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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5.29
중국과 러시아
▲ 지난 16일 베이징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를 하고 있어요. /AFP 연합뉴스
최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베이징을 방문했어요. 집권 5기를 시작한 푸틴의 첫 외교 행보에 많은 이목이 집중됐죠. 시진핑은 "새로운 여정에서 중국은 언제나 러시아와 함께 서로 신뢰하는 좋은 이웃, 좋은 친구, 좋은 동반자가 될 용의가 있다"고 말하며 친분을 과시했어요. 두 지도자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양국 간 경제 협력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대해 논의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와 중국은 오랜 세월 동안 복잡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요. 양국은 정치·경제·군사적 이해관계 속에서 때로는 협력적이고, 때로는 적대적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을 통해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를 살펴볼게요.
첫 공식 만남
양국의 첫 공식 만남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7세기 중반부터 러시아는 헤이룽강(아무르강) 지역 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청나라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죠.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점령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한족 장군 출신 등이 일으킨 삼번의 난(1673∼1681)을 진압하느라 러시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국내 정세가 안정되자 청은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어요. 1685년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는 러시아가 구축한 알바진 요새 공격을 명령했어요. 만반의 준비를 한 청나라 군대의 공격에 러시아군 피해가 커지자 러시아 정부는 황급히 강화(講和)를 제안해요. 이렇게 1689년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습니다. 이 조약으로 양국은 헤이룽강과 우수리강 유역이 청나라 영토임을 재확인하고 양국 간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알바진 요새를 공격한 청나라 군인들은 러시아인들을 포로로 잡았었는데요. 이들 중 일부는 베이징에 정착해 살면서 황실 근위대로 기용됐어요. 이들은 급여를 받으며 청나라 여성과 결혼하기도 했지요. 정착한 러시아인들의 종교 활동을 위해 베이징에 러시아 정교회가 세워지기도 했는데요. 베이징의 교회는 러시아 정부를 대신해 외교 심부름을 하는 등 러시아 대사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청나라, 러시아에 연해주를 넘겨주다
19세기 중반 1차 아편 전쟁을 끝내기 위해 영국과 난징 조약을 맺은 청나라는 이후 서구 열강의 개항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영국은 난징 조약으로 청나라가 개항한 항구 5곳에서 무역 이익이 생각만큼 늘어나지 않자, 청에 추가로 개항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영국은 1856년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다시 청을 침략합니다.
영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미국과 러시아의 지지를 받은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공세에 청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1858년 중국 톈진에서 항구를 추가로 개방하고, 외교 사절이 베이징에 주둔하게 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불평등한 조약에 합의하게 됩니다. 이 톈진 조약은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4국과 각각 맺은 조약이에요. 러시아는 혼란을 틈타 청의 전권 대사를 협박해서 아이훈 조약도 체결하는데요. 이 조약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뒤집는 것이었어요. 러시아가 헤이룽강 좌안(左岸)을 차지하고, 우수리강 동쪽의 연해주는 양국이 공동으로 관리한다는 내용이었죠.
그런데 톈진 조약에 불만을 가진 청나라 정부가 비준을 거부했고, 이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전쟁을 재개해 1860년 베이징을 점령합니다. 그 결과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와 각각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되는데요. 러시아는 청과 영국·프랑스 간의 강화를 알선해줬다는 명목으로 청에 자신들과의 조약 체결을 요구했어요. 그리고 이때 연해주 지역을 청으로부터 받아냈습니다. 러시아의 연해주 획득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러시아 함대 본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 잡게 되면서,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에요.
협력에서 갈등, 다시 협력으로 이어지다
중국과 러시아(당시 소련)는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부터 급격히 가까워집니다. 두 나라는 1950년 '중·소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경제·군사적 협력을 강화합니다. 이 조약으로 상호 협력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에요. 조약에는 "일본 혹은 일본과 연결된 외국에 의해 중국이나 소련 어느 한쪽이 침략을 받을 경우 서로 전력을 다해 원조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요. 이는 냉전 시기 미국을 의식한 것이었어요.
당시 마오쩌둥은 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는데요. 협상이 2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자 한동안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 인질로 잡혀있다는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갈등을 겪기 시작합니다.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에서 소련은 자본주의 진영과의 평화 공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중국은 이런 소련의 달라진 행보에 불만이 생겼죠. 사회주의 실현 등에 대한 두 나라의 견해 차이는 갈수록 심해졌고, 1969년 국경 지대인 우수리강에서 무력 충돌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국경 분쟁은 두 나라 사이에 심각한 긴장을 초래했어요. 당시 소련은 핵무기를 동원하는 계획까지 생각할 정도였죠. 하지만 그런 상황이 온다면 미국은 핵을 이용해 중국을 돕겠다고 경고하면서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게 됐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넘긴 두 나라의 관계는 1980년대 중반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개선되기 시작합니다. 고르바초프는 중국과 관계 회복을 주요 과제로 추진했어요. 그는 몽골 국경 지역에 주둔하던 소련군 일부를 철수시키는 등 지속적으로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런 움직임들을 통해 양국 관계도 점차 회복될 수 있었어요.
양국은 21세기에 들어선 안보와 경제 협력을 추구하는 사이로 나아갑니다. 2001년 상하이 협력기구(SCO)를 출범해 안보 협력 등을 강화했어요. 또 최근 몇 년간 두 나라는 에너지 협력과 무역을 중심으로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중앙아시아와 극동 지역에서의 영향력 경쟁 등 양국 사이에 여전히 여러 갈등 요소가 있다고 평가하기도 해요.
▲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 /위키피디아
▲ 중·소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조인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55년 7월 중국에서 발행된 우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오주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