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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 말고 여자 바위꾼은 얼마나 만들어졌을까…
기계로 찍어내듯 바위꾼을 단번에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산을 배우기 위해서는 정확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건강을 위해, 친목을 위해,
이런저런 이유를 달지 않고서도 산을 찾는 사람,
오히려 산을 오르기 위해 공부하고 체력을 키우고 자기 생활을 절제하는 사람.
이제 막 바위를 사랑하게 된 여자 바위꾼인 나도 그런 선배들을 쫓고자 한다.
나는 이미 매듭과 슬랩 등반, 확보와 하강법을 배웠다.
그러나 선배들은 “이제까지 아무리 잘했어도 크랙만큼은 쉽지 않을 텐데…”라면서
오늘의 크랙등반 교육만큼은 우려를 했다.
오늘 과연 내가 비명을 지를 것인가.
크랙 등반은 여자 바위꾼 만들기 코스의 ‘크럭스’인 셈이다.
단지 바위를 오르는 기술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늘 한자리에 있어도 오를 때마다 새로워지는 산,
단지 다리 품을 팔아 오르는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거친 호흡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산이 만나 어우러져 다시 태어나는 산.
바위꾼이 되고자 하는 내가 배우고 오를 산은 그런 산이다.
도선사 매표소에서 하루재를 지나 인수 야영장까지,
나는 이 길을 두번째 오른다.
“아는 길이라 그런지 처음 보단 힘들지 않아요.”
아는 것이 정말 힘을 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전날 내린 비로 축축한 기운이 대기를 짓누르고 있어서
오히려 산행하기에는 힘든 날이었다.
끈적끈적하고 더운 땀이 비처럼 옷을 적신다.
인수 산장 뜰에서 잠시 땀을 식힌다.
“저게 박달나무 꽃이에요.
옛날에 산악인들이 우든 펙(wooden peg)을 만들기 위해 많이 심었어요.”
선배가 가리키는 나무에는 초록빛이 도는 소박한 흰 꽃잎들이
바람에 물기를 떨어내고 있었다.
홍두깨나 윷의 재료로 쓰이는 단단한 목재인 박달나무는
하켄을 쓸 수 없는 곳에 박아 확보물로 쓰는 요긴한 나무였다.
나무를 쪄서 말리고 아마인유를 칠해서 만들었다는 장비는
싸늘한 금속장비의 긴장감과는 또 다른 느낌이 전해졌다.
‘확보물 설치와 크랙 등반’ 교육을 앞두고 만나 더욱 반가웠던 박달나무를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인수봉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인수봉 동쪽, 취나드B 코스에 이르기 직전
경기고등학교 산악부에서 세운 추모비 하나를 만났다.
“등반하다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에요.”
인수봉 등반 도중 목숨을 잃은 사람들..
그들을 추모하는 비석과 동판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선배의 설명에 나는 묻는다.
“그럼, 여기가 인수봉이에요?”
일순간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여태 그걸 몰랐단 말이에요.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정상에 올라갈 사람이…”
비지땀을 쏟으며 무작정 선배들의 걸음을 쫓아가기 바쁜 새내기에게
나무는 보여도 숲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크랙과 확보물, 궁합을 맞춰라
취나드B 코스의 출발 지점에서 확보물 설치요령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3년 전, 확보물을 설치하지 않고 등반하다 80미터를 추락한 사망 사고가 있던 곳이다.
희부연 바위 위로 붉은 피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는 선배의 목격담은
교육에 앞서 들뜬 새내기인 나를 잔뜩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죽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이 던지는 ‘곤란’한 문제를 온몸으로 부딪혀 시원하게 풀어내고 싶을 뿐이다.
그 해답 끝에서 육체가 열리고 정신이 개화한다.
그것은 무모하게 ‘위험’을 즐기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말을 이야기하며 오늘의 교육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여성 바위꾼이 되고자 하는 나는 크랙에서 ‘살아남는 기술’을 배운다.
크랙은 바위가 타인을 받아들이는 문이다.
그 틈새로 솔씨가 날아들면 바위는 제 살을 깎아 아름드리 소나무를 키운다.
물방울이 흘러들면 허투루 떨구지 않고 골골이 모아 내려 샘으로 계곡으로 물을 모은다.
또, 클라이머에게는 하늘을 향해 오르는 길을 내준다.
그 미세한 틈새에 손과 발을 끼워 넣으면 벼랑 위로 더 높은 곳을 향해 문이 열린다.
다양한 장비가 개발되기 이전에는 대부분 크랙을 따라 등반이 이루어졌다.
최근의 개척 등반 역시 크랙을 주로 이용한다.
바위 틈새에 손과 발을 끼워넣고 비틀면 수직의 세계로 오를 지지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 바위를 파괴하지 않고도 확보물을 설치할 수 있는
환경친화적인 장비들을 만들어 낸 길이기도 하다.
틈새가 없어 볼트 같은 폭력적인 확보물을 설치해야만 하는 슬랩의 밋밋함에 비해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기술이 필요한 변화무쌍한 길이다.
그러나 그 만큼 육체의 고통이 뒤따른다.
크랙 등반을 일명 ‘노가다길’이라 부르는 이유가 거기 있다.
크랙 등반은 기술에 앞서 정확한 장비 사용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올라가는 기술은 뛰어나도 확보물 설치법을 제대로 익힌 사람들은 많지 않아요.”
선배는 실제로 최근 확보물 설치 미숙으로 인한 등반 사고가 눈에 띄게 늘었다며
오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확보물은 안전을 위한 자기 방어 장치예요.
잘못 설치한 장비는 아예 설치하지 않은 것만 못해요.”
선배의 안전벨트에 주렁주렁 매달린 너트와 프렌드 같은 초크장비들이
드디어 나의 손에 건네졌다.
크랙의 크기에 맞는 쐐기형 초크를 정확하게 골라 끼워 넣는 일,
SLCD(Spring Loaded Camming Devices)류 장비의 스프링을 적절하게 당겨
바위 틈새에 캠의 톱니를 맞물리는 일 등…
확보물 설치는 장비와 크랙이 잘 맞물려 확보물이 빠지지 않도록 궁합을 맞추는 기술이다.
“어린애한테 어른 옷을 입힐 수는 없지요? 크랙과 확보물도 마찬가지예요.”
몸에 맞지 않는 옷은 볼품이 없을 뿐이지만
크랙에 맞지 않는 확보물은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부른다.
선배의 시범을 주의 깊게 살핀 나는 크랙의 크기에 맞는 너트와 프렌드를 골라
바위 틈새에 끼워 보고, 힘껏 당겨 그 지지력을 확인한다.
“확보물은 쉬운 곳에서부터 미리미리 설치해야 합니다.
정작 어려운 곳에 이르러서는 힘이 빠져 제대로 설치하기가 힘들어요.”
쉬운 곳이라도 절대 자만하지 않고 차근차근 모든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확보 장비는 반드시 등반의 고빗사위에 다다르기 전에 설치하고
특히 초반에는 충분히, 그리고 높이 올라가면서 점차 그 빈도를 줄여 나가야 한다.
신속하게 크랙의 크기에 맞는 확보물을 선택해
등반 방향과 추락 방향에 따라 확보물이 빠지지 않도록 정확하게 설치하고
그 시기와 양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일…
크랙 등반은 매순간 정확한 계산과 결단이 필요하다.
출발!
선배는 취나드B 코스의 출발 지점을 레이백 자세로 등반을 시작한다.
선배의 지도 아래 나는 선등자 확보를 한다.
숙련된 선배의 등반 속도에 맞추어 줄을 푸는 일은 여전히 나에게는 버겁다.
“선등자가 등반하는 모습을 잘 지켜보세요.
출발하기 전에 자기가 등반할 코스를 머릿속에 환하게 그리고 있어야 해요.”
이제 내가 오를 차례다.
“손은 당기고 발은 밀고… 팔을 쭉 뻗어서 뼈로 매달리세요.
근육을 쓰려고 하면 금세 지쳐요.”
선배의 지시대로 가뿐하게 레이백으로 크랙을 뜯으며 올라간 나는
일단 크랙 상단에 프렌드 하나를 설치한다.
다음은 손과 발을 크랙 속에 끼워 넣고 힘껏 비틀어야 하는 재밍 기술이 필요한 곳이다.
“발가락에서 우지직 소리가 날 때까지 비틀어요.
내 손, 내 발이 아니라 생각하고 사정없이 비틀어야만 힘이 생겨요.”
크랙 등반의 손과 발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선배의 설명이 이어진다.
“산에서 손끝 하나 안 다치고 곱게 내려가겠다는 건 도둑놈 심보예요.
긁히고 피나는 걸 두려워해선 안돼요.”
크랙 속에 손을 넣고 팔목을 힘껏 비틀어 당기지 않으면 그대로 미끄러져 내린다.
팔을 당기며 동시에 다리를 들어 올려 크랙 속에 발을 끼워 넣는다.
왼발을 끼워 넣으면 바로 오른 다리를 들어올린다.
동작 하나 하나에도 계산이 필요하다.
움직이는 동시에 다음 동작을 가늠해야 한다.
변화무쌍한 크랙 등반에선 온몸으로 계산해야 한다.
또한 사람마다 체격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선등자가 주먹을 끼워 재밍한 곳이
후등자에겐 팔 전체 또는 어깨를 끼워 넣고 지탱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매 순간 크랙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몸을 맞추어야 한다.
평소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손과 발이
일상의 용도와는 전혀 다른 도구로 쓰인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지만 크랙등반은 인간의 몸을 오름짓의 도구로 쓴다.
“더 편하고 재미있어요.”
나는 이것저것 몸을 의지할 것이 많고
계속 새롭게 대처해야 하는 크랙 등반에서 훨씬 흥미를 느낀다.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합시다. 여기처럼 만만치는 않을 거예요.”
크로니길 우측 크랙으로 자리를 옮겨 교육이 이어졌다.
“오른발 끼우고 왼발 올리고!”
손동작 발동작 하나 하나에 선배의 지도가 따르는데도
팽팽하게 곧추 선 벽에서는 오른쪽 왼쪽도 분간하기 힘들다.
또 크랙에 낀 발이 빠지지 않아 애를 먹기도 한다.
아, 나는 진이 빠진 모양이다.
머리를 묶었던 고무줄도 느슨해져 이내 춤을 추듯….
결국 나는 추락했다.
고통만큼 보답하는 길
바위 틈새로 비틀어 넣은 손등에 화강암의 거친 돌기가 파고든다.
살갗이 까지고 피가 맺힌다.
매니큐어를 바르고 자판을 두드리고 우아하게 스타벅스 커피잔이나 들던 희고 고운 손을
기꺼이 거친 모험의 세계에 던진 나, 여자 바위꾼.
그 고통 끝에는 눈부신 보답이 있다.
높은 바위 턱 너머… 하늘이다.
오르자. 우리는 허공으로 간다.
완료!
나는 크로니길 우측 크랙의 한 피치 등반을 힘겹게 마쳤다.
어느새 비구름들이 다시 인수봉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는 하강하고 구름도 산허리로 내려온다.
“옛날에 우린 군용 워커를 신고 길을 개척했어요.”
교육을 마친 선배는
요즘 슬랩 등반은 실력(實力)보다는 ‘신력(신발의 힘)’이 크게 작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바위에 착착 달라붙는 암벽화 창 앞에
자신감을 가지면 가볍게 춤을 추듯 오를 수 있는 슬랩과 달리,
크랙 등반은 온몸을 바위틈에 구겨 넣고 짓이기는 고통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 여자 바위꾼은 오늘 그 고통을 ‘달게’ 받았다.
산길을 내려오니 인수봉은 이미 구름 속에 숨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어느 늦여름날
초보 여자 바위꾼은 비지땀을 쏟으며 인수봉 끝자락을 올랐다.
왜?
인수봉이 거기 있으므로.
첫댓글 크랙 등반의 과정을 여성의 눈으로 세심하게 그리고 있군요 .... 감칠 맛 나는 글솜씨로 말입니다.
아~~~ 무식하게 제 힘만 믿고 덤벼들었던 제가 참으로 작아보입니다, 다시금 마음을 정렬해야겠읍니다,감사합니다
작은 절 추스려 봅니다. 여자 바위꾼의 열정에 찬사를...퍼오신 분께 감사를드려요. 엉켜있는 머릭속에 끝자락을 찾은 것 같다가도, 잡아당겨보면 끝없이 엉켜있는 실타래가 되곤 하는 제 분수에 따끔한 회초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