 내 혼자 차지하련만
갈매기 백로가 먼저 물가를 차지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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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립은 충효로서 세상에 알려진 승증(承曾)의 후예이다. 그도 효성이 지극해서 일찍 양친을 여의고 여묘살이를 하는데 잠시도 묘를 떠나지 않아서 풀이 말랐다고 한다. 상을 다 마치고 탄식하며 나라를 위하는 참다운 길을 찾았다. 그가 나라를 위하는 길로서 택한 것이 "철"과 유황(砧黃)을 얻는 일이었다. 이러한 그의 계획을 안 일가 친척들이 몰려와서 손을 잡고 만류했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7세에 지근 시가 이미 성인을 무색하게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재주로 공부만 열심히 한다면 대과에 급제하고 입신출세해서 가문에 영화를 가져 올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공부는 그만두고 철광산을 찾으러 정처없는 길을 떠난다고 한다. 온 집안이 야단일 밖에는. 그러나 의립의 결심은 굳었다.
드디어 그는 철광산을 찾아 길을 떠났다. 먼저 치술령에서 치제를 드렸다. 삼천리 금수강산에 어찌 철이 나는 곳이 없겠는가 하고 떠났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막막했다. 영남에서 호남으로 다시 발길을 멀리 북으로 돌려 서북으로 관동으로 10년을 하루같이 철을 찾아 헤맸다. 백두산(白頭山), 묘향산(妙香山), 구월산(九月山), 금강산(金剛山)을 돌아 삼각산(三角山), 속리산(俗離山), 태백산(太白山), 소백산(小白山)을 거쳐 지리산(智異山)에 이르는 험한 길을 남김 없이 다 밟았다. 사람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 벌판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으며 깊은 산속에서 병들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철이 나는 곳이 없었다.
돌고 돌다가 길은 다시 고향 땅에 이르렀다. 울산을 지나 경주로 들어서는 객주집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다. 생각하면 너무나 아득하다. 10년 세월을 헤매었지만 앞길은 망막하다.
고향에 들어서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생각에 잠기다가 그만 잠이 들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는 갈길을 손가락질 했다. 날이 밝자 객주집앞의 나무가지에 까치 한 마리가 마치 그를 부르는 것처럼 요란하게 짖어댔다.
마음 속에 느끼는 바가 있어 그는 곧 까치를 따라 나섰다. 까치는 거기에서 멀지않는 달내산(達川山)에 이르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이 곳이야말로 하늘이 계시하는 곳이로구나."고 생각하고 조사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산이야 말고 10여년을 두고 찾아 헤매던 「철이 나는 산」이였다. 그의 나라 위한 일편단심에 하늘도 감동했슴이니라.
천신만고 끝에 철광은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련해서 "쇠"를 만드는 일은 앞으로 넘어야 하는 또 하나의 고난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쉽게 해결을 보았다. 경주와 언양의 중간 반곡(盤谷)이라는 곳에서 비상을 얻게된 것이다. 철광을 녹일 때 비상을 불어 넣어서 "쇠"를 얻는 제련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이래서 많은 쇠를 얻는데 성공한 그는 군기(軍器)를 만드는데 필요한 쇠를 만들어 훈련대장에게 바치고 철환(鐵丸), 연철(鉛鐵), 솥(釜)등도 대량을 만들어 나라에 바쳤다.
백성들의 생활에 가장 요긴한 것 가운데의 하나는 솥이였다.
그는 이 솥을 많이 만들어 무역하고 거기서 얻은 자본으로 유황을 캐는 비용을 마련했다. 일찍 유황이 나는 곳을 발견은 했으나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서 손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황석(黃石)에서 유황을 만들어 이것도 나라에 바쳤다.
이 때가 현종때의 일이였는데 현종께서 친히 이의립을 불러 철을 마련하고 유황을 얻게된 고생담을 듣고 그를 숙천도호부사(肅川都호府使)에 임명했다. 그러나 의립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려 하니 왕은 더욱 감탄해서 그를 칭찬하며 구충당(求忠堂)의 호를 내렸다. 그리고 유황은 군용으로 쓰기 위해 나라의 소유로 하고 달내의 광산은 그에게 하사해서 자손이 관리하도록 했다.
과거해서 출세하고도 남을 재주를 가지고 너무나도 어리석은 길을 가려서 나라에 이바지하려고 애 쓴 구충당 이의립……
이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분들에 의해서 살기 좋고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구충당이 발견한 달내광산은 경주시 외동읍에서 울산으로 들어간 첫 역인 호계에 있다. 구충당의 후손의 소유에서 일본 사람 소유로 넘어갔다가 지금은 대한광업회사 소유가 되어 있다. 철과 국력과의 관계를 일찍부터 알아 차리고 철을 얻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이의립은 참으로 위대한 애국자이며 선각자였다는 것을 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첫댓글 이의립이 찾은 달내산은 울주군 달천리(현재 울산시 북구 농소동 달천)에 있는 산으로 일명 망제산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철이 많이 났으나 현재는 폐광되고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많이 들어서 있다. 모화에서 국도로 울산으로 내려가다가 보면 호계 조금 못가서 오른쪽 먼곳에 아파트 단지가 보입니다. 바로 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