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시 고만 쓸랍니다
<나의 시론을 이야기해야겠다. 시인은 위대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는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보라 윤동주의 ‘서시’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시인의 감성을.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시인 밖에 없다. 이 시를 쓰기 위해 얼마나 아팠을까. 아프지 않고는 절대 시가 쓰여지지 않는다.
김소월은 어떤가. 정말 쉬운 언어로 우리의 정서를 저렇게 잘 표현한 시인이 더 있을 수 있을까. ‘엄마야 누나야’라는 시를 보아라. 어려운 말이 어디에 한 단어라도 있는가. 너무나 쉬운 우리 말로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쓰지 않았느냐. 아! 소월은 위대하고 위대하다. 이 육사는 ‘광야’에서 태초를 이야기 하고 다시 천년을 약속하는 시를 썼다. 광야를 읽고 민족적 의식이 일깨워지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천치이거나 바보이다. 그의 ‘청포도’는 얼마나 절창인가. 신동엽은 초기작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에서 전 지구적 공간과 무한대의 시간을 노래하고 있다.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에서 그 짧은 내용 속에 한라에서 백두까지의 공간과 우리 민족의 始原에서 오늘날까지의 시간을 함축해 내고 있다. 시인만이 이런 작업이 가능한 것이다. 아! 신동엽 시인은 너무나 아파 요절했다. 우리 민족의 염원을 우리 민중의 희망을 혼자서 짊어지고 아파하다가 갔다. 아! 일찍 죽지 않을 수 없는 시인의 운명이여. 나는 시를 쓸 때의 아픔이 두렵다. 그 아픔이 너무나 두려워 시를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시란 산고의 아픔 속에서만 태어나는 것이니 나는 그 산고와 같은 아픔을 견딜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영원히 시를 쓰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도 내심 만약 내가 시를 쓴다면 누구보다도 절창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내 책장에 여기 저기 꽃혀 있는 시집을 모두 모으니 오십여권이다. 대부분은 지역 시인들에게서 얻은 것이다. 마음이 내켜 직접 구입한 시집도 있고 이런 저런 인연으로 내 손에 들어온 시집도 있다. 오십권 정도의 시집을 갖고 있고 그것도 건성으로 표지만 훑어본 처지에 시 작업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해보지도 않고 시 작법에 관한 책을 겨우 두권(시의 길을 여는 새벽 별 하나-김상욱, 도서출판 친구. 가슴으로도 쓰고 손 끝으로도 써라-안도현, 한겨레 출판) 읽고 감히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고 만약 내가 시를 쓴다면 대단한 절창이 되리라는 생각까지 갖고 있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 수 십년 전에 신동엽을 읽을 때는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시를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을 갖고 신동엽을 다시 읽으니 나의 삶이 부끄러워졌다. 신동엽을 읽으며 자신의 삶이 부끄러워 지는 것은 누구나 가지는 감정이리라. 신동엽 만큼 철저히 민족과 민중을 걱정하는 시를 쓴 시인이 있을까. 그래서 상대적으로 형편없이 나태한 자신의 삶이 부끄럽게 마련이다.
시를 쓰기에 너무 부끄러워 나 이제 시를 고만 쓸랍니다. 내가 시를 쓴다는 것은 처음부터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무명 저고리에 번쩍이는 브롯치를 다는 것 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처음 몇 편의 시를 쓰고 좋아라 읽고 또 읽고 혼자 감동하여 절창이라 한 것은 번쩍이는 갓을 쓰고 나선 격이다. 양복에 갓 쓴 줄도 모르고 갓 자랑만 하고 다니는 꼴에 다름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집. 1. 저 창살에 햇살이(김남주 옥중 시선집, 창작비평사). 2.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김용락 시집, 문예미학사). 3. 에피고넨의 노래(박원식 시집, 빛남). 4.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류시화 엮음, 오래된미래). 5. 교과서와 휴전선(곽재구 외, 제3문학사). 6. 할 일 없는 하루(김대열 시집, 두엄). 7. 창문 너머로(김윤현 시집, 그루). 8. 황토(김지하 시집, 풀빛). 9.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배창환 시집, 실천문학사). 10. 백석 시 전집(이동순편, 창비). 11. 신동엽 전집(창작과 비평사). 12. 포옹(정호승 시집, 창비). 13. 갠지스 강을 그리며(김대열 시집, 두엄). 14. 백석 전집(김학동 편저, 새문사). 15. 비소리(이재윤 시집, 시와반시). 16. 광야에서 부르리라(손병희 엮음, 이육사 문학관). 17.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배창환 시집, 창작과 비평사). 18. 나 하늘로 돌아가네(천상병 유고 시집, 청산). 19 풀밭의 담론(박진형 시집, 만인사). 20. 시간의 흰길(김용락 시집, 사람). 21.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시집, 자음과 모음). 22.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시집, 흑룡강조선민족 출판사). 23. 교단으로 돌아가면(정도원 시집, 사람). 24. 해직 일기(조영옥 시집, 푸른나무). 25. 거미울 고개(류근삼 시집, 삶이 보이는 창). 26. 시인의 생가(시 창작 교실 회원 작품집). 27. 백제 가는 길(시 창작교실 회원 시집). 28. 겨울나무는 외롭다(정도원 시집, 사람). 29. 사람들이 다시 그리워질까(김윤현 시집, 사람). 30. 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간다(이해리 시집, 나남출판). 31. 글마가 절마가(류근삼 민담시집, 사람). 32. 황새울(류근삼 시집, 문예미학사). 33. 사람만이 희망이다(박노해, 해냄). 34. 잠든 그대(배창환 시집, 민음사). 35. 개불란(류근삼 시집, 사람). 36. 백두산 놀러가자(배창환 시집, 사람). 37. 통일의 꽃씨, 민주의 불씨(해직교사 교육시집, 전교조대구지부). 38. 겨울 가야산(배창환 시집, 실천문학사). 39. 은령위의 장작불(김기문 시집, 한국시사). 40. 오월의 솔바람에 행복찾는 인생(이홍렬 시집, 북랜드). 41. 박목월(지식산업사). 42. 지금 우리들의 사랑이라는 것이(김시천 시집, 온누리). 43~51. 만인보 1~9(고은, 창작과 비평사). 52. 김수영 전집(민음사)
순서없이 손에 잡히는대로 시집을 늘어놓았다. 김남주의 시에는 진짜로 피와 칼이 들어있다. 시집을 여는 순간 칼의 날과 피의 내음이 내 정수리를 찔러온다. 박원식의 ‘에피고넨의 노래’에서는 이상(李箱)의 천재성이 엿보인다. 김대열의 ‘할 일없는 하루’와 ‘갠지스강을 그리며’ 두 시집에서 그의 바닥에 닿은 일상과 그로인해 깨달음에 이른듯한 초월이 보인다. 김윤현의 시집 속에서 참되고 바른 삶을 추구하는 이상과 현실의 삶에 대한 고뇌가 들어있다. 배창환은 온몸으로 시를 쓰고 온몸으로 산다는 느낌으로 시가 다가온다. 근본적으로 그는 이상주의자이며 실천철학자이다. 김용락은 가벼우나 버릴 수 없는 실체를 낚시로 낚아올려 형상화 해내는 재주가 있다. 정도원은 좋은 시를 위해 얼마나 고뇌하는지 보이는 시인이다. 류근삼 시인은 타고난 시인이다. 그가 만지면 모두가 시가 된다. 내가 김지하, 신동엽, 백석, 이육사. 윤동주, 고은, 박노해, 김수영을 어찌 평할 수 있으리요. 너무나 큰 그래서 실체를 볼 수 없는 거인이여 그대들 이름만으로도 나는 어지럼증이 생깁니다. 아 위대한 시인이시여.
아 시인들이여 그들의 아픔을 내가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지 모르겠소. 시 한편을 위한 시인의 고뇌를 내 어찌 알리요. 사실 시인을 그저 내키는대로 몇가지 단어를 가지고 보기 좋게 늘어놓는 솜씨 좋은 실내 장식가 정도로만 생각했고 나도 저 정도의 일은 손수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시인들의 시를 꼼꼼히 읽고 그들의 사랑과 희망 그리고 고뇌가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나니 아 이게 시인이구나 나는 영원히 이들과 어깨를 함께 할 수 없겠구나 시를 쓴 적도 없지만 쓸 엄두도 못내겠구나. 펜만 잡으면 시를 쓸수 있다고 한 자부가 너무나 부끄럽다. 운동장을 달리기만 하면 백미터를 10초 내로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10초 내로 달리는 사람들의 훈련 과정을 조금도 모르면서 영원히 10초내로 달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고, 참 가소롭구나 박지극이여. 신춘문예에 한번도 응모하지도 않고 아니 응모할 시 한편 써 두지 않았으면서 당선 소감만 마음에 새겨두는 어리석은 자여.
이제 시를 고만 쓰야할 것 같구나. 이제 시를 운운하지 말아야겠다. 감히 시를 말하다니 부끄럽다.
첫댓글 "사랑하면 시인이 된다." 플라톤이 한 말을 '고'대로 옮긴 것은 아니겠지만, 대략 플라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醉月형님만큼 모든 대상을 온전하게 사랑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제가 일찍이 못 보았는데, 어찌 시를 그만 쓴다고 하십니까. 시를 계속 줄기차게 쓰셔요. (물론 제가 여기서 말하는 '시'는 꼭 문학 갈래의 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변함없이 사랑해야지요, 사랑할 만한 대상은 여전히 있으니까요.
신문에 보니 고희림 시인이 문학상을 받던데, 시상식에 함께 가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요? 고희림 시인 문학상 받는데 당연히 축하해줘야지요. 내가 좋아하는 시인인데... 언제 어디입니까.
시상식은 12월 29일 오후 6시 대구문화예술회관 내 커피숍 아르떼에서 열린다.
醉月 형님, 시를 더 쓰이소. 형님만큼 시를 좋아하는 사람도 난 잘 못봤는데.. 형님은 이미 시인입니다. 시적인 삶이기도 하구요. 지금까지 겨우 몇 편 썼다고? 수 십편.. 아니면 수백 편... 앞으로 1,000편만 더 쓰이소.. 그래야 그 중에 정말 시같은 시, 몇 편 건질 수 있다는 자세로 시를 쓰이소. 신경림 시인은 시 한 줄 써놓고 천 번을 고친다는 얘기, 도종환 시인은 울면서 시를 쓴대요... 그래야 그 시 보고 남들도 운대요.. 몸 補身 잘 하십시오.
耳松 선생 말씀 참 고맙습니다. 힘내겠습니다.
선생님, 와 카십니까...제가 '잉여기와'를 시 창작 강의자료로 이미 널리 널리 사용했습니다..."이 시는 시인 박지극님의 시로서........." 어저구저쩌구...어쩌죠
아이쿠! 고 시인께서 여기를 들려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힘내 볼랍니다. 이렇게 응원의 말씀을 해주시니 말입니다. 잘 계시지요? 좋은 상 받으시는데 시상식날 한번 찾아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