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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실권자 덩샤오핑과 원수 네룽쩐(聶榮臻·섭영진)이 지혜를 짜냈다. “부인들은 참석시키지 말자. 7명을 한자리에 모아 놨다간 큰일 난다. 개성 강한 여자들이라 무슨 대형 사고를 일으킬지 모른다. 싸움이라도 벌어졌다 하는 날엔 천하대란보다 더 수습하기가 힘들다. 우리 모두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20여 년 전 홍콩에서 “부인들에게 영결식 날짜를 틀리게 알려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개혁·개방 이후 최대 규모의 추도식이 끝나자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우리는 한 명 뒤치다꺼리 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예젠잉은 재주도 좋다. 쑨원, 장제스, 마오쩌둥이 중용할 만하다.” 한대(漢代)에 이미 유언비어(流言蜚語)라는 4자성어를 만들어 낸 민족이다 보니 그냥 내버려 뒀다간 무슨 심한 말들이 나올지 몰랐다.
예젠잉의 장남 예쉬안핑(葉選平·엽선평, 당시 광둥성 성장)이 진화에 나섰다. 직접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 유자녀들의 의견일 뿐 아니라 당 중앙의 결정이었다. 아직도 우리 형제들은 7명의 여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일단은 믿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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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원수(十大元帥)의 평균 결혼 횟수는 4.9차례, 순전히 예젠잉 덕분이다. “그 바쁜 와중에 정말 부지런했던 사람”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대상도 근대중국 군벌의 시조 쩡궈판(曾國藩·증국번)의 집안 딸과 혁명가, 군인, 간호사, 학생 등 다양했다.
문인들도 뒤지지 않았다. 신중국 제1의 문호(文豪) 궈뭐뤄(郭沫若·곽말약)는 4차례에 불과했지만 기록을 생생히 남긴 덕에 아직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중국인들은 1995년 다롄(大連)에서 101세로 세상을 떠난 두 번째 부인인 일본 여인을 특히 애석해한다.
부모가 지어준 일본 이름을 버리고 궈뭐뤄가 지어준 안나(安娜)를 평생 사용한 이 여인은 원래 도쿄 성 누가 병원의 간호사였다. 1916년 6월, 오카야마(岡山) 6고에 재학 중이던 궈뭐뤄는 1고에 다니던 친구 병문안 갔다가 안나를 처음 만났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의 애인일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미간에 빛이 났다.”
친구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안나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냈다. “망우(亡友)의 X레이를 보고 싶다.” 중국 청년의 편지를 받은 안나는 며칠간 잠을 못 잤다. 동봉한 영시(英詩)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40여 차례 영문 편지를 주고받은 안나는 쓰촨(四川) 천재와 결혼을 결심했다. 4남1녀를 연달아 출산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궈뭐뤄의 유곽 출입이었다. 귀국한 후에도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성병을 옮기고도 태연했다.
궈뭐뤄와 이혼한 안나는 죽는 날까지 저우언라이의 보살핌을 받았다.
덩샤오핑, 방광암 걸린 저우언라이 ‘대타’로 복귀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34>
김명호 | 제335호 | 2013081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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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의 발병 사실을 몰랐다. 온갖 일을 다 시켜먹었다. 저우언라이의 주치의들은 마음이 급했다. 몰래 예젠잉을 찾아가 이실직고했다.
린뱌오 사후 마오쩌둥은 간부들을 잘 만나지 않았다. 기회를 엿보던 예젠잉은 마오쩌둥과 함께 외빈 접견이 끝나자 저우언라이의 혈뇨(血尿)가 담긴 병을 내밀었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 치료 전담반을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예전잉에게 책임을 맡겼다. 저우언라이를 대신할 인물도 물색했다. 시골에 쫓겨가 있던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을 극비리에 불러 올렸다.
시아누크 환영만찬회가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이 좌정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만찬장 문이 열리며 꾀죄죄한 몰골의 노인이 나타났다.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어디 앉아야 좋을지 몰라 당황해하는 노인을 마오쩌둥의 여비서가 와서 안내하자 좌중이 술렁거렸다. “주석이 덩샤오핑을 베이징으로 불렀다.” 외신기자들이 용수철처럼 밖으로 튀어나갔다.
전 세계의 신문들이 덩샤오핑의 기용 가능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일단 소문부터 내놓고 여론을 들어보는, 중공의 전통적인 방법을 외국인들은 알 턱이 없었다. 만찬장에서 돌아온 예젠잉은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팬티 바람으로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덩샤오핑이 돌아왔습니다. 군사위원회를 이끌 수 있도록 주석께 간청합니다.”
마오쩌둥은 예젠잉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저우언라이와 상의했다. 덩샤오핑의 부총리 복직과 총참모장 임명을 결정했다.
73년 3월 9일, 저우언라이는 정치국 회의 석상에서 자신의 증세를 설명했다. “2주간 휴가를 청한다. 주석도 동의했다. 내가 없는 동안 정치국 회의는 예젠잉이 주재한다. 군사위원회 업무도 마찬가지다.” 다음날, 중공 중앙은 덩샤오핑의 부총리 임명을 발표했다. 5개월 후, 덩샤오핑은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중앙 정치국과 군사위원회 진입은 시간문제였다. 저우언라이와 예젠잉은 한숨을 돌렸다. 4인방은 긴장했다.
해가 바뀌자 저우언라이는 해방군 총의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예젠잉은 병원을 떠나지 않았다. 방광암에 효과를 봤다는 비방(秘方)과 험방(驗方)을 다 긁어 모았다. 수술 받는 날은 수술실 앞을 떠나지 않았다. 결과를 꼬치꼬치 캐묻고 나서야 병원문을 나섰다. 비서의 기록에 의하면 “온갖 전쟁을 다 해봤지만 암세포와의 싸움처럼 힘든 것도 없다”며 한숨 내쉴 때가 많았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도 예젠잉이 병원을 방문할 때는 문 앞에 나가 맞이했다.
예젠잉과 저우언라이는 1924년 8월, 광저우(廣州)의 황포군관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교장 장제스는 교수부 부주임 예젠잉을 총애했다. 무기를 휴대하고 교장 집무실을 마음대로 출입할 정도였다. 프랑스 유학을 마친 저우언라이가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했다. 두 청년은 국·공 합작 시절인 탓도 있었지만 항상 붙어 다녔다. 나이는 예젠잉이 27세, 저우언라이보다 한 살 더 많았다.
3년 후, 국·공 합작을 파기한 장제스가 공산당원을 숙청했다. 예젠잉은 “사람을 많이 죽인 정당은 성공할 수 없다”며 국민당을 떠났다. 저우언라이를 찾아가 입당을 자청했다. “피에는 공짜가 없다. 많이 흘린 정당이 집권한다.” 이제 공산당은 틀렸다며, 열성 당원들조차 당을 떠날 때였다. 50년 가까이 두 사람은 상부상조했다.
덩샤오핑이 저우언라이를 대신해 국무원과 군사위원회의 일상 업무를 관장하자 4인방은 반발했다. 정치국 회의에서 사사건건 덩샤오핑을 물고 늘어졌다.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목한 당 부주석 왕훙원은 악담까지 퍼부어댔다. 덩샤오핑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면, 예젠잉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4인방을 공격했다. 뾰로통해서 앉아 있던 장칭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도 개의치 않았다.
4인방은 전국적으로 덩샤오핑 비판운동을 전개했다. 마오쩌둥도 예전 같지 않았다. 정신이 들었다 말았다 했다. 예젠잉과 덩샤오핑은 실각 위기에 몰렸다.
예젠잉은 저우언라이의 치료와 덩샤오핑 보호에 매달렸다. 훗날 경호원 중 한 사람이 “밤마다 방안에서 혼자 흐느끼곤 했다. 통곡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는 구술을 남겼다. 병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죽든지 살든지 결과도 명쾌하다. 저우언라이의 병세는 호전될 기색이 없었다.
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4인방은 추모 열기에 찬물을 뿌렸다. 빈소 설치를 불허하고 상장(喪章) 착용을 금지시켰다. 검은색 옷도 못 입게 했다. <계속>
4인방, 덩샤오핑·예젠잉 거세게 공격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35>
김명호 | 제336호 | 2013081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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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젠잉은 단호했다. “덩샤오핑은 당당한 당의 부주석이고 국무원 제1 부총리다.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4인방은 절충안을 내놨다. “예젠잉이 해야 한다.” 80을 눈앞에 둔 예젠잉은 “나는 자격이 없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덩샤오핑은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 신세였다. 추도식을 주재하지 못하면 앞날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덩샤오핑이 침통한 표정으로 추도사를 읽어 내려가자 4인방은 긴장했다. 차기 총리는 덩샤오핑의 몫이나 다름없었다.
마오쩌둥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지만 정신 하나만은 여전했다. 총리 인선을 놓고 고심했다. 쫓아냈던 덩샤오핑은 다시 중책을 맡겨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4인방은 더 고약했다. 아무리 야단을 쳐도 잘못을 고칠 줄 몰랐다. ‘모순 해결에 능한 변증법의 대가’다운 결정을 내렸다. 의외의 인물을 발탁했다.
저우언라이 사망 13일 후인 76년 1월 21일, 마오쩌둥은 “앞으로 누구를 통해 주석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지 알려달라”는 국무원 부장(장관급)들의 요청에 화답했다. “화궈펑(華國鋒·화국봉)이 국무원을 이끌어라. 화궈펑은 정치수준이 높은 사람이 아니다. 내부 단속만 하고, 외부 일은 덩샤오핑이 관장해라.”
2월 2일 중공 중앙은 전 당에 ‘1호 문건’을 발송했다. “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의 제의를 중앙정치국이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공안부장 겸 부총리 화궈펑을 국무원 대리총리로 임명한다.” 문건에는 다른 중요한 내용도 들어있었다. “예젠잉 동지의 병세가 위중하다. 천시롄(陳錫聯·진석련) 동지가 중앙군사위 공작을 주재한다.”
4인방은 “예젠잉을 군사위원회에서 끌어내리고, 덩샤오핑의 총리 길을 막았다”며 자축했다. 상하이 거리에 큼지막한 표어가 나붙기 시작했다. “강력히 요구한다. 장춘차오를 총리에 임명해라.” 장춘차오는 기겁했다. 빨리 떼어내라고 지시했다. “나 장춘차오는 총리 임명을 강력히 요구한다”로 둔갑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기뻐하기는 예젠잉도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이 4인방에게 대권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영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화궈펑 정도는 어린애였다.
선량하고 정직하면서 국가대사에 관심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예젠잉의 건강을 걱정했다. 기를 쓰고 예젠잉의 집무실에 전화를 해댔다. “원수(元帥)마저 병세가 위중하다니 나랏일이 걱정이다.” 집무실 직원들은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원수는 병에 걸린 적이 없다. 평소와 다름없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중국처럼 소문이 빠른 나라도 없다. 온갖 풍문이 떠돌았다. 외국 언론들은 진위 판단이 불가능했다. 중국인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한 줄도 모른 채, 실무파·급진파 등 신조어 만들어내느라 분주했다.
예젠잉은 침묵했다. 오랜 혁명과정을 통해 ‘침묵이 지혜의 원천’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입방정 떨다 귀신도 모르게 몰락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걱정하는 옛 부하들이 “베이징은 요양하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다. 남쪽으로 거처를 옮기자”고 해도 듣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처사에 불만을 표시하는 간부들에겐 화를 냈다. “마오 주석이 없었더라면 신중국 탄생은 상상할 수도 없다. 지금도 우리는 상하이 조계의 지하실을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4인방은 예젠잉과 덩샤오핑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중앙군사위 상임위원회 석상에서 비수를 들이댔다.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하고 계급주의 종식론을 선양했다. 생산력에만 치중해 인민들을 사악한 길로 몰아넣으려 한다.” 예젠잉의 비준을 받아 개방한 군사박물관도 폐쇄시켰다. 예젠잉이 의지할 곳은 마오쩌둥밖에 없었다. 주석의 결정 앞에는 풍부한 투쟁경험이나 절세의 통찰력도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예젠잉은 2년간 틈만 나면 마오쩌둥에게 덩샤오핑을 추천했다. “인재처럼 구하기 힘든 것도 없다. 말을 잘 안 들어서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간 벌여만 놓은 일이 한둘이 아니다. 완성할 사람은 덩샤오핑밖에 없다.”
일곱 살 아래인 덩샤오핑에게는 짜증을 냈다. “겁내지 마라. 무슨 일이건 대책이 있게 마련이다.” 덩샤오핑도 만만치 않았다. “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무서워도 원칙은 양보할 수 없다.” 예젠잉은 기다렸다는 듯이 싱글벙글했다. 79세와 72세 먹은 노인들의 대화였다. <계속>
덩샤오핑 “청력 나빠 여러분 말 제대로 못 들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36>
김명호 | 제337호 | 2013082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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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9월 24일, 베트남 노동당 서기를 만난 자리에서 마오쩌둥이 덩샤오핑을 평한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 가장 가난한 나라는 너희가 아니라 우리다. 인구는 8억을 웃돌고 총리는 700일 가까이 병원 밖을 나오지 못한다. 1년에 수술을 4차례나 받을 정도로 위험하다. 예젠잉도 건강이 엉망이다. 내 나이 82세,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멀쩡한 사람은 덩샤오핑이 유일하다.”
4인방은 “주석이 덩샤오핑을 후계자로 삼을지 모른다”며 머리를 맞댔다. 상황을 역전시킬 묘안을 짜냈다.
마오쩌둥에게 탁월한 동생이 한 명 있었다. 누가 봐도 미래의 총서기감이었지만 1943년 6월 신장(新疆)에서 아들 마오위안신(毛遠新·모원신)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집권에 성공한 마오는 어린 조카를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말년에는 모든 지시를 위안신을 통해 내렸다.
마오위안신은 4인방과 가까웠다. 하루는 큰아버지에게 랴오닝(遼寧)성의 여론을 보고했다.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놓고 말들이 많습니다. 긍정과 부정을 판단하기 힘들어합니다. 열에 일곱은 성과가 있다고 말합니다. 착오 투성이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열에 일곱입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위안신의 말엔 조리가 있었다. 마오쩌둥은 계속하라고 손짓을 했다. “문제는 덩샤오핑입니다. 그간 그가 한 말들을 분석해 봤습니다. 문화대혁명의 업적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 쫓겨날지 몰라 전전긍긍하면서도 류샤오치의 수정주의 노선 비판에 인색합니다. 아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사람 같습니다.” 이 정도면 마오쩌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문혁에 대한 마오쩌둥의 입장은 확고했다.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도 “원칙의 문제”라며 굽히지 않았다. 큰아버지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업적이 장제스와의 전쟁과 문혁이라는 것을 위안신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문혁에 불만을 표시한 칭화대학 부서기 류빙(劉冰·유빙)의 편지도 문제가 됐다. 덩샤오핑을 통해 2개월 간격으로 류빙의 편지를 전달받은 마오쩌둥은 기분이 상했다. 외빈 접견이 끝난 후, 배석했던 부총리 리셴녠(李先念·이선념)에게 불만을 털어놨다. “내가 베이징에 있는 줄 알면서 직접 건네지 않은 이유가 뭘까. 꼭 덩샤오핑을 통해 전달해야만 했을까. 덩샤오핑은 고약한 놈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류빙을 부추겨 하게 하고 내 반응을 떠봤다.”
마오쩌둥은 두 사건의 연관성을 위안신에게 설명했다. “모두 덩샤오핑의 짓이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며 나와 계산을 한번 해보자는 심사다.”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이 문혁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고 단정했지만 내치지는 않았다. 문혁에 대한 인식을 통일시키기 위해 덩샤오핑을 내세웠다. 11월 2일, 덩샤오핑에게 지시했다. “정치국회의를 주재해라. 문화대혁명에 대한 긍정적인 결의를 이끌어내라.”
덩샤오핑은 문혁에 대해 아는 게 없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문혁 발발 후 지방에 쫓겨가 있던 일을 상기시켰다. “그간 저는 도화원에 박혀 있었습니다. 한(漢)나라가 있었던 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위(魏)나라와 진(晉)나라를 논하겠습니까(桃花原中人, 不知有漢, 何論魏晉).”
마오위안신을 통해 주석의 의중을 파악한 4인방은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소집해 덩샤오핑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예젠잉은 목이 탔다. 자신에 대한 비판 따위는 한 귀로 흘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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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기 중 하나인 청명은 중국의 전통적인 명절이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선영을 단장하며 조상의 넋을 기린다. 4월 5일을 전후한 청명절이 다가오자 조상보다는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상장(喪章)을 차고 흰 꽃을 든 군중들이 천안문 광장에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광장을 메운 추모객들은 자작시를 낭송하며 4인방을 성토했다.
예젠잉은 천안문 광장의 추도열기에 “4인방의 제삿날이 임박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매일 오후 3시만 되면 직접 광장 주변을 한 바퀴씩 돌았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애도시를 옮겨 적고 화환 숫자를 헤아렸다.
4인방은 공안부장을 겸하고 있던 총리대리 화궈펑을 압박했다. 화궈펑은 예젠잉과 덩샤오핑 몰래 베이징 주재 정치국원들을 소집했다. “악독하고 못된 것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로 뛰쳐나왔다. 덕지덕지 붙은 표어와 시들 중에는 주석을 공격한 것들도 있다.” 4인방을 비난한 내용이 대부분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장칭(江靑)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화환들을 걷어버리고 반혁명적인 연설을 한 사람들을 잡아들여라.”
예젠잉은 현실을 존중했다. 마오쩌둥이 살아있고 화궈펑과 마오위안신이 있는 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판단했다. 이럴 때는 입다물고 틀어박혀 있는 게 상책이었다. 중병(重病)을 선포하고 대문을 걸어 닫았다. <계속>
마오, 장칭이 鄧 당적 박탈 요구하자 “그는 지도자감”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37>
김명호 | 제338호 | 2013090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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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은 부메랑이다. 만든 사람의 심장을 겨누는 장소로 둔갑하곤 한다. 천안문광장도 예외가 아니다. 1976년 4월 5일을 전후해 천안문광장에서 일어난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는 신중국 변신의 계기였다.
4인방은 생전의 저우언라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를 대신해 국정을 총괄하던 덩샤오핑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죽은 사람은 비판할 가치도 없다”며 포화를 덩샤오핑에게 집중시켰다.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신문잡지와 비(非)관방 선전기구를 동원해 반혁명 분자 덩샤오핑을 비판하자”고 제안했다. 덩샤오핑은 끄떡도 안 했다. 장칭(江靑)은 발을 동동 굴렀다. ‘매국적(賣國賊)’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저우언라이 사후 총리대리에 임명된 화궈펑에 대해선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며 무시했다.
덩샤오핑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덩샤오핑에 관한 문제는 내부모순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지시 때문이었다. 1937년 7월 마오쩌둥은 옌안의 항일군정대학 강의에서 모순을 외부모순과 내부모순으로 구분한 적이 있었다. 외부모순은 적과 발생하는 모순이지만 내부모순은 자아비판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4인방은 마오와 화궈펑을 설득하지 못했다. 장칭은 마오의 지시에 반발했지만 화궈펑은 마오의 말이라면 무조건 준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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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의 4인방 반대 투쟁도 진전이 없었다. 화궈펑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을 공격했다. 주석의 혁명노선에 배치된다. 엄중한 착오를 범했다.”
천안문광장에 운집한 군중들은 연일 저우언라이를 찬양하며 장칭과 4인방에게 독설을 퍼부어댔다. “모두 힘을 합해 악마를 제거하자. 저우언라이 총리는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다.” 4인방을 이리와 늑대에 비유하고 장칭을 “황제를 꿈꾸는 미친 여자”라고 매도했다.
4월 4일 오후, 사태 대응을 위한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시위자들에게 동조하던 예젠잉과 리셴녠은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연락관 마오위안신이 나타나자 화궈펑이 회의를 주재했다. 베이징 치안 담당자가 입을 열었다. “1400여 개의 직장에서 보낸 2073개의 화환이 광장을 뒤덮었다. 6m짜리도 있다. 시위자들은 덩샤오핑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장칭은 “해가 지면 화환들을 수거해 소각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화궈펑도 동조했다. 대형 트럭 200대가 광장에 들이닥쳤다.
날이 밝자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10만 명을 웃돌았다. 텅 빈 광장에 분노한 시위대는 “화환을 돌려달라”며 인민대회당으로 몰려갔다. 중앙정치국도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그간 참석을 거부하던 덩샤오핑도 비판을 받겠다며 모습을 나타냈다. 4인방의 일원인 장춘차오는 덩샤오핑을 1956년 헝가리 민중봉기를 주도했던 ‘임레 나지(Imre Nagy)’의 중국판이라고 비난했다. 마오위안신이 덩샤오핑을 비판하는 마오쩌둥의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덩샤오핑은 고개를 떨군 채 침묵했다. 부주석 왕훙원은 마오쩌둥의 지시를 전달했다. “10만 민병을 동원해 진압해라.”
오후 6시30분, 정치국 성명이 광장에 울려퍼졌다. “아직도 회개를 못한 주자파(走資派)가 당에 잠입했다.” 덩샤오핑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10시30분, 광장이 암흑으로 변했다. 시위자들에게 30분간 시간의 여유를 줬다. 11시가 되자 광장에는 100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출동한 민병들은 100여 명을 체포했다. 사망자는 없었다. 천안문광장의 사태를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옆에 있던 문건 관리자에게 심회를 피력했다. “민중의 만세 소리를 듣던 곳이 성토장으로 변했다. 죽으면 역사의 심판을 피하기 힘들다.”
4월 6일 다시 정치국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시위가 계획적이고 조직적”이라고 단정했다. 4인방은 마오위안신을 마오쩌둥에게 보냈다.
조카로부터 회의 결과를 들은 마오쩌둥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나도 무슨 음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덩샤오핑이 막후에서 시위를 조정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권한을 행사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날 밤, 장칭이 마오쩌둥에게 달려갔다. 덩샤오핑의 당적 박탈을 요구했다. 마오는 거절했다. “나는 민심을 잃었다. 저우언라이는 백성들 마음에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사건 때문에 덩샤오핑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 자격을 갖췄다.” <계속>
통치권 넘긴 마오 “염라대왕 만날 약속” 농담만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38>
김명호 | 제339호 | 2013090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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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건의지 지상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철저히 내치지 않았다. 묘한 지시를 첨부했다. “당적은 보유케 해라. 하는 걸 잘 지켜봐라.” 정치국 회의장에 침묵이 흘렀다. 4인방의 일원이며 한때 마오의 후계자였던 왕훙원(王洪文·왕홍문)의 얼굴이 백지장으로 변했다.
정치국은 한발 더 나갔다. 덩샤오핑을 적으로 간주했다. 감옥에 처넣건, 패 죽이건 상관없다는 의미였다. 훗날 덩샤오핑은 당시를 회상했다. “이날을 계기로 4인방의 힘도 약해졌다. 인민들은 더 이상 왼쪽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여론이 돌아섰다. 혁명이라면 넌덜머리들을 냈다.”
총리와 당 제1 부주석에 선출된 화궈펑은 서열이 급상승했다. 4인방과의 관계 개선에 들어갔다. 4인방은 화궈펑을 적수로 보지 않았다. 당 원로들도 “긴장이 극에 달한 정치 분위기를 완화시킬 사람이 없다”며 겸손하고 소심한 화궈펑을 지지했다.
덩샤오핑이 자취를 감추자 전 세계 언론들의 오보가 잇달았다. 다시 정치무대에 등장한 후에도 수십 년간 소설을 써댔다. “덩샤오핑은 1967년 주자파로 몰렸을 때처럼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위기에 대비해 비밀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명령으로 직위가 해제된 날 베이징을 탈출했다. 정치국원이었던 광둥군구(廣東軍區) 사령관 쉬스유(許世友·허세우)의 전용기를 타고 광저우(廣州)에 안착했다. 며칠 후 예젠잉도 광저우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변두리에 있는 온천마을을 전전하며 4인방 제거계획을 세웠다.” 중국 물정 모르는 특파원들이 찻집과 골목에 나돌던 말들을 곧이곧대로 보도한, 이런 말들을 믿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덩샤오핑은 민첩했다. 면직 당일 밤,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 통 들고 중앙 경위국(警衛局) 서기 왕둥싱(汪東興·왕동흥)을 찾아갔다. 마오의 경호실장 격인 왕둥싱은 옛 친구의 청을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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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궈펑에게 통치권을 넘긴 마오쩌둥은 앉아 있는 시간보다 누워 있을 때가 더 많았다. 5월 11일 심장발작이 일어난 후부터는 매사가 귀찮았던지 화궈펑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슬픈 농담만 되풀이했다. “염라대왕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장칭(江靑·강청)은 힘이 넘쳤다. 당과 군대의 선전기구를 동원해 마오쩌둥 사후에 대비했다. 덩샤오핑과 혁명 원로들 비판에 정력을 쏟아부었다.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잘못 보였다 하는 날엔 귀신도 모르게 행방불명이 되고도 남을 정도로 살벌했다.
젊은 시절부터 온갖 신산(辛酸)을 겪은 당 원로들은 핫바지가 아니었다. 부총리 왕전(王震·왕진)이 시산(西山)의 베이징군구 깊숙한 곳에 칩거 중인 예젠잉을 방문했다. 4인방을 대놓고 거론했다. 이날 왕전은 정곡을 찔렀다. “4인방은 없다. 주석까지 해서 5인방이 맞다.” 예젠잉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눈에 보이지 않게 보살폈다. 6월 10일 덩샤오핑이 왕둥싱을 통해 마오와 화궈펑에게 보낸 편지가 최근 공개됐다. “집사람이 안질에 걸렸습니다. 증세가 심해서 병원에 입원해야 합니다. 간호를 위해 가족 중 한 사람이 병실에 함께 기거했으면 합니다.” 마오는 선뜻 허락했다. 부인이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덩샤오핑은 살던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통지를 받았다.
7월 6일, 중국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주덕)가 세상을 떠났다. 저우언라이 사망 6개월 후였다. 덩샤오핑은 추도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7월 28일 3시 42분 53.8초, 베이징에서 100㎞ 떨어진 탕산(唐山)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24만2769명이 사망하고 하루아침에 4204명이 고아가 된 대형 지진이었다. 큰 변이 날 징조라며 전 중국이 들썩거렸다. <계속>
닉슨 만난 마오쩌둥 “싸우다 지치면 친구 되는 법”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39>
김명호 | 제340호 | 2013091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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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1975년 4월 18일,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평소에 안 하던 말을 했다. “둥비우(董必武·동필무)가 죽고, 총리는 병중이다. 내 나이 여든둘, 몸도 못 가눌 날이 멀지 않았다. 그때는 너희들에게나 기대겠다.” 현장에 있었던 두슈셴(杜修賢·두수현)에 의하면 그렇게 비장하고 처량해 보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2개월 후 심장병이 재발한 후부터는 음식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그래도 책은 놓지 않았다.
1976년 2월,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다. 마오쩌둥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한 닉슨을 국가원수로 예우했다. 직접 만나 1시간40분간 대화를 나눴다. 목이 막히면 종이에 하고 싶은 말들을 써내려 갔다. 허약할 대로 허약해진 83세 노인의 기억력과 사고는 경이로웠다. 4년 전 겨울, 처음 만났을 때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거론하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미국 국내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국제문제 분석도 명쾌했다.
평생 논쟁을 즐긴 마오쩌둥은 이날도 수십 년간 적대시하던 미국의 전직 대통령과 논쟁을 벌였다. 헤어질 무렵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손에 힘이 없어 보였다. 건배 제의를 눈치챈 닉슨도 찻잔을 높이 들었다. 마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들릴락 말락 했다. “우리는 수십 년간 바다를 사이에 두고 원수처럼 지냈다. 원수 진 집안이 아니면 머리 맞대고 의논할 일도 없다. 원래 싸우다 지치면 친구가 되는 법이다. 서로를 위해 건배하자. 이제 나는 술을 못 마신다.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가 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술이 없지만 물은 있다. 물로 술을 대신하자.” 닉슨과 수행원들은 마오의 매력에 흠뻑 취했다. 닉슨도 마오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며 화답했다. “세상에 어려운 일은 없다. 등산하듯이 한 발 한 발 기어오르면 된다.”
닉슨 회견 직후부터 건강이 악화됐다. 3월 8일 오후, 지린(吉林)성에 운석이 떨어졌다. 지면 19㎞ 상공에서 폭발한 3000여 개의 운석 덩어리가 시골 마을을 덮쳤다. 177㎏짜리도 있었다. 전속 간호사가 운석 소식이 실린 신문을 마오쩌둥에게 읽어줬다. 한참 듣던 마오는 간호사를 제지했다. “그만 읽어라. 듣고 싶지 않다. 천지가 요동칠 징조다. 하늘에서 돌덩어리기 떨어지면 사람이 죽는다. 삼국지를 보면 제갈량과 조자룡이 죽을 때도 그랬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4월 30일, 뉴질랜드 총리를 만난 후, 배석했던 화궈펑을 붙잡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종이 3장에 뭔가 써서 건넸다. “천천히 해라. 급하게 서두를 필요 없다.” “네가 일을 처리하니 안심이다.” “예전 방침대로 하면 된다.”
5월 27일 밤, 화궈펑이 파키스탄 총리 부토를 마오쩌둥의 서재로 안내했다. 부토는 10분 만에 자리를 떴다. 마오의 두 손을 잡고 건강 회복을 기원했다. 부토가 베이징을 떠난 후 중국 정부는 “외빈들의 주석 접견을 불허한다”고 대외에 공포했다. 화궈펑을 비롯한 정치국원들은 돌아가며 병실을 지켰다.
마오쩌둥은 통증을 견디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독서만 한 진통제는 없었다. 손에 힘이 빠지면 의사와 간호사가 대신 들고 책장을 넘겼다. 눈이 피곤하면 간호사에게 읽으라고 손짓했다. 눈에 피로가 풀리면 다시 책을 읽었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그럴 기세였다.
사망 2개월 전, 마오쩌둥은 고향산천이 그리웠다. 어린 시절 뛰어 놀던 곳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 중앙정치국은 토론과 연구를 거듭했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함부로 의견을 내지 못했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은 병실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덩샤오핑을 비판하고 예젠잉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안 가는 곳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주석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마오의 사망에 대비했다. 9월 1일 밤, 측근들과 긴급회의를 열었다. 예젠잉과 덩샤오핑 외에 화궈펑을 처음 거론했다. “일단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다가 처리하자. 주석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 너희들이 있으면 나는 없어도 된다. 내일 다자이(大寨)로 가겠다. 밑에서부터 여론을 조성할 생각이다. 내가 없는 동안 사람 감시를 철저히 해라.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수시로 알려라.”
2일 새벽, 장칭은 병중의 마오쩌둥을 뒤로했다. 호화 전용열차에 한 무리의 측근과 연예인, 작가들을 데리고 다자이로 떠났다. 농민들에게 보여줄 외국영화 필름과 백마 4마리도 손수 챙겼다. 측근들의 만류도 뿌리쳤다. <계속>
‘측천무후’ 꿈꾼 장칭 vs ‘독 오른 여자’ 치려는 예젠잉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40>
김명호 | 제341호 | 2013092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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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따라온 일류 연예인과 작가들도 『고대의 걸출했던 정치가 무측천』 『法家人物 呂后)』 같은 책을 나눠주며 장단을 맞췄다.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공산주의 사회에도 여성 통치자가 등장할 때가 됐다”는 것과 그게 그거였다.
인민일보와 북경일보에 장칭의 활동이 1면을 차지했다. “중공 중앙 정치국위원 장칭 동지가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을 대표해 인민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당시 전국의 언론기관은 4인방이 장악하고 있었다.
병상의 마오쩌둥은 장칭과 달랐다. 반년 사이에 전우 저우언라이·주더·장원톈을 잃고, 탕산(唐山)대지진까지 겪은 절세의 노(老) 혁명가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자신을 말라 비틀어진 버드나무에 비유하며 처연함을 감추지 못했다. 툭 하면 남북조 시대 시인 유신(庾信)의 ‘고수부(枯樹賦)’의 한 구절을 우물거렸다. “흔들리는 모습, 살 뜻이 다했다. 강가에 서 있는 모습 서글프다. 나무도 이와 같거늘 사람이 어찌 견딜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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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교외 시산(西山)에 칩거 중인 예젠잉은 입이 탔다. 답답하기는 개국 10원수 중 한 사람인 네룽쩐도 마찬가지였다. 예젠잉이 피서지 시산에 있다는 말을 듣자 더위를 핑계로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은 1926년, 황포군관학교 교관 시절부터 생사를 함께한 노 전우였다.
예젠잉은 젊은 시절부터 지하공작에 익숙했다. 네룽쩐의 방문을 받자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라디오 볼륨을 크게 하고 수도꼭지란 수도꼭지는 모두 틀어놓고 나서야 대화를 시작했다.
네룽쩐이 먼저 예젠잉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것들 때문에 정말 큰일이다. 주석 옆에 붙어있으니 방법이 없다.” 예젠잉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석도 저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여러 번 말한 적이 있다. 참고 기다리자.” 경극의 반주가 방안에 울려 펴졌다. 예젠잉은 네룽쩐을 안심시켰다. “덩샤오핑은 쫓겨나고 우리도 제거 대상에 이름이 올랐다. 지금은 저것들이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지만 왕훙원이나 장춘차오는 조조가 아니고 주석은 한나라 황제가 아니다. 주석이 세상을 떠나면 장칭이 난동을 부릴 테니 두고 봐라. 독이 오른 여자는 처리하기가 쉽다. 셰익스피어를 많이 읽은 여자들이 못됐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두 원수의 ‘시산예화(西山夜話)’는 몇 날 며칠이 지나도 그칠 줄을 몰랐다.
9월 5일, 마오쩌둥의 병세가 악화됐다. 예젠잉은 당 부주석 자격으로 장칭에게 귀경을 독촉했다. 장칭은 서두르지 않았다. 밤새도록 창 밖만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어둠이 걷히자 귀경길에 올랐다.
장칭은 냉정했다. 사신이 남편 곁에 어른거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분주하게 오가는 의료진과 훌쩍거리는 간호사들에게 소리를 꽥 질렀다. “질질 짜지 마라. 꼴도 보기 싫다. 당장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방에서 나가라.”
장칭은 마오쩌둥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계속 문질렀다. 가끔 소리를 지르며 화도 냈다. 훗날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나 마오를 괴롭혔다고 장칭을 비난했다. 아직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장칭은 누가 뭐래도 마오의 부인이었다.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9월 8일 새벽, 장칭은 신화사 인쇄창을 찾아갔다. 공원들에게 모과(文冠果)를 한 개씩 선물했다. 중국인들은 문관과(文官果)라고도 불렀다. 그 덕에 왕훙원·장춘차오·야오원위안 등 문관들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라며 몰매를 맞았다.
오후가 되자 번갈아가며 마오쩌둥의 병실 문을 지키던 정치국원들이 도열했다. 한 사람씩 들어가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예젠잉의 차례가 왔다.
수십 년간 추종했던 영수와의 영원한 이별, 예젠잉은 만감이 교차했다. 1980년 봄, 당시를 회상했다. “가늘게 뜬 두 눈은 뭔가 새로운 지시를 내리려는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갑자기 눈을 뜨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느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방에서 나온 예젠잉을 간호사가 황급히 따라 나왔다. “주석이 부릅니다.” <계속>
毛 사망 90분 뒤 침실 옆방서 정치국 긴급회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41>
김명호 | 제342호 | 2013092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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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행동은 훗날 수많은 추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했다. 한동안 사실처럼 떠돌던 말이 있다. “마오 주석이 예젠잉에게 4인방을 제거하라고 생애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기도가 막혀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예젠잉은 표정과 눈빛을 보고 주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말 같지 않은 소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다.
마오쩌둥이 예젠잉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흔히들 “무한한 신뢰를 표했다”고 하지만 예젠잉이 주관하던 중앙군사위원회 업무를 천시롄(陳錫聯·진석련)에게 넘기려 했고, 중앙 정치국회의에 예젠잉을 참석 못하게 한 사람이 마오였다. 천하의 마오쩌둥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죽으면 장칭을 잘 부탁한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가 차라리 설득력이 있다.
1976년 9월 9일 0시10분, 마오쩌둥이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4인방 몰락 후 펴낸 『4인방 반당집단 범죄증거자료집(四人幇反黨集團罪證資料)』은 장칭을 악녀로 묘사했다. “마오 주석이 서거하자 다들 비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장칭은 딴판이었다. ‘오만상 찡그리지 말라’며 목청을 높였다. 기쁘다는 말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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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사망 1시간30분 후, 마오의 침실 옆방에서 정치국 긴급회의가 열렸다. 장례 문제를 토의했다. 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가 유체(遺體) 보존을 주장했다. “주석의 유체를 보존 못하면 자손만대에 죄인이 된다. 인도의 네루를 봐라. 사망 후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시신이 부패했다. 결국 화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월남의 호찌민은 유체 보존에 성공했다. 월남에 도움을 청하자.” 1956년, 마오쩌둥은 “사후 화장을 허락한다”는 문서에 제일 먼저 서명을 한 적이 있었지만 아무도 화장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허구한 날 통곡만 할 수는 없는 법, 장칭은 불안이 엄습했다. 연금 중인 덩샤오핑 처리 문제를 들고 나왔다. “주석은 덩샤오핑 때문에 죽었다. 당적을 박탈해야 한다.” 화궈펑(華國鋒·화국봉)이 “마오 주석은 덩샤오핑의 당적을 유지시켰다. 주석의 뜻에 위배된다”며 반대했다. 발끈한 장칭과 한바탕 언쟁을 벌였다. 몇 시간 전의 화궈펑이 아니었다. 마오가 세상을 떠난 마당에 화궈펑의 주장엔 권위가 있었다.
날이 밝자 중공 중앙과 전인대(全人代),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명의로 마오쩌둥의 사망을 발표했다. 연금 중이던 덩샤오핑은 방 안에 마오의 사진을 걸어 놓고 작은 제단(祭壇)을 차렸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심장이 멎었다”며 온종일 식음을 전폐했다.
마오쩌둥 사망 다음 날, 당 부주석 왕훙원(王洪文·왕홍문)은 중난하이(中南海) 자광각(紫光閣)에 중앙판공청 직반실(中央辦公廳直班室) 간판을 내걸었다. 중앙판공청 명의로 전국의 성과 시·자치구에 통보했다. “주석 장례기간 중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직반실로 보고해라.” 직반실 업무는 왕훙원의 비서가 총괄했다.
후난(湖南)성 서기가 화궈펑에게 전화로 일렀다. 화궈펑은 예젠잉과 의논했다. 4인방을 제외한 정치국원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전국의 당·정 기관에 공문을 발송했다. “중앙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개설한 중앙판공청 직반실을 즉각 폐쇄한다. 중공 중앙 명의로 전국의 당·정·군에 통보한다. 모든 중대 문제를 화궈펑 동지를 정점으로 하는 당 중앙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라.” 마오쩌둥 사후 지휘계통을 장악하려던 4인방의 기도는 하루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국민은 묘한 속성이 있다. 친근한 지도자에겐 금방 싫증을 낸다. 독재자라고 비난은 해도 강한 지도자를 선호한다.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려면 천하대란은 시간 문제였다. <계속>
4인방 제거 결심한 화궈펑, 병원 간다며 리셴녠 만나 밀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42>
김명호 | 제343호 | 20131006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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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가라고 권하는 사람이 많았다. 화궈펑은 마오의 시신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화궈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다들 병원에 가겠거니 했다.
베이징 의원에 잠깐 들른 화궈펑의 승용차가 부총리 리셴녠(李先念·이선념)의 집을 향했다. 화궈펑은 지방 관리를 오래했다. 린뱌오 사후 마오쩌둥에 의해 권력 중심부에 진입했지만 중앙에 친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리셴녠만은 예외였다. 후난성(湖南)성 서기처 서기 시절 재정업무를 담당할 때, 직속 상사가 전국의 재정과 무역을 관장하던 리셴녠이었다. 얼떨결에 마오의 후계자가 된 후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귀찮게 굴어도 리셴녠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소문대로, 입도 무거웠다. 무슨 말을 해도 되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불청객을 맞이한 리셴녠은 짚이는 바가 있었다. 거실로 안내한 후 방문을 걸어 닫았다. 화궈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래 머물 시간이 없다. 용건만 말하겠다. 마오 주석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제 4인방과의 싸움은 피할 수가 없다. 관건은 군의 동향이다. 나는 군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 나 대신 예젠잉을 만나라. 방법과 적당한 시기를 물어봐라.” 리셴녠은 동의했다. 마오의 후계자 화궈펑의 생각이 그렇다면 해볼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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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시롄과 리셴녠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이였다. 리셴녠 모친의 전 남편이 천(陳)씨였다. 가끔 만나면 촌수를 따지며 웃을 때가 많았다.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변을 볼 정도로 가까웠다. 마오 사망 직후 함께 시신을 지킨 적이 있었다. 이날도 리셴녠이 화장실에 가자 천시롄이 뒤를 따라왔다. 리셴녠 옆에 손으로 코를 막고 다가와 속삭였다. “아무래도 저것들이 무슨 일을 벌일 속셈이니 조심해라.”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목하지는 않았다. 리셴녠이 손을 휘젓자 입을 닫았다.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다.
화궈펑과 천시롄의 의중을 파악한 리셴녠은 쾌재를 불렀다. 이틀 후 “기분이 울적하다. 샹산(香山)식물원이나 한 바퀴 돌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차가 식물원 근처에 오자 수행원에게 지시했다. “식물원은 다음에 가자. 이왕 왔으니 예젠잉 원수나 보고 가자.”
경비실의 연락을 받은 예젠잉은 당황했다. “도처에 4인방의 눈이 널려 있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면 만나지 말자. 무슨 날벼락 맞을지 모른다. 거처도 오가지 말자”고 한 적이 엊그제였다. 한동안 망설이다 통과시키라고 지시했다.
얼마 전 서울을 다녀간 리셴녠의 딸에 의하면,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의 첫 대화는 싱거웠다고 한다. “갑자기 웬일인가.” “웬일이라니.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
거실에 정좌한 리셴녠에게 예젠잉이 물었다. “상부의 명을 받은 공적인 일 때문인가, 아니면 옛 정이 그리워 찾아왔나.” “모두 다다.” 예젠잉은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경극 가락이 방 안에 가득했다.
80회 생일을 앞둔 예젠잉은 청력이 신통치 않았다. 음악 소리에 뒤엉킨 리셴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필기구와 성냥을 챙겨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1980년, 예젠잉의 회상에 의하면 두 노인은 변기 앞에 앉아 필담을 나눴다. 한 줄씩 쓰고 소각했다. 리셴녠이 먼저 썼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한바탕 해야 할 것 같다.” 예젠잉이 답했다. “맞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싸움은 안 된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싸움이라야 한다.” 필담이 계속됐다. “방법은 네가 정해라.” 예젠잉이 고개를 끄덕이며 ‘陳錫聯’ 석 자를 썼다. 리셴녠의 대답도 간단했다. “그건 내게 맡겨라.” 젊은 시절부터 지하공작과 잔혹한 정치투쟁을 경험한 두 원로는 변기 안에 쌓인 재들을 막대기로 휘젓고선 화장실을 나섰다. 둘의 만남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예젠잉과 리셴녠의 지지를 확보한 화궈펑은 4인방 제거에 착수했다. 마오쩌둥의 그림자나 다름없던, 8341 부대장 왕둥싱(汪東興·왕동흥)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였다. 30년간 마오의 경호를 책임졌던 왕둥싱도 4인방이라면 넌덜머리를 냈다. 진작부터 “전쟁시절 총 한 방 못 쏴본 것들”이라며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너 죽고 나 살자”는 4인방도 마찬가지였다. 9월 14일, 장칭은 화궈펑에게 전화를 걸었다. “토의할 일이 생겼다. 당장 정치국 상무위원 회의를 소집해라. 예젠잉은 부르지 말라”는 말만 하고 툭 끊어버렸다. <계속>
마오가 남긴 원고·서류 쟁탈 ‘문건대전’ 점화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43>
김명호 | 제344호 | 2013101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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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젠잉과 화궈펑이 연합하지 않았다면 4인방 제거는 불가능했다. 마오쩌둥 사망 당시 당내에는 실무, 극좌, 혁명원로 등 3개의 파벌이 있었다. 마오가 후계자로 지명한 당 제1 부주석 겸 총리 화궈펑과 마오의 직계였던 중앙 경위국장(8341부대 최고 지휘관) 왕둥싱, 마오의 부인 겸 생활비서 장칭을 필두로 한 4인방, 젊은 시절부터 온갖 별꼴을 다 겪은 예젠잉ㆍ천윈ㆍ리셴녠ㆍ네룽쩐 등 당 원로들이 각 파벌을 대표했다.
4인방은 결집력이 강했다. 원로들은 정치국과 군에 포진해 있었지만 문혁을 겪으며 눈치꾸러기로 전락했다. 화궈펑은 군과 정치국을 장악하지 못했고, 중앙경위국도 마오가 세상을 떠나자 방향을 잡지 못했다. 잠복해 있던 권력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두 파벌이 손을 잡으면 다른 하나는 몰락하는 싸움이었다.
화궈펑과 연합한 예젠잉은 신중했다. 4인방을 제거하기까지 약 1개월간 거처를 옮겨 다니며 원로들을 설득했다. “정치와 범죄는 그게 그거다. 성공하려면 주도면밀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상대를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괴팍하고 변덕이 심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이번 싸움은 먼저 거는 쪽이 진다.” 마오가 살아있을 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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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건대전이 한창이던 1976년 9월 18일 오후 3시 마오쩌둥 추도식이 천안문광장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100만 명으로 제한했다. 이날도 한 차례 소동이 벌어졌다. 발단은 엉덩이였다. 시작 10분 전 화궈펑이 천안문을 등지고 군중을 향해 도열한 당·정·군 고위인사들에게 제안했다. “뒤로 돌아 주석의 유상(遺像)을 향해 세 번 절하자.” 부총리 장춘차오(張春橋)가 싱긋이 웃고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도 마라. 돌아서서 절을 하면 저 많은 군중에게 우리 엉덩이를 삐죽 내밀어야 한다.” 4인방 중 나머지 3명도 “추도객들에게 엉덩이를 들이댈 수 없다”고 동조했다.
예젠잉과 리셴녠은 “정치국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이라며 화궈펑 편을 들었다. 화궈펑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고 4인방에게 화를 냈다. “광장의 군중에게 엉덩이를 내밀지 않으면 주석에게 우리의 더러운 엉덩이를 들이밀란 말이냐.”
숙소로 돌아온 장칭은 화궈펑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앙정치국회의를 열자고 요구했다. 장춘차오와 왕훙원은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4인방의 근거지 상하이에 급전을 보냈다. “군용차량을 징발하고 민병(民兵)들에게 실탄을 지급해라. 해안에 경비정을 배치하고 레이더에서 눈을 떼지 마라.”
9월 29일 평소 습관대로 오밤중에 정치국회의가 열렸다. 장칭은 이날도 연금 중인 덩샤오핑을 당에서 축출하자며 원로들을 압박했다. 장춘차오는 엉뚱한 의견을 내놨다. “10월 1일 개국기념일 행사를 성대히 열자. 8341부대와 베이징군구도 병력을 동원해라.” 잠자코 있던 화궈펑이 예젠잉을 힐끔 쳐다봤다. 벌떡 일어난 예젠잉은 화장실로 달려갔다. 오는 길에 왕둥싱 옆을 스치며 살짝 말했다. “지금은 비상시기다. 군 동원은 절대 안 된다.” 왕둥싱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를 마친 장칭은 왕둥싱을 잡고 늘어졌다. “나는 주석의 미망인이다. 남긴 원고와 문건들을 내가 보관하겠다.”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주석의 친필 원고와 문건들은 우리 당의 중요한 보배다.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 중앙판공청에서 보관함이 마땅하다.” 왕둥싱은 중앙판공청 주임도 겸하고 있었다. <계속>
예젠잉·덩잉차오·천윈 “4인방, 당내 문제로 처리”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44>
김명호 | 제345호 | 2013102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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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예젠잉은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를 찾았다. 밀담을 나누던 중 원로 천윈(陳雲·진운)에게 사람을 보냈다. 칩거 중이던 천윈은 짚이는 바가 있었다. 집을 나서며 아들에게 금고 열쇠를 맡겼다. “중요한 문건들이 저 안에 들어있다. 내가 못 돌아오면 열쇠와 금고를 당에 보내라. 너는 열어보지 마라.”
오랜만에 만난 세 사람은 4인방 문제로 머리를 맞댔다. 천윈의 제의에 동의했다. “잘못하면 내전으로 번질 수 있다. 피를 흘려선 안 된다. 당 내부문제로 처리하자.”
날이 밝자 예젠잉은 군사과학원 정치위원 쑤위(粟裕·속유)와 원장 쑹스룬(宋時輪·송시륜)을 불렀다. “경계를 강화하고 군 간부들의 동향을 주시하라”고 지시했다. 국·공전쟁 시절, 양자강 도하(渡河)를 지휘했던 쑤위와 1950년 겨울, 한반도 북단 장진호(長津湖)에서 미군에게 치명타를 안긴 쑹스룬은 장담했다. “4인방이라면 넌덜머리가 난다. 도대체 뭐 하던 것들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저것들 없애는 일이라면 당장이라도 짚신 신고 싸우겠다. 명령만 내려라.” 예젠잉은 이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당시 301의원에는 입원 중인 군 지휘관들이 많았다. 병원 인근 호텔에 4인방의 추종자들이 몰려들어 방을 잡았다. 보고를 받은 예젠잉은 침착했다. 지휘관들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냈다. “옆에 있는 호텔에 4인방 측 사람들이 많으니 주의해라. 회의를 하자고 부르면 절대 가지 마라.” 지휘관들은 핏대를 세웠다. “천하의 예젠잉도 나이를 먹더니 별 걱정을 다 한다. 염려 마라, 여차하면 총으로 쏴 죽여버리겠다”며 대표 두 명을 예젠잉에게 보냈다.
환자복 차림으로 찾아온 지휘관들에게 예젠잉은 차분히 말했다. “아프지도 않은 놈들이 병원 침대에서 빈둥거리는 거 내가 잘 안다. 빨리 병원들을 나와라. 군복 입고 각자 부대로 돌아가서 병력을 장악해라. 왕훙원이 나를 감시하기 위해 근처로 이사 왔다. 위험하니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라. 이제 피 흘리는 싸움은 그만해야 한다.”
10월에 들어서자 4인방은 화궈펑을 집중적으로 몰아붙였다. 궁지에 몰린 화궈펑도 결전 태세를 갖췄다. 왕둥싱과 만나는 횟수가 눈에 띄게 빈번했다.
10월 2일 오후, 예젠잉이 왕둥싱의 집무실을 찾았다. 왕둥싱은 방문부터 걸어 닫았다. ‘慶父不死 魯難未已(우두머리를 없애지 않으면 편할 수가 없다)’며 빨리 손을 쓰자고 재촉했다. 훗날, 왕둥싱은 이날의 대화를 자주 회상했다. “예젠잉이 내 귀를 잡아 끌었다. 뭐든지 때가 무르익어야 한다. 상대방을 안심시키고 신속하게 허를 찔러야 한다. 무슨 싸움이건 순식간에 희비가 엇갈린다. 방심은 금물이다. 남자와 여자가 싸우면 결국은 여자가 이긴다. 장칭을 여자로 생각하면 우리가 진다. 적으로 여겨야 한다.” 왕둥싱이 “원수와 화궈펑 동지 두 분이 이끌고, 정치국원 다수가 동조합니다. 이기는 싸움입니다”라고 하자 예젠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문을 나서려던 예젠잉이 다시 몸을 돌렸다 “요즈음 장칭이 화장실에 자주 간다고 들었다. 한번 가면 머무르는 시간이 길다는데 사실이냐.” 왕둥싱은 장칭의 건강상태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변비는 없지만 소변 보기를 힘들어 합니다.”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예젠잉이 중얼거리듯이 한마디 했다. “장칭도 머리가 복잡하구나. 생각이 많을 수밖에.”
왕둥싱의 집무실을 나온 예젠잉은 화궈펑을 찾아갔다. 의견 일치를 확인하고 옥천산(玉泉山) 숙소로 돌아갔다. 그날 밤 9시, 왕둥싱은 화궈펑에게 예젠잉과 나눴던 대화를 보고했다. 화궈펑은 “4일 밤 정치국회의를 열겠다. 저들이 회의 내용에 골몰하는 동안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세워라. 시간이 하루밖에 없다.”
1976년 10월 6일 수요일(음력 윤 8월 13일), 오후 3시 반, 예젠잉의 경호원과 운전기사 집무실에 홍색전화의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오늘 밤 8시 중난하이 화이런탕(懷仁堂)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회의가 열린다. 1시간 전에 도착해라.”
80고령의 예젠잉은 이른 저녁을 들었다. 경호원 한 사람만 대동하고 옥천산을 떠났다. 80년대 말, 영화감독으로 대성한 딸이 홍콩의 한 출판사 회의실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아직도 그날의 정경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말만 남겼다. 무슨 일인지 별생각이 다 났다.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경호원도 회고담을 남겼다. “우리는 5시에 출발했다. 원수는 장칭이 머무르는 댜오위타이(釣魚臺)를 지날 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중난하이가 익숙하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질문이 이어졌다. 화이런탕에 후문이 있느냐? 차 진입이 가능하냐? 왜 그런 걸 묻는지 의아했다.” <계속>
태양 품었던 여인 장칭, ‘마지막 자유’는 사과 따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45>
김명호 | 제346호 | 2013102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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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궈펑의 제안으로 예젠잉이 기획하고, 왕둥싱이 주관한 4인방 체포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것도 30분짜리 단막극이었다. 워낙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다 보니, 행동조장의 구술이 있기 전까지 달 밝은 가을밤, 중국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일을 놓고 수십 년간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다.
마오쩌둥 사망 당시 베이징에는 13명의 정치국원이 있었다. 홍위병들에게 얻어맞아 식물인간이 된 원수 류보청(劉伯承·유백승)과 4인방을 제외한 8명이 4인방 제거를 화궈펑에게 건의했다. 표결로 처리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화궈펑과 예젠잉은 묵살했다. “그간 4인방은 정국을 좌지우지했다.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우리가 다수라도 안심할 수 없다. 이런 일은 참여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베이징을 떠나지 말고 소식을 기다려라.”
1976년 10월 6일 오후 7시10분 남짓, 4인방 체포를 위해 중난하이(中南海)의 화이런탕(懷仁堂)에 도착한 예젠잉을 왕둥싱이 영접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배치를 끝냈습니다.” 예젠잉은 신중한 모략가였다. 사방에 눈길을 준 후 “우리는 배수진을 친 거나 마찬가지”라며 36계의 한 구절을 속삭였다. “적의 가장 견고한 부분을 공격해서(催其堅), 상대편 두목을 제압하면(奪其魁), 그 조직은 해체된다(解其體).”
예젠잉은 시인이기도 했다. 애독자였던 왕둥싱은 이날 따라 예젠잉의 시 중에서 적당한 대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두보(杜甫)의 시로 화답했다. “사람을 쏘려면 말부터 쏴야 하고, 도둑을 잡으려면 괴수부터 잡아야 한다(射人先射馬, 擒賊先擒王).”
예젠잉은 만족했다. “오늘 밤 중요한 무대가 펼쳐진다. 네가 노래해라. 나는 들으며 즐기겠다”며 농담을 건넸다. 왕둥싱은 “저는 당 중앙의 명령에 따를 뿐”이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4시간 전, 왕둥싱은 4인방 체포 담당조를 조직했다. “당 중앙의 결정사항이다. 오늘 밤 4인방에 대한 격리심사를 실시한다. 당과 국가의 운명이 우리 손에 달렸다.” 간 큰 부하가 있었다. “누구의 명령을 받았습니까?” 당연한 질문이었다.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다. 화궈펑 총리와 예젠잉 원수의 명령이다.” 이 한마디에 다들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왕둥싱은 준수사항을 선포했다. “비밀을 엄수해라. 누설했을 경우 엄중한 제재를 각오해라. 명령에 복종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총성이 울려선 안 된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가족은 물론, 외부와의 접촉을 금한다. 6시30분까지 정해진 위치에 가서 대기해라.” 또 질문이 있었다. “왕훙원 부주석은 항상 총을 차고 다닙니다. 사격 솜씨도 백발백중입니다. 사격을 해오면 어떻게 할까요?” “그래도 총을 쏘지 마라. 몰려가서 때려죽여라. 맞아 죽어도 너희들 책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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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45분, 회의 시작 15분을 남기고 화궈펑이 도착했다. 화궈펑과 예젠잉이 소파에 앉자 왕둥싱은 자리를 떴다. “저는 정치국 상무위원이 아닙니다. 병풍 뒤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겠습니다.”
장춘차오가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행동조원들에게 몇 대 얻어터지며 끌려온 장춘차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화궈펑이 자리에 앉은 채 문건을 읽어 내려갔다. “너는 중앙의 경고를 무시하고 당파를 결성해 불법활동을 자행하며 당권을 찬탈하려 했다. 당 중앙은 너의 격리심사를 결정했다. 즉각 집행한다.” 잠시 후 왕훙원이 단정한 복장에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나타났다. 행동조들에게 제압당하자 “뭐하는 짓들이냐. 나는 회의에 참석하러 왔다”며 저항했지만 잠시였다. 장춘차오와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끌려 나가며 가볍게 탄식했다고 한다. “너희들이 이렇게 빨리 손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왕훙원과 장춘차오, 4인방 중 두 명을 10분 만에 처리한 예젠잉과 화궈펑은 뜨거운 물수건과 진한 차로 피로를 풀었다. 남은 건 야오원위안과 장칭이었다. 상무위원이 아닌 두 사람은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다. <계속>
장칭, 자택서 美 영화 보다 무방비로 강제연행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46>
김명호 | 제347호 | 2013110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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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둥싱은 거침이 없었다. “장칭은 지금 중난하이에 있다. 체포조가 대기 중이다. 당장 잡아오면 된다. 야오원위안은 이곳으로 유인하자. 마오 주석의 원고는 중난하이 밖을 나갈 수 없다. 주석의 선집 출판에 관한 건이라고 하면 당장 달려온다. 전화는 화궈펑 동지가 직접 해라.”
화궈펑의 전화를 받은 야오원위안은 “왕훙원·장춘차오 동지와 마오 주석 선집 5권 출판에 관한 문제로 회의 중이다. 당신의 의견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자 “지금 곧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화궈펑과 예젠잉은 더 이상 회의실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왕둥싱도 부하들에게 야오원위안의 체포를 지시하고 자리를 떴다.
서류가방을 들고 나타난 야오원위안을 왕둥싱의 부하들이 에워쌌다. 화궈펑 명의의 격리심사 명령서를 들은 야오원위안은 데리고 온 경호원을 불렀다. 어느 구석에 있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체포를 지휘한 조장이 구술을 남겼다. “야오원위안은 계속 고함을 질러댔다. 격리심사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너희들은 어디 소속이냐’며 그칠 줄을 몰랐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시켰느냐’는 말까지 했다. 준비한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자 잠잠해졌다.”
장칭은 누가 뭐래도 마오쩌둥의 부인이었다. 왕둥싱은 중앙경위국 부국장 장야오스(張耀祠·장요사)에게 체포를 지시했다. “전화로 화궈펑 총리의 명령을 받았다고 해라. 당 중앙이 격리심사를 결정했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하면 된다. 문건 상자 열쇠를 뺏고, 전화선을 끊어버려라. 여자 간호사를 한 명 데리고 가라.”
장야오스도 구술을 남겼다. “마오 주석 사망 후, 장칭은 중난하이 201호에 머물고 있었다. 몇 명만 데리고 갔다. 주변에 깔린 게 모두 직속 부하들이라 몰려갈 필요도 없었다. 매일 다니던 곳이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장칭의 부속실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비서, 경호원, 의사, 간호사, 운전기사들이 뒤섞여 포커 놀이가 한참이었다. 장야오스 일행을 보자 손을 흔들었다. “안에 있느냐”고 손짓을 하자 다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야오스는 장칭의 운전기사에게 방탄차를 문 앞에 대기시키라고 일렀다.
장칭은 소파에 앉아 클라크 게이블이 나오는 미국 영화를 보고 있었다. 장야오스를 보자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장야오스는 부동자세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장칭! 너는 중앙의 경고를 무시했다. 패거리를 만들어 당을 분열시키고 당권 찬탈 음모를 꾸몄다. 이에 중공 중앙은 너를 격리심사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즉각 집행한다.”
듣고만 있던 장칭이 몸을 꼿꼿이 하고 되물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몇 년 전 공개됐다. “중공 중앙 누구의 결정이냐.” 장야오스는 말문이 막혔다. 이실직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화궈펑과 예젠잉 부주석의 명령을 받았다.”
동행한 행동조장이 언성을 높였다. “서둘러라.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 장칭은 못 들은 체했다. 질문을 계속했다. “이 방에 있는 문건들을 어떻게 하라는 지시도 받았나.” “우리가 보관하겠다. 열쇠를 내놔라.” 장칭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안 된다. 나는 당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화궈펑에게 직접 전달하겠다.” 장야오스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화궈펑에게 편지를 써라. 서류와 함께 전달하겠다.”
장칭은 앉은 자리에서 화궈펑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너의 명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내게 격리심사를 통보했다. 당 중앙의 결정인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편지와 함께 문건 상자 열쇠를 이들에게 넘긴다.”
중요 서류와 열쇠가 담긴 봉투를 건넨 장칭은 복장과 머리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둥싱이 간호사를 딸려 보낸 것은 이유가 있었다. 장칭은 평생 소변에 시달렸다. 마오쩌둥이 선물한 요도염 때문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날도 방문을 나가기 전 화장실에 들어가 30분을 허비했다.
장칭은 평소 이용하던 방탄차를 타고 격리심사가 진행될 곳으로 이동했다. 선도차량과 중무장한 8341부대원을 태운 차가 뒤를 따랐다. 베이징 중요 거리의 교통경찰들은 눈치가 빨랐다. 홍색등을 무시하고 질주하는 차량을 제지하지 않았다. 아주 높은 사람이 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격리심사장에 도착한 장칭을 지켜본 사람이 기록을 남겼다. “차에서 내린 장칭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여기가 어디냐, 언젠가 와본 곳 같다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기억을 더듬는 듯했지만 잠시였다. 무장요원들에게 끌려 격리심사실로 들어갔다.”
거의 같은 시간, 베이징 위수사령관 첸시롄(陳錫聯·진석련)의 명령을 받은 무장병력이 칭화·베이징 양 대학을 급습해 홍위병 두목들을 체포했다. 4인방의 주무대였던 신화통신사와 인민일보, 중앙TV도 화궈펑과 예젠잉이 파견한 사람들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문혁 10년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권력과 금력처럼 허망한 것도 없다. 아무리 망할 것 같지 않아도, 인심을 잃으면 망하는 건 하루아침이다. 4인방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