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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안목포관광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천사의섬
창 : 안숙선 장단 : 중모리 | |||||||||||||||||||||||||||
중모리 정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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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왼편 가죽을 치면서 동시에 북채로 오른편 북가죽을 힘 있게 침. 궁: 왼편 가죽을 침. 딱: 북채로 북통의 앞쪽을 침. 탁: 왼편 가죽을 손바닥으로 꽉 막으면서 북통 꼭대기를 힘있게 침. 구궁: 편 가죽을 재빨리 두 번 침. 따르닥: 북채로 북통 오른편 가를 가볍게 굴려 소리를 냄. 동그라미의 크기는 소리의 크기를 말함. | |||||||||||||||||||||||||||
호남가 가사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고향을 보랴하고 제주어선 빌려타고 해남으로 건너갈 제 흥양의 돋은 해는 보성에 비쳐있고 고산의 아침 안개 영암을 둘러있다. 태인하신 우리성군 예악을 장흥하니 삼태육경이 순천심이이요 방백수령이 진안군이라 고창성에 높이 앉아 나주 풍경을 바라보니 만장운봉이 높이 솟아 층층한 익산이요 백리담양의 흐르는 물은 구부구부 만경인데 용담의 맑은 물은 이 아니 용안처며 능주의 붉은 꽃은 곳곳마다 금산이라 삼천리 좋은 경은 호남이 으뜸이로다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 |
함평천지-- 로 시작하는 호남가 한번 음미해 봅시다.
*호남가(湖南歌)*
호남가의 작자에 대해서는 창작 년대와 함께 미상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조선조 말 이서구(1754~1825)가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할 때 전라도에 대한 노래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여 지었다는 기록이 있고, 판소리를 집대성하여 우리의 국악사에 큰 흔적을 남긴 신재효(1812~1844)의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다.
1821~1823년까지 재임한 함평현감 ‘권복‘이 함평을 찬미하기 위해 지은 ’咸山歌‘의 첫 구절에 “호남의 여러 고을을 노래한 호남가도 제일먼저 함평을 부르지 않았던가”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그 이전(170여년)에 호남가가 널리 애창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신재효가 1812~1884년의 사람으로 호남가를 지었다면 그의 나이 11세 이전에 지었다고 해야 하므로 객관적으로 볼 때 신빙성이 지극히 낮다 하겠다. 또한 이서구의 경우에도 그가 20세인 177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감사 재임 시에 지었다 하나 출생연대와 앞의 “함산가” 및 당시의 통신관계 등을 참작하면 이서구가 직접 창작 했다고 하긴 어렵고 저간에 구전되어 오는 노래들을 집대성 하고 널리 보급시킴에 따라 그의 창작이라고 와전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겠다.
따라서 현재까지는 작자연대미상이라 함이 옳다하겠다.
호남가는 민중의 노래로 불리어 오다가 경복궁 낙성식(1867년)때
전라도 대표로 나가 장원하니 그때부터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한말(韓末)과 일제치하에 고향을 그리는 향수로 나라 잃은
망국의 한(恨)을 달래는 비원(悲願)의 노래로 애창되어 왔다고 한다
*호남가 가사 (여러 이본들 중의 하나)*
함평천지(咸平天地) 늙은 몸이 광주고향(光州故鄕)을 보려하고
제주어선(濟州漁船)을 빌려 타고 해남(海南)으로 건너 갈 제
흥양(興陽)에 돋은 해는 보성(寶城)에 비쳐있고,
고산(高山)의 아침안개 영암(靈岩)에 둘러있다.
태인(泰仁)하신 우리 성군 예악(聖君 禮樂)을 장흥(長興)하니
삼태육경(三台六卿)은 순천심(順天心)이요.
방백수령(方伯守令)은 진안(鎭安)이라.
고창성(高敞城)에 높이 앉아 나주풍경(羅州風景) 바라보니
만장운봉(萬丈雲峰)은 높이 솟아 층층(層層)한 익산(益山)이요.
백리 담양(白里潭陽) 흐르는 물은 구비구비 만경(萬頃)인데,
용담(龍潭)의 흐르는 물은 이 아니 진안처(鎭安處)며,
능주(綾州)의 붉은 꽃은 곳곳마다 금산(錦山)인가.
남원(南原)에 봄이 들어 각색화초(各色花草) 무장(茂長)하니
나무 나무 임실(任實)이요. 가지 가지 옥과(玉果)로다.
풍속(風俗)은 화순(和順)이요. 인심(人心)은 함열(咸悅)인데
이초(異草)는 무주(茂朱)하고, 서기(瑞氣)는 영광(靈光)이라.
창평(昌平)한 좋은 시절 무안(務安)을 일 삼으니
사농공상(士農工商)은 낙안(樂安)이요. 부자형제(父子兄弟)는 동복(同福)이라
강진(康津)의 상가선(商賈船)은 진도(珍島)로 건너갈제
금구(金溝)의 금(金)을 일어 쌓인 게 김제(金堤)로다.
농사(農事)하는 옥구백성(沃溝百姓) 임피사의(臨陂蓑依) 둘러입고
정읍(井邑)의 정전법(井田法)은 납세인심(納稅人心) 순창(淳昌)이라.
고부(古阜) 청청(靑靑) 양유읍(楊柳邑)은 광양(光陽) 춘색(春色)이 팔도에 왔네.
곡성(谷城)의 묻힌 선비 구례(求禮)도 하려니와
흥덕(興德)을 일삼으니 부안(扶安) 제가(齊家) 이 아닌가?
호남(湖南)의 굳은 법성(法聖) 전주(全州) 백성(百姓)거느리고
장성(長城)을 멀리 쌓고 장수(長水)를 돌고 돌아
여산 석(礪山 石)에 칼을 갈아 남평루(南平樓)에 꽂았으니
삼천리(三千里) 좋은 경(景)은 호남(湖南)이 으뜸이라.
거어드렁 거리고 살아보세.
*호남가 가사 해설*
모두가 함께 어울려서 평화(咸平/함평)롭게 살아가는 좋은 세상(天地/천지)에
최고 어른이(늙은 몸) 광명한 고향(光州/광주)을 보려하고
온 백성을 구제(濟州/제주)하는 큰 배(어선/漁船)을 빌려 타고
남쪽지방(海南/해남)으로 건너 갈제, 아침에 돋는 해(興陽/흥양)는
보배의 땅(寶城/보성)에 비쳐 있고, 높은 산(高山/고산)의 아침 안개는
신령한 바위(靈岩/영암)에 둘러 있네.
인자(泰仁/태인)하신 우리 성군(聖君) 예의 바르고 즐겁게 살아가는
예악(禮樂) 세상을 크게 일으키니 장흥(長興) 삼정승 육판서(三台 六卿)는
하늘의 뜻(順天心/순천심)을 따르고 지방의 모든 수령(方伯守令)들은
백성을 편안(鎭安/진안)하게 다스리는 구나.
탁 트인 언덕(高敞/고창)에 높이 앉아 삼라만상(森羅萬象) 펼쳐진(羅州/나주),
좋은 풍경을 바라보니 산들은 높이 솟아 구름 위에 떠있고(萬丈 雲峰/만장 운봉),
병풍같이 두른 층층(層層) 산은 겹겹(益山/익산)이 쌓여 있네.
백리(白里) 담양(潭陽), 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큰강(萬頃/만경)되니,
용담(龍潭/현재 댐이 건설되었음)의 맑은 물은 용(龍)이 살던 곳이 아니련가.
비단같이 고은 마을(綾州/능주)에 붉은 꽃(현재 복숭아 재배단지임)이
만발하니 금수강산(錦山/금산)이라.
남원(南原)에 봄이 깃들어 각색(各色) 화초(花草/춘향제), 무성(茂長/무장)하니,
나무나무 열매맺고(任實/임실), 가지가지 구슬같은 과실(玉果/옥과)로다.
미풍양속(美風良俗)은 평화롭고 순직(和順/화순)하며,
인심(人心)은 모두가 기쁨이 넘치(咸悅)는데,
선경(仙境)에 피는 꽃(異草/이초)은 울긋불긋 피어(茂朱/무주)있고,
상서로운 기운(瑞氣/서기)은 신령스런 빛(靈光/영광)이 피어나는 구나.
태평(昌平/창평)한 좋은 세상에 편안하기 힘을 쓰니(務安/무안),
사농공상(士農工商) 온 백성이 즐거웁게 사는 (樂安/낙안)구나.
부자(父子)는 자효(慈孝)하고, 형제(兄弟)는 우애(友愛)하니,
한핏줄 한 뱃속(同福:腹/복)이로다.
활기넘친 나룻터(康津/강진)에 떠나가는 장삿배(商賈船/상가선)는
보배섬(珍島/진도)을 찾아가니 골짜기마다 금밭(金溝/금구)이요.
캐어내니 금무더기(金堤/김제)로다.
농사하는 우리 농부 비옷(臨陂蓑依/임피사의)을 둘러 입고,
우물 좋은 마을(井邑/정읍)에서 사이좋게 농사지어(井田法;아홉구역으로
나누어 지음), 좋은 곡식만 골라내어 나라에 바치니(納稅),
순박하고 고운 인심 서로서로 어울려서 번창하게(淳昌/순창) 사는 구나.
옛동산(古阜/고부)에 홀로 앉아 버들피리 불어대니 연푸른 버들가지
(楊柳色/양유색) 아름답게 빛을 내니(光陽/광양),
푸르른 봄기운(春色/춘색)이 팔도(八道)에 퍼져가네.
심산유곡(深山幽谷) 산골(谷城/곡성)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은
예의를 구(求禮/구례)하고,큰 덕을 일으키니(興德/흥덕)
서로돕고 의지하는 편안하고 즐거운 가정(扶安齊家/부안제가)이 아니련가.
우리 호남(湖南)의 굳고 바른 거룩한 정신(法聖/법성:단오제)으로
온 백성(全州) 거느리고 만리같은 성(長城)을 쌓고,
긴강(長水/장수)으로 둘러치고, 숫돌(礪山石/여산 석)에 큰 칼을 갈아들고
남녘땅 지키려고 남평루(南平樓)에 올라보니,
팔도(八道)의 좋은 경(景)은 호남(湖南)이 으뜸이라
거어드렁 거리고 지내보세
호남가(1930) - 임방울
제목 :호남가 (남도단가)
가수 :임방울
앨범 :(1930) 임방울 - 호남가/쑥대머리
咸平天地 늙은 몸이 光州고향을 보랴허고,
濟州漁船 빌려 타고 海南으로 건늬갈적,
興陽으 돋은 해는 寶城으 비쳐있고,
高山으 아침 안개 靈岩을 둘러있다.
泰仁하신 우리聖君 醫藥을 長興하니,
四八六卿 順天心은 方伯守令으 鎭安郡이라.
高敞城에 높이앉어 羅州風景 바랴보니,
萬丈雲峰이 높이 솟아 層層한 益山이요.
백리潭陽 흐르는 물은 굽으굽으 萬頃인데.
龍潭으 맑은 물은 이 아니 龍安處며,
綾州으 붉은 꽃은 골골마당 錦山이라,
南原으 봄이 들어 各色花草茂長허니,
나무나무 任實이요, 가지가지 玉果로다.
풍속은 和順이요, 인심은 咸悅인디,
醫草는 茂州허고 西海는 靈光이라.
昌平한 좋은 세상 務安을 일삼으니,
士農工商의 樂安이요,
父子兄弟 同福이로구나.
康津으 商賈船은 珍島로 건늬갈적
金溝의 金을 일워 쌓인게 金堤로다.
農事허든 沃溝백성 臨陂簑衣가 둘렀으니
아니 놀고 뭐슬 할 끄나 거드렁 그리고나
'판소리계 최고의 로맨티스트' 임방울 명창(1904년~1961년)을 소개하겠습니다.
임방울 명창은 을사보호 조약을 맺기 1년 전인 1904년에, 전남 광산군 수성마을에서 아버지 임경학씨와 어머니 김나주씨의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세습 예술가 집안이었고, 본 이름은 승근인데 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크라고 방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외삼촌이자 국창이라 불리던 서편제의 김창환 명창에게 기초를 닦았고, 자라면서 여러 명창들에게 배운 뒤, 15세 무렵에는 동편제의 유성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성질이 급하고 괴퍅해서 어린 임방울은 기다란 담뱃대로 머리통을 수도 없이 얻어 맞았다고 합니다. 같이 공부하던 여자애들을 맨발로 북 위에 한 시간씩 세워두기도 했다니, 제가 연기했던 「서편제」의 유봉보다 더 지독한 선생님이었나 봅니다.
임방울은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면서도 슬픈 느낌을 주고, 고음과 저음이 시원시원하게 터져나오고, 어떠한 경우에도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 좋은 성대를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 변성기를 맞아 소리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자 골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연습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가 무덤가에서 하루종일 소리공부를 하는데 원하는 소리가 죽어도 안나오자 "마마(천연두)에 걸리면 목이 트인다는데 마마나 걸려라!"하고 소원을 빌었더니 과연 천연두에 걸려서 소리가 트이고, 그 대신 얼굴이 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이처럼 소리 공부에 전력을 기울인 뒤, 그는 대명창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스물을 갓 넘은 1925년 9월, '조선명창연주회'가 매일신보사 주최로 열렸습니다. 명창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관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먼저 그의 외삼촌인 김창환 명창과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들이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라 소리를 했습니다.
그뒤를 이어 무릎 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땅딸막한 키에, 약간 얽은 데다가 별로 잘생기지 않은 얼굴의 임방울이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판소리 「춘향가」 중 <옥중가(獄中歌)>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노래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 간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목에 칼을 쓰고 산발한 머리가 마치 쑥대처럼 생겼고, 얼굴은 창백하게 귀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쑥대머리 귀신형용'이란 충격적인 가사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참혹한 지경에서도 일편단심 사랑하는 님을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이 너무도 절실하게 묘사된 명곡입니다. 오페라로 치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나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같은 대표적인 아리아인 것입니다.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는 통성에 약간 쉰듯 칼칼하게 터져나오는 수리성을 섞어, 춘향이의 비통처절한 심정을 애절하게 토해내는 임방울의 판소리는 단박에 청중을 휘어잡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춘향이의 심정이 절망적인 시대의 정서와 어울어지면서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이 된 <쑥대머리>인 것입니다.
그 공연 이후 임방울은 하루 아침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콜럼비아 레코드나 빅터 레코드나 OK 레코드와 같은 유명 음반사가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출세작 <쑥대머리>가 실린 음반은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가, 각 음반사마다 12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습니다.
그후 1930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임방울은 본격적인 소리꾼으로 나서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즈음, 광주의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 준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임방울이 소년시절에 광주의 부잣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는데, 그 집에 동갑내기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다. 소녀와 소년은 철부지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가 반대하는 통에 소년은 그 집을 떠나야 했고, 소녀는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후 소녀의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고, 광주에서 송학원이란 요릿집을 차리고 예명을 김산호주로 지은 소녀는 광주 유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명창이 되어 돌아 온 임방울과 여주인 김산호주가 십여년도 훨씬 흐른 뒤에 해후를 한 겁니다. 그동안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두 연인은 곧바로 불같은 사랑을 불태웠습니다.
임방울은 2년 간 송학원의 내실에 숨어 살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세상에서는 임방울이 잠적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전속계약을 한 OK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습니다.
미색이 빼어났던 김산호주는 천하명창 임방울을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 숨겨 놓은 채,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임방울은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토록 기름졌던 목소리가 탁해지고, 고음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고, 소리를 조금만 질러도 땀이 뻘뻘 나는 것이었습니다.
대경실색한 그는 어느 날, 산호주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지리산으로 떠나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토굴에 숨어 살며 소리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임방울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미칠듯한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천지사방을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임방울의 행방을 알아 낸 산호주는 임방울이 소리공부를 하는 토굴 앞에서 만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임방울은 끝내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집으로 돌아 온 산호주는 임방울을 애타게 그리다가 병이 깊어져, 마침내 30세도 안된 꽃 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산호주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임방울은 죽어가는 애인을 가슴에 껴안고 슬피 울며 즉석에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추억>이라는 노래입니다.
10여세부터 여러 스승으로부터 '서편제'와 '동편제'를 모두 사사받아 자신의 고유한 가풍을 수립한 전설적 명창 임방울.
민족사의 흐름에서 가장 불행했던 시기이자, 판소리 역사에서 가장 시련과 수난이 많았던 일제 침략기에 민초들의 한을 노래한 명창 임방울.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 같은 선배 가객들처럼 조선시대의 벼슬 하나 지낸 바 없고, 후배 명창들처럼 인간문화재로 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불운한 시대의 진정한 광대 임방울.
평생 양복 입기를 싫어하며 흰색 한복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소외된 민초들의 아픔을 위로해주던 아름다운 가객 임방울.
공연 때 마이크 쓰기를 꺼려 했고, 입에 발린 공치사나 돈 받기를 외면했으며, 번돈은 불우한 이웃에게 아낌없이 써버려 유족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은 풍류남아 임방울.
조선왕조가 저물어가는 때에 태어나 민족사의 혼란 속에서 유랑의 생애를 마친 임방울은 우리의 비극적 시대를 대표하는 명창이었습니다.
그의 출생지인 광주시 광산구 송정공원에 세워진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