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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강해(24) 2026. 8. 19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자
왕하7:3~10
<사마리아 성에서 일어난 비극>
아람 왕 벤하닷이 다시 군대를 모아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아람 군대는 먼저 사마리아 성 앞에 진을 치고 성 주위를 포위하였습니다.
포위가 계속되자 결국 성안의 식량은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물가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습니다(‘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 ‘비둘기 똥 한 움큼에 은 다섯 세겔.”).
이러다 보니, 말로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여인들 사이에서 아이를 잡아먹는 일로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호람 왕은 그 상황을 슬퍼하며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이 참상의 원인을 엘리사에게 돌렸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죽이려고 사자(자객)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미 왕이 자신을 죽이려 사자를 보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자가 도착하자 엘리사는 뜻밖의 예언을 해 주었습니다. 내일 이맘때까지 기근에 허덕이던 사마리아 성이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러자 한 장관이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고 엘리사의 예언을 조롱했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그 장관에게 그 일을 보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먹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병 환자 네 사람>
오늘 본문은 엘리사의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소개한 내용입니다.
3~4절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4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성문 밖 어귀에 네 명의 나병 환자가 등장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부정한 존재’로 인식되어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성 밖에서 살았습니다(레 13:45~46, 민 5:3). 그들은 자선에 의존하거나 때때로 친지들이 공급해 주는 음식으로 연명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성 안의 거주자들도 목구멍에 풀칠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성 밖 출입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음식 공급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차피 굶어 죽을 운명에 처한 이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짜낸 아이디어가 차라리 아람 군에 항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4).
말은 항복하러 갔다고 표현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양식을 구하러 간 것입니다(항복을 받아 줄리도 없음).
에스더 왕비의 유명한 말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는 각오로 아람 진영으로 향했습니다.
<놀라운 현장 발견>
아마 아람 진영에 도착한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은 놀라운 현장을 발견하였습니다.
5절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아람 군의 진영에 도착해 보니 한 명의 군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열왕기 기자는 그 이유를 6~7절에서 설명합니다.
6~7절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7 해 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아람 군대의 귀에 ‘환청’이 들린 것입니다. 실제는 오지도 않은 외국 군대(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의 병거 소리와 말소리, 돌격 소리를 듣게 하신 것입니다. 아람 군인들은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과 동맹을 맺고 쳐들어오는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겁에 질린 아람 군대는 허겁지겁 줄행랑을 쳤습니다.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갔는지, 자기 진영을 그대로 두고(‘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먹고 마시는 나병 환자들>
그 현장을 목격한 나병 환자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8절 “그 나병환자들이 진영 끝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이들 나병 환자들이 적진의 끝까지 갔습니다. 정말 다 도망갔는지, 혹시 남은 자가 있는지를 확인한 것입니다. 정말 아무도 안 남고 다 도망갔습니다. 안심이 된 그들은 한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배가 부른 뒤에는 장막을 뒤져 아람 군대가 남기고 간 귀중품(은과 금)과 의복을 챙겨, 자신들만 아는 장소에 숨겨 두었습니다. 이렇게 장막을 돌아다니며 귀중품을 챙겨 숨겨 두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의 결단 –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자>
그러다가 불현듯 사마리아 성에서 굶고 있는 가족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9~10절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10 가서 성읍 문지기를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서 보니 거기에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하는지라.”
자신들만 먹고 마시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지금 성 안에서는 수많은 형제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며 기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는 자신들을 책망하였습니다. 만일 자신들이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지 않은 채로 내일 아침 해가 뜬다면, 벌이 자신들에게 미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속히 왕궁에 가서 알리자고 서로 제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성문 문지기를 불러 자신들이 본 사실을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과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6절a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군대로 하여금 ‘환청’을 듣게 하신 이가 누구입니까? 주어가 ‘주께서’입니다. 이 일을 주관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증언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가 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던, 엘리사를 죽이려고 오는 아람 군대를 모두 눈이 어둡게 하여 엘리사의 인도로 사마리아 성읍 한복판으로 제 발로 스스로 들어가게 하시고 하셨습니다(왕하 6:15~23).
주 전에 보았던, 이스라엘 연합군이 에돔 사막에서 물이 떨어졌을 때, 엘리사는 개울에 구덩이를 파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침이 되니,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오지 않았는데, 구덩이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에돔 쪽에서 흘러옴).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압 초병이 보니 아침에 떠오르는 햇빛에 물이 비치는데, 핏빛으로 보인 것입니다(그저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여기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고 생각). 그들은 내분이 일어나 자기들끼리 싸워 서로 죽인 것으로 성급하게 판단하고, 노략질하러 내려왔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습격하여 모압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습니다(왕하 3:20~25).
왕상 22장을 보면, 우리는 아합의 죽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합과 여호사밧이 힘을 합쳐 아람에게 빼앗긴 땅 ‘길르앗 라못’을 되찾으려 할 때, 선지자 ‘미가야’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출전한다면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가 늘 ‘흉한 일’만 예언한다고 하면서, ‘미가야’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고, 출전하였습니다. 아합은 내심 미가야의 예언이 적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신분을 감추려고 왕복을 벗고 일개 군사로 변장을 합니다. 그러나 한 아람 병사가 ‘무심코’ 활에 맞아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피를 많이 흘려 죽고 말았습니다. 아합이 탄 병거의 피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었는데, 그곳에 있던 개들이 그 피를 핥은 것입니다. 이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벌어졌을 때 엘리야가 아합에게 선포한 바로 그 예언(“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왕상21:19)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상식과 논리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역사가 수없이 등장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예를 보면, 홍해 바다가 갈라진 사건(출14장),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사건(수6장)을,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놋뱀을 보면 치유되는 사건(민21), 엘리야가 바엘 선지자 450명과 대결해서 승리하는 사건(왕상18) 등 수많은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세세하게 말씀드리려면 끝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부터 이미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을 초월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일어난, 수많은 기적 역시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과 상상력을 초월한 사건입니다.
그중 제일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처형당하셨을 때, 세상의 관점과 이성에서는 "모든 실패와 끝"이었습니다. 제자들조차 절망하여 도망쳤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한계이자 최종 절망인 '죽음'마저 넘어서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실패처럼 보였던 십자가를 인류 구원의 완성이라는 전무후무한 역사로 뒤바꾸셨습니다.
사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고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처럼 성경 속 수많은 사건들은 “인간의 계산과 한계가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배려와 계획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 5절과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절묘하게 당신의 역사를 주관하시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5절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7 해 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바로 ‘해 질 무렵에’란 구절입니다.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이 언제 일어나 아람 진영으로 출발한 시점이 바로 ‘해 질 무렵’(5)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람 군대가 두려움에 도망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해 질 무렵’(7)이었습니다. 즉, 나병 환자들이 아람 진영으로 가려고 일어났을 때는 아람 군인들이 도망을 치려고 일어난 때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한 편에서는 출발하기 시작하였고 다른 편에서는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일이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해 질 무렵’보다 ‘일찍 출발해서’ 아람 진영에 도착했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람 군대는 그대로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나병 환자가 자기 진영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반대로 아람 군대가 ‘해 질 무렵’보다 더 늦게 떠났더라도 분명 나병 환자들이 사로잡혔을 것이고 그들은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의 타이밍은 정확합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상황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과 귀에 불가능하게 보여도 모든 이론과 예상을 뒤엎고 말씀하신 대로 목적을 성취하십니다.
둘째, 탐욕에 매몰되는 것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본 절에는 네 명의 나병 환자가 아람 진영에 들어가서 취한 행동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1) 식욕을 채움 : 이 식욕은 수면욕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2) 재물욕을 채움 : 일단 식욕이 채워지고 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이 네 명의 나병 환자는 탐욕에 매몰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되겠도다’(9절) 하고 뉘우치고, 성 안에서 굶주리고 있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탐욕’(탐심)에 매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탐욕은 우리의 신앙을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3: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즉,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은 우리가 말씀에 결실치 못하게 하는 방해물입니다.
바울은 심지어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라고까지 말씀했습니다. 그만큼 우리 마음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같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아야 합니다(마 6:25, 31). 왜냐하면, 하나님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고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마6:32).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셋째,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일하시는 방법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병은 당시에 가장 혐오스러운 병이었습니다.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격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혼자 지내면서 진영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레 13:45-46). 그런데 하나님은 사마리아 도성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아름다운 소식’을 바로 이 네 명의 나병환자에게 맡기셨습니다.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예수님의 출생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이나 서기관이나 권력자들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의 가난한 목자들에게 먼저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누구를 뽑았습니까? 당대 사회의 엘리트나 학자가 아닌, 어부와 세리 같은 평범하고 소외된 이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그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심).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고전1:28~29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쓰시는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 힘과 자격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넷째, 아름다운 소식은 반드시 세상 끝까지 전해져야 합니다.
9~10절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10 가서 성읍 문지기를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서 보니 거기에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하는지라.”
사실 그들은 성안에 거하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든 사람들입니다. 복수하기로 하면 그대로 방치해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아름다운 소식’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유언의 명령을 기억하십시오.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맺는 말씀 – 거룩한 부담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나병 환자들처럼 우리도 이 아름다운 소식인 복음을 다른 죽어가는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나아가 성도들 각 사람에게도 ‘거룩한 부담감’이 있어야 합니다.
나병 환자들은 자신들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지 않고, 아침을 맞게 된다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교회)는 침묵의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요즘 어떤 이들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분위기로 인해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숨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울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환영받는 분위기 속에서 복음을 전했습니까?
무관심과 이기주의와 안일주의의 죄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름다운 소식’,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첫 번째 증거입니다.
바라기는 내가 이 ‘아름다운 소식’,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하나님의 책망이 있을 것이라는 ‘거룩한 부담감’을 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구원의 복음을 진실하게 전하는 참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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