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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공삼(金公三) |
호 |
본명은 봉규(奉奎), 자(字) 공삼(公三) |
본관 |
김해(金海) |
출생지 |
고수면 은사리(古水面 隱士里) |
주요활동 |
타고난 불행으로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산간벽촌에서 편모슬하에 갖은 고초를 딛고 자랐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수려하여 비범한 걸출로 총명까지 겸하였다. 맹모(孟母)에 못지 않은 모친의 교자열로 곤궁한 가운데 족히 무식은 면하였고 어디에 가도 백인지상(百人之上)을 능가하는 대장부였다.
1895년(乙未)일본 낭인배의 명성황후 시해만행에 절치부심하고 항일독지에 불타던 중 1905(乙巳) 적신(賊臣)들과 야합하여 국권을 강탈하고 이어서 1907년(丁未)에는 황제를 협박하여 강제로 양위(讓位)를 결행함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장성(長城)기대장(奇三衍)과 회맹(會盟)을 맺고 토왜전선(討倭戰線)에 선봉장으로 나섰다.
1907년 9월25일 문수산작전을 서전으로 26일 무장읍전(茂長邑戰), 27일에는 고창읍전투(高敞邑戰鬪)에서 고창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 3명을 살육했고 11월10일에는 담양 추월산(潭陽秋月山)작전에서 일군 수비대와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12월1일 수연산(隨緣山)에서 출전제를 지내고 3일에 성송내원(星松內院)전투를 치르고 13일에는 흥덕안치(興德鞍峙)작전이 있었다.
28일에는 기대장이 체포되어 의진을 지휘하게 되었다. 익년 2월25일 장성 송치산(松峙山)전투에서 일군 4명을 사살하고 3월6일에는 장성 월평(長城 月坪)장터 교전에서는 일경 3명과 한경 3명을 처단하고 12일에는 구수산(九峀山)전투를 치른 후 5월18일 무장에서 일군 기병 7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다음날 군유리 전투의 급보를 받고 원군으로 출병하였으나 적군의 군세는 병력과 화력이 비교가 되지 않아 대패하고 고산(高山)으로 퇴각하여 재기를 기약하고 의진을 해산 하였다.
김열사는 재기를 모색하고 암약하던 중 1909년 9월 20일 일경에 체포되어 광주지법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1910년 1월27일 교수형 집행으로 순국하여 1991년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족으로 무매독자가 있었으나 무후 절손하였다. 유해는 촌로(村老) 고 김옥식(故 金玉植)옹이 수호유지하다가 독지가 진채석(陳彩錫)씨의 헌성으로 현묘지에 이장 되었고 군비로 초라한 석물을 제공했을 뿐이다. 나라가 바로선 국체라면 무후선열의 후사는 국민전체가 후손 구실을 하는 것이 도리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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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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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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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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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전북 고창군 아산면 주진리 산-16 아산면 공설묘지 |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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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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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고 |
익산보훈지청, 블로그 (http://blog.daum.net/iksanbohun/13670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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