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헌팅턴의 이와같은 예측이 결코 페이퍼 워크에서 끝나지 않은 것임을 9.11사태를 통해 실감하게 되었으며,
북한이 이슬람 테러 위협국들에 유도탄과 생화학무기를 공급하는 나라로 '악의 축'으로 지목되면서 더욱 우리 주변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지금
문명충돌을 문명융합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모델을 구축할 힘이 있는가 하는 것이 경제발전 이상으로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유교 모델은 지금까지 기독교나 이슬람 종교와는 달리 종교전쟁을 일으킨 일이 거의 없다. 하늘, 땅, 사람을 대립이 아니라
융합으로 보는 삼합 일체의 사상은 도교 불교 유교의 삼대 종교세력을 공존시키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이슬람의 문명적 대립구조와 그 영원한 지하드[聖戰]와
같은 종교 전쟁이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비교적 드문 편이었다.
한국의 경우 세계의 모든 종교가 들어와 있으면서도 종교내의
분규는 있어도 종교간의 분규는 별로 크게 발생하지 않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신라 불교의 원융회통이나 유교의 인(仁)과 서(恕)는 타자 배제의 원리가 아니라 역지사지의 타자
인정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경우처럼
인종이나 종파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사랑의 힘과 그 실체는
유불선 합일의 사상과 그렇게 먼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타자 배제가 아니라 나와 다른 타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더불어 살아가려는 관용(寬容)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어떠한
문명이든 관용이 없으면 세계는 분쟁과 갈등의 도가니로 화하게 될 것이며 헌팅턴의 가상 시나리오가 적중하게 될 것이다.
관용은 윤리적 가치체계라기보다 생물학적 생존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인간은 잡식을 하면서도 그 중에 들어있는 항원(抗原)에 대한 항체는 보통의 경우 거의 혈액 속으로
흐르지 않는다. 즉 우유 1리터를 마시면 소의 알부민이 꽤 짙은 농도로 혈액속으로 들어온다. 만약 입으로 우유를 마시지
않고 주사로 혈액 속에 주입하면 틀림없이 쇼크로 죽게 된다.
하지만 소화기관은 끝없이 흘러 들어오는 외계의 이물질을 배제하지 않고 자기 내부로 받아들여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장치를 지니고 있다. 그 같은 생물학적 장치를 생물학 용어로 톨레런스, 즉 '관용'이라고 부른다. 소화관을 경유한 항원이 소화관 부속의 임파조직 안에서 면역을 억제하는 T세포를 자극하여 그것을 증식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T세포를 다른 동물에 주사하면 그 동물도 '관용'이 되어 버린다. 소화기관의
면역계는 생물이 외계와 공존하기 위한 놀라운 지혜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생물학자들은 이 관용을 연구하면서 훌륭한 철학자로 변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종교적인 마인드를 갖게 된다. '자기(自己)
속에 하나의 모형으로서의 비(非) 자기(自己)를 지녀야만 한다'는 점이다. 자기 속에 있는 비 자기의 모형 - 이 것이야 말로 유교의 덕목인 인(仁)이며 서(恕)이다.
지난날의 문명은 '눈'의 시대 '귀'의 시대였지만 앞으로 백년을 움직이는 문명은 '위'(胃)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과학기술 역시 타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내부로 융합하는 면역계를 창조해 내는 일이다. BT의 시대에서
가장 귀중한 과제도 바로 그 같은 생물체의 융합기술인 것이다.
●●●문명충돌을 문명융합으로 만들어가는 기술모델은 의외로 서양이 아니라 한국 그리고 동양의 종교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