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 고등문관시험 합격
1937 함남경찰부 경부
1941 경시 승진, 평남경찰 보안과장 취임
1943 학무국 사무관
1945 미군정 경무부 차장
한국전쟁 당시 납북됨
● 엘리트 친일경찰의 고속 승진
1908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최경진(창씨명 江東慶進)은 일본에서 규슈(九州)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한 후 1934년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 일제시 식민지인에게는 최고의 권력적 지위를 보장하는 고급 관료의 임용 자격시험으로 관계 진출에 뜻을 둔 조선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고문시험이라는 정통 출세 코스를 밟아 식민지 지배기구에 편입하게 된 것이다. 고문시험 출신의 조선인들 대다수가 일반 행정부서에 취임한 데 비해 최경진은 1937년 함경남도경찰부에서 경부로 근무한 것을 비롯해서 1941년에는 경시로 승진, 평안남도경찰부 보안과장의 중책을 맡는 등 일찍부터 경찰부서의 핵심 간부로 부상했다. 1943년에 학무국 사무관으로 잠시 부서를 옮겼으나 해방 직전 다시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 겸 훈련과장으로 경찰부서에 복귀했다.
일제 말 역시 경시직에까지 올랐던 최연(崔燕)과 같이 일반적으로 조선인 경찰들이 말단 순사로부터 시작해서 오랜 기간 동안 사상범 및 독립운동자 검거의 일선에서 식민지 경찰로서의 악역을 도맡은 결과 고위 경찰관료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최경진의 경우는 처음부터 도경(道警)급의 고위경찰부서에서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최경진이 경찰에 투신한 지 단시일만에 경시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조선인 경찰로서는 드물게 대학 졸업의 학력과 고문 출신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소지한 덕분이었다.
일제시 주임관(9등급) 이상의 관리직 임용 자격을 부여하는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하려면 우선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는 일체의 사상적 경향, 또는 반일행위의 경력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고문 출신 관료들은 고문시험에 응시하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민족적 절조를 포기해야 했다. 거기에 대체로 비교적 부유한 환경과 유력한 가문을 배경으로 우수한 학벌, 강한 성취욕을 소유할 수 있었던 고문 출신 관리들이 출세지향적 또는 계급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일제의 통치 권력과 자연스럽게 결탁하면서 식민지 사회의 토착 지배 세력으로서 친일의 대열로 나아가게 된 것은 필연적 귀결이었다.
고문시험 출신자들은 초기에는 총독부 중앙관서나 도의 고위직, 또는 지방군수 등에 주로 배치되었고 그 숫자도 소수였으나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이 강화되는 1930년대 후반에 와서는 현지 관료의 필요성이 늘어나 그 숫자가 증가했고 이와 함께 고문 출신의 인사 배치가 경찰 계통으로까지 확대됐다. 최경진을 비롯하여 경성제대 출신으로 1939년에 고문시험에 합격한 전봉덕(田鳳德, 일제하 경기도경찰부 수송 보안과장 1949년 후 육군 헌병사령관), 역시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1942년에 고문시험에 합격한 박주식(朴朱植, 일제하 마포경찰서장, 해방 후 민주당 정권하에서 치안국장) 등이 바로 그 대표적 경우였다.
성격상 비공개적일 수밖에 없는 식민지 경찰 업무에 그것도 일반경찰직이 아닌 간부직에 종사한 까닭에 고문 출신 경찰관료들의 경우 개인적 친일행적이 구체적 행위나 사건으로 뚜렷이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36년의 일제 식민통치 기간 동안 가장 강력한 물리적 통치 수단으로서 일제 침략의 첨병과도 같았던 경찰 조직에서 민족의 운명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곧 이들의 반민족적 성격을 대변한다 할 것이다.
● 미군정 경찰 경무국 차장에 취임
해방후 최경진의 활동은 일제 시대의 행정관료로서의 경력이 미군정에 의해 인정되어 군정경찰에 발탁됨으로써 시작되었다. 따라서 해방 후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무엇보다 군정경찰의 형성과 그 성격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기존의 경찰 기구는 종전의 일본 정부와 전혀 관계없고 군정장관의 지휘와 권한에 속한다"는 아놀드 군정 장관의 선언(1945년 9월 14일에 발표)은 점령 직후 미군정의 경찰 행정이 당분간 현상유지 정책에 의해 일제의 경찰 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고 활용할 방침임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일본인 경찰관을 전원 면직시키고 조선인 경찰관을 채용하는 방향으로 경찰 조직을 재편함으로써 일제 잔재의 청산을 요구하는 일반의 요구에 어느 정도 부응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미군정에 의해 취해진 이러한 조치는 다만 경찰의 전권이 일제 총독부로부터 미군정에게로 이양되었다는 사실에 불과할 뿐, 군정의 의도가 근본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통치 구조와 경찰의 체질을 혁신하는 것에 있지 않았음이 미군정 초기의 임시방편적인 경찰행정을 통해 곧 드러났다.
먼저 군정경찰 체제 확립을 위한 첫 시도로 미군정은 광화문 앞에 있던 경찰관강습소(일제시 신임경찰 및 경부보 이상의 경찰 간부를 위한 교육 기관)를 통해 일본인 경찰의 해임과 악질 친일경찰의 잠적으로 인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경찰 인원을 보충하려 했다. 이에 따라 1945년 9월 16일부터 9월 말까지 네 차례에 걸쳐 1천여 명이 신규로 경찰에 채용됐다. 하지만 "치안유지를 위한 시급한 필요"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서두른 결과, 해방 직후의 어수선한 사회분위기를 틈타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일부의 간상배와 모리배들이 경찰직에 들어와서 오히려 비리나 부정행위를 저지르게도 하고 경찰, 군인, 면 서기, 형무소 간수 등 일제하 관직 경험이 있는 자들이 대거 선발되어 일제 잔재의 청산은커녕, 최소한의 치안과 질서 유지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또 군정 당국은 말로는 "압제와 악정(惡政)의 표본(하지 중장의 기자회견중에서 인용)"이던 기존의 경찰을 개편하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전직 일인 경찰을 정책고문으로 활용하고 일제 경찰의 충실한 보조자였던 조선인 경찰 간부를 대거 군정경찰에 발탁하는 모순된 인사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친일경찰의 청산이라고 하는 민족감정을 무시한 미군정에 의해 일제하의 조선인 경찰관료의 대다수가 해방 후 자신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해방 후 최경진이 경찰 관료로 재등장할 수 있었던 계기는 이처럼 해방된 조선의 민족사적 요구를 도외시한 미군정의 점령정책에 의해 마련됐다. 궁극적으로 친미적 보수 정권의 수립이라는 기본 목표를 수행하는 미군정은 우선 미국식 민주주의 제도의 도입 방침에 따라 일본식 경찰 제도를 미국식 경찰 제도로 전환시키는 제도 개편에 착수하는 한편, 인사정책에 의해 경찰계의 친미 인맥을 구축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미군정은 시급한 경찰력의 강화를 위해 우선 전문적 실무 능력과 행정 경험을 갖춘 조선인 경찰 간부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 중앙부서의 첫 경찰 인사로 10월 9일, 경무국에 이영(李英), 박장순(朴璋淳), 황의권(黃義權), 김태일(金泰日), 최경진 등 일제 경찰 간부를 임명했다. 특히 최경진의 발탁은 단지 일제시 경무국 사무관으로서의 경력뿐만이 아니라 하지(John R.Hodge)의 통역관인 이묘묵(李卯黙)의 추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친일 경찰의 새로운 변신과 군정경찰 내 친미 인맥의 형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최경진을 추천한 이묘묵(창씨명 李宮卯黙)은 일제하 대표적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과 "대화숙"에 가입한 적이 있었으며 미국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연희전문에서 서양사를 가르친 인물로서, 해방 후에는 자신이 만든 『코리아타임즈』라는 영자신문에 미군 환영 기사를 전면 게재하는 등 군정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협력으로 군정장관 하지의 통역 겸 고문으로 발탁된 인물이었다. 하지의 "귀와 입"으로 불릴 정도로 미군정 3년을 통해 하지와 밀착된 관계를 유지한 이묘묵과 최경진의 연결은 어느 면에서는 일제하의 기득권 세력이 미군 진주 후 공통의 이해관계 위해서 서로를 지원하면서 군정과 결탁하여 새로이 세력을 규합해 나가는 지배 계급 생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한편 조병옥의 경무국장 취임(1946년 1월 4일에 정식으로 발령)을 계기로 경무국은 조병옥 국장-최경진 차장을 중심으로 조선인 간부진용을 구성하게 되었다.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 학위를 갖고 있던 조응천(曺應天, 전 육군통신감)이 통신과장에 부임해 왔으며 해방 직후 평양에서 조만식(曺晩植)이 조직한 "건준"의 치안대장을 맡았던 최능진(崔能鎭)이 수사국장에 취임했다. 또 군정 재무장관 서리로 있던 김용택(金容澤, 전 국학대학장)의 권유로 김태선(金泰善, 서울시경국장, 내무장관 역임)이 수사부국장으로 최능진 밑에서 일하게 됐다. 그리고 "미국에서 범죄학을 전공한 경력도 있고, 공산당이 너무 거세서 곤란하니 어렵겠지만 경무부에 들어가서 좀 일해 달라"는 김용택의 권유에 따라 경찰 투신을 결심했다는 김태선의 말처럼, 이들의 경찰 투신에는 반공경찰로서의 군정경찰의 임무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었다.
당시 경무국장 조병옥은 "고의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운동을 방해했거나 독립운동가들을 살해한 자 외에는 일반 경찰에 전직 경험이 있는 경찰관 출신을 등용한다"는 인사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위로 조병옥-최경진 체제의 경무국은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는 민족 세력에 맞서 반공․보수 세력을 지지하는 친일경찰의 결집으로 나름대로 자신들의 정치적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조병옥을 도와 실무 능력을 발휘한 최경진은 특히 일제시 북한 지방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경력으로 인해, 수도청의 최연과 함께 월남한 친일경찰들이 군정경찰로 진출하는 통로가 됐다.
● 경찰계의 반탁 파동, "8서장 임명"에 개입
국내 정국의 흐름에 중요한 전환을 가져온 모스크바 3상회담의 결정은 경찰계에 민족경찰의 진로와 위상을 둘러싼 파문을 일으켰다.
임정계가 주도한 반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신되자 미군정은 전체 경찰에 대해 비상근무령을 내리고 경찰의 동요를 경계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29일 오후 2시, 종로경찰서에는 서울 시내의 10개 경찰서장이 긴급회의를 열어 "신탁통치"를 배격하기로 뜻을 모으고 동대문경찰서장 김정제(金正濟, 일제 때 군수, 이승만 정권 수립 후 좌익으로 몰려 처형)가 대표로 다음과 같이 공동담화를 발표했다.
우리는 치안을 확보해야 할 중책에 있는 몸이나 신탁통치안을 배격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없는 곳에 경찰이 있을 리 없고 민중을 떠난 치안은 허수아비 파수병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이같이 모여 결의를 했다. 경찰관의 직을 떠나 자주국가로서 완전 독립이 올 때까지 군정보 기관인 경찰관의 신분을 떠나 순수하게 민중을 위한 치안대로서 치안확보에 전력을 다하겠다. … 오늘 오후 4시부터 도에서 과서장 회의가 있는데 우리의 뜻을 피력하겠다(『자유신문』, 1945년 12월 30일자).
모두가 일제 때 경찰관을 지내 민족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처지에 다시 미군정의 보조 기관으로 전락하여 민중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수모를 당할 수는 없다는 각오였다.
이어 시내 서장들은 30일 밤, 임정계의 교섭 대표인 신익희(申翼熙)와 만난 후 다음날 임시정부를 방문하고 금후 전 경찰은 임시 정부의 지휘하에 민중의 치안확보에 소임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를 안 경기도 경찰부장 스톤은 당장에 경무부장 최연을 불러 명령불복종의 이유로 신익희와 만난 8개 경찰서장(영등포 서장과 창덕궁 서장은 불참)의 집단 사임을 요구했고 결국 이들 서장들은,
원래 군대와 경찰은 그 사명에 비추어 가장 민족적 양심으로 행동할 것이며 반동적 편벽(偏僻)을 엄피(嚴避)하며 불편 부당한 입장으로서 과도기 치안확보에만 매진함이 우리가 찾을 노선임을 충분히 인식하였노라. 언제나 경찰의 고유한 기능을 발휘하려면 국민을 기반으로 한 정부의 보호와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인데 국민된 도리로서 어찌 국민통일을 희구치 못하리까.
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고 "각계 제위의 통일전선 결성을 학수고대하면서" 일괄 퇴진하고 말았다.
1946년 1월 12일, 군정청 경무국의 경무부 승격과 함께 차장으로 승진한 최경진이 맡은 최초의 과제가 바로 위의 "반탁"파동으로 공석중인 8서장의 자리를 메우는 일이었다. 조병옥 경무부장과 장택상 수도청장, 그리고 최경진의 주도로 1946년 1월 26일에 발표된 서울시 8개서의 후임서장 임명은 한국인에 의해 단행된 최초의 인사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중부서와 용산서에는 장택상이 추천한 이구범(李九範, 전 개성 경찰서장)과 김형진(金亨鎭, 해방 전 경부까지 지냈으며 종로경찰서 보안주임을 역임했고 해방 후 경찰학교장)이, 그리고 종로서장에는 역시 장택상에 의해 발탁된 전 영등포경찰서장 윤명운(尹明運)이 취임했다. 나머지는 경무부장의 결정으로 이익홍, 임성호, 이중수(李仲秀, 경도 보안과 서무주임), 윤파(尹巴, 경찰학교 서무과장), 이호우가 각각 순서대로 동대문, 서대문, 성동, 성북, 마포경찰서장에 또 종로서장으로 자리를 옮긴 윤명운(尹明運) 대신에 문학주(文學周)가 새로 영등포서장에 임명됐다.
이들의 면모는 대체로 일제 때부터 경찰 경험이 풍부한 인사들이었고 월남한 전직 경찰이 다수 포함된 점이 특징적이었다. 특히 동대문서장 이익흥[李益興, 일본 규슈제대 출신, 전 박천(博川) 경찰서장]과 마포서장 이호우[李虎羽, 전 영원(寧遠)경찰서장]는 최경진과 같이 북한에 고향을 둔 월남경찰 출신이었다(북한에 남은 처자를 걱정한 이호우의 자진 사퇴로 마포서장은 곧 인천서장을 지낸 강신창(姜信昌)으로 교체됐다). 이처럼 민족의 자주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의 반탁 열기에 고무되어 임정 세력에 합세, 군정 통치에 반기를 든 경찰계의 반탁 파문은 "8서장"의 임명으로 한 달여 만에 수습되었고 이 과정에서 최경진은 조병옥을 도와 경찰 내 한민당의 세력 확립에 크게 기여한 셈이 되었다.
● 경무부와 수도청의 반목, 그리고 최경진의 해임
일찌감치 군정경찰에 발탁되어 출세가 보장된 듯했던 최경진의 경찰 생활은 경찰 내부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예상 외로 빨리 중단되고 말았다. 즉 최경진의 도중하차는 미군정 초기 심각했던 경무부와 수도청간, 즉 조병옥과 장택상의 대립이 빚은 산물이었다.
조병옥과 장택상의 드러난 갈등은 앞의 "8서장" 인선 과정에서 비롯됐다. 파면된 경찰서장의 후임 인사는 경기도 경찰부장에 취임한 장택상과 함께 하게 되었으나 경무부장 조병옥은 장택상이 추천한 인물 가운데 이구범 외 두 명만을 그대로 임명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측 사람으로 결정해 버렸다. 그 뒤로는 인사 이동이 있을 때마다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청장이 된(수도청은 1946년 9월 17일 경기도경찰부로부터 분리, 창설됨) 장택상이 서로 대립하는 바람에 경무부 차장 최경진은 수도청 부청장 이익홍과 함께 조정을 맡아 적절히 안배해야 했다.
이 두 사람의 대립은 산하의 경찰을 경무부파와 수도청파로 갈라놓고 서로 반목하게 했으며 개인의 비위사실 여부를 조사하는 사태로까지 번져갔다. 그리하여 경무부와 수도청에서는 상대방과 가깝다는 소문만으로 해임되거나 좌천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한때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경무부 차장 최경진도 수도청측과 내통하고 있다는 모략을 받아 급기야 해임되고 말았다.
당시 대립이 지나쳤던 조병옥과 장택상의 사이를 다소 부드럽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최경진은 김태선과 함께 대구에서 돌아오는 장택상을 마중하기 위해 서울역에 나간 일이 있었다. 경무부 내 모(某) 과장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조병옥이 국장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최경진을 불러놓고 호통을 쳤고 그 즉시 최경진은 사표를 내야 했다.
초창기 경찰수뇌부의 이러한 대립은 한국경찰의 수뇌인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청장 장택상을 갈라놓고 경찰을 견제하고자 한 하지에 의해 조장된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정부 수립 후를 겨냥한 경찰 내부의 헤게모니 경쟁의 양상으로 발전됐고 그러한 과정에서 최경진의 해임이 이뤄진 것이었다. 일제하 경시까지 지낸 화려한 경력의 최경진도 경찰 내의 권력 투쟁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후 최경진이 공직에 복귀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일찍이 경찰에서 탈락한 덕분인지 반민특위의 조사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는 사실 외에 그후의 행적은 더 이상 알려지지 않는다.
□ 안소영(영남대 강사)
■ 참고문헌
「비화 한세대」, 『경향신문』, 1978년 기획연재.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 국립경찰창설-김태선」, 『중앙일보』, 기획연재.
대한경제일보사, 《한국경찰의 발자취》, 대한경제일보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