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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 스크랩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 (2)
思庵 황윤진 추천 0 조회 203 16.10.07 02: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백두대간 영주땅 마락리, 골짝마다 사과밭 들어서
우리마을 탐방[2] 단산면 마락리
[463호] 2014년 03월 21일 (금) 10:37:27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 마을 전경
   
▲ 80년대 초까지 사람이 살던 옛집


한때 400여 명 살았지만 현재 20여명 거주
서로 의지하며 과수원, 블루베리 농장 등 운영

단산면 마락리는 경상북도 북쪽 땅의 끝에 위치해 있다. 소백산맥 분수령을 넘어 강원, 충북 두 도의 틈새에 있어 영남의 고도(孤島.외로운 섬)라 할 만큼 백두대간을 넘어 영북(嶺北)에 떨어진 동네이다.영주에 살면서 마락과 고치령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 그 곳에 가본 사람은 많지 않다. 수년 전 필자와 고치령 넘어 마락까지 동행한 50대 한 지인은 “와! 어릴 적부터 말로만 듣던 마락에 왔다”며 감격했다.

영주땅의 물이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하면 의아해 할 것이다. 실제 고치령을 넘어 마락리의 물은 의풍과 김삿갓묘 앞 그리고 영월을 지나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조선시대 때 팔도의 물이 한강으로 모여들게 하기 위해 경계를 그렇게 했다는 설이 있다.

마락리로 가는 길은 단산면사무소가 있는 옥대1리를 벗어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우측은 부석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 가면 금대(옥대3리), 모산(옥대4리), 단산저수지를 지나 좌석리에 이른다. 좌석 삼거리에서 좌측은 원좌석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 계속 숲길을 오르면 고치령 정상에 산령각이 나오고 이 재를 넘으면 마락리이다. 마락리는 고치령이 있어 유명해 졌고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지난 5일 마락를 찾아 이 곳 사람들로부터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를 들었다.

   
▲ 80년대 초까지 사람이 살던 옛집

▲ 마락의 유래 = 고치령 정상 표석에는 “신라 때 이 고개 아래에다 대궐터를 잡으면서 옛고개라 부르다 차차 변하여 고치령이라 하였다”라고 안내되어 있다. 아마도 ‘옛고개’를 한자를 붙여 고치(古:예고, 峙:언덕치, 고개치, 재치)라 부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치령 옛길은 남녘에서 강원도 영월과 충북 영춘 지방으로 통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구전에 의하면 이곳은 옛날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이 있었는데 하루는 상인이 말에 짐을 싣고 이곳을 지나다가 갑자기 몰아닥친 광풍으로 말이 절벽에서 떨어졌으나 죽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기하게 생각했으며 말이 굴러 떨어졌다하여 말굴이라 불렀는데 한자를 따서 붙이니 마락(馬落)이 됐다고 한다. 또 조선 초기 순흥에 유배돼 있던 금성대군과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 사이를 왕래하던 밀사가 말에서 떨어진 곳이라 하여 마락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어 말과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 진봉선 할머니 가게

▲ 마락 사람들의 옛 이야기 = 마락리는 고치령에서부터 칠목, 새목, 큰터, 마주바위, 섶밭, 동편 골짜기의 법수, 도화 등 마주바위를 중심으로 모두 일곱 뜸으로 나뉘어 있으며 맨 아래 뜸인 섶밭 구역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계점이다. 현재 이 마을에는 23가구에 26명이 살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 14가구에 20여명이 겨울을 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마락리 김진철(76) 이장은 마락에서 태어나서 아이들 교육 때문에 20여 년 간 용인에 가서 직장생활하다가 귀향해서 살고 있다. 김 이장은 “1977년부터 1980년까지는 이 마을에 85가구에 400여명이 살았으며 마락분교(1964-1991) 학생도 80명 정도됐다”며 “이후 산업화가 되자 대부분 도시로 떠나고 마을이 텅 비게 됐다”고 말했다.

김 이장의 부인 권상임(75) 씨는 단산면 병산3리(젓돌)에서 태어나 단곡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마락으로 시집왔다고 한다. 김 씨는 딸 여덟을 놓고 아홉 번째 아들을 낳았는데 당시 고생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딸들은 모두 병원 한 번 안 가고 잘 컸는데 아들은 약하고 자주 아팠다. 여기서 병원에 가려면 아이를 업고 고칫재(고치령)를 넘어 단산까지 30리 길을 걸어가 단산에서 버스를 타고 영주에 갔다”며 “당시 영주기독병원 원장님이 우리 아들을 살려줘서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그 아들이 지금 31살로 키도 크고 튼튼해 졌으며 작년에 장가보냈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딸 둘을(맏딸 현재 55세) 단산중학교에 보냈는데 통학이 안 되니 학교 인근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교육시켰다. 그러다 보니 ‘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아이들 교육을 위해 도시로 나가게 됐다”며 “그렇게 키운 딸들이 얼마나 잘 하는지 이제 딸들이 집도 새로 지어주고 해서 덕분에 호강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구멍가게를 하면서 오가는 길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진봉선(86) 할머니의 가게는 문이 굳게 잠겨 있다. 딸 다섯에 아들 둘인 진 할머니는 겨울은 아들집에서 나고 봄이 오면 다시 오신다고 한다.

   
▲ 블루베리 농장댁
   
▲ 블루베리 단풍

▲ 새롭게 변모하는 마락리 = 김 이장댁에서 나와 김왕준(65)·강복순(57)씨가 경영하는 블루베리 관광농장으로 갔다. 덩치가 큰 개 두 마리가 손님을 맞이했다. 김 씨 부부는 10여 년 전 이곳에 와 블루베리 재배에 성공해 대규모 블루베리관광농장을 조성했다고 한다. 김 씨 부부는 “소백산록 중턱 천혜의 자연조건에서 무농약 재배를 성공했다”면서 “전량 생식용 웰빙 기능성 과일로 출하하고 있으며 그 수요가 점차 확대되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 수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 과수원 확장 작업 중에 만난 최종근 씨와 김현곤 씨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산전(山田)을 일구며 살았던 마락리가 지금 분명 변하고 있다. 뚜렷한 변화는 사과 농사의 북상으로 마락리가 온통 사과밭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람 만나기는 참으로 힘든 곳이다. 마침 사과농장 확장 작업을 하다가 점심식사를 하러 집에 오고 있다는 최종근(51) 씨와 김현곤(47) 씨를 만났다.

   
▲ 임영근 씨 과수원

이들을 따라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니 드넓은 과수원이 나타났고 지붕이 뽀족한 양옥집도 있다. 최종근 씨는 “기후 변화로 사과 농사가 점점 북상하고 있다”며 “마락리 임영근 씨가 경영하는 이 과수원은 1만평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수익도 1억 5천만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곤 씨도 “마락도 이제는 골짝마다 사과밭으로 변하고 있으며 땅이 모자라 의풍리 쪽으로 점차 내려가면서 확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 변화로 사과농사가 북상해 강원도로 간다더니 그 예상이 실감나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그 외에도 계곡과 골짜기를 개간해 수 천평의 오미자 농장이 새로 생겼고 새마을시대의 집은 헐리고 별장 같은 예쁜 집들이 들어서고 있다.

▲ 마락리 일꾼 박경학 씨 = 옛 마락분교장과 진봉선 할머니 가게 사이로 난 길을 조금 오르면 장작담장으로 둘러쌓인 집이 박경학(49)씨 집이다. 박 씨는 이 마을 반장이면서 어렵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한다고 김진철 이장이 칭찬했다.

눈이 많이 오는 마락은 고치령이 막히면 고립된다. 그래서 박 씨는 눈 온 날이면 새벽같이 트렉터를 몰고 고치령으로 향한다. 그는 마락에서 고치령을 넘어 좌석리까지 눈을 친다고 하니 그의 수고는 입이 닳도록 칭찬할만하다. 뿐만 아니라 마을의 농기계 수리를 비롯 보일러, 전기, 수도 등 크고 작은 일은 모두 박 반장이 해결한다고 하니 ‘약방에 감초’ 같은 일꾼이다.

   
▲ 고치령 산령각, 단종과 금성대군의 신위를 모신 서낭당

▲ 고치령 산령각 = 고치령 산령각은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에서 마락리로 넘어 가는 고갯마루 정상에 남서향을 하고 있다.고치재는 순흥에 유배됐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端宗)의 귀양지인 영월로 다니는 길목이었다. 산령각은 15살에 왕위를 빼앗기고 17살에 죽임을 당한 단종 임금을 태백산 신령으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희생된 금성대군을 소백산 신령으로 모시고 있다.

제사는 고개 넘어 첫 마을인 마락리 새목마을에서 매년 정월대보름 새벽 즉 14일 밤 자정에 올린다. 1950년 화재로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1966년에 중건했으며 2001년 4월 또 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없어진 것을 2004년 중건했다.

   
▲ 고치령 넘어 계곡에 최근 조성한 오미자 농장

▲ 고구려 장수왕과 신라 소지왕이 힘겨루기 한 고치령 = 영주의 고대사(古代史)를 연구했던 고 최현교(2007 작고) 선생이 고서(古書) 속에서 찾은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장수왕은 481년 고치령으로 신라를 침공했는데 고치령 협곡을 지나던 고구려군은 당시 모산성을 지키던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기습공격을 받고 전멸하다시피 퇴각했다고 한다.

분함을 참지못한 장수왕은 8년 뒤 마구령(부석-남대)으로 침공해 신라군을 무너뜨리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철탄산 뒤쪽 성재에서 신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 3개월에 걸친 전투 끝에 승기를 잡은 장수왕부대는 경북 청송까지 밀고 내려갔다고 전했다.

삼국사기 소지왕 11년(489) 기록에서「가을 9월 고구려가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戈峴)에 이르고 겨울 10월 호산성(狐山城)을 함락하였다」라고 적고 있어 믿음이 가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신라 소지왕(479~500)은 21대 왕으로 소백산을 국경으로 대치하고 있던 내이군(영주의 옛이름)에 순시하러 왔다가 당시 내이군의 통치자였던 파로의 딸을 선물 받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당시 소지왕은 예순이 넘은 나이였고 벽화는 열여섯 살 난 어린낭자였다.

이원식 프리랜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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