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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남지고교.남지초교(오른쪽),남지중과 남지여중 (왼쪽)이 있는 남지들판)
대체적으로 교육이라 할 때 어떠한 목적으로 의도적 계획적으로 시행되는
행위라 말 할 수 있다면 교육은 원시시대나 또는 그 후 신석기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것이다.
고대에는 교육의 형태나 내용이나 목적이 생활에 요구된 필요한 훈련이나
예전(禮典) 의식(儀式)의 훈련, 생활에 필요한 관습 금기(禁忌) 억제 등의
훈련일 것이라 추측된다.
그때 실제적인 교육은 가족에 의해서 행해 졌을 것이며, 차차 타인에게
알려주어 드디어 인류의 지식과 기술의 발전이라는 계기가 움터나 훗일의
의도적 형식적 교육이 구체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기원 전후로 해서 역사적 전환기에 접어들었을 때 지난날의 몽매한 수준을
벗어나서 정주생활(定住生活) 형식의 지역적 결합으로 이행되어 사유 재산 제도의
확립과 계급적 편성이 이루어지는 원시 부족 사회에서 부족국가 형태로 이행되면서 교육도 함께 발전되었다.
신라시대에 들어와 가장 특색 있는 교육은 곧 화랑도이다.
세속오계(世俗五戒)라는 덕목을 바탕으로 수련과 기품을 연마하고 유교 불교의 정신을 보태어서 그 시대가 요청하는 청소년을 길렀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점차 관리 등용정책으로서 과거제도가 시행되어 유학(儒學)이 진흥되었다.
이때부터 지방교육에까지 유의하여 지방에 근학관(勤學官)을 파견, 후일 향교 교육의 기틀이 마련되어 졌다.
조선시대는 국가 통치 이념을 신유교주의(新儒敎主義)인 성리학(性理學)으로 종지(宗旨)로 삼았으므로 자연히 유교의 교육 목표인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었으며 따라서 [수기]와 [치인]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성리학의 교육이 주축이 되었다.
지방 교육기관으로 향교가 각 고을마다 세워지게 되는데 주로 현실 쪽으로 치우쳐 관료 지향인 과거 준비교육이 득세를 하였으며, 성인 군자를 목표로 삼는 이상주의적 목표보다는 교육은 치국평천하 실현을 인간의 큰 과업으로 삼아 벼슬길에 나갈 것을 장려하였던 것이다.
갑오경장까지 조선의 교육제도는 성균관을 비롯한 사학(四學), 지방으로는 향교, 서원, 서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갑오경장 이후 개화기에 이르러 현대적인 모습의 교육기관인 학당이 생기고 학교가 개교하게 되었으며, 우리 군에서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최초의 학교가 생겨났으니 바로 남창학교였다.
이 학교는 1905년에 인가를 받아 이문재(지금의 창녕읍 교동)에 설립 개교하였는데 후에 창녕공립보통학교가 되었으며 학교 이름이 창녕국민학교를 거쳐 현재 창녕초등학교인 것이다.
또한 영산에도 1908년 사립 경명학교가 설립되었는데 뒤에 영산보통학교가 되었으며 현재의 영산초등학교이다.
그러나 우리 고장의 신식 학교의 설립은 이들보다 상당히 뒤떨어진 1921년에야 인가가 되어 남지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1. 서원(書院)과 서당교육(書堂敎育)
1) 향교(鄕校)
보통 향교는 현청이 있었던 곳에 있었는데 우리 군에는 3개의 향교가 있었다.
그 중 계성현이 폐치 됨에 따라 계성향교는 일찍이 없어졌고 영산현의 영산향교와 창녕현의 창녕향교가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우리 고장에는 현청의 소재지가 아니므로 향교가 없었다.
향교는 문묘(文廟) 명륜당(明倫堂) 재(齋)를 둔 성균관 축소형태로서 지방에 설치된 관학(官學)이었다.
이곳에서는 과거시험에 대비한 교육을 시행하였으며 향교고사 성적 우수자에게 소과 복시에 진부(進赴)케 한다던가 군역 과세의 면제 등 적극적인 정책으로 지방 향교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또 관에서 교수나 훈도가 파견돼 학생을 가르쳤다.
갑오경장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교육제도와 교육기관의 정비로 향교는 문묘 석전(釋典)만을 향사(享祀)할 따름이었는데 일제시대에는 문묘직원을 두어 문묘를 지키게 하였다.
해방 후 유도회가 조직되고 유림 대표가 선출되어 문묘 향사와 향교 재산을 관리 운영하고 있으며 교육 기관의 역할은 하지 않고 있다.
2) 서원 (書院)
사진설명 ( 숙종때의 선비 신 일암 선생을 배출한 도산서원이 있었던 마산리 동편 땀 )
서원은 조선 또는 선현을 봉사(奉祀)하는 사(祠)와 자제를 교육하는 재(齋)가 결합 성립된
것으로서 지방의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고 연학수양(硏學修養)의 도장으로 백운동 서원이
그 효시라 할 것이다.
사학은 오래 전부터 교육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오고 있었는데 성종 대에 사묘 건립의
운동이 일반화되면서 지방에 많은 서원이 건립되어 졌다.
본래 서원이란 선비들이 모여 강학(講學)하는 곳을 말하나 조선시대에는 모든 학자들이
추앙하는 현인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 되었다.
따라서 서원을 설립하려면 반드시 뜻이 앞서고 여기에 모시는 주인공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유림의 뜻이 모여져야 하였다.
이러한 조건이 맞지 않으면 서원을 세울 수 없었다.
몇몇 사림(士林)들이 모여 세운 소규모 서원은 향현사(鄕賢祠)라 불리었다.
우리 창녕군에서도 많은 서원이 숙종 대에 건립되어졌는데 그 중 사액서원으로는 창녕현 고암면에 관산서원(冠山書院)이 있었다.
창녕군지의 기록을 참고하여 보면 관산서원외에 사액서원은 아니지만 물계서원(勿溪書院) 연암서원(燕巖書院) 광산서원(光山書院) 동산서원(東山書院) 소곡서원(蘇谷書院) 운곡서원(雲谷書院) 등이 창녕현에 있었고, 영산현에는 도천서원(都泉書院) 덕봉서원(德峰書院) 구봉서원(龜峯書院) 도산서원(道山書院)이 있었는데 이들 서원은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대부분 철폐되었으나 그 후 복원되기도 하였다.
이들 서원 중 우리 고장에 있었던 서원은 바로 도산서원이다.
도산서원은 마산리 518번지에 있었는데 철종 기미년(1859년)에 창건되었고 배향인물(配享人物)은 우리 고장의 선비였던 일암 신몽삼(辛夢參)이었다.
{취산군지}(鷲山郡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道山書院 在治西三十里馬山亭 哲廟己未建 一庵辛夢參享焉 戊辰
道山書院辛一庵上享祝文 搜索工專進修誠篤眞寶體認爲世矜式 ○定齋 柳致明 撰
배향인물인 일암 신몽삼은 본관이 영산으로 숙종 때의 대유(大儒)였다.
마산리 마산정에 살았으며, 후학을 양성하며 은거하여 명례학(明禮學)을 강론하였는데 암행어사의 천거로 황산도찰방,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등에 제수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저서로 가례집해(家禮輯解)가 있다.
이 도산서원은 대원군의 철폐령에 의해 훼손 철거(?去)된 이후 위폐는 매몰되었고 현판은 내려진 채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다른 곳의 서원들은 후손들의 열성으로 복구가 되어 다시 문을 열고 있어 이 서원도 언젠가 문을 열게될 것으로 기대된다.
3) 서당과 제(齋) 정(亭)
서당교육은 고구려 때 있었던 민중자제의 교육관이었던 경당(?堂)의 변천이라 한다.
글방이라고도 불려지는 서당은 고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민간이 설립하고 운영한 사설 교육 기관이었다.
대체로 향교나 서원에의 입학 전 준비를 위하여 한문의 독해력을 기르고 유교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을 가르치는데 공헌을 했는데 훈장 한사람과 방 한 칸으로서 인가도 필요 없이 설치 할 수 있었다.
서당은 훈장 스스로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또는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세운 훈장 자영서당과, 살림이 넉넉한 이가 제 자녀나 친척의 자제, 이웃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훈장을 혼자 부담하고 세운 유지독영(有志獨營) 서당, 마을 유지 몇 사람이 합쳐 훈장을 초빙하여 세운 유지조합 서당, 마을 전체가 동성이거나 동민이 조합하여 훈장을 모시고 마을 아이를 가르치게 한 촌락조합 서당 등이 있었다.
훈장에게 기본 급료{糧米}를 주었는데 훈장 가족들의 생계까지 부담하거나 훈장이 객지에서 온 경우에는 의복 식사까지도 학부모가 부담하였다.
이때는 매월 돌아가면서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때 글방에 내는 훈료(訓料)는 봄 가을 두 번 쌀 서 말이었다고 한다.
서당에는 학동중 나이도 많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뽑아 접장(接長)으로 임명했고 접장은 다음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그 다음 아이는 다른 아이에게 리레이식으로 가르치게도 하였다 한다.
접장 외의 아이를 동접(同接)이라 하였는데 매일 배운 것을 훈장 앞에서 암송하였다.
교육 내용은 강독, 제술(製述) 습자(習字)의 세 가지였다.
서당 교육은 자생적인 기초 교육 기관이었으나 국민 대중의 문자 교육과 그 마을의 도덕적 예교적(禮敎的)인 고을 풍속을 이루고 순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 고장에서도 서당이 상당히 많이 있었겠으나 확실한 통계나 자료가 없어 소개할 수 없다.
그러나 같은 마을이 한 성씨이었던 마을{集姓村}에서는 보통 재실에서 마을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으니 우리 고장의 재실에서도 위와 같은 교육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재실은 경치 좋은 곳에 지어 선비의 유람과 공부에 사용했거나 조상의 제사를 위해 지은 것도 상당수였으나 선비들의 서숙(墅塾)들로 자손들의 교육, 조선(祖先)의 제각이나 묘각, 별장이나 접객용 등 그 목적이 다양하였다.
재실의 건물 이름 끝에는 당(堂)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자가 붙어 있다.
궁궐 건물의 경우 건물의 주인공과 용도에 따라 그 서열이 정해지고 이름도 달라지게 되는데 '전(殿)'은 왕과 왕비의 공적(公的) 사적(私的) 공간, '당'은 왕의 아들의 공간, '합(閤)' '당'은 전과 당의 부속건물, '재]는 왕실 가족들의 생활 공간, '헌'은 별당과 같은 휴식 공간을 일컬었다.
그리고 '루'는 2층 짜리 휴식 공간, '정'은 단층 짜리 휴식 공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도 이에 따라 재실의 이름을 정하였던 것이다.
{창녕군지}에 실려 있는 정재중에서 묘제시에 자손들이 재숙(齋宿)하는 조선(祖先)의 묘제각과 봉선소를 제외하고 교육 목적의 장소로 제공되었던 강학소나 서당과 서숙은 {창녕현지}의 기록을 참고하여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월송정 (月松亭)
고곡리에 있었던 임진왜란때 곽망우당 의병군 연무소이었는데 지금은 없다.
{창녕현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月松亭 在縣西四十里忠翼公忘憂堂郭再祐壬亂鍊武所
월송정은 우리 고장에 살았던 선조들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의병으로 나섰고 또한 병술을 익혀 전투에 용감하게 참전하였던 것을 증언하여 주는 곳이라 하겠다.
다만 현존하지 않음이 유감스럽다.
오여정 (吾與亭)
지금 시남리 이이목 나루 동편에 있는 정자로 조선시대 창녕의 선비였던 어촌(漁村) 양훤(楊暄)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이 집을 짓고 인근 선비들과 교유하며 지냈던 곳인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다.
{창녕현지}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吾與亭 在縣南二十里進士楊暄游憩所
어촌 양훤은 동계 정문간공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곳 오여정에서 만년을 보냈으며 허미수와 절친하게 지냈는데 사후에 사림이 유어면 광산에 광산서원을 세워 배향하고 있다.
두남제 (斗南齋)
고곡리 두곡에 있었는데 하취원(河就源)이 강학하였던 집이다.
{창녕현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斗南齋 在縣南四十里河就源講學所
인근 마을의 문중 자손들과 학동들을 모아 가르쳤던 곳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월산제 (月山齋)
월하리 월상에 있는데 공씨 문중의 후손들을 길러내기 위하여 공한련(孔漢連)이 지은 재실이다.
또한 조상의 산소도 바라보이는 곳이라 봉선소도 겸했던 모양인데 6 25때 불에 타서 새로 중건하였다.
{창녕현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月山齋 在縣南四十里孔氏書塾
현재는 봉선소로만 사용되고 있다.
왕남제 (旺南齋)
수개리에 있는데 김준영이 정사(精舍)로 짓기 시작하여 완성치 못했는데 그의 아들 김성두가 완성시켰는데 노상직이 쓴 기문에 의하면 "손님과 벗이 머물어 갈 수 있고 경서와 사서를 두루 갖추어 두어 자손들이 여기서 공부하면 효자의 세대가 이에서 일어날 것"이라고하여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지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창녕현지} 기록은 다음과 같다.
旺南齋 在縣南三十里金준永所築
남호제 (南湖亭)
아지리 창아지 낙동강변에 있는 정자인데 김해 김종하(金鍾河)가 쓴 기문에 의하면 차삼도(車三道)가 1946년에 건립한 정사로 조상의 봉선소 겸 만년에 살고 쉬는 곳을 삼았다고 하며 문중의 손님 접대 또는 교육 장소로 쓰였던 곳이며 관리는 아들 차종석(車鍾碩)이 맡고 있다.
경치가 좋은 정자라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한다.
낙원제 (洛原齋)
남지리 본동에 있었던 정사(精舍)로 이곳에 살았던 김창진(金昌璡 일명 奎煥)이 서흥 김씨 문중과 마을 자제들의 교육 및 인근 선비들과 교유(交遊)하였던 장소로 사용하였던 서숙(墅塾)이었다. 해방되기 전 불에 타버린 후 복원치 못하고 있다.
학남서당
서당으로는 남지에서 이름이 남아 있는 유일한 것으로 학계리 옥산마을 도남재가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1910년경 개설되었으며 역대 훈장으로는 김영수 최봉세 김해수 박근식 김송갑 등이 많은 서생을 지도하였으며 1935년 폐당되었다고 한다.
장골서당
장실 마을 안 골짜기에 있었는데 팔계 정씨의 자녀들이 글을 배웠다고 하며 훈장으로 정귀철(鄭貴喆)이란 이가 있었다고 전한다.
일감정 (一鑑亭)
대곡리에 있는 성보영(成普永)의 강학소(講學所)이다.
본동에도 서당(남지리 286)이 있었는데 훈장은 김양필(金良弼: 일명 쌍필, 남지 동수였던 김봉륜의 아들)이었으며 배운 이는 박우열(朴禹烈; 남포) 김옥선(金玉先: 본동) 등 많이 있었고 또 웃개 마을 동사에 외지인 훈장을 초빙하여 마을 청년들에게 글을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또 서봉술(徐鳳述 : 한학자, 남지리 리장 역임)이 웃개 장터(남지리 619, 지금의 남지파출소 뒤)에 학당을 열어 10여년 아동들을 가르쳤다고 하며 용산리 아곡, 학계리 덕동(선생 吳潾善)에도 서당이 있어 많은 청년들이 글을 배웠다고 한다.
성사리 관동 서재골에도 서당이 있어 신학제도가 생기기 전 근대까지 조용한(趙鏞漢) 김차술(金且述) 김원개(金元介) 허위도(許爲道) 등이 수업을 받았으나 훈장 및 수업료 등은 확실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성사리 본동에도 김녕 김씨 종당 동편 공터가 예전에 서재가 있었던 자리라고 전해오며, 그 외 마산리, 두곡, 대곡에도 서당이 있었고 많은 이들이 배웠다고 하지만 자세한 내력은 전해 오지 않는다.
2. 우리 고장의 근대교육
향교나 서원 서당을 중심으로 실시하였던 유교적인 학문과 한문위주의 교육은 점차 개화기를 맞이하면서 근대적인 부국강병을 실현하는데는 먼저 실력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이며 신지식을 가진 강건한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 새로운 학교이며, 학교를 하나씩 세워 나가는 것이 자주적 근대화라고 초기의 개화파들은 인식했다.
의무교육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여 1906년 이후 의정부 회의에서 가결하여 의무교육 실시의 길이 열리고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리 경남에서도 부산개성학교가 1896년에 개교되었고, 그후 여러 사립학교가 개교되었는데 창녕에도 남창학교가 이문재에서 개교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본격적인 일제 식민정치가 개시되면서 사립학교는 억압되어 폐교하거나 공립학교로 변하는데 신 학제(新學制)의 실시로 신학문의 교육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식민지 초기에는 조선교육령을 제정 공포하여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동화 교육을 통해서 우민화 정책을 실천하려 하였다.
일어(日語)를 강요하고 조선어 한문과 이외의 모든 교과서를 일본어로 쓰고 교수 용어도 일어를 주로 사용하게 하였다.
또 민도에 맞는 교육이라 하여 보통학교는 3 -4년으로 수업 연한을 줄여 정하였다.
또 학교 설립도 억제하였는데 1920년대에 가서야 1개 면에 1개교라는 조금 완화되는 원칙으로 바뀌어 면마다 보통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수업 연한도 보통학교 6년 중등학교 5년으로 연장되었다.
{취산군지}에 다음과 같이 학교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南谷面公立普通學校 在南谷面 南旨里
南谷面尋常小學校 在南谷面 南旨里
조선 아이들의 학교는 공립보통학교이고 일본인 아이들의 학교는 심상소학교로 보통학교는 1개면에 1개교씩 설립되었지만 심상소학교는 영산면과 남곡면 2개교만 설립되었다.
3. 학교의 개교
1) 보통학교
일제시대 학교 설립을 억제하려고 3면 1교를 원칙으로 정하고 오다가 1920년대에 들어서 1면 1개교의 계획으로 조정되었다.
우리 고장은 그때까지 초등학교가 없어 공부를 하려고 하여도 먼 곳까지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배우지 못하였던 것인데 1면 1개교의 계획 추진으로 학교가 서게 되었던 것이다.
1921년 5월, 인가를 받아 남지공립보통학교가 남지리(지금의 동포동 천주교회 터 일대)에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1925년에야 6년제로 인가되었는데 그 당시 남지리에 학교는 있었으나 고곡지구는 너무나 멀어서 여간 열성적인 학부모의 자제가 아니면 학교를 다니지 못하였고, 또 인근 마을이더라도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하여 많은 아이들이 취학하지 못하여 취학률은 20%를 겨우 넘은 수준이었다.
1938년 4월에는 학교 명칭을 일본인 학교와 차별이 없게 한다면서 남지 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되었으나 차별 교육은 여전하였다.
기록이 없어 개교한 일자는 밝힐 수 없으나 지금의 동포초등학교 자리에 남지소학교가 있어 일본인 아동만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일제 말기의 교육방침은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에 두고 한국 사람을 일본인화 하여 전쟁 완수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공급하는 즉 전시동원 교육체제로 바뀌었다.
2) 간이학교 (簡易學校)
전시 동원에 완전히 봉사하는 체제로 개편된 학교의 교육 내용도 학생은 학업보다는 전쟁 물자의 생산, 군사 시설의 건설 등에 모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원병이란 이름 밑에 청소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시 동원 등을 감안한 초등교육 확대의 필요성은 곧 초등학교의 증가를 불러오게 되었는데 이 영향으로 우리 고장에는 2개 간이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다.
1933년 4월에 고곡리에 고곡간이학교가 개교되었는데 후에 남곡국민학교이며, 1941년 7월 25일에는 월하간이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다.
이로써 남지면내의 취학률은 40 - 60%에 이르게 되었다.
1941년 교육령을 개정하여 소학교령을 국민학교령으로 바꾸었으며, 초등교육 보급확대를 서두르게 되었는데 이때 초등학교의 명칭이 국민학교로 바뀐 후 해방 후까지 그대로 존속되어 해방 50년을 보낸 후에야 1996년 3월 1일부터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칭하게 되었으니 식민지 교육의 영향이나 잔재가 너무나 오랫동안 이 나라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심상소학교의 과목은 다음과 같았다.
수신(修身) 국어(國語 : 日本語) 산술(算術) 국사 지리 이과(理科) 직업 도화(圖畵) 수공 창가(唱歌) 체조(體操) 등이었으며, 여아(女兒)를 위하여 가사 재봉 등 고곡간이학교가 해방되기 바로 직전인 1944년 4월 1일 남곡국민학교로 인가되어 우리 고장에는 국민학교가 2개교로 늘어났다.
1. 광복 후의 교육
1945년 광복과 함께 식민지 교육은 끝이 나고 새 교육이 시작되었다.
물론 초기에는 여러 가지 혼란이 있었으나 점차 식민지 교육의 피해에서 벗어나 광복된 조국에 알맞은 민주교육 운동이 전개되었으니 해방된 그해 9월 24일에는 공립 초등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다.
남지국민학교도 이에 맞추어 개교를 하여야 할 형편인데 해방될 당시 교사가 일인이 약 40%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선생이 부족하였고, 학생을 가르칠 한글로 된 교과서도 또한 없는 실정이었다 한다.
그때 위에서(미군정청 교육담당관) 개학을 명령하면서 내려온 지시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한다.
학생들을 인종적, 종교적 관계로 차별하지 말 것, 교수 용어는 한국어로 할 것, 한국에 유해한 학과나 의식 또는 행사를 하지 말 것, 교과서는 당분간 산술이나 이과 외는 일본 교과서를 사용치 말 것이며, 부득이 쓸 경우는 교사에만 국한 할 것 등 [한글 첫걸음] [초등 국어독본]이 보급되기는 1946년 초여서 그 동안 학교에서는 선생이 적당하게 번역한 교재를 썼는데 그 형편이 말이 아니어서 우리 글의 맞춤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교사가 드물었고 음악시간이면 일본 가사를 번역하여 일본 곡 그대로 부르기도 하였고, 보건 시간에는 구령이 통일되지 않아서 "차려!"의 구령을 일본말의 '기오스케(氣を付け)'로 직역하여 [기착(氣着)] 이라 구령을 하던 웃지 못할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1946년 2월부터 국사 수업이 실시되었으며 1947년에 한글자습교실이 배부되는 등 우리 글과 우리 역사를 찾는 교육이 실시되어 국민학교의 기능을 점차 회복해 갔다.
1946년부터 학기는 2학기로 나누어 1학기는 9월 - 익년 2월 2학기는 3월 - 8월까지 였다.
교육이념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이 채택되어 일선 학교에 널리 알려지게 된 때도 이때부터이며, 학교의 수도 학생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빼 놓을 수 없는 일은 성인교육과 공민학교의 교육인데 우리 남지읍에도 한글을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문맹퇴치교육이 실시되었다.
주로 국문강습회로 면에서 주최하거나 마을 단위 주최 또는 국민학교에서 주최하여 3개월 정도 기간으로 가르쳤다.
이때 문맹자를 크게 줄여 전국적으로 12세 이상 문맹자의 비율이 42%나 감소되었다고 한다.
공민학교의 교육이 주로 국민학교 부설로 실시되었는데 학령을 초과한 미취학자를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새 교육 운동은 해방 후 6 25전쟁 발발 때까지 이어져 계속되었는데 전쟁 때문에 지방교육자치나 학제 개편 등은 법만 만들어 놓고 시행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해방 후 우리 고장의 국민학교는 해방후 일인 소학교의 터에 남지국민학교 분교로 있다가 1947년 9월 1일 개교한 동포국민학교, 월하간이학교 학생 일부를 수용 개교한 반포국민학교, 와 함께 남지국민학교, 남곡국민학교, 월상간이학교(분교) 등이 있었다.
2. 중등학교의 설립 (設立)
1) 중학교
문맹퇴치 교육이나 공민학교 교육의 향학열을 불태우게 하였고 점점 국민학교뿐만 아니라 중등학교로의 진학을 열망하는 학생이 늘어나면서 우리 고장에도 중학교를 설립하자는 운동이 지식층과 지방 유지를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다른 지방에도 공민학교가 발전되어 지방민들의 성원으로 학교 설립의 기운이 크게 번져나갔던 것이다.
우리 고장의 경우도 위와 같아서 1947년 4월 20일에 남지중등공민학교의 설립인가를 받아 남지중학교가 개교하게 되는데 이때 국민학교 교사 경력이 있었던 김해권(金海權)이 교장을 맡게 되었으며 조찬규, 권연수 등 읍내 유지 다수가 협찬을 하여 재단을 설립하게 되고 학교 유지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처음 개교 장소는 남지공회당으로 지금의 남지읍사무소 자리인데 칸막이를 하여 교실을 몇 칸 만들어 수업을 하였다.
개교 때 김해권 교장이 학교 설립인가를 받기 위해 문교부에 가서 활동할 때, 1개월 여 서울에서 죽치고 살면서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설립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 학교가 정상적으로 재단법인 남지학원으로 설립인가가 되기는 1949년 12월 20일로 초대 이사장에 조찬규 초대 교장에 김해권이 취임하여 명실 상부한 우리 고장의 중등교육기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남지중학교는 51년에는 1개 학년에 3학급씩 9개 학급으로 학급수가 늘어났으며 68년에는 15학급으로 증설되는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2) 고등학교
전시 중인데도 우리 고장에서는 축하할만한 일이 있었다.
곧 고등학교의 개교였다.
남지중학교가 개교할 당시에는 당시의 학제에 따라 5년제 중학교였으나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950년에 학제가 6, 3, 3, 4제로 개편되어 중학교 과정이 3년으로 되었으나 이 학제의 실시는 6 25전쟁이 한창이던 때인 1951년 3월 20일자로 교육법이 개정 공포되고 1951학년도 초인 9월 1일을 기하여 실시하게 되어 남지중학교에서는 불가불 고등학교 과정을 분리할 수밖에 없었다.
6 25전쟁 와중에서 1952년 5월 9일 재단법인 일민학술원에 남지일민고등학교가 인가되었고, 이어 초대 학교의 재단법인 이사장으로 권연수(權演洙)가 취임하였고, 초대 교장으로는 양동일(梁東一)이 취임하여 1952년 5월 26일 개교하였다.
개교 당시의 위치는 지금의 동포동으로 남지읍사무소 동편에 있던 건물인데 이곳은 높고 큰 굴뚝이 서 있었던 일제시대 장공장이었는데 그 안의 단무지 창고로 쓰던 것을 교실로 사용하였다 한다.
또 학교 이름이 처음에는 지금처럼 [남지고등학교]가 아니라 [남지일민고등학교]라 하였음이 특징이 있다.
학교명에 [일민(一民)]이란 말이 더 들어갔는데 [일민]이란 초대 문교부장관이었던 안호상(安浩相)박사가 문교시책으로 강력히 추진하였던 사상, 곧 일민주의를 지칭하는데 일민주의사상이란 인간주의와 민주주의로된 민족주의로서 원칙 다섯 가지 한백성주의로 ① 정민(正民) - 한밝삶(大覺生) ② 민족통일(民族統一) ③ 세계일민(世界一民) ④ 만민동일(萬民同一) ⑤ 인민제일(人民第一)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때 교육기회 균등을 실현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남지고등학교는 그 후 지금 남지중학교 자리로 이전하였다가 1970년 2월 23일에 그때 남지중학교가 있었던 남지리(동포동) 659-14로 이전하였으며, 다시 남지리(대신동) 829-10 현재 위치로 1974년 5월 10일 이전하였는데 교사는 동년 5월 25일에야 준공하였다.
3) 한국전쟁과 학교
6 25 한국전쟁은 막 자리를 잡고 자라나려던 한국 교육 발전을 머뭇거리게 하는 시련을 겪게 하였다.
우리 고장은 마지막 보루, 낙동강 전투의 최대 격전지로 휩싸여 전쟁의 포화를 집중적으로 얻어맞았다.
남지국민학교나 동포국민학교는 다행히 교사는 포탄이나 총탄 흔적이 있었으나 현관만이 부서지는 등 피해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미군이 주둔하였으며 공산군이 처음 도하하여 습격하였던 격전지 고곡리의 남곡국민학교는 집중 포화와 포격으로 목조교실 6간과 가교실 1간이 전소 파괴되고 말았다.
창녕군내에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소 파괴된 학교 교실이 모두 98개이었다고 한다.
피란을 다녀왔으나 상당기간 학교를 군부대에게 징발 당해 내주고 학생들은 야외에서 수업을 받는 일도 있었다.
곧 전시교육이 시작된 것이었다.
교실이 없어 노천 수업을 받아야 하는 설움은 고사하고 교과서도 없고 학용품도 없고 선생도 징집되어 나가 가르칠 사람도 없는 혼란 속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1951년 2월 26일이 되어서야 전시하(戰時下) 교육 특별조치요강에 의하여 전시교육 체제로 갖추면서 그 동안 중단되었던 정상적인 학교 수업이 재개되었다.
교과서가 없어 전시교재로 그때 국민학교용 [전시생활]이 보급되기도 하였다.
4) 남지학원의 발전
1960년에는 당시 남지중학교를 운영하던 재단법인 남지학원(이사장 조찬규)과 일민학술원(이사장 권우식)이 합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으며, 남지학원은 1964년 4월 25일 재단법인으로 있었던 것을 학교법인으로 조직변경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두 학교 법인의 병합으로 인하여 파생된 이사진의 분열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학원이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데 1966년(당시 이사장 정대수)에 학부형 및 지역민의 향토 교육의 파경에 대한 깊은 우려와 정상적인 학교 교육에의 열망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에, 평소부터 교육을 통한 지역사회 인재 양성과 지역 발전에 대한 뜻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신영주(당시 국회의원)가 사재로서 부실 경영으로 인한 재단의 부채를 해결하고, 임야 35만평과 논 약 1만 4천평을 출연하여 학원 정상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1968년 6월 이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남지학원은 교육 기관으로서의 참다운 면모를 갖추어 향토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으며,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학교 경영의 공이 크게 인정되어 신영주 이사장은 1976년 12월 5일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 받기도 하였다.
1984년에는 학교법인(이사장 이수연)의 지원금으로 고등학교에 현대식 대 강당과 최신 시설을 완비한 특별교실을 완공하는 등 학원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 남지학원 역대 이사장 명단
1949.12. 20 남지학원 초대 조찬규 이사장 취임
1952. 5. 26 일민학술원 초대 이사장 권인수 이사장 취임
1960. 5. 24 남지학원과 일민학술원이 병합하여 재단법인 남지학원으로 인가
1960. 8. 27 재단법인 남지학원 2대 이사장 권우식 이사장 취임
1966. 8. 6 3대 정대수 이사장 취임
1968. 6. 8 4대 신영주 이사장 취임
1977. 5. 29 5대 이수연 이사장 취임
3. 남지도서관(圖書館)의 개관
1) 개 관
사진 ( 남지 도서관 )
읍민 숙원 사업의 하나였던 도서관 건립을 당시 창녕교육청 이보룡 교육장을
비롯하여 지역 유지들과 출향 인사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91년 7월 20일
남지도서관 건립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1991년 12월 1일, 남지초등학교 운동장
동쪽(남지리 723번지)에 공사를 시작하여 국비 2억 7천만원과 군비 1억5천만원
계 4억 2천만원으로 대지 1,659m2에 연 건평 960.3m2(290평) 철근콘크리트 슬래브의
2층 도서관을 1992년 11월 20일에 준공하여 1993년 4월 23일에 경상남도
남지도서관으로 개관하였다.
도서관이 있음으로 해서 학생들이 쾌적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공부를 할 수 있으며
읍민들이 각종 교양 도서를 언제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서관의 장서 구입자금이 모자라 장서 모으기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위원장 신승열)
성금 모금을 전개한 결과 9백여 만원이 모금되어 장서 구입에 큰 보탬이 되었다.
또 읍민의 정서 순화를 위하여 수석 수집가 김장학(남지리 남포)이 평생 수집한 수석 144점을 기증하여 특별전시실을 마련하여 1995년 1월 1일 개관하였다.
1996년 대출실 확장공사를 하였으며, 98년 대출실을 이전하고 98년 12월 9일에는 대출실, 아동실, 사서실을 통합하여 운영하고 있다.
2) 운영상황
남지읍민의 정보 이용과 문화활동과 평생교육을 증진하기 위하여 지식, 교양, 정보자료의 제공, 평생교육 및 지역 문화 활성화를 통한 지식 습득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데 운영 상황은 다음과 같다.
장서는 1998년 현재 17,512권으로 97년에 1,772권, 98년도에 1,770권을 확보하였다. 시설된 열람실과 열람 좌석은 대출실 정기간행물실 아동열람실 여자열람실 남자 열람실 일반열람실 등 12실에 열람 좌석수는 294석이다.
그러나 장서가 부족하여 지속적인 자료 확보를 위해 노력중이다.
그렇지만 도서대출은 꾸준히 늘어 전체 도서 인원을 보면 97년도에 2,061명, 98년도에는 2,772명으로 25.6%가 증가하였다.
운영방침은 1. 독서문화생활의 진흥 2. 양질의 정보자료 확보 3. 봉사자세 확립으로 인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독서교실을 연 2회 운영하거나 어린이 1일 독서교실을 운영하여 도서관 이용법이나 책 선택, 독서 지도 등을 가르쳐 독후감 발표, 독서감상화 그리기등 여러 성과를 거두었다.
또 도서관 주간이나 독서의 달 행사를 가져서 독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도서관 이용율을 높이도록 노력하였다.
또 글동무(초등학생) 너나들이(중고생) 웃개독서회(일반여성) 등 계층별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꾸준한 독서와 도서실 이용을 권장하면서 동시와 편지쓰기도 지도하였다.
서예교실, 메이컵 강좌를 일반인을 대상으로 개최하였으며 종이접기 소모임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개최하고 있다.
직원은 관장 외 6명으로 조직은 관장 아래에 서무부서와 사서부서로 운영하고 있다.
공공도서관 상황
연도별 |
좌석수 |
기본장서수 |
장서수 |
장서율 |
관외대출자수 |
이용자수 |
예산(천원) |
1993 |
306 |
3,719 |
7,238 |
194.6 |
10,710 |
41,178 |
- |
1996 |
294 |
- |
12,495 |
- |
- |
14,514 |
40,956 |
(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1994∼97)
역대 관장 명단
대 |
성 명 |
재 임 기 간 |
대 |
성 명 |
재 임 기 간 |
1 |
黃 萬 石 |
1993. 4. 1∼95. 6.30 |
3 |
金 銀 姬 |
98. 1. 1∼99. 4. 현재 |
2 |
金 ? 顯 |
95. 7. 1∼97. 12. 31 |
|
|
◑ 직원 명단
관장 : 김은희
사서, 서무직원 : 이영숙 정혜주 정연진
기능직 : 노제록 차창갑 김진관
(자료 제공 : 남지도서관)
4. 사회교육의 정착
사회교육은 학교교육의 연장선상에서 모든 국민에게 평생을 통한 교육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회교육이라 할 수 있다.
사회교육은 국민의 자질을 향상하게 함으로써 국가 사회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된 교육 기관이 바로 사설강습소(학원), 과외교습소 등이다.
대체적으로 계열별로 구분하자면 인문물리, 기술, 예능, 가정, 사무, 독서, 종합 등이 있어 이 계열의 학원은 교육청에서 관장하고 있으며, 체육도장 같은 것은 군청에서, 운전학원은 경찰서에서 그 지도 감독 업무를 맡고 있다.
우리 읍에 있는 문리계 학원은 3개소로 정원은 1,170명인데, 남지영수학원(95년 설립), 대성영수학원(93년 설립) 하버드영수학원(95년 설립) 등이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학원은 경남속셈학원(남지리 748-7) 계명음악학원(남지리 동포 603-7) 남지속셈학원(남지리 서동 663-31) 남지컴퓨터학원(남지리 대신 734), 대성영수학원(남지리 남포 655-19) 백합음악학원(남지리 서동 663-47) 백합종합학원(남지리 목련상가빌라101호) 세광속셈학원(남지리 659-20) 쇼팽피아노학원(남지리 동포 590-49) 신대성학원(남지리 남포 655-19) 예그린음악학원(남지리 동포 272) 예원음악학원(남지리 603-15) 이영욱화실(남지리 663-49) 정옥웅변학원(남지리 663-16) 하바드영수학원(남지리 481-13) 하버드미키외국어학원(남지리 동포 533-18) 하버드웅변학원(남지리 548-5) 해인미술학원(남지리 남포 790-16) 현대미술학원((남지리 동포 541) 현대컴퓨터학원(남지리 662-10) 등이다.
1997년 학원은 16개소, 수강자 수는 2,784명, 강사수는 26명이었다.
사설학원 상황
연도별 |
강습소수 |
수강자수 |
이수자수 |
강사수 |
강의실 |
실험실습실 |
사무실 | ||||||
계 |
남 |
여 |
계 |
남 |
여 |
계 |
남 |
여 | |||||
1994 |
13 |
597 |
277 |
320 |
1,130 |
583 |
547 |
24 |
8 |
16 |
26 |
6 |
13 |
1998 |
16 |
451 |
211 |
240 |
1,920 |
950 |
970 |
25 |
5 |
20 |
29 |
15 |
16 |
(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1994∼98)
1. 유아교육
유아교육이란 초등학교 미취학 연령층을 대상으로 유아의 자립심을 기르고 도덕성과 공동체 의식이 투철한 민주시민 육성을 위하여 기본생활 습관 지도, 조화로운 심신 발달 조장 등 교육을 말한다.
최근 유아교육에 관한 전반적인 관심이 상승하여 우리 고장에서도 유아 교육 기관이 여러 곳에 설립되었다.
해방 후 유아 교육은 미미하였지만 남지장로교회에서 유치원을 개원하여 수년간 운영한 적이 있다.
또 1980년대에는 창녕군의 지원을 받아 유아원이 개설되어 유아 교육을 전개하기도 하였고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이 다음과 같이 개원되어 해당 지역의 유아교육을 전담하고 있는데 유아교육의 내실화와 공교육 기반조성을 유아교육의 추진 방향으로 삼고 있으며, 기본 생활 습관지도의 철저, 조화로운 심신 발달 조장, 교원의 전문성 재고와 쾌적한 환경조성 등 유아교육의 시책 구현에 노력해 왔다.
1981년 3월 1일, 남지초등학교와 동포초등학교에서 각각 병설유치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남지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은 1996년 현재 16회 졸업을 가졌는데 졸업생은 551명(1994년 현재)이다.
또 남곡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은 1982년 2월 4일에, 남지초교 반포분교장병설유치원은 1985년 8월 5일에 설립되었다.
또 사립 유치원으로는 1989년 2월 16일에 설립 인가된 예원유치원이 있는데 이들 우리 읍의 유치원 현황은 다음과 같다.
유치원 현황 (1998 4. 1. 현재)
설립별 |
유치원명 (설립년월일) |
소 재 지 |
설 립 재단별 |
편 성 학급수 |
원아수 |
교원수 | ||
계 |
여 |
계 |
여 | |||||
공립 |
남지초등학교병설유치원 (1981. 1. 31) |
남지리 723 |
학교 부속 |
2 |
37 |
19 |
2 |
2 |
" |
남지초교반포분교장 " (1985. 8. 5) |
반포리 603 |
" |
1 |
11 |
5 |
1 |
1 |
" |
동포초등학교병설유치원 (1981. 1. 31) |
남지리 598-2 |
" |
1 |
30 |
14 |
1 |
1 |
" |
남곡초등학교병설유치원 (1982. 2. 4) |
고곡리 577 |
" |
1 |
8 |
2 |
1 |
1 |
사립 |
예원유치원 (1989. 2. 16) |
남지리603-15 |
개인 |
2 |
53 |
21 |
2 |
2 |
(자료 : 경남교육통계연보 1998)
2. 초등학교
광복 이전부터 국민학교라 불리었으나 1996년 3월 1일부터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곧 일제시대의 명칭을 50여 년이나 그냥 써 왔다는 반성과 함께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는 뜻이 크다.
우리 고장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학교는 남지초등학교이다.
가장 마지막으로 개교한 초등학교는 1954년에 개교한 성사국민학교였는데 1988년에 학생수가 감소하자 폐교되고 말았으며, 일제 때 간이학교로 출발하여 역사가 오래 되었으나 분교장으로 계속되다가 1971년 3월 9일에 국민학교로 격상된 월상국민학교는 학생수 감소로 1985년 3월 1일 반포국민학교 월상분교장으로 되었다.
또 1945년 9월 1일 개교한 반포국민학교도 1993년 3월 1일 학생수의 감소로 남지초등학교 반포분교장으로 격하되었다가 월상, 반포분교 모두 1999년 3월 1일 폐교되었다.
지금은 남지초등학교, 동포초등학교, 남곡초등학교 등 초등학교는 3개교가 있다.
초등학교에 취학하여야 할 의무교육 대상 취학아동이 점차 감소하고 있는데 1994년 적령아동 취학상황을 보면 166명이었으며 1996년도는 122명으로 점차 감소하고 있다.
1995학년도의 교육의 지표는 [미래사회를 창조할 새 한국인 육성]이며, 기본방향은 꿈을 심는 교육, 전인적인 인간으로하여 인간 존중의 도덕성 함양, 기초 교육의 충실, 과학 실업교육의 내실, 건전 교직풍토의 정착, 쾌적한 교육환경 조성 등의 교육 시책을 추진하였다.
1970 ∼ 1990년대의 학교규모의 변동상황은 다음 표와 같은데 해마다 학생수가 격감하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1998년 4월 1일 현재 초등학교 일람은 다음과 같다.
1) 학생수 증감 추이
학교 규모 변동 상황(1971 ∼ 1991년)
학교명 |
연도별 |
학급수 |
교실수 |
교직원수 |
재 학 생 수 |
졸업자 수 |
졸업회수 |
진 학 자 수 | ||||||
계 |
남 |
여 |
계 |
남 |
여 |
계 |
남 |
여 | ||||||
남지 |
71 |
27 |
28 |
30 |
1,601 |
825 |
776 |
5,901 |
3,706 |
2,195 |
49 |
223 |
129 |
94 |
81 |
21 |
28 |
23 |
1,086 |
553 |
533 |
190 |
99 |
91 |
59 |
189 |
98 |
91 | |
91 |
16 |
16 |
20 |
589 |
282 |
307 |
89 |
45 |
44 |
|
|
|
| |
동포 |
71 |
17 |
19 |
18 |
945 |
516 |
429 |
2,631 |
1,484 |
1,147 |
25 |
127 |
68 |
59 |
81 |
18 |
23 |
21 |
806 |
408 |
398 |
125 |
61 |
64 |
35 |
119 |
60 |
59 | |
91 |
15 |
15 |
18 |
627 |
311 |
316 |
98 |
40 |
58 |
|
|
|
| |
남곡 |
71 |
12 |
12 |
13 |
527 |
253 |
274 |
1,114 |
722 |
392 |
26 |
47 |
30 |
17 |
81 |
6 |
13 |
7 |
262 |
136 |
126 |
45 |
20 |
25 |
35 |
44 |
20 |
24 | |
91 |
5 |
5 |
7 |
68 |
41 |
27 |
14 |
7 |
7 |
|
|
|
| |
반포 |
71 |
7 |
8 |
8 |
372 |
189 |
183 |
1,155 |
728 |
427 |
23 |
33 |
25 |
8 |
81 |
6 |
8 |
7 |
181 |
92 |
89 |
27 |
9 |
18 |
33 |
27 |
9 |
18 | |
91 |
5 |
5 |
7 |
69 |
35 |
34 |
14 |
8 |
6 |
|
|
|
| |
월상 |
71 |
6 |
7 |
7 |
305 |
166 |
139 |
110 |
52 |
58 |
2 |
35 |
22 |
13 |
81 |
6 |
7 |
6 |
107 |
60 |
47 |
22 |
13 |
9 |
11 |
22 |
13 |
9 | |
91 |
4 |
4 |
4 |
46 |
19 |
27 |
11 |
3 |
8 |
|
|
|
| |
성사 |
71 |
6 |
8 |
7 |
338 |
180 |
158 |
877 |
476 |
401 |
17 |
64 |
40 |
24 |
81 |
6 |
8 |
7 |
128 |
66 |
62 |
25 |
20 |
5 |
27 |
27 |
21 |
6 | |
계 |
71 |
75 |
82 |
83 |
4,088 |
2,129 |
1,959 |
11,788 |
7,168 |
4,620 |
|
529 |
314 |
215 |
81 |
63 |
87 |
71 |
2,570 |
1,315 |
1,255 |
434 |
222 |
212 |
|
428 |
221 |
207 | |
91 |
45 |
45 |
56 |
1,399 |
688 |
711 |
226 |
103 |
123 |
|
|
|
|
*71년 졸업자수는 누계임 (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 1972∼1992)
초등학교 일람 1998. 4. 1 현재
학교명 (설립년월일) |
소재지 |
학 생 상 황 | ||||||||||||||
계 여 |
합 계 |
1학년 |
2학년 |
3학년 |
4학년 |
5학년 |
6학년 | |||||||||
학급 |
학생 |
학급 |
학생 |
학급 |
학생 |
학급 |
학생 |
학급 |
학생 |
학급 |
학생 |
학급 |
학생 | |||
남지초교(21. 5. 1) |
남지리 723 |
계 |
13 |
321 |
2 |
55 |
2 |
47 |
3 |
43 |
2 |
54 |
2 |
51 |
2 |
71 |
여 |
- |
163 |
- |
27 |
- |
21 |
- |
18 |
- |
26 |
- |
31 |
- |
40 | ||
남지초교반포분교장 (45.9.1) |
반포리 360 |
계 |
3 |
21 |
1 |
4 |
- |
5 |
1 |
3 |
- |
2 |
1 |
4 |
- |
3 |
여 |
- |
10 |
- |
1 |
- |
1 |
- |
1 |
- |
2 |
- |
3 |
- |
2 | ||
남지초교월상분교장 (45.7.25) |
월하리 626 |
계 |
3 |
15 |
- |
3 |
1 |
2 |
- |
2 |
1 |
3 |
- |
- |
1 |
5 |
여 |
- |
9 |
- |
1 |
- |
2 |
- |
2 |
- |
2 |
- |
- |
- |
2 | ||
동포초교 (47. 9. 1) |
남지리 598-2 |
계 |
15 |
518 |
3 |
110 |
2 |
79 |
3 |
98 |
2 |
77 |
3 |
88 |
2 |
66 |
여 |
- |
252 |
- |
57 |
- |
44 |
- |
47 |
- |
33 |
- |
40 |
- |
31 | ||
남곡초교 (44. 4. 1) |
고곡리 577 |
계 |
4 |
39 |
- |
6 |
1 |
5 |
- |
7 |
1 |
6 |
1 |
11 |
1 |
4 |
여 |
- |
22 |
- |
4 |
- |
3 |
- |
3 |
- |
4 |
- |
6 |
- |
2 | ||
합 계 |
|
계 |
38 |
914 |
6 |
178 |
6 |
128 |
7 |
153 |
6 |
142 |
7 |
154 |
6 |
149 |
여 |
- |
456 |
- |
90 |
- |
71 |
- |
71 |
- |
67 |
- |
80 |
- |
77 |
학 교 명 |
설립별 |
교원 |
사무직 |
졸 업 상 황 |
교 사 상 황 |
학교용지(㎡) | ||||||||
졸업자 |
진학자 |
보통교실 |
특별교실 |
관리실 |
대지 |
체육장 | ||||||||
계 |
여 |
계 |
여 |
계 |
여 |
계 |
여 | |||||||
남지초교 |
공립 |
17 |
11 |
8 |
4 |
75 |
29 |
75 |
29 |
13 |
4 |
7 |
6,800 |
21,472 |
"반포분교장 |
" |
3 |
1 |
1 |
0 |
8 |
3 |
8 |
3 |
3 |
1 |
4 |
2,893 |
7,267 |
"월상분교장 |
" |
3 |
1 |
2 |
1 |
7 |
1 |
7 |
1 |
3 |
1 |
3 |
5,426 |
2,038 |
동포초교 |
" |
19 |
12 |
6 |
2 |
91 |
42 |
91 |
42 |
15 |
1 |
3 |
4,966 |
6,741 |
남곡초교 |
" |
6 |
1 |
2 |
1 |
9 |
6 |
9 |
6 |
4 |
3 |
4 |
2,989 |
5,808 |
합 계 |
|
48 |
26 |
19 |
8 |
190 |
81 |
190 |
81 |
38 |
10 |
21 |
23,074 |
43,326 |
(자료 : 경남교육통계연보, 경상남도교육청 1998)
2) 남지초등학교
사진 ( 남지초등학교 )
남지초등학교의 명칭은 여러 번 바뀌었는데 곧 우리 나라 초등 교육의 변천과
그 궤를 같이 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개교 초기에는 공립보통학교라 하였다가 1938년 4월 1일부터 남지 남공립심상소학교로,
1940년 4월 1일부터는 남지 남공립국민학교, 광복 후 남지공립국민학교로 불리다가
1948년 10월 1일부터는 공립을 떼고 남지국민학교라 불리었으며, 1996년 3월 1일부터는
남지초등학교로 불리게 되었다.
개교할 당시는 면내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1920년(경신) 가을에 4학년제로 설립인가를 얻어
정식 개교는 이듬해(신유) 4월이었다.
즉 1920년 5월 17일 4년제 공립보통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이듬해인 1921년 5월 1일 개교하였다.
그때 학교의 위치는 동포동 남지천주교회 옆으로 대지를 높게 돋우어 건물을 앉혔다고 한다.
1925년 4월 1일 6학년제로 승격되었으며, 1926년에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개교 당시 준공되었던 교사는 1933년과 1934년 2년에 걸친 홍수 피해로 전복할 위기에 봉착하게되어 1936년(병자) 봄에 교사를 옮겨야 했다.
학교 연혁지에는 1937년 12월 9일에 현 위치인 남지리 723번지로 이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남지면지}에는 1년 빠르게 1935년에 교사 이축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준공되어 이교(移校) 개교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권경수(權炅洙) 면장은 빈약한 면민의 재정 형편으로 지방민의 부담능력은 없고 학교는 이전하여야 할 형편이라 용산리 소재 면유 임야 200평과 남지리 남포동에 있었던 공동묘지 이설을 면협의회에 자문하여 승인과 감독관청의 허가를 얻어 그것을 매각한 대금 일부를 재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것이 일시양중(一矢兩中)이 되어 권면장의 백씨(伯氏)인 특지인(特志人) 권연수(權演洙 : 당시 마산리 홍포동 거주)의 학교 부지 800평의 기부와 함께 그의 진심갈력(盡心竭力)으로 허다한 애로를 돌파하고 면민의 부담 없이 현재 자리에 교사를 준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 ( 남지초등학교 쳬육관 )
학구는 개교할 당시에는 남지면 관내 전부와 인근 면, 함안군 일부까지 포함하였으나
고곡리에 고곡간이학교가 부설되면서 남지면의 남부와 함안군 일부로 축소되었다.
이 학교에서 분리 개교한 학교가 많았는데 1934년 9월 6일 고곡간이학교를 부설한 후
1944년 4월1일 남곡공립국민학교로 승격 분리되었으며, 해방후인 1945년 10월1일
일인학교를 동포분교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1947년 9월 25일에 동포공립국민학교로
분리 인가되었으며, 1947년 10월 2일에는 성사리 학암 마을에 분실을 설치하였다가
1954년 4월 1일 학암분실을 성사국민학교로 승격 인가되어 분리되는 등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최근 학생수의 격감으로 1986년 3월 1일, 성사국민학교는 도로 성사분교장으로
격하되어 남지초등학교에 부설되었다가 1989년 3월 1일 본교에 통폐합되었고,
이때부터 그 지역의 학생을 수송하는 통학버스를 운행하게 되었으며, 반포국민학교와 월상국민학교가 1993년 3월 1일부터 각각 분교장으로 격하되면서 남지초등학교의 분교가 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학생수의 감소로 인하여 1999년 2월 28일 반포와 월상분교장을 폐교하고 학생들은 남곡초등학교에 합하였다.
연구, 시범학교 운영으로 지역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1975년에는 도 선정 특별활동우수학교, 1979년 도 지정 도덕과 연구학교, 1981년 한국교육개발원 협력학교, 1985 -86년 도 지정 과학교육 시범학교, 1989년 도 선정 예절실 운영 우수학교, 1991년 도 지정 산수과 시범학교, 1994년 도 선정 과학실운영 우수학교, 1995년 도 지정 진로교육 시범학교 등을 추진하였으며, 1996년에는 군 지정 유치원 시범학교로 지정 받아 시범보고회를 가졌으며, 1994년 2월 16일 강당 및 급식소를 개소하여 급식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성사지구 학생들의 통학을 위해 통학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97년에는 군 지정 과학교육 시범학교를 추진하였으며, 여자 배구 선수단이 도소년체육대회에 출전하여 3년 연속 우승을 했으나 연습장이 없던 중 운동장 서편에 체육관을 건립하게 되어 지역 사회의 체육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1998년 3월 1일 제18대 진원백 교장이 부임하였으며, 1999년 4월 1일 현재 학급 및 학생 수는 13학급에 304명이며, 교직원은 교원 19명, 일반직 9명이며, 졸업회수는 76회, 졸업생 총수는 10,229명이다.
역대 교장 명단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1 |
橋本良藏 |
23. 4. 7∼25. 3.24 |
|
5 |
鄭 學 用 |
59. 9.14∼61.10. 5 |
|
2 |
比嘉龜治 |
25. 3.25∼26. 3.21 |
|
6 |
成 耆 元 |
61.10. 6∼68. 6.20 |
|
3 |
江川澯夫 |
26. 3.22∼27. 5. 1 |
|
7 |
尹 鎭 宇 |
68. 6.21∼69. 3.20 |
|
4 |
奧村敏昭 |
27. 5. 2∼29. 3.31 |
|
8 |
金 竝 埴 |
69. 3.21∼72. 8.31 |
|
5 |
中野日吉 |
29. 4. 1∼32. 3.30 |
|
9 |
李 義 斗 |
72. 9. 1∼74. 8.31 |
|
6 |
三上健夫 |
32. 3.31∼37. 3.30 |
|
10 |
李 元 雨 |
74. 9. 1∼80. 8.31 |
|
7 |
關屋實善 |
37. 3.31∼39. 5. 8 |
|
11 |
金 元 浩 |
80. 9. 1∼81. 8.31 |
|
8 |
田中正一 |
39. 5. 9∼43. 3.30 |
|
12 |
鄭 仁 秀 |
81. 9. 1∼83. 2.28 |
|
9 |
寺島秋男 |
43. 3.31∼43. 5.12 |
|
13 |
李 松 揆 |
83. 3. 1∼88. 8.31 |
|
10 |
川上英一 |
43. 5.13∼45. 9.23 |
|
14 |
姜 龍 官 |
88. 9. 1∼90. 8.31 |
|
11 |
李 台 雨 |
45. 9.24∼45.11. 9 |
사무취급 |
15 |
金 圭 泰 |
90. 9. 1∼92. 2.29 |
|
1 |
成 韶 永 |
45.11.10∼46. 8.30 |
|
16 |
姜 慶 中 |
92. 3. 1∼94.10. 3 |
|
2 |
李 文 永 |
46. 8.31∼56. 8.30 |
|
17 |
辛 正 基 |
94.10. 4∼98. 2.28 |
|
3 |
宋 在 根 |
56. 8.31∼58. 9.11 |
|
18 |
陳 元 佰 |
98. 3. 1∼99. 2.현 |
|
4 |
金 炯 國 |
58. 9.12∼59. 9.13 |
|
|
|
|
|
◑ 교직원 명단
교장 : 진원백
교감 : 신영균
부장 : 임규섭 김숙련 김경희 김상건
교사 : 이영숙 임미순 박희성 노원렬 손창익 윤경희 진현정 윤민정 권태윤 윤해정 권옥분(양호) 정의경(유치원) 전병숙(유치원)
서무주임 : 감민경 기능직 : 구만호 조성미 황동순 손은숙 성정화
영양사 : 윤미선 과학보조 : 김문호
(자료 제공 : 남지초등학교)
3) 동포초등학교
사진 ( 동포초등학교 전경 )
남지리 동포 598-2번지 동포초등학교 자리에는 일제시대 때
일인 자녀들만의 소학교가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일인 소학교는 폐교되고 1945년 10월 1일에
남지공립국민학교 분교장으로 문을 열었다.
1947년 9월 1일 동포공립국민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1947년 9월 25일 10학급 규모로 동포공립국민학교로
개교하게 되었는데 교사 증축을 위한 학부형의 모임인
교사증축위원회가 그때 구성되어 활동하여 서편에
기와 지붕의 목조 교사를 신축하기도 하였다.
학구는 본동 동포동 남포동 일부와 서동 일부이었다.
1947년 7월 16일 제1회 졸업생 65명을 배출하였다.
6 25 때 본관 정문이 포격에 부서져 고쳤으며 서편 교실과 남쪽 교사를 연차적으로 증축하게 되었는데 학생수가 점차 불어나 개교 당시 10학급 480명이던 것이 1950년대에는 11학급 498명, 1960년대에는 14학급 654명 1970년대에는 18학급 839명 1980년대에는 18학급 863명으로 증가하여 저학년은 2부제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 학구 내 인구 증가율 둔화로 적령 아동이 감소하여 1991년에는 15학급 627명으로 감소하기 시작하여 1995년에는 12학급 502명이었다.
현재 교사는 본관 2층 콘크리트 건물이며 남쪽에도 교사가 있다.
1981년 1월 31일 병설유치원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3월 3일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동포초등학교는 창녕군뿐만 아니라 도내 우수학교로 여러 차례에 걸쳐 지정 연구 시범학교로 지정되었다.
1953년부터 1959년까지 군 지정 연구발표 2회, 1962년 도 지정 특별활동 연구학교 운영 발표로 시작하여 산수과 우수학교 도 선정 푸른 학교, 1976년 도 지정 산수과 연구보고회를 갖고 교육 현장 발전에 기여했으며, 1977년 도 학교경영 우수학교로 선정, 1978년 문교부 지정 새마을 교육 연구학교로 지정 받아 [역할 학습을 통한 자연보호 능력 신장]이란 주제로 자연보호로 발전하는 학교로서 1979년 전국적인 공개보고회를 갖고 전국에 일반화시켰다.
1980년 도 자연보호 교육실천 보고회, 전국 현장교육 연구논문 학교 단체 입상과 1981년부터 3년간 문교부 지정 TV교육방송 시범실험학교 운영, 1986년 도 선정 선진학교 표창, 1987년 도 지정 과학교육 선도 시범학교 2년간 운영을 하였다.
특히 학교의 교육 환경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조성되어 1989년 소년한국일보 주최(문교부 후원) 제1회 [전국 아름다운 학교 뽑기 대회]에서 [제일 아름다운 학교상]을 수상한바 있어 학교교육의 내실에서나 교육 환경 조성에 만전을 기하여 손색없는 학교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그 외 컴퓨터 시범학교 운영, 근검협동 생활화 교육 우수학교 선정, 특별활동(꿈을 심는 교육) 시범학교 공개 보고회를 가진바 있어 학교와 학부모 학생 교직원들의 상호 이해와 단결로 그칠 줄 모르는 사명감에서 계속 노력하여 지역의 중심 학교로 발전하였다.
1999년 4월 현재 학급수와 학생수는 16학급 550명 교직원수는 29명(교원 22명)이며, 졸업생은 52회에 5,859명을 배출하였다.
역대 교장 명단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1 |
崔 性 珍 |
47.10.22∼59. 6.23 |
|
9 |
趙 一 奎 |
80. 3. 1∼82. 8.31 |
|
2 |
盧 玄 錫 |
59. 6.24∼65. 9.19 |
|
10 |
姜 八 中 |
82. 9. 1∼84. 8.31 |
|
3 |
鄭 鎬 永 |
65. 9.20∼70. 8.31 |
|
11 |
김 용 학 |
84. 9. 1∼86. 2.28 |
|
4 |
李 相 道 |
70. 9. 1∼73. 2.28 |
|
12 |
金 元 浩 |
86. 3. 1∼88. 2.28 |
|
5 |
金 榮 浩 |
73. 3. 1∼74.11.31 |
|
13 |
정 규 갑 |
88. 3. 1∼90. 8.31 |
|
6 |
盧 玄 錫 |
74. 3. 1∼77. 2.28 |
|
14 |
權 道 鎬 |
90. 9. 1∼95. 8.31 |
|
7 |
金 錫 永 |
77. 3. 1∼78. 2.28 |
|
15 |
李 戊 源 |
95. 9. 1∼98. 2.28 |
|
8 |
姜 八 中 |
78. 3. 1∼80. 2.28 |
|
16 |
梁 元 錫 |
98. 3. 1∼99.3. 현 |
|
◑ 교직원 명단
교장 : 양원석
교감 : 우무호
교사 : 나현규 안국태 이주희 박양일 이현자 이정희 손득춘 최영란 이완기 황지현 정지연 윤홍기 이은주 정수영 박정미 박미영 안순희 박수진(유친원) 이미정(유치원) 최예숙(양호)
서무주사 : 임채일
서무실 : 김미영 감화순 성정화 엄남수 황귀동 이길오
(자료 제공 : 동포초등학교)
4) 남곡초등학교
사진 ( 남곡초등학교 전경 )
남곡초등학교는 고곡리 577번지에 있는데 1933년 4월 20일 남지공립보통학교
부설 고곡간이학교로 개교하였다.
이때 간이학교는 고곡리 소재미에 있었다고 한다.
해방되기 직전인 1944년 4월 1일 남곡국민학교로 인가되었는데 이때 4학급 학생수는
남자 158명, 여자 7명이었으며 졸업생수는 45명이었다.
교사 신축 상황을 보면 1947년 4월 목조 교실을 증축하였으나 6 25전란으로
교실 6간, 가교실 1간이 전소되었다.
그후 1956년 6월 교실 4간과 나들간 1간을 신축하였고, 64년에 교실 1간,
67년에 교실 2간(증축), 2간(개축), 68년에 교실 3간, 71년에 교실 1간,
73년에 교실 1간을 신축하는 등 확장이 계속되었다.
76년에는 학부모의 도움으로 간이상수도시설과 철제 교문이 설치되었다.
85년에는 병설유치원이 개교되었고, 89년 12월에는 본관 교사 5간을
개축하였는데 95년에는 급식학교로 지정되어 학생의 체력향상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앞에는 곽재우성 굳게 쌓였고 " 교가 가사처럼 남곡초등학교는 역사적인 고장 구 남곡면의 소재지의 학교답게 여러 번 우수학교를 운영하였다.
82년 83년 통일안보교육 군 및 도지정 우수학교, 85년 96년 사회과교육 군 및 도지정 우수학교, 88년 군지정 조화로운 인간교육 우수학교, 89년 도지정 교재원 운영 우수학교, 91년 군지정 건전교육풍토 조성 우수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학습의 장을 제공하여 잠재력을 최대한 계발하고 아동 중심학습, 개별화 학습, 방과후 교육활동 등을 강화하여 바람직하고 능력 있는 어린이를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학생수는 1970년대에 500여명에 육박하는 등 교세가 확충되었는데 학생수가 가장 많았을 때는 1976년으로 12학급 528명(남 270명, 여 258명)이었으며, 1980년 3월에는 7학급 편성 학생수는 243명이었다.
1999년 3월 1일에 정부의 구조조정 방침과 기구 축소에 따라 학생수가 100명 이하로 되어 있는 반포분교장과 월상분교장이 폐교됨에 따라 그곳 학생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월상 반포지구 학생들은 통학버스를 이용하여 통학을 시키게 되었다.
1999년 2월, 제53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총 졸업생 수는 2,146명에 다다르며 학급수와 학생수는 6학급 80명으로 교원의 수는 10명이며, 서무실 직원 등 전 교직원 수는 16명이다.
역대 교장 명단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1 |
成 俊 鎬 |
44. 4. 1∼46. 3.31 |
|
13 |
金 麗 洙 |
72. 9. 1∼79. 2.28 |
|
2 |
具 中 書 |
46. 4. 1∼49. 3.31 |
|
14 |
金 鍾 轍 |
79. 3. 1∼82. 2.28 |
|
3 |
黃 敬 祚 |
49. 4. 1∼50. 3.31 |
|
15 |
朴 泰 順 |
82. 3. 1∼83. 8.31 |
|
4 |
裵 德 基 |
50. 4. 1∼51. 3.31 |
|
16 |
金 容 昊 |
83. 9. 1∼84. 8.31 |
|
5 |
孫 秉 曦 |
51. 4. 1∼53. 3.31 |
|
17 |
鄭 初 安 |
84. 9. 1∼90. 8.31 |
|
6 |
崔 哲 錫 |
53. 4. 1∼57. 8.31 |
|
18 |
金 台 球 |
90. 9. 1∼91.11.30 |
|
7 |
金 基 鳳 |
57.10. 1∼62. 1.25 |
|
19 |
朴 慶 一 |
91.12. 1∼93. 8.31 |
|
8 |
金 四 景 |
62. 2.28∼63.11. 3 |
|
20 |
李 戊 源 |
93. 9. 1∼95. 8.31 |
|
9 |
孫 性 吉 |
63.11. 4∼66.10.14 |
|
21 |
金 判 祚 |
95. 9. 1∼96. 8.31 |
|
10 |
裵 鍾 壁 |
66.10.15∼68.10.31 |
|
22 |
金 正 章 |
96. 9. 1∼98. 8.31 |
|
11 |
朴 尙 根 |
68.11.16∼69. 6.20 |
|
23 |
盧 在 斗 |
98. 9. 1∼99. 3.현 |
|
12 |
黃 敦 容 |
69. 6.21∼72. 8.31 |
|
|
|
|
|
◑ 교직원 명단
교장 : 盧在斗
교감 : 金弘珍
교무부장 : 金武列 환경부장 : 최병옥
교사 : 임양호 장귀향 김영수 조현화 尹賢珠 정영희(유치원)
기능직 : 辛容伯 정해국 신판국
(자료 제공 : 남곡초등학교)
사진 ( 폐교된 반포분교장 전경 )
이 반포분교장은 1945년 9월 1일 반포국민학교로 설립 인가되었는데
반포리 360번지 현 위치에서 1946년 10월 30일 개교하였다.
그 전에 이 지역에는 1941년 7월 25일에 인가된 남지국민학교
부설 월하간이학교가 있었다.
반포국민학교로 개교하면서 월하간이학교의 학생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한다.
1950년 3월 1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50년 6 25 때 교사가 불타 버려
다음해 2월에 임시 교사 4교실에서 수업을 하였다.
농촌 인구의 증가로 69년에는 8학급이 되고 월상분교장은 5학급이 되었다.
1984년 노후 목조교실 4개를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하는 등 발전하면서
학구내 아동들을 교육하여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여 왔다.
1985년 3월 1일 월상국민학교가 분교장으로 격하되면서 반포국민학교 분교장으로 편입되었으며, 1985년 9월 1일에는 병설 유치원을 인가 받아 개원하기도 하였다. 1986년 다시 3교실을 증축하였다.
학교 규모의 변동을 보면 1950년대는 6학급 146명 교원수 7명이었고 1960년대에는 8학급 163명에 교원은 9명으로 가장 학생수가 많았던 시절이었다.
7, 80년대에는 6학급 140 -124명 선을 유지하였으나 1990년부터 학급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90년에는 6학급 84명, 91년 4학급 46명, 94년 4학급 49명, 95년 3학급 29명으로 감소되었다.
1986년에는 도 과학 우수학교로 선정되었고, 노후 교실 2개실과 수세식 화장실 개축 및 신축이 있었다.
그러나 학생수의 격감으로 1993년 3월 1일 남지초등학교 반포분교장으로 격하되었는데, 1996년 4월 1일 현재 3학급에 복식수업을 하는데 학생수는 26명이며 교원수는 3명이다.
개교이래 1998년까지 49회 졸업에 2,00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 분교장은 1999년 3월 1일에 정부의 구조조정 방침과 기구 축소에 따라 학생수가 100명이하로 되어 남곡초등학교에 통폐합되면서 폐교되었다.
역대 교장 명단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1 |
李 泰 來 |
46.10.30∼49. 2.27 |
|
9 |
張 純 杓 |
70. 4. 1∼73. 8.31 |
|
2 |
尹 爽 烋 |
49. 2.28∼52. 9.14 |
|
10 |
崔 成 用 |
73. 9. 1∼77. 8.31 |
|
3 |
裵 德 基 |
52. 9.15∼54. 4.23 |
|
11 |
趙 海 基 |
77. 9. 1∼82. 8.31 |
|
4 |
鄭 永 達 |
54. 4.24∼57. 8. 1 |
|
12 |
裵 德 基 |
82. 9. 1∼85. 2.28 |
|
5 |
河 大 君 |
57. 8. 2∼59. 5.28 |
|
13 |
金 圭 泰 |
85. 3. 1∼87. 2.28 |
|
6 |
배 정 환 |
59. 5.29∼65. 6.20 |
|
14 |
金 鎭 玉 |
87. 3. 1∼92. 2.29 |
|
7 |
李 元 雨 |
65. 6.21∼68. 6. 1 |
|
15 |
陳 鍾 德 |
92. 3. 1∼93. 2.28 |
|
8 |
金 寅 洪 |
68. 6. 2∼70. 3.31 |
|
93. 3. 1 남지초교 반포분교로 됨 |
◑ 교직원 명단(1998학년도)
주임 : 정수영 교사 :
정유정 최승희
기능직 : 신판국
(자료 제공 : 남지초등학교)
사진 (폐교된 월상분교장 전경 )
이 분교장은 1941년 7월 25일 남지국민학교 월하간이학교로 인가 개설되어
운영되어 오다가 1946년 반포국민학교의 개교로 학생들을 반포국민학교에 수용되게 되었다.
그후 1967년 11월 27일 반포국민학교 월상분교장으로 인가되자 월하리 월상마을
626번지 일대 학교부지 1,300평을 매입하여 3개교실의 교사와 변소 1간을 신축하여
학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71년 학생수가 증가하자 3월 1일 6학급 규모 월상국민학교로 승격 개교하였던 것이다. 이때 숙직실 1동,
운동장 정지작업, 교문통 다리 공사, 교실 1간 증축을 하였으며, 1972년 2월 24일 제1회 졸업식을 가졌다.
학교 경영과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여 1974년에는 학교 경영 군 우수학교로 선정되었고, 1983년에는 자연과 군 우수학교, 1984년에는 자연과 도 우수학교로 선정되었으며, 1981년에는 부산 석포여자중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기도 하였다.
1971년 국민학교로 승격 개교할 당시에는 6학급으로 학생수 304명 교원수는 7명으로 상당히 규모가 짜인 학교이기도 하였으나 1980년에는 6학급 141명, 1990년에는 6학급 81명, 91년에는 5학급 66명, 92년 4학급 56명으로 감소하여 95년에는 4학급 31명이었다.
이농현상의 심화로 학생수가 격감하여 1985년 3월 1일에는 반포국민학교 월상분교장으로 격하되었고, 1993년 3월 1일에는 반포국민학교가 분교로 격하되자 따라서 남지초등학교 월상분교장으로 변경되었다.
1996년 4월 1일 현재 학급수는 3학급 학생수는 23명, 교원수는 3명이었으며, 개교이래 졸업상황을 보면 98년 현재까지 27회 졸업에 59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앞으로 박진나루에 건설되는 박진교가 완공되고 도로포장이 완결되면 교통이 아주 편리하게 되고 넓은 벌판의 농산물의 유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져 이 지역의 발전이 기대되며 따라서 학생수가 증가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 분교장은 1999년 3월 1일에 정부의 구조조정 방침과 기구 축소에 따라 학생수가 100명이하로 되어 남곡초등학교에 통폐합되면서 폐교되었다.
역대 교장 명단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1 |
趙 性 覺 |
71. 3. 1∼74. 2. 28 |
|
85. 3. 1 -반포국교 분교로 됨 | |||
2 |
卞 正 洙 |
74. 3. 1∼75. 9. 27 |
|
93. 3. 1 -남지초교 분교로 됨 | |||
3 |
崔 昌 圭 |
75.10. 1∼81. 8. 31 |
|
|
|
|
|
4 |
金 奎 泰 |
81. 9. 1∼87. 2. 28 |
|
|
|
|
|
◑ 교직원 명단(1998년도)
부장 : 김경자교사 : 이현자 노원렬
기능직 : 정해국
(자료 제공 : 남지초등학교)
7) 폐교된 성사국민학교
사진 ( 폐교된 성사국민학교 )
1989년에 학생수가 감소되자 폐교가 된 성사국민학교는 1947년 10월 2일에
성사리 학암 마을에 남지국민학교의 분실로 설치되었다가 1954년 4월 1일
학암분실이 성사국민학교로 승격 인가되어 본교로부터 분리되었는데 교사는
성사리 민두루미마을에 세워졌다.
개교인가 당시에는 4학급 규모였으나 1962년 1월 9일에 정규 교실 3교실,
1962년 10월 30일에는 다시 3교실 및 변소 1동을 준공하였으며 이때는 6학급 규모였다.
1970년과 71년에도 각각 1교실씩 준공하여 2층 교사가 되었다.
학교 규모 변동사항을 보면 학생수는 72년에는 6학급 342명 교원수는 7명이었으며,
80년대까지 학급수는 계속 6학급, 학생수는 해마다 줄어들어 73년 316명 75년 281명
78년 200명 80년에는 173명으로 감소되고 있다.
졸업생은 1980학년도까지 1,247명이었다.
학구가 성사리뿐 좁은 지역이었으므로 점차 학생수의 격감으로 1986년 3월 1일,
도로 남지국민학교 성사분교장으로 격하되어 1989년 3월 1일 본교에 통폐합되었는데,
인근 지역의 학생을 수송하는 통학버스를 운행하게 되어 학생들의 불편을 최소화하였으나
지역 중심의 문화센터 역할을 감당하던 학교가 폐교되어 아쉬움이 또한 매우 컸다.
역대 교장명단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1 |
孔 宇 烈 |
54. 4.24∼56. 3.31 |
|
7 |
金 閏 甲 |
69. 6.21∼76. 8.31 |
|
2 |
裵 德 基 |
56. 4. 1∼61. 8.16 |
|
8 |
鄭 鎭 東 |
76. 9. 1∼79. 2.28 |
|
3 |
成 樂 熙 |
61. 9. 2∼62. 9. 6 |
|
9 |
金 麗 洙 |
79. 3. 1∼84. 2.28 |
|
4 |
梁 在 慶 |
62. 9. 7∼65.10.15 |
|
10 |
車 元 中 |
84. 3. 1∼86. 2.28 |
|
5 |
朴 尙 根 |
65.10.16∼68.11.15 |
|
86. 3. 1. 남지국교 성사분교로 됨 | |||
6 |
朴 正 錫 |
68.11.16∼69. 6.20 |
|
89. 3. 1. 폐교 |
(자료 제공 : 남지초등학교)
3. 중학교
1) 중학교 학생수 증감 추이
중학교는 사립 중학교로서 1947년 4월 28일 남지중등공민학교로 출발한 남지중학교가 1949년 12월 20일 정식 중학교 설립인가를 얻고 학교법인 남지학원이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으로 조찬규, 초대 교장으로 김해권이 취임하게 되었다.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남 여 공학에서 여학생을 분리하여 1969년 11월 17일 남지여자중학교가 개교하게 되었으며, 그 이전인 1959년 가칭 남곡중학교가 고곡리에서 개교하였으나 1961년 4월 1일 남지중학교 남곡분교로, 1963년 1월 5일 남지제2중학교로, 1975년 3월 1일에야 현재의 남곡중학교로 개칭을 하게 되는데 이 3개 학교 모두 남지학원의 산하 사립학교이다.
현재 우리 읍내에는 공립 중학교가 없다.
중학교의 1970년대 ∼ 1990년대의 학교 규모 학생수 증감 추이등 변동 상황은 다음 표와 같으며 1998년 4월 1일 현재 중학교 일람은 다음과 같다.
(1) 학교규모 변동 상황
학교명 |
연도 |
학급 |
교실수 |
교원수 |
재 학 생 수 |
졸업자 수 |
졸업회수 |
진 학 자 수 | ||||||
계 |
남 |
여 |
계 |
남 |
여 |
계 |
남 |
여 | ||||||
남지중 |
71 |
15 |
15 |
23 |
1,198 |
1,198 |
- |
337 |
337 |
- |
24 |
285 |
285 |
- |
81 |
15 |
15 |
17 |
695 |
695 |
- |
233 |
233 |
|
33 |
225 |
225 |
| |
91 |
8 |
8 |
17 |
337 |
337 |
- |
136 |
136 |
|
|
|
|
| |
남곡중(남지제2) |
71 |
6 |
7 |
10 |
363 |
249 |
114 |
121 |
83 |
38 |
9 |
28 |
21 |
7 |
81 |
9 |
8 |
14 |
521 |
251 |
270 |
194 |
98 |
96 |
20 |
158 |
90 |
68 | |
91 |
4 |
4 |
14 |
149 |
77 |
72 |
58 |
29 |
29 |
|
|
|
| |
남지여중 |
71 |
8 |
8 |
11 |
540 |
- |
540 |
- |
- |
- |
- |
- |
- |
- |
81 |
12 |
11 |
17 |
744 |
- |
744 |
233 |
- |
233 |
10 |
175 |
- |
175 | |
91 |
9 |
9 |
19 |
373 |
- |
373 |
154 |
- |
154 |
|
|
|
| |
계 |
71 |
29 |
30 |
44 |
2,101 |
1,447 |
654 |
458 |
420 |
271 |
|
481 |
306 |
182 |
81 |
36 |
34 |
48 |
1,960 |
946 |
1,014 |
660 |
331 |
329 |
|
558 |
315 |
243 | |
91 |
21 |
21 |
50 |
859 |
414 |
445 |
348 |
165 |
183 |
|
|
|
|
(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 1972∼1992)
(2) 중학교 일람 1998. 4. 1현재
설립별 |
학교명 |
소재지 |
남여별 |
계 여 |
학 생 상 황 | |||||||
합 계 |
1학년 |
2학년 |
3학년 | |||||||||
학급 |
학생 |
학급 |
학생 |
학급 |
학생 |
학급 |
학생 | |||||
사립 |
남지중학교 (1947. 9. 8) |
마산리 894 |
남 |
계 |
7 |
252 |
3 |
102 |
2 |
65 |
2 |
85 |
여 |
- |
- |
- |
- |
- |
- |
- |
- | ||||
" |
남지여중학교(69.11.17) |
마산리 894-1 |
여 |
계 |
7 |
257 |
2 |
76 |
3 |
95 |
2 |
86 |
여 |
- |
257 |
- |
76 |
- |
95 |
- |
86 | ||||
" |
남곡중학교 (1963. 1. 5) |
고곡리789 |
공학 |
계 |
3 |
55 |
1 |
25 |
1 |
9 |
1 |
21 |
여 |
- |
20 |
- |
10 |
- |
5 |
- |
10 | ||||
|
합 계 |
|
|
계 |
17 |
564 |
6 |
203 |
6 |
169 |
5 |
192 |
여 |
- |
277 |
- |
86 |
- |
100 |
- |
96 |
학교명 |
계 |
졸업상황 |
교원 |
사무직 |
교 사 상 황 |
학 교 용 지(㎡) | |||||
여 |
졸업자 |
진학자 |
보통 |
특별 |
관리실 |
계 |
대지 |
체육장 | |||
남지중 |
계 |
115 |
115 |
16 |
3 |
7 |
4 |
5 |
16,221 |
4,088 |
12,133 |
여 |
- |
- |
6 |
1 | |||||||
남지여중 |
계 |
114 |
113 |
17 |
3 |
7 |
4 |
4 |
11,164 |
2,888 |
8,276 |
여 |
114 |
113 |
6 |
1 | |||||||
남곡중 |
계 |
20 |
20 |
11 |
3 |
3 |
6 |
7 |
12,069 |
3,692 |
8,356 |
여 |
14 |
14 |
2 |
1 | |||||||
계 |
계 |
249 |
248 |
44 |
9 |
17 |
14 |
16 |
39,433 |
10,668 |
28,765 |
여 |
128 |
127 |
14 |
3 |
(자료 : 경남교육통계연보, 경상남도교육청 1998)
2) 남지중학교
사진 ( 남지중학교 전경 )
"영남들 넓은 옥토 율림청풍에/ 칠백리 앞 강물은 언제나 푸러/ 용화산 구구봉에 흰 구름 뜨고 "로
시작되는 황세순 작사 황외천 작곡의 남지중학교 교가는 해방 후 향학열에 불타는 남지의 젊은이들을
불러모았고 목이 터져라 애국가 다음으로 애창되던 노래였다.
남지중학교의 역사는 바로 남지 현대사의 일면이기도하여 1947년 4월 20일 남지중등공민학교로
설립인가를 받고 그해 9월 8일에 개교하였을 때 이곳 사람들은 진심으로 기뻐하였던 것이다.
이 학교가 정식 중학교가 되기는 1949년도로 1949년 12월 20일 학교법인 남지학원의 설립인가와
남지초급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이듬해 3월 29일, 교육법 개정에 의거 현재 명칭인 남지중학교로 되었다.
개교 당시의 교사는 남지리 663-7번지 지금 읍사무소 건물자리에 있었던 읍민관이었으며,
그 후 남지리 동포동 당시 식량영단이라는 도정공장 창고를 교실로 개조하여 학교를 옮겼다.
1970년 3월에 남녀 공학이던 것을 남 여를 분리하게 되어 남지여자중학교가 분리되어 나갔으며,
한때 남지고등학교와 같은 운동장을 쓰기도 하였으나 마산리 894번지 남지고등학교 구 교사 자리에
현재 교사를 신축하여 옮겼다.
현재 본관 1층, 별관 2층 2개 동으로 보통교실 8실과 강당 과학실 등 모두 21개실이 있다.
학생수의 증감 상황을 보면 1950년대 1학급 84명이던 것이 1960년대 7학급 406명, 1970년대는 14학급으로 늘어나 979명으로 개교이래 최대였으며 도시 학교나 다름없는 지방 명문 중학교로 발전하였다.
중학구는 남지와 동포초등학교외에 영산면의 월영초등학교와 함안군의 대산초교부목분교(폐교)와 폐교된 구 송진국교 학구인 도일초등학교의 송진리 등인데 1980년대에는 남녀 분리로 인하여 12학급 749명으로, 1990년에는 8학급 366명으로 감소되었다.
1994년 9학급 407명, 1995년에는 9학급 401명으로 감소 추세가 주춤하고 있다.
그러다가 1996년 8학급 356명, 1997년 7학급 288명으로 계속 감소되고 있다.
교육활동으로는 1967년도에는 도지정 도덕교육 연구시범학교, 1992년도에는 군지정 학교체육우수학교 등을 운영하였으며, 교기로 축구를 육성하고 있는데 95년 경남 소년체육대회와 금석배 전국 중 고 축구대회에서 우승하였다.
그 외 경남축구협회장기 중 고 축구대회와 청룡기 전국 중 고 축구대회에도 4강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축구부의 운영난이 겹쳐 1998년에 교기를 태권도로 바꾸어 학교 체육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7년 9월 1일 박근도 교장이 취임한 이래 [성실한 마음 튼튼한 몸 부지런한 생활]을 교훈으로 [미래 사회를 창조할 도덕적이고 창조적인 민주시민 육성]을 교육목표로 하여 국가관이 투철한 능력인 양성과 마산 인근의 지방 도시로의 발전이 기대되는 이 지역의 중심학교 육성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명문 중학교의 전통이 계속 유지되도록 지역사회의 사회교육과 문화 창달의 중심이 되고자 중 장기 계획을 수립 추진하고 있으며 특히 학생들의 인성교육 강화를 통한 향토애를 향상시키고 다양한 교육개혁으로 능력 있는 세계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지는 교육에 매진하고 있다.
1999학년도 현재 7학급 234명 교직원수 19명이며 졸업생은 50회에 9,649명을 배출하였다.
역대 교장 명단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1 |
金 海 權 |
49.12.20∼58. 2.21 |
|
6 |
孔 炳 達 |
69. 1.15∼91. 2.28 |
|
2 |
朴 潤 根 |
58. 2.24∼59.10.22 |
|
7 |
安 鍾 燮 |
91. 3. 1∼94. 2.28 |
|
3 |
崔 洛 述 |
59.10.30∼60. 5.24 |
|
8 |
宋 周 翰 |
94. 3. 1∼97. 8.30 |
|
4 |
全 且 榮 |
60. 6. 8∼68. 5.13 |
|
9 |
朴 根 道 |
97. 9. 1∼99. 2.현 |
|
5 |
康 鴻 運 |
68. 5.14∼69. 1.14 |
|
10 |
朴 昞 永 |
|
|
◑ 교직원 명단
교장 : 朴昞 永
교감 :
교사 : 趙孝珍 李珍圭 申鍾億 朴尙根 金仙美 張熙德 辛興植 朴慶姬 金慶贊 金德水 金道于 文得珍 金畢新
서무과장 : 李鐘洙
일반직 : 辛容奎 辛有景
(자료 제공 : 남지중학교)
3) 남지여자중학교
사진 ( 남지여자중학교 전경 )
남지여자중학교는 당초 남지중학교가 남녀 공학으로 있다가 여학생만을 위한 중학교로
분리되었는데 1969년 11월 17일 설립인가를 받아 1970년 3월 5일 개교식을 가졌다.
개교할 당시 남지지역의 남녀 공학이었던 남지중학교가 과밀 학급과 학생수의 증가로 인해
효율적인 교육이 되지 않아 여성 교육에 이바지 하고자 남지학원(당시 이사장 신영주)에서
지역 주민들의 열의를 받아 들여 사재를 투입 [창의적인 정신과 건강한 몸으로 지혜로운 생활을 하자]는
교훈 아래 마산리 894-6번지에 교실을 신축하여 신입생 2학급, 121명을 모집하여 1970년 3월 5일에
개교하게된 것이다.
그해 2월 16일 2개 교실, 3월 30일 3개 교실을 준공하여 수업에 들어갔고 또 71년 11월 15일에 4교실,
72년 12월 20일 2교실 증축 준공되었다.
1973년에는 4학급 편성 인가를 받아 12학급이 되어 내실과 함께 외형적인 발전을 가져 왔으며,
학군은 남지 남부지역과 영산면 월령초등학교는 물론 함안군 칠서면, 대산면 일부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73년 2월 24일 제1회 졸업식을 가졌다.
1975년 1월 20일에 2층 2교실과 77년에는 2층 2교실을 증축하게 되는 발전을 가져 왔다.
1980년에는 12학급에 743명, 교원17명으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90년대에는 9학급에 교원수는 19명인데 학생수는 90년 413명, 92년 394명, 94년 385명, 96년 315명, 97년 296명, 98년 254명, 99년 244명 등으로 점차 학구내의 초등학교 학생수 감소로 인하여 학생수가 줄어들고 있다.
1990년 이후부터 교실 개축을 시작하여 92년 5개 교실을 증축과 함께 깨끗한 교육환경 조성에 역점을 두고 있다.
1997년 3월 1일, 정수찬 교장이 취임하였으며 [미래 사회를 주도할 여린 인간 육성]을 교육지표로 하여 여러 가지 교육 시책을 추진하여 왔으며, 21세기 산업 정보화 시대로 전환함에 따라 창의력과 자기 주도적인 학습 능력을 길러주고 학생 개인의 적성과 소질을 계발하여 학습자 중심의 수업으로 전환하는 장기적이고 의도적이며 종합적인 교육활동을 이룩하는 학교로 변모해 나아가고 노력하고 있으며, 열린교육을 점진적으로 실천하여 학생들의 개성과 창의성을 최대로 신장시킬 수 있는 체제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기할 것은 도내 여중 유일한 스키부를 1987년에 창단(감독 이종수, 1999년부터 지도교사 김영숙)하여 매년 종별 대회 또는 전국동계체전에 출전하여 1998년 3월까지 금 30, 은 39, 동 33개 등 메달을 획득하는 좋은 성적을 가지고 있으며 1996년 일본에서 개최된 아사히까와 바사 스키대회에 출전하여 금메달(윤면정 선수)을 따기도 하였다.
1996년 3월부터 주부미술교실(지도교사 김옥기)을 개설 운영하고 있으며, 1995년부터 미술부(디자인부) 활동이 활발하여 전국 금산업디자인 전람회에서 1995년 동상, 1996년 동상, 1997년 금상(교육부장관상), 단체 우수상(통상산업부장관상), 1998년 금상(행정자치부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미술부는 각종 대회에서 많은 수상 실적을 올렸다.
1999년 3월 31일 현재 학생수는 6학급(각 학년 2학급)에 244명(1학년 77명, 2학년 75명, 3학년 92명) 이며, 교원은 14명(남 8명, 여 6명), 일반직은 3명이다.
졸업생은 개교 3년 뒤인 1973년 2월 24일 제1회 졸업생 108명을 졸업시킨 이래 1999년 현재 졸업회수 27회에 4,907명이다.
역대 교장 명단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1 |
孔 炳 達 |
69.11.17∼73. 2. 9 |
|
5 |
辛 鍾 學 |
84. 9.25∼92. 8.31 |
|
2 |
金 康 漢 |
73. 2.10∼73. 3. 2 |
|
6 |
宋 周 翰 |
92. 9. 1∼94. 2.28 |
|
3 |
康 鴻 運 |
73. 3. 3∼74. 8.31 |
|
7 |
尹 成 烈 |
94. 3. 1∼97. 2.28 |
|
4 |
辛 鍾 學 |
74. 9. 1∼82. 2.28 |
|
8 |
鄭 守 贊 |
97. 3. 1∼99. 3.현 |
|
5 |
裵 孝 敦 |
82. 3. 1∼84. 9.24 |
|
9 |
朴 大 淳 |
|
|
◑ 교직원 명단
교장 : 박대순
교감 : 정달웅
부장 : 박필곤 권택현
교사 : 김영숙 박정애 안갑수 최석순 정왕근 김옥기 신화영 김옥희 정대열 이명진
서무과장 : 신용규
서무 : 이정순 하홍철
(자료 제공 : 남지여자중학교)
4) 남곡중학교
사진 ( 남곡중학교 전경 )
"절의의 곽충의 성 앞에 높이고 " 교가처럼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군이
왜군을 물리친 승리의 성 고곡산성이 바로 앞에 있는 고곡리의 남곡중학교는
1959년 4월 1일 가칭 남곡중학교로 개교하였는데, 과거 고곡출장소 건물을
후세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당시 신성백면장으로부터 기증 받아 가교사
1동으로 개교하였던 것이다.
남지학원(당시 이사장 권우식)의 노력으로 1961년 4월 1일 남지중학교 남곡분교로 되었고,
1963년 1월 5일에 3학급 규모의 남지제2중학교로 설립인가를 받게되어 그해 2월 20일에
제1회 졸업식을 가지게 되었으니 첫 졸업생이 35명이었다.
그후 1975년 3월 1일 지금의 남곡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학생수가 계속 증가하자 교지 890평을 새로 구입, 1964년 8월 20일 4개 교실을 준공하여
그 해 9월 1일 이때까지 사용하던 가교사에서 신축교사로 이전을 하였다. 이 교사도 1991년
모두 철거하고 11개 교실의 2층 건물을 신축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직원용 사택도 5동이나 보유하고 있다.
1969년 11월 17일에 3학급이 증설인가 되어 6학급이 되었으며, 1970년 12월 20일 다시 3학급이 증설되어 9학급 규모가 되어 1978년에는 학생수가 610명으로 증가되어 농촌 소재지 중학교로는 큰 규모의 짜인 학교가 되었다.
그러나 최근 농촌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인하여 1980년대의 9학급 학생수 559명이던 것이 1990년대에 들어 급격히 감소하여 6학급 학생수 162명으로 감소되었고, 1991년에는 5학급 148명, 1993년에는 4학급 130명, 1995년에는 3학급 97명으로 감소하였다.
1976년에 도지정 새마을 푸른 학교, 1989년에는 도 학교체육활동 우수학교로 지정되어 교육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99학년도 현재 3학급 학생수 48명 교직원수 13명이며, 졸업생 총수는 37회 3,545명이다.
남곡중학교는 교육적 환경이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성실한 마음 정직한 행동 건전한 생활]을 교훈으로 삼고 전인교육 실천을 위해 전 교직원이 온 힘을 쏟고 있다.
역대 교장 명단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1 |
全 且 榮 |
61. 4. 1∼64. 5.30 |
|
8 |
裵 孝 敦 |
78. 9. 1∼82. 2.28 |
|
2 |
金 相 道 |
64. 6. 1∼65. 2.28 |
|
9 |
辛 鍾 學 |
82. 3. 1∼84. 9.23 |
|
3 |
全 且 榮 |
65. 3. 1∼69. 6.12 |
|
10 |
裵 孝 敦 |
84. 9.24∼92. 9. 1 |
|
4 |
金 在 斗 |
69. 6.13∼73. 3. 4 |
|
11 |
尹 成 烈 |
92. 9. 2∼94. 2.28 |
|
5 |
辛 鍾 學 |
73. 3. 5∼74. 8.30 |
|
12 |
李 鍾 洙 |
94. 3. 1∼99. 2.28 |
|
6 |
兪 東 根 |
74. 9. 1∼77.10.12 |
|
13 |
朴 大 淳 |
99. 3. 1∼99.4.현재 |
|
7 |
李 鍾 洙 |
77.10.13∼78. 8.30 |
|
|
|
|
|
◑ 교직원 명단
교장 : 朴大淳
교사 : 李相出 鄭梁杓 裵壽贊 李用哲 卓松哲 宋毅燮 金珠哲 金二淑 崔恩慶
행정실장 : 辛賢植
서무 : 金眞敬 黃三術
(자료 제공 : 남곡중학교)
3. 고등학교
1) 고등학교 학생수 증감 추이
우리 고장의 고등학교는 1952년 5월 20일에 개교한 남지고등학교 1개교뿐이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는 정해진 학구내의 학생수 격감으로 인하여 학교 규모가 줄어들고 있으나 고등학교는 학구가 경남 일원으로 확대되어 있기 때문에 인근 지역의 학생을 대부분 모집, 수용할 수 있어 여전히 상당수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 군에서 가장 높은 진학률과 잘 가르친다는 여론으로 명문 남지고등학교로 성장하였다.
학생수 증감 추이는 다음 표와 같으며 1998년 4월 1일 현재 학교 일람은 다음과 같다.
(1) 학교규모 및 학생수 증감 추이
학교명 |
연도별 |
학급수 |
교실수 |
교원수 |
재 학 생 수 |
졸업자 수 |
졸업회수 |
진 학 자 수 | ||||||
계 |
남 |
여 |
계 |
남 |
여 |
계 |
남 |
여 | ||||||
남지 고교 |
71 |
10 |
10 |
19 |
585 |
450 |
135 |
126 |
973 |
29 |
20 |
13 |
10 |
3 |
82 |
15 |
15 |
26 |
891 |
586 |
305 |
258 |
168 |
90 |
29 |
114 |
80 |
34 | |
91 |
15 |
15 |
22 |
733 |
391 |
342 |
263 |
146 |
113 |
|
|
|
|
(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2) 고등학교 일람 1998. 4. 1 현재
설립별 |
학교명 |
소재지 |
남여별 |
계 여 |
학 생 상 황 | |||||||
합 계 |
1학년 |
2학년 |
3학년 | |||||||||
학급 |
학생 |
학급 |
학생 |
학급 |
학생 |
학급 |
학생 | |||||
사립 |
남지고등학교 (1952. 5.26) |
남지리 829-10 |
공학 |
계 |
15 |
684 |
5 |
220 |
5 |
232 |
5 |
232 |
여 |
- |
344 |
- |
113 |
- |
112 |
- |
119 |
계열별 |
졸 업 상 황 |
교원 |
사무직 |
교 사 상 황 |
학교용지 (㎡) | ||||
졸업자 |
진학자 |
취업자 |
보통 |
특별 |
관리실 | ||||
인문계 |
229 |
174 |
26 |
33 |
5 |
15 |
4 |
6 |
16,527 |
124 |
103 |
6 |
6 |
1 |
(자료 : 경남교육통계연보, 경상남도교육청 1998)
2) 남지고등학교
사진 ( 남지고등학교 전경 )
남지고등학교는 건국 초기 교육 기관이 지극히 부족하였던 광복이후
6 25 혼란의 와중이었던 1952년 5월 9일 재단법인 일민학술원
(초대 이사장 권인수)에 남지일민고등학교가 인가되어 그해 5월 26일
개교(교장 양동일)하였는데 단무지공장 창고(동포동 소재)와 남지공회당
(남지리 663-7, 현 남지읍사무소 자리) 등으로 전전하며 수업을 하여
1954년 3월 3일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던 것이다.
광복과 전란으로 사회 전반이 혼란과 곤경에 처했을 때, 인재 육성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숭고한 뜻으로 [지 덕 체를 겸비하고 정서가
순화된 전인적 생활인 육성]의 이념아래 [능력과 도덕성을 갖춘 창조적
인간 육성]을 목적으로 개교 하였던 것이다.
1954년 4월 7일 마산리 894(현 남지중학교 자리)에 교사 신축을 시작하였는데 전후의 어려운 사정으로 새로운 목재를 쓰지 못하고 도정공장 낡은 창고를 해체한 자재를 사용하여 7월 28일 완공 낙성식을 가졌다.
1958년 1월 15일 제2대 이사장으로 권우식이 취임하였고 60년 6월 1일에 남지학원과 일민학술원 2개 재단이 합병하였다.
학생수용 인원 관계로 1962년 5월 20일, 남지리 659번지에 있던 남지중학교와 마산리 894번지에 있던 고등학교와 교사를 서로 바꾸기도 하였는데, 1963년 2월 20일, 학교명을 남지고등학교로 변경하였으며, 이 해 교내 신문으로 [남지학보]를 발간하였으며, 1966년 6월 6일에 다시 마산리 894번지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는데 이 해 정대수가 제3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68년 6월 12일 신영주가 제4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70년 2월 23일에는 다시 교사를 남지리 동포 659번지 그 전 위치로 옮겼다가 1973년 4월 27일 현재 위치인 남지리(대신동) 829-1에 현대식 교사를 기공하여 1974년 5월 10일 학교를 이전하고 같은 해 5월 25일 준공식을 거행하여 제자리를 잡고 교육 여건이 완비된 명실상부한 고등학교가 되었다.
1977년 5월 29일에 현 법인 이사장인 이수연 이사장이 제5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교육 여건이 정비되고 학원 체제도 안정되면서 1978년 이종수교장이 취임하여 더욱 교육 내실에 박차를 가하여 1980년대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적인 사학으로 발돋움하여 괄목할 만한 교육 성과를 이룩하였고, 1983년 5월 16일에는 현대식 대강당과 특별실을 기공하여 이듬해 2월 11일 준공 개관하였으며 1997년 제6대 교장으로 윤성렬이 취임한 이후 교장이하 전교직원 38명이 교육의 내실화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
곧 [성실, 정직, 협동] 세 덕목을 교훈으로 삼아 반세기의 역사 속에 8천 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각계 각층에서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학급 규모의 변동 사항을 보면 개교 당시 2개 학급이었던 것이 1955년 12월 29일에는 3학급 증설인가를 받아 6학급이 되었으며, 1973년 12월 29일에는 매 학년 5개 학급으로 증설(남 3학급, 여 2학급) 15개 학급이 되었는데 1981년 10월 2일, 남 여 5학급으로 학칙변경 인가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재학생은 1999년 4월 1일 현재 15학급 624명이며, 졸업생은 1999년 2월 11일 제46회 졸업식을 거행, 총 졸업생 수는 7,928명이다.
지금은 아름답고 쾌적한 환경조성으로 아름다운 심성을 기르고, 교단 선진화를 통하여 21세기를 대비한 교육 개혁을 선도하는 학교로서 자리하고 있다.
또 학생들의 높은 학구열과 전 교직원의 불타는 열정으로 대부분의 학생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이 학교를 유지 경영하는 학교 법인 남지학원은 [지역문화 창달]의 건학 이념아래 밝고 건전한 사고를 지닌 민주시민 육성과 지역사회 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역대 교장 명단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대 |
성 명 |
기 간 |
비고 |
1 |
梁 東 一 |
52. 5.26∼58.10.31 |
|
4 |
李 鍾 洙 |
78. 9. 1∼94. 2.28 |
|
2 |
全 且 榮 |
58.11. 1∼73. 2.28 |
|
5 |
安 鍾 燮 |
94. 3. 1∼97. 2.28 |
|
3 |
金 康 漢 |
73. 3. 1∼78. 8.31 |
|
6 |
尹 成 烈 |
97. 3. 1∼99. |
|
◑ 교직원 명단 (2000. 5. 현재)
교장 : 박근도
교감 : 문삼철
부장 : 이승국 이창수 차찬국 황선율 유윤재 강재구 송광배 차봉환 이도재
교사 : 차봉환 송광배 윤계옥 김명석 김효근 이경련 김동하 신종진 민신기 윤석목 임원희 박용명 신종만 김병동
제갈경 정진화 정웅천 정귀현 신은주 이혜숙 오은경 황지영 박상근 박정애 김옥기 김용곤 이익중 한경혜
행정실장 : 신규태 행정주임 :신용규
일반직 : 김진경 김용상 조재현
(자료제공 : 남지고등학교)
4. 학교동창회
학교마다 졸업생을 주축으로 하는 총동창회가 조직되어 자신의 출신 모교에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는 한편 모교 발전을 위하여 기금, 장학금을 조성하거나 교기육성을 위한 기금을 마련해 후배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한다.
각급 학교에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는 동창회마다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데 동창회 조직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초등학교
(1) 남지초등학교 총 동창회
♣ 역대 회장 명단
초대 : 신승열(16회)(73. 7) 2대 : 조용판(18회) 3대 : 이정기(22회) 4대 : 황치효(24회)
♣ 임원 명단
고 문 : 조용직(8회) 김병수(13회) 정호원(16회) 신승열(16회) 조용판(18회) 신화식(19회) 신용호(19회) 황규학(22회)
명예회장 : 이정기(22회)
회 장 : 황치효(24회)
부회장 : 황호영(수석, 25회) 김익근(24회) 황창규(25회) 신봉화(26회) 이명옥(26회) 박삼근(26회) 이영희(28회) 진성조(28회) 조윤제(28회) 김영준(28회)
육권수(29회) 정호성(29회) 김무일(31회) 김수길(32회) 황준호(32회) 신점남(33회) 김상대(33회) 김진순(34회)
감 사 : 강병호(24회) 최삼판(27회)
사무국장 : 황경도(35회) 재 무 : 신대식(36회)
집행이사 : 윤영용(24회) 우동권(26회) 최삼판(27회) 이영희(28회) 신경식(28회) 신용찬(28회) 육권수(29회) 김수길(32회) 주성환(33회) 한수돌(37회) 황의용(41회) 황선율(43회) 신현식(46회)
기별이사 : 조기영(22회) 김재동(23) 윤영용(24) 김윤상(25) 우동권(26) 김윤두(27) 신용찬(28) 정규화(29) 강찬기(30) 이순태(31) 최정남(32) 임범웅(33) 박용주(34) 오문석(35) 이숙환(36) 조판식(37) 이순호(38) 채윤근(39) 김종길(40) 김종곤(41) 김철세(42) 장희덕(43) 황호술(44) 신인상(45) 신용규(46) 조용만(47) 김한수(48) 김진관(49) 김길곤(50)
(자료 제공 : 남지초등학교 총 동창회)
(2) 동포초등학교 총 동창회
창립 : 1978년 10월 1일
♣ 역대 회장 명단
초대∼2대 성백용(1979∼80) 3∼4대 곽해문(81∼82) 5∼6대 황영갑(83∼84) 7∼9대 이용대(85∼87) 10∼11대 임종식(88∼89) 12∼13대 구삼회(90∼91) 14대 정태권(92∼) 15대 이종수(93∼) 16대 박기천(94∼) 17대 박재홍(95∼) 18대 신정태(96∼) 19대 조양우(97∼) 20대 신명남(98∼현재)
♣ 임원 명단
회 장 : 신명남(9회)
부회장 : 김현치(9회) 이창우(10회) 김충식(14회)
감 사 : 신정태(6회) 조양우(6회)
총 무 : 황장호(17회) 재무 : 이순봉(24회)
이 사 : 1회- 황영갑 곽해문 2회- 임종식 3회- 박기천 4회- 정태권 박재홍 5회 - 하천호 6회- 신정태 남부언 7회- 한정동 서동석 8회- 임인자 9회- 전용로 10회- 이창우 11회- 안영옥 12회- 정윤욱 14회- 김장수 15회- 김상태 백남석 16회- 황성봉 남상수 17회- 공영대 황장호 18회- 백남운 김경수 19회- 정종만 20회- 배한영 조홍래 21회- 배득한 최원룡 22회- 박판근 노규수 23회- 이문세 문학찬 24회- 여용철 설이규 25회- 김도우 김용백 26회- 이춘기 손태룡 27회- 추학엽 진헌광 28회- 김진철 박경태 29회- 김부열 안충모 30회- 구상서 임치봉 31회- 황경헌 박종찬 32회- 김창수 윤승민 33회- 곽종수
(자료 제공 : 동포초등학교 총동창회)
(2) 남곡초등학교 동창회
창립 : 1991년 7월 28일
회원은 5회 졸업생부터 10회까지 입회되어 활동하고 있는데 남곡향심회라고도 칭한다.
♣ 역대 회장 명단
초대 오달석 2대 윤판수 3대 이재권 4대 정만길 5대 이동춘 6대 신용근 7대 이종식 8대 윤성용 9대 서영수(현재)
♣ 임원 명단
회 장 : 서영수
부회장 : 김문현 박순년
(자료 제공 : 남곡초등학교 동창회)
2) 중학교
(1) 남지중학교 총 동창회
♣ 역대 회장 명단
창립준비위원장 1989. 6.23∼ 최대열(2회) 초대 89. 8. 2∼ 정기도(1회) 2대 90.11. 5∼ 황호영(2회) 3대 92. 10. 3∼ 구삼회(3회) 4대 94.11.27∼ 구삼회 5대 95.11.10∼ 박삼근(4회) 6대 96.11.10∼ 박삼근 98년 황영목(5회) 99. 12.∼ 황철수(8회)
♣ 임원 명단
명예고문 : 이수연(이사장) 박근도(교장)
상임고문 : 정기도(1회) 황치효(1회) 주규식(2회) 최대열(2회) 황호영(2회) 구삼회(3회) 이수종(3회) 김종수(3회)
고 문 : 4회- 김정수 박삼근 백남대 5회- 김영준 신경식 진성조 황태식 6회- 황호영 황종식 7회- 박성실 강명구
명예회장 : 황영목(4회)
회 장 : 황철수(8회)
부회장 : 김동대(수석, 8회) 황하순(8회) 9회- 이영호 황군성 10회- 김정일 황철락 11회- 정민화 신용갑 12회- 박수근 차달숙 13회- 김정계 김명곤 서경식 14회- 신용오 정철암 15회- 김충식 16회- 안덕영 17회- 구동희 18회- 황재도
감 사 : 구영환(10회) 추교식(19회)
사무국장 : 김용석(13회) 간사 : 김해일
이사 : 8회- 신용찬 진성식 차상관 이옥금 9회- 최운영 10회- 김무일 황명규 황인상 정달웅 이종춘 11회- 김종규 배종태 12회- 이종규 정동광 진달출 황경도 13회- 남필우 신장식 전인수 정윤욱 14회- 이지원 정호필 조판석 15회- 김강숙 이문열 정규도 차근술 차용균 16회- 강영준 문삼철 최상호 17회- 김종호 성정현 임흥영 18회- 신용학 황장호 황의용 신판동 19회- 김초년 정외환 20회- 김정호 김동출 장희덕 신용재 21회- 김강훈 김종열 배한영 22회- 배득한 오세식 유형창 최재민 23회- 이경렬 신현식 진영택 신상기 진부근 24회- 강재구 김창득 채영환 25회- 김진태 김흥돌 이희덕 이순봉 26회- 김용백 황광화 27회- 김용일 안시현 차환균 황시동 28회- 배종렬 신덕식 신동훈 29회- 김진철 박하정 이운학 조용덕 30회- 정종호
○ 재부남지중학교 동문회
회 장 : 김정일(10회)
부회장 : 이종춘(수석, 10회) 구영환(10회) 정민화(상임, 11회) 이재호(11회) 차달숙(12회) 서경식(13회) 이종원(13회) 신용오(14회) 차근술(15회) 안덕영(16회) 구동회(17회) 신진문(18회) 이종학(19회) 안규영(20회) 김종일(21회) 최재민(22회) 진부근(23회)
(기타 명단 생략)
(자료 제공 : 남지중학교 총 동창회)
(2) 남지여자중학교 총 동창회
♣ 역대 회장 명단
초대 신연숙 2대 김금수 3대 이옥년 4대 박명자(현재)
♣ 임원 명단
회 장 : 박명자(1회)
부회장 : 이보란(2회) 김경희(3회)
총 무 : 박정숙(4회)
(자료 제공 : 남지여자중학교 총동창회)
(3) 남곡중학교 총 동창회
* 창립 : 1980년 1월 2일
♣ 역대 회장 명단
초대 신용백(1980∼1988) 2대 김만진(1989∼1993) 3대 오관석(1994∼현재)
♣ 임원 명단
회 장 : 오관석
총 무 : 성수건
(자료제공 : 남곡중학교 총동창회)
3) 남지고등학교 총 동창회
♣ 역대 회장 명단
초대 황치효(1회, 1989∼90) 2대 이수종(2회, 1991) 3대 주영대(3회, 1992) 4대 이명술(4회, 1993∼94) 5대 김진수(5회, 1995) 6대 안진수(4회, 1996) 7대 김명곤(13회, 1997) 8대 신용갑(10회, 1998∼현재)
♣ 임원 명단
고 문 : 황치효(1회) 최대열(2회) 이수종(2회) 주영대(3회) 이명술(4회) 김진수(5회) 안진수(4회)
명예회장 : 김명곤(13회)
자문위원 : 양승학(1회) 황호영(2회) 김종수(2회) 이경중(2회) 김동기(2회) 백남대(2회) 이선문(2회) 차낙균(4회) 신경식(4회) 서순기(4회) 최삼판(5회) 황호영(5회) 추교덕(5회) 정규화(6회) 박성규(6회) 손동운(7회) 공병석(7회) 김정길(7회) 진성식(7회) 김수길(8회) 신용찬(8회) 이영호(8회) 신점남(9회) 강홍일(9회) 김무일(9회)
회 장 : 신용갑(10회)
부회장 : 수석- 손경현(11회) 황점철(11회) 박수근(12회) 김정계(12회) 신용오(13회) 서철규(14회) 차시동(15회) 차정섭(16회) 김영국(17회) 오대환(18회) 주수회(19회) 정규균(20회) 유형창(21회)
감 사 : 박근도(6회) 김충식(14회)재 무 : 서호도(12회)
사무국장 : 황의용(17회) 사무차장 : 신현식(22회) 신종진(29회)
이 사 : 10회- 이종춘 정동호 11회- 김진용 김성규 진달출 12회- 김용석 전민화 13회- 남필우 여상덕 정문규 14회- 이명숙 정철암 이종선 15회- 성찬경 신영기 박종원 문삼철 16회- 황삼성 임흥영 김치곤 17회- 정태조 김찬식 김타곤 백종협 18회- 하태곤 김해일 19회- 정규권 박판복 김정호 권유태 표대수 황선율 20회- 배한영 서종찬 배종삼 황호술 21회 이학현 손병철 22회 이경렬 박종철 신용규 김동일 23회- 김병규 김병곤 서정호 24회- 박경현 이희덕 이인수 진성규 변재천 25회- 성호경 이도암 김인호 조용호 26회- 신용탁 27회- 최치규 이길영 28회- 전갑진 최성용 29회- 신민홍 김무곤 신윤열 30회- 이경복
(자료 제공 : 남지고등학교 총동창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