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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성회를 마치고 성도님들과 함께 |
금강다리를 건너고 공주 시내를 지나서 동학혁명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우금치를 넘었다. 한참을 더 달리자 ‘세광교회’라는 안내표지가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산 밑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얼마를 더 가니 산자락 아래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는 세광교회가 보인다.
필자를 맞이하는 목사님의 목소리가 푸근하다. 틀림없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목사님 얼굴을 대면하자 내 마음이 먼저 넉넉해진다. 그러나 목사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뜻밖이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요. 몹시 가난했구요. 외골수라 놀림도 많이 받아서 어린 마음에도 참 속상했어요. 소풍갈 때도 돈이 없어서 가지 못했고, 풀빵을 사 먹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풀빵이에요. 결국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말았는데 모교회 장로님의 도움으로 어렵게 미션학교를 졸업했어요. 검정 고무신을 신고 신학교에 갔는데 등록금을 내지 못해 수모도 많이 당했지요. 집이 없어 삼각산 꼭대기에서 산짐승처럼 지내기도 했고, 차가운 기도실에서 추위에 떨면서 겨울을 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꾹 참고 열심히 공부했고 무사히 졸업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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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호 목사는 현재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 통일및사회위원장으로, 그리고 대전충남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장으로 사랑의 실천, 정의사회구현, 평화통일운동, 생명살림운동을 펼치고 있다. |
어린 시절이 그토록 힘들었다면 도대체 지금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해맑은 평화는 무엇일까? 좋은 교회, 좋은 교인들을 만났던 것일까? 목회가 즐거워 보이는 목사님의 이야기는 또 나의 예상을 비켜간다. “지금은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개척 당시에는 비가 새는 셋방교회였고 사택 역시도 비가 샜지요. 처자식에게 얼마나 미안하던지요. 그 때 얻은 병으로 아내는 지금까지도 허약하지요. 그러나 가장 힘이 들었던 것은 정치군인들에 의해 정권이 찬탈 당하던 때였어요. 의식이 깨어있던 대학생들은 연일 민주화를 외치며 데모를 하던 때였는데, 데모를 하던 학생들이 교회로 몰려오기 시작했어요. 아내는 종일 밥을 해야만 했고, 저는 경찰에 붙들리거나 수배가 내려 피신해 다니는 학생들을 돌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청년회를 창립하게 되었지요. 1985년도 청년회 창립 기념으로 ‘문익환 목사 초청 강연회’를 열었는데 이 일로 인해서 공주시기독교연합회로부터 제명이 되었지요.”
문익환 목사님을 모시고 초청 강연회를 연 것 때문에 연합회에서 제명이 되다니, 도대체 그 시대는 얼마나 긴 암흑의 터널이었을까? 목사님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문익환 목사님을 혼란을 야기시키는 정치 목사, 가짜 목사라는 것이었지요. 덩달아 저도 정치 목사, 가짜 목사가 되었고요. 거기에다가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공주시?군지부창립대회’를 중동초등학교에서 열기로 했는데 경찰이 원천봉쇄하여 모두들 거리에 모였어요. 경찰이 옥내집회를 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어느 누구도 장소를 제공해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세광교회가 교회당을 빌려주었는데 경찰은 옥내집회조차 무산시키기 위해 교회당에 최루탄을 발사했어요. 저는 성전수호를 위한 교역자 철야 기도회에 참여하면서 일천만 교우들에게 다급한 제언을 하게 되었지요.”
목사님은 빈 커피 잔을 가만히 내려놓으시더니 책꽂이에서 무언가를 꺼내셨다. “한번 읽어보겠습니까?” 목사님이 건네주는 종이엔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글이었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강물에 힘차게 노를 저었던 선배 목회자들의 정신이 혁혁하게 살아있는 글이었다. 나는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수선한 한말에 복음을 받아들여 기독교가 독립운동과 민족개화를 위한 교육, 의료, 선교에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십자가 없는 내세지향적이고도 물량주의적인 ‘축복’ 강풍에 휘말리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내 백성을 군부독재의 마수에서 하루 빨리 건져내어라’ 라고 하십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동터오는 새날을 일구어 냅시다.”
지금은 화합의 시대, 통합의 시대이다. 서로를 용서하고 끌어안아야 하는 때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픈 역사가 있었던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옳은 말을 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다 꽃다운 젊음들이 사라져간 일은 두고두고 교훈에 새겨야 한다.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이상호 목사님, 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목사님의 얼굴은 참 맑다. 웃음도 청년처럼 싱그럽다. 목사님이 들려주는 목회 이야기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공주에 ‘소망회’라는 장애우들의 모임이 있어서 지도목사로 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비로소 장애우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어요. 저는 예배당에 장애우들을 데려오기 시작했어요. 사실 목회자가 장애우를 자꾸 데려오면 교회가 성장이 안 된다고 반대하는 것이 현실이에요. 그런데 우리 세광교회 성도님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우리 성도님들이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운지, 이건 목회자가 누리는 최고의 기쁨이지요. 또 개척 초창기 어느 날 새벽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더니 교회에 들어와 자던 아이들이 있었어요. 가출을 한 아이들이었는데 그들의 가정을 방문해 보니까 딱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결손 가정이었고 생활도 무척 곤궁했어요.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았지요. 정말 도와야 할 이 땅의 소외된 민중이었어요. 그래서 ‘사랑이 있는 모임’을 결성했고 지속적으로 돕기 시작했어요. 그들과 함께 캠프도 가고, 성탄절에는 마굿간 축제도 열어 시간을 함께 가지려고 애를 썼지요. 차츰 후원자가 생겨 매월 생활지원금도 줄 수 있게 되었고 장학금도 전달할 수 있었어요. 그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어느 덧 대학에 가는 일이 생겼을 때, 우리들은 참 행복했지요. 지금은 그런 모든 일들을 나라가 책임지고 있고, 교회보다 나라가 더 잘하는 좋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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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광교회사랑이있는집 | 세광교회 이상호 목사님은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압된 민중들과 함께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했던 목회자였다.
“지금 교회의 사명은 사랑이지요. 특별히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희망을 주고, 생명을 불어 넣어 주어야지요. 사랑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전도고요. 우리가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지 않습니까? 복음은 바로 새 새명을 주는 일입니다.”
목사님의 부드러운 성품이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아마 그 부드러운 힘이 세상을 밝히는 한 줄기 빛의 선한 역사를 일구어냈을 것이다. 그 빛은 공주 세광교회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빛이 가는 곳마다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슬픔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빛이 비쳐지는 곳마다 가난하고 병들었던 사람이 나음을 입을 것이다. 빛이 쏟아진 곳에서 억압받던 사람들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세광교회에서 보았던 밝은 사랑의 빛을 모든 교회에서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