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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25) 2025. 2. 9
스데반의 설교(2) - 요셉 이야기
사도행전7:9-16
< 지난 시간 요약 - 아브라함의 믿음>
스데반은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함으로써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산헤드린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스데반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왜 구세주이신지를 변증합니다. 그런데 대상이 유대인들이다 보니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변증을 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스데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고향과 친척, 혈육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 안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약속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요셉의 삶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예표>
계속해서 요셉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스데반은 요셉을 예수님의 예표로 증거합니다.
9-10절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요셉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비슷한 형태를 보입니다.
그 형태(패턴)을 4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에 의해 고난을 당했습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여러 조상)이 있었습니다. 그중 11번째인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였습니다. 노년에 얻은 아들임과 동시에 자신이 사랑한 라헬과의 사이에서 난 첫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히며 각별히 여겼습니다. 이는 이복형들의 질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느 날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 꿈은 형들의 곡식단이 자기의 곡식단에 절하는 꿈이었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너무 선명하고 또렷했습니다.
이 꿈 이야기를 아버지와 형들에게 하게 되었고, 이는 요셉에 대한 형들의 질투와 분노를 더 키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창37:14)고 심부름을 시킵니다. 요셉은 형들을 찾아 세겜으로 갔다가 거기 없자 물어 물어 도단에까지 이릅니다. 도단에서 양을 치던 형들은 요셉이 오늘 것을 보고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하고는 죽이기를 꾀합니다. 그들은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고 말합니다. 그러자 제일 큰 형 르우벤이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고 말립니다.
요셉이 가까이 오자 그들은 요셉이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집어 던집니다. 다행히 그 속에 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앉아 음식을 먹는데,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낙타에 짐을 싣고 애굽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 이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인들 무엇이 유익하겠냐 그를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형들은 요셉을 은 이십을 받고, 그를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버립니다.
팔 때는 르우벤이 자리에 없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구덩이에 요셉이 없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옷을 찢고,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하고 탄식합니다. 그러자 동생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아버지에게는 “우리가 요셉의 옷을 발견하였는데,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은 것 같다”고 거짓말을 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야곱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야곱은 큰 충격을 받고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해합니다.
이처럼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에 의해 고난을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요셉과 같이 자신의 형제들, 곧 유대인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빛으로 오셨지만,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였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에게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마16:21)고 예언하셨습니다(세 번이나).
스데반은 지금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이 바로 요셉의 형제들과 같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둘째,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9b~10a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에 팔려가 노예가 되었습니다(17세).
그의 신분은 노예였지만, 하나님은 이런 중에도 요셉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창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형통은 우리가 떠올리는 성공이나 탄탄대로의 삶이 절대 아닙니다. 실패하지 않고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내는 삶도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형통한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형통’은 우리가 원하는 상황이나 환경, 지위에 도달하거나 유지하는 삶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삶을 의미합니다.
보디발 장군은 그의 신실함을 보고, 가정 총무로 임명하고 자신의 아내 외에 모든 것을 맡아서 책임을 지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아니한 시험이 왔습니다. 요셉이 젊고 용모가 준수하였기에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끈질기게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코람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39:9)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요셉이 집에 일하러 들어갔다가 두 사람만 남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옷을 붙들고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 요셉은 뿌리치고 나왔는데, 그 과정에서 겉옷이 그녀의 손에 남겨졌습니다. 그녀는 그 옷을 근거로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다며 자신의 남편인 보디발에게 일렀습니다. 분노한 보디발은 요셉을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의 삶에 또 한 번의 큰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시험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고, 요셉 역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간수장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하는 요셉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간수장은 요셉에게 제반 업무를 다 맡겼습니다. 창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이 모든 과정의 결론을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받고 버려졌지만,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해 옥에 갇혔지만, 하나님은 그를 함께 하셨고, 그의 삶을 형통케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건축자들이 버린 돌’에 비유하였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버려진 돌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마21: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막12:10).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귀히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준비시키셨습니다. 그것이 형통입니다.
세 번째는 이방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높아지셨습니다.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10)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왕의 신하 두 사람이 옥에 들어왔습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술 맡은 관원장’와 ‘떡 굽는 관원장’이 같이 옥에 들어왔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수종 들게 되었습니다.
여러 날 후에, 두 사람이 동시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꾼 꿈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지만 알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요셉이 그들을 보니 근심의 빛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를 묻자 자신들이 꿈을 꾸었는데 이를 해석할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요셉이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하고 말했습니다.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이 말합니다.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요셉은 해석하기를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킬 것입니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40:14)하고 부탁하였습니다.
이어서 ‘떡 굽는 관원장’이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합니다.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맨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요셉은 해석하기를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였습니다.
사흘 뒤는 바로 바로의 생일이었습니다. 바로가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시키고, ‘떡 굽는 관원장’은 목을 매달아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복직한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습니다.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창41장). “자기가 나일강 가에 서 있는데,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강 가에서 올라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로가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깬 바로는 그 꿈을 해몽하기 위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들였지만 해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생각하여 냈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소개하였습니다.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은총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꿈 내용을 들은 요셉은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하고는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일곱 좋은 암소와 일곱 좋은 이삭은 칠 년 동안 풍년이 들 것이라는 뜻이고,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와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은 칠 년 동안 흉년이 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풍년이 든 칠 년 동안 미리 대비하게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어 저장하라고 권면).
요셉의 해석에 감명을 받은 바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는 그를 애굽의 총리로 삼았습니다(30세). 요셉에게 권위를 더하기 위하여,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에게 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습니다(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음).
요셉을 받아들여 애굽의 통치자로 세운 사람은 애굽 왕 바로였습니다. 비록 형제들에게 미움받고 팔려나갔지만, 이방인 바로에게 받아들여져서 아주 높고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요셉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미움받고 버림받으셨지만,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받아들여지셨고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찾아와 아끼는 자기 부하의 중풍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대답하셨지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마15장, 막7장). 더러운 귀신에 들린 어린 딸을 고쳐 달라고 한 이방 여인이 찾아와 부탁을 하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시며 차갑게 거절하셨습니다. 물론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만약 여자가 자존심을 세우고 기분 나빠서 돌아갔다면 그의 딸은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어느 마을로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명이 멀리 서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눅17:11~19).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을 불쌍히 보신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엎으려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한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그 순간에,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을 들은 로마의 백부장만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 예수님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유대인에게서는 배척을 받으셨지만, 오히려 이방인에게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에게 계속 거절당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 복음을 지금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결과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1~16절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12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14.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요셉이 총리가 된 후에 칠 년간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 다시 칠 년간 흉년이 들었습니다. 애굽과 가나안 모든 땅에 임한 흉년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야곱과 그 아들들도 먹을 양식이 없었습니다. 야곱이 애굽에는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베냐민을 뺀 열 명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애굽에 도착한 아들들은 총리인 요셉을 향해 절을 올렸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고 사흘 동안 옥에 가둔 후에, 정탐꾼이 아님을 증명하고 여기서 나가려면 막내 동생(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대신 한 사람은 볼모로 남으라고 하였습니다. 시므온이 볼모로 남습니다. 그리고는 우선 먹을 것을 자루에 넣어 보냅니다. 그런데 돈도 그들의 도로 넣게 합니다. 나중에 자신의 자루에서 돈을 발견한 그들은 두려움에 떱니다. 결국, 가나안 땅에 돌아온 그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고하고, 막내를 데리고 가야 정탐꾼의 누명도 벗고, 볼모로 잡힌 시므온도 구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언뜻 허락하지 못합니다. 그러는 사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 다시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말합니다. 이때 유다가 막내를 데려가지 못하면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살 수 없음을 말하고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베냐민을 데려오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42:9) 이렇게 해서 막내 베냐민과 함께 애굽으로 갑니다(갑절의 돈을 가지고).
요셉은 베냐민이 함께 온 것을 보고, 신하들을 시켜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인도하게 하고 점심을 준비하게 합니다. 시므온도 이끌어내고, 발 씻을 물도 주며 점심 먹을 준비를 시킵니다.
정오에 그들에게 온 요셉은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는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웁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각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보냅니다. 그리고 베냐민의 자루에는 요셉의 은잔을 몰래 넣어 보냅니다. 그리고 다음 날 부하들을 보내어 그들을 추격하게 합니다. 은잔을 훔쳐 갔다고 하면서, 은잔이 발견된 자루의 주인을 잡아 오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그들은 다시 요셉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요셉은 그들을 책망하면서 그 잔이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이때 유다가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면서 자신이 그 아이를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부탁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정말로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을 위하는 것을 확인한 후 울면서 자신이 바로 형들이 판 요셉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도 못 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복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7~8)고 고백하였습니다(창50:19-21). 그 후에야 서로 목을 안고 울었습니다.
요셉이 수레와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 야곱을 모셔오게 하였습니다. 친족 75명을 고센 땅으로 정착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요셉의 고난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75명 – 야곱이 데려온 66명(창46:26)에 야곱, 요셉, 므낫세, 에브라임을 포함하여 요셉의 손자 5명을 더한 숫자).
야곱은 애굽에서 죽은 후에 세겜에 있는 막벨라 굴로 옮겨져서 그곳에서 아주 성대하게 장사지냈습니다.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지내기 위해서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 70 세겔을 주고 산 무덤입니다.
스데반은 이를 통하여 조상들이 요셉을 파는 큰 죄를 지었는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셔서 구원역사를 이루심을 말씀하십니다.
스데반은 그들이 예수님을 팔은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암시적으로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들의 구원주로 삼으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요셉의 형들처럼 이제는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맺는 말씀>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패턴이 계시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1) 요셉이 자신의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팔린 것과 같이, 예수님도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지 않고 함께 하셨고, 그의 삶을 형통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버려진 돌과 같다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귀히 쓰셨습니다.
3)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멸시받았지만 바로에 의해 존귀함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은 유대인에게서는 배척을 받으셨지만, 오히려 이방인에게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4) 결국, 요셉의 고난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결과가 되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스데반이 왜 요셉의 이야기를 길게 말하고 있는지 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거절하고, 멸시하고, 심지어 죽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의 역사, 곧 형통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악한 자로 쓰임 받지 말고, 선한 일꾼으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방해해도 소용없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가운데에서 방해꾼으로 기록되지 말고, ‘선한 일꾼’으로 인정받고, 하늘 생명록 책이 기록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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