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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박열 [1902~1974], 본명은 박준식(朴準植)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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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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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경상북도 문경 |
주요활동 |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경성고보 재학 중에 3·1 운동 만세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191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정칙영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일본에서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고, 의혈단, 흑우회 등을 조직했다. 그는 흑도회라는 무정부주의자 단체에 가담한 아나키즘 신봉자였다.
박열은 1923년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그해 관동대지진 이후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일본어: 金子文子)와 함께 체포되었다. 불령사가 일본 천황과 왕세자 등을 폭탄으로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는 혐의 때문이었으나, 사건 자체가 과장,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두 사람은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몇달 뒤 감옥 안에서 자결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박열은 22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수감 생활을 하고 살아남았다.
광복후 풀려나 일본에서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거류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전신)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그는 이승만 노선을 지지했으며,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귀국했다가 한국 전쟁 때 북조선으로 갔다.
1974년 사망 당시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어록 |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 사형판결을 받은 후 |
저서 |
《신조선혁명론》(1946) |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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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물 |
가네코 후미코 |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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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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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건립중) |
참고, 출처 |
민족정기선양센터, 한국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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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라미드님 박열선생에 대하여 자료를 잘 보았읍니다 그당시 박열 선생을 아주 많이 도와주신분이 일본인여서 가네코후미코 입니다 자료에도 있지만 옥중에서 사망을 하기전에 박열선생과는 혼인생활(동거)을 한것으로 알고있고요 옥중에서 게실때에 임신중이 엿지요 무론 고문으로 인하여서 유산이 된것으로 알고요 그리하여서 박열 선생의 형님되시는 분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두분을 모셔와서 현재는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 그분들의 기념관을 건립중인것으로 알고 있고요 그곳의 관계자는 황병태 사무차장님이십니다 아직 건립을 하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지요
꼬리글 보고 카페에 들어왔습니다. 이전에 혁명가님이 올린 정도의삶에서도 가네코여사의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것이 정말 아름다우면서도 또한 너무도 가슴이 아파옵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리고 리학효님의 글을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가지 더요 그당시 가네코후미코 여사의 부친은 일본 경찰 이였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열선생을 그리도 돠주셨다닌 그당시로서는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할일이 아닌가 싶네요 그분들의 산소는 현재 고향인 경북 문경에 있읍니다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박열의사 카페로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