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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에서 잡지를 만드는 일을 함께하며 인연 맺은 도반들과 제주 섬에서 며칠 머물렀다. 그중 한 명의 환갑을 축하하는 자리도 겸했다. 그런데 뒷바라지는 제주 사는 이들의 몫이다. 늘 그랬듯이 토박이 스님이 유사(有司)를 맡았다. 유사란 계(契), 문중 모임, 동호회에서 살림과 실무를 도맡아 챙기는 사람을 말한다.
유사를 맡은 스님의 마지막 안내처는 제주 절물마을과 월대천 인근이다. 잘 보존된 자연림을 걷는 것도 좋았고 황무지를 피땀으로 일군 민간정원도 볼만했지만, 역사가 있는 인문학 명소가 주는 느낌은 또 다른 각별함으로 닿아왔다.
월대천 큰물에 한 줄기 냇물을 보탠 것은 절물마을의 ‘납새미물’이다. 한문 표기는 납천(衲泉)이다. 납은 기운 옷, 즉 승복을 뜻하며, ‘새미’라는 표현은 샘을 말한다. 따라서 사찰 샘물을 말한다. 전성기 때는 승려를 제외하고도 절에서 일하는 사람이 130여 명이었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이곳에서 옛 절터를 발굴한 결과 12동의 건물이 있었던 터가 발견됐다고 한다. 동네 이름까지 절물마을이라 부를 정도이니 사용한 물의 양도 만만찮았을 것이다.
특히 사찰 업무용 선박은 크고 튼실해서 제주 목사(牧使)조차도 궂은 날씨로 바닷길이 여의치 않을 때는 한때 제주 3대 사찰이었던 수정사(水精寺)의 배를 빌려 육지를 다녀왔다고 한다. 당연히 오가는 물길에는 징발당한 배의 관리자가 따라 갔을 것이다. 이처럼 때로는 내키지 않는 유사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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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대(月臺)’라는 표지석과 현무암으로 만든 단(壇)/원철 스님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몇 개의 물줄기가 합수한 후 바다와 연결되는 지점에 월대천이 있다. 화산섬인지라 대부분 하천이 장맛때를 제외하고는 물이 없는 건천인데 반하여 이 지역은 ‘외도물길 20리’라고 불릴 만큼 풍부한 물을 자랑한다. ‘월대(月臺)’라는 표지석과 현무암으로 만든 단(壇·사진)을 설치했다. 월(月) 자 글씨는 상형문자처럼 썼다. 제주 읍장(邑長)을 지낸 연농(硏農) 홍종시(1857~1936) 선생의 1925년 작품이다. 그보다 80여 년 전에 제주로 유배왔던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의 서법을 익히고자 노력한 흔적이라 하겠다. 어쨌거나 이 명당 자리를 제주도민들은 물 구경, 달 구경, 그리고 모임 장소로 즐겨 찾았다.
조선 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절 월대 자리에서는 30여 명이 참석하는 시회(詩會)가 정기적으로 열렸다. 구성원은 유배 온 사람, 제주에 거주하는 육지인, 그리고 제주도민을 포함한 범(汎)조선 모임이다. 연농 선생은 문장과 붓글씨 그리고 그림에 능했고 재력까지 갖추었는지라 늘 기쁜 마음으로 유사 역할을 자청했다. 그 무렵 강제로 격리당한 신세였던 개화파 인물인 김윤식 선생은 ‘속음청사(續陰晴史)’라는 유배 일기에서 “홍종시는 좋은 글씨와 그림을 엄청나게 간직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풍류가 넘치는 문사이다. 한시 동호인들의 열 번째 모임은 홍종시 집에서 가졌다”고 기록했다.
아름답고 이국적인 관광지에 사는 섬 주민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본업 이외에 또 다른 업무가 있다. 뭍에서 온 이들을 맞이하고 안내하고 보내는 일이다. 수월찮게 이어지는 방문객 때문에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가운’ 일이 반복됐다. 알고 보면 전 도민이 유사인 셈이다. 이래저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유사들의 노고를 기억하는 공덕비라도 세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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