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 교리 강좌반에서 퍼왔습니다....
아랫부분은 좀처럼 접하기 어려웠던 이야기 같아서....
[불교강좌23] 한국불교사1 (불교의 수용)
23. 불교의 수용
1. 고구려의 불교 수용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의 전래에서 시작되었다는 북방전래설이 정설로 되
어 있다. 고구려의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372년(소수림왕 2
년), 전진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보
냄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양고승전(梁高僧傳)과 해동고승전(海東
高僧傳)에 동진(東晋)의 고승 도림(道林)이 고구려 승려에게 청담격의(淸談
格義)불교의 대표자인 법심(法深)을 소개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
아 372년이전에 이미 문화교류의 방편으로 민간경로로 전파되었음을 알게 한
다.
이 당시의 왕권은 민중에 대한 지배의 필요성과 자기네 지위를 신성시 해
주던 재래 신앙(자연신과 조상신 숭배)의 기능이 약화 됨에 따라 새로운 지
배이념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372년 왕실이 불교 수용의 주체가 되어
중앙 집권적 지배 체재를 정비 하는 데 이용하게 된다.
한편 전진왕이 불교를 전하게 되는 것은 당시 중국 북방을 정복하고 남방
의 동진과 대치한 상황에서 후방인 동북방의 견제의 필요에서 고구려와 관계
개선을 위한 문화 교류의 한 방편이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고구려에 공
식적으로 들어온 전진 불교는 도안의 새로운 불교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불교는 민간 경로를 통한 격의적 불교와 왕실을 통한 도
안적 불교의 두 가지 형태로 발전이 가능했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 사회에
토착화 되어 민간 사회나 지방 사회의 신앙적인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고 후
자는 공식적인 불교가 왕실의 지원 아래 순도에 의해 포교되면서 중앙 왕실
이나 지식층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 나갔다. 따라서 다른 삼국에 비해서 아주
두드러진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이의 대표적인 예로 고구려에서는 승려 학자
승랑을 배출 하였는데 그는 `섭산의 고구려 승랑 대사'라고 불리었으며 그는
고구려 불교의 주체적인 수용에 앞장서면서 존재와 無의 변증법적인 지향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진보적인 인식론도 관념론적 제약으로 인해 변혁적인
세계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봉건 지배자에게 봉사하는 한계를 극복치 못했
다.
그 후 불교의 주류는 삼론종이라는 학문적인 경향으로 기울었고 그 당시
고구려의 불교가 어떤 상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
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차지한 왕이
다. 그의 계속되는 정복 전쟁속에서 죽는 것은 백성들 뿐이었고 그런데도 계
속 불교를 신봉하라는 교령을 내렸다. 그리고 권력에 의해 짓밟힌 민중들의
행복을 신앙의 위안과 복으로써 보상 받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이는 기복신앙적인 호국불교의 최초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호국불교는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진리를 말하라.]
는 석가모니불의 본 뜻과는 달리, 거짓말과 시기와 간첩을 하면서까지 철저
히 지배권력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권력의 이익을 위
해 민중을 배신하고 수탈에 일조하는 이른바 호국불교의 허구성과 모순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당 태종 침략시에 나타난 승려들의 반외세 투쟁으로, 최초 승군이
있기도 했지만, 이것도 또한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정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 중생을 위한 것이었는지, 또한 호국불교라는 말이 팔만대장경에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말인데 도대체 언제 부터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말
만 호국불교라 외치지 말고 그 뜻을 한 번 음미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말년에는 불교, 유교와 함께 도교가 당에서 전래되어 성행했다. 삼국유사
에 따르면 고구려 말 영류왕( 榮留王 ), 보장왕 시대에는 사람들이 다투어
도교의 일파였던 오두미도(五斗米道) 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다.
기복을 위한 기도 불사로서 왕실에서 수용한 불교는 국민의 정신 통일의
크나큰 역할을 했지만 말기에 이르러 특히 연개소문에 의해 배불정책이 일어
났고 재차 당에서 도교가 들어오자 백성들은 다투어 오두미도( 五斗米道 )를
신봉하였고 결국 불교는 쇠약해지고 훌륭한 불교 승려들은 일본이나 신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2. 백제의 불교 수용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384년 (침류왕 원년)에 동진에서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백제 불교가 시작되었다. 인도의 승려이거나 중
앙 아시아 출신으로 생각되는 마라난타는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신통한 이적
을 가진 사람으로서 백제왕은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를 다하여 공경했
다. 이는 왕실이 그의 신통력 주술에 의지하여 왕실의 안녕을 빌고자 하고
또한 재래신앙에 대신하여 전란에 동요하는 민중을 통제할 지배이념으로써
불교를 수용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반야 사상과 정토 신앙이 봉건 지배층
에 의해 사용되어 그들의 착취를 은폐시키고, 민중의 저항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왜곡된 불교 신앙으로 적극 보급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392년(아신왕
원년)에는 왕이 불교 신앙을 대대적으로 권장하였다. 그는 '불법을 숭상해서
복을 구하라'는 소칙을 내렸고, 민중에게 불교의 신봉을 권유했다.
그 후 170여년간 백제는 대외적으로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약했다. 하
지만 불교의 발전은 그 동안에도 계속 이루어 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표적
으로 겸익의 `미륵 불광사 사적'의 편찬 업적을 통해 알 수 있는데 - 이것은
백제 율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 그러한 것은 단시일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날의 불교 업적의 축적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는 불교가 매우 성행했는데 그것은 당시 미륵 정토신앙과 결합 하여
실천 불교로서 민중 속에 뿌리 내리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민중에
게는 미륵신앙이 뿌리 깊었고 왕실 측에서는 계율학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
다. 이로인해 왕실의 지지아래 율종과 계율 연구가 매우 활발했던 것으로 보
인다. 그리고 법왕의 '살생 금지령'을 통한 국민적 계율 실천이 가능했었던
것 같다.
3. 신라의 불교 수용
신라의 불교 공인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150년 가량 늦은 법흥왕(528년)
때 이루어 진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이미 그 이전 부터 ( 고구려에 불
교가 들어 온지 40 - 80년 후에 )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가 들어온 듯 하며
그 경로가 공식적이지 못한 터라 은밀하게 포교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의 불
교는 기복 신앙의 형태였고 공인되지 못한다. 그러다가 향의 전래를 계기로
왕실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 되었다.
신라에서 나타난 불교 수용 과정에서의 갈등은 두 가지로 파악된다. 첫째
로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들 수 있다. 이차돈 등의 불교도의 불교 공인 요구
와 왕권 신장 및 중앙 집권적인 지배 체제 확립을 위한 새로운 지배 이념을
필요로 하는 왕권의 요구가 상응한데 반해, 부족 합의제의 고수를 지향하는
전통 귀족 세력은 법흥왕과 이차돈의 불교 승인요구를 극력 거부 하였던 것
이 그 형태이다. 둘째로 종교적, 문화적 갈등을 들 수 있는데, 법흥왕의 불
교 승인 요구에 대하여 귀족층과 전통 부족 세력을 대표하는 대신들이 승려
들의 머리모양, 옷차림새 그리고 그들의 언변에 상당한 비난을 가한 것이었
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신라에서 공인 되었는데 그 과정상 결
코 순조롭지는 못했다.
법흥왕 때 (527년) 귀족들의 봉불(奉佛) 반대 주장에 대하여 이차돈(異次
頓)은 자신의 목을 베어 분분한 의견을 결정토록 자청했고, 이차돈은 죽음에
임하여 "나는 불법을 위해 형을 받는다. 부처님이시여 만약 당신께 신(神)이
있다면 나의 죽음을 통하여 이적을 행하소서." 이런 말을 끝으로 처형되었
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피가 솟구쳤고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땅이 진동하
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등 이적이 나타나 중신 귀족이 더 이상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이차돈
의 죽음을 그대로 종교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고 삼국유사의 일연은 정치적
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불교를 받아들이려는 주체는 대왕(大王) 이
었고 그를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것은 군신(群臣) 들이었다. 즉 법흥왕이 그
의 왕권을 강화 하고 귀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쇼로써 그
일을 벌였고 봉불을 반대하던 군신들에게 연대 책임을 물게 하여 그네들의
세력을 약화 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또한 '흰 젖빛의 피 ' 는 신화적
기술 양식의 일종으로 당대 왕 측근들에 의해 조작된 풍문으로 간주 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법흥왕은 불교 수용 정책을 강력
히 관철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부족합의제를 지향하던 귀족층의 반대를 누
르고 불교를 공인하고 중앙 집권적인 왕권 전제 통치를 강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왕실에서는 지방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신장하기 위하여 부
족 연맹체 사회의 지배 이념이었던 재래 신앙을 대신하여 새로운 지배이념으
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수용 과정상의 갈등은 왕권의 지원과 불교도의 재래 신앙과의 융화
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무마되고 극복되었고, 재래 신앙은 대체로 불
교 신앙에 흡수 통합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로 수용 과정상 중국 불교가 직수입 되
는게 아니라 고구려를 거치면서 한층 더 토착화 되었고, 다른 나라에 비해
어느 정도 민중화 되기 쉬웠다는 점이다. 둘째로 불교 수용 공인을 둘러 싸
고 지배권력 내부에서 이해 관계를 달리 하여 갈등이 치열하였으나 대체로
민주적 합의에 의해 외래 종교가 받아들여 졌다는데 있다.
비록 신라는 삼국 가운데서 가장 뒤늦게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였지만 이
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밀접하게 불교를 국가와 정치
면에 직결시켜 국가 발전에 활용했다.
[불교강좌24] 한국불교사2 (신라의 불교)
24. 신라의 불교
4. 신라불교의 전래
1>신라 왕실의 호국 불교
법흥왕에 이은 진흥왕은 왕권의 확립 및 신장과 국토 확장에 힘쓰면서 불
교의 국교화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 예로
① 법흥왕이 착공했던 홍륜사 완성(554년)
② 사람들의 출가 공인(544년)
③ 고구려 침략 때 귀화해 온 승려 혜량을 승통으로 삼음(551)
④ 부족적 축제를 팔관회의 형식으로 계승 발전
⑤ 승관제를 확립하여 불교의 국교화,제도화에 주력
⑥ 황룡사의 건립으로 용으로 상징되는 신라 왕권의 신장을 반영하며
왕권 신성화의 도구 구실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정신적인 면을 통합
하여 신라가 삼국 통일의 주체가 되게 하는데 기여한 면도 없지 않다.
삼국 통일에 이바지 한 대표적인 승려로서 원광이 있다. 그는 불교적인 여
러 측면에서 보았을때 큰 획을 긋고 간 사람 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도
신라의 지배 권력의 이익을 위해 일했던, 승려 귀족으로서 계급적 한계를 벗
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이러한 경향은 원광 뿐만 아니라 자장에게서도 나타
난다. 자장의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원광의 이야기를 계속하자. 우리들이 원
광이라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세속5계] 이다.여기서 나타나는 의미를 살펴
보면 첫째, 나라(임금)에 충성하고, 둘째, 부모에 효도하고, 세째, 벗은 믿
음으로 사귀고, 넷째 싸움에서 물러 서지 말며 다섯째, 살생을 가려서 하라.
의 내용이다. 언뜻보면 둘째, 세째 계명이 유교적인 사고인것 같으나,이는
육방례경(六方禮經)과 같은 초기 경전에도 나오는 세속인에 대한 불교의 핵
심적인 교훈이다. 그리고 다섯째 계명은 자연숭배의 샤머니즘적 의식이 불교
와 혼용된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첫째, 넷째 계명은 불교적인 윤리와 무
관한 왕실 옹호의 윤리이며,당시 귀족들의 요구에 규합하는 윤리이다. 이러
한 원광의 임전무퇴의 계율이 고구려, 백제와의 싸움에 큰 힘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정신적인 힘이 되었음을 인정하지만, 그도 왕실 호국불
교를 이끈 한 사람이었다.
다음으로 자장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불교가 신라 땅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박는 결정적인 시기에 이와같이 신라
땅이 결코 불교와 무관한 낯선 땅이 아니라 본래 불국토였다는 신념을 신라
사람들에게 불어넣어 불교에 귀의하게 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이 바로 자
장이었다. 그는 선덕 여왕 때 활약한 승려로서 원광에 이어 신라 불교를 발
전 시키는데 기여한 사람이었다.하지만 한층 왕실과 귀족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엄격한 계율과 의식을 갖추고 대국통으로
서 전국의 승려들을 감찰하고 포살, 자자의 의식을 시행했으나, 거대한 절이
나 탑등을 건설하는데 민중을 동원하여 혹사시켰다. 그러니, 당연히 민중들
도 그러한 귀족 불교의 위선에 대해 반대 하면서, 당시 지배층의 억압과 전
쟁과 노역의 시달림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하게 되었다. 결국 귀족의 편에 서
서 그들의 민중에 대한 억압이나 수탈을 합리화 시켜 주던 자장은 더 이상
민중의 스승이 되지 못하였다.
원래 석가모니불 불교는 계급적 권위를 타파하고 억압 받는 민중에게 인간
의 존엄과 평등을 일깨우고자 했으나, 중국 불교를 거쳐 신라에 이르러 결국
왕권이나 신성화하고, 지배층을 위해 일하는 귀족 불교로 되어 민중을 무시
하는 종교로 타락하고 만 것이다. 이렇듯 신라 불교가 귀족 불교로서의 성격
이 강했지만, 세속민중과 살면서 자기의 삶과 진리를 중생에게 바치면서 진
정한 불교를 실천하는 승려 - 혜숙, 혜공, 대안, 사복 - 들도 있었다.
2>신라 불교학의 발전-의상
의상은 원효와 함께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로서 한국 화엄의 기초를
닦은 승려이다. 그는 학문을 대성함과 동시에 제자를 양성하고 대중 교화에
힘쓰며, 불교의 사회적 실천에도 힘쓴 사람 이었다.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사물은 차별될 수 없다는 평등 사상과, 상호 연관성을 중시 하는 - 홀로 존
재 할 수 없다.- 것을 핵심으로 한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후에 고려의 화엄
종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신앙적 실천
이 관음 신앙을 대중화 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토 및 동해 용
왕 신앙과 결합시킨 의상의 민족적 관음 신앙에 힙입었다 할 수 있다. 그리
고 자장의 문수 보살, 불국토 신앙이 사대주의적 요소로 인해 민중에게 외면
받은 것과 대조된다. 그는 권력을 멀리하고 완고한 골품제 사회에서 신분의
평등을 주장하였고 왕에게 올바른 정치를 직접 요구하는 등 지행일치의 실천
에 앞섰던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3>신라의 통불교적 발전-원효
통일 신라 초기에 불교계에서 화려하게 활약을 한 사람 중 특히 원효는 한
국 불교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이자 실천자였다.
삼국 통일 이후의 신라 불교학은 원효에 의해 불교 각 경전의 이론이 통합
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통불교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원효는 [정
토 신앙] 을 대중화 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틀에 매이지 않는 생활로 대중속에 들어감으로써 역사와 민족의 기억속
에 오래도록 살아남는 최대의 고승으로 자리잡았다. 원효의 정토 구원관은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하고 귀족불교를 전면으로 부정하였다. 그 당시 현실
적으로 고통 받는 민중에게는 엄격한 계율이나 어려운 이론보다는 정토를 지
향하는 염원을 가지고 삶을 이어나갈 의지가 더욱 절실하였다. 이러한 원효
의 노력으로 신라의 불교는 점차로 귀족 불교에서 민중 불교로 넘어 오게
되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원효가 비록 지배 계급의 소유물이었던
귀족 불교를 타파하고 민중 불교로 이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당시의 제도적
왕권 불교에 대응하고 정토 실현을 위한 민중의 공동체적 노력을 수정할 수
있는 민중 불교 결사와 같은 조직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아미타불
타력 신앙에 의해 숙명적이고 체념적이며, 현실 도피적인 신앙으로 오도 될
가능성을 남겼다.
우리 나라에서 주체적 연구를 통해 발전된 신라 불교학으로서의 원효의 불
교학은 중국과 일본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그의 저술은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 불교의 존숭(尊嵩)을 받고,그의 실천적 불교 대중화 운동은 일본의 불
교 민중화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외에도 화엄학,대현(大賢)등도 외
국에 영향을 끼치는 데, 이는 신라 불교의 자주적인 발전과 대외적인 영향력
을 반영한다.))
2.통일 신라의 불교
신라불교의 타락과 선종의 수용
이 시기의 불교는 대규모의 사찰, 불상, 탑, 종을 지어 호사한 왕실의 권
위를 드러내 보이고 왕실 귀족의 안녕과 복을 기원해 주었다. 그 대가로 승
려들은 엄청난 땅과 노비를 기부 받았는데, 그러한 행위가 너무 심해져 한
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신라 불교가 봉건 지배계급과
밀착하여 사치와 타락의 길로 떨어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신라 골품제의 모
순으로 귀족 내부의 권력 다툼이 생기는 한편 지방의 호족 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지방 호족의 성장과 함께,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각자가
스스로 깨달을 것을 주장하는 지방의 새로운 불교 종파로 선종이 성장해 왔
다. 이 당시 9세기의 신라는 골품제가 신분체재의 모순을 드러내 봉건 체제
가 점차 흔들리고 있었고, 지방의 호족세력이 사회 모순을 극복할 주체로 떠
오르면서 선종은 그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이 선종은 직설적이고 간명
한 방법과 평등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당시 귀족 불교인 교종이 난해
하고, 관념적이고, 지배자의 복을 비는 일만 일삼던 때에 비하여,상당히 지
방민중에게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선종도 하나의 착취자였던 호족의 이념적 기반에 불과 했다. 호족
들에 의해 농민들은 땅을 잃어 유랑하였고 마침내, 그 착취자들에 대항하여
맞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종도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산간에 은
둔하며 참선에 전념하는 산중불교로 자리 잡는다.
신라 봉건 사회의 모순이 극에 이르러 귀족들 사이의 내분과 민중 봉기가
극에 달한 9세기에는 미륵 신앙과 도참 사상이 민중들에게 크게 호응을 받았
다. 미륵 신앙은 백제 말, 고창 지방 검단에 의해 일어났고 민중적인 실천
불교로써 민중속에 파고 들기 쉬웠다. (( 그리고 삼국 시대에는 비록 왕실과
귀족층의 주도하에 전개 되었으나 민중의 고난을 동정하는 태도를 취하여 개
인적인 구원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사회적인 구원, 민중 구제를 위한 집단적
인 신앙 이었다. 특히 진표의 미륵 신앙이 대표적이었는데, 그는 소외된 지
방에서 - 신라의 중심지가 아니라 - 미륵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참고 : 5교 9산
신라불교는 열반종(무열왕때 보덕), 율종(선덕왕때 자장), 법성종(경덕왕때 진표
율사), 화엄종(원효와 의상), 법상종의 다섯 종파로 나뉘어져 각기 그 교리를 연
구하게 되었는데 이를 5교라고 합니다.
구산은 신라말 중국에서 성행하던 선종이 들어왔는데 고려초기까지 대표적인 9
개의 선문이 개창되었는데 이를 9산선문이라고 합니다.
9산선문은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 지리산 실상사. 곡성군 죽곡동 동리산 태안사.
보령군 미산면의 성주사. 강릉군 구정면의 사굴산 사굴사. 영월군 수주면의 사
자산 흥녕사. 문경군 가은면의 희양산 봉암사. 창원군 상남면 봉림산 봉림사. 해
주군 금산면 수미산 광조사 이다.
[불교강좌25] 한국불교사3 (고려의 불교)
25. 고려의 불교
3. 고려 시대의 불교
1. 왕실 호국불교
송악의 호족 세력이었던 왕건이 918년 궁예를 몰아 내고 고려 정권을 세
우고,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고려 시대는 시작된다. 건국기에 왕건은
동요하는 민심을 무마하고 지방 호족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일련의 회유 정
책으로써 불교를 숭봉하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즉위 원년(918)에, 신라 봉
건 지배 계급의 이익을 위해 연례행사로 치러쳤던 왕실 주체의 호족불교 행
사인 팔관회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태조가 자손들에게 남긴 유훈 [ 훈
요십조] 에 나타나듯이 - 훈요 십조의 제 1조에 "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님의 가호에 힘입은 것이므로 선 . 교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보내 분향
수도하게 할 지어다." 하며 불교 숭봉을 표방하면서도 동시에 " 후세에 간신
이 정권을 잡아 승려의 청탁을 따르게 되면 각 종파가 서로 사찰을 뺏는 다
툼을 벌일 것이니, 이를 엄금 할 지어다." 라고 하여 불교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불교는 지배층의 안녕과 복을 빌어
주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교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고려 왕권의 기만적 불교 통제 정책아래 소외되었고, 왕권
의 비호 아래 날이 갈 수록 불교는 점점 썩기 시작했다.
불교의 부패는 광종 때 가장 혹심했었다고 할 수 있다. 광종은 왕실의 왕
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 호족 세력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선종을 버리
고, 화엄종을 선택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 했다. 그는 왕권강화를 위한 시책
으로 과거 제도를 실시하고 특히 승과를 개설, 시행하였다. 한편 광종은 승
과의 선발 기준으로 균여의 화엄학을 채택할 정도로 균여를 숭봉하였다. 그
리고 균여 또한 화엄종의 남악파, 북악파의 갈등을 해소하여 통합된 지배이
념으로써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에 이바지 하였다. 이렇게 전제 왕권의 이익
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는 다르게 불교의 대중화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그가
지은 [보현 십원가] 를 보면 잘 나타나듯이 화엄사상을 노래로 지어 민중속
에 퍼뜨렸다. 이는 원효가 그의 화엄사상을 노래로 지어 민중속에 퍼뜨린 것
과 같이 균여에 의해 불교 대중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매우 특이 할 만한 일
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귀족 불교를 위한 것이었다는 한계는 벗을 수
없다.
그러던 중 성종 때의 정치 사상가 최승로는 [시무책] 을 통해 왕권의 불교
비호 정책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 권력의 후광을 믿고 횡포를 부리
던 귀족 불교 승려들을 규탄하였으며, 그 대신 현실주의적인 유교를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제시하였다. 성종은 그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여 불교를 억압
하는 정책을 폈으나, 그것도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다.
현종에 이르러 폐지 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가 다시 부활되었고 황룡사9층
탑을 재수리하고 고려대장경이 조판되었다. 이것은 당시 거란 침략에 맞서
호국불교 행사를 통해 국민단결을 꾀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2. 천태종의 개창
화엄종은 신라 의상의 화엄종을 계승하여 고려 역대 왕권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귀족 불교로 발전했다. 그리고 법상종은 유가종이라고도 하는데 대현
(大賢)등의 신라 유가종을 계승한 것으로 왕권과 밀착하여 발전하였다. 화엄
종과 법상종이 왕권과 결탁하여 위세를 떨치던 이 시기에 선종은 그에 비해
9산 선문으로 분열 되어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11세기 중반까지
중앙 집권화가 완성됨으로써 서서히 9산 선종도 왕권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교종과 선종이 서로 대립 분열하고 있는 상황에서 왕권은 각 종파 불
교의 융화와 통일된 지배이념을 요구하게 되었다.
문종의 왕자로서 11세기에 승려가 된 의천은 그러한 왕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이것은 왕자를 츨가 시켜 승려 지도자로 앉힘으로써 불
교 세력을 적당히 통합하고 왕권의 통제 아래 두려 했던 것이다.
의천은 1085년 중국(송)에 건너가 새로운 통합의 지도이념으로 천태학을
배우고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그리고 화엄종과 법상종의 융화와 교종과 선종
의 융화를 꾀하여 통일적 지배이념을 요구하는 왕권에 이바지 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원효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민중불교 보다는
철저한 왕실 불교 지도자에 불과했다.이러한 왜곡된 반 민중적 불교의 전통
은 조선을 거쳐 해방후에 거치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나라의 주체인 민중을
외면하고 현실에 등돌리고 참선을 일삼는 형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3. 무신정권 아래에서의 불교
이 시기에 불교는 왕실만을 위해 존재하였고, 왕실에 의해 대표적인 착취
자로 등장하면서, 왕실과 함께 타락했다. 특히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승
려들과 함께 방탕하게 놀음과 잔치로 세월을 보내고, 사찰을 곳곳에 세워 향
락 장소로 이용하곤 했다. 이러한 왕실의 부패와 함께 민생고가 날로 가중되
어 가고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해 나가기 시작할 때 승려들은 약해진
왕권을 위해 무신정권에 항변하여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권력에
빌붙어 또 하나의 착취자로 군림해 오던 불교 대사찰들도 민중들의 새로운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무신정권의 옹호를 받으며 선종은 성장해 나갔고, 선종은
선.교의 대립을 지양하고 교종을 포용함으로써 불교계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
였다. 이러한 노력은 지눌(知訥;1158-1210)과 그 계승자들에 의해 시도되었
다.
지눌은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권력과 밀착 해 온 귀족 불교에 대한 비판의
식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였다. 이 결사는 선종 뿐만 아니라 교
종, 유교, 도교에까지 문호를 개방하였고 세속적 명리를 추구해온 불교의 자
기 비판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당시의 농민들이 지배자의 착취에 못 이겨
곳곳에서 봉기하고 지방하층의 승려까지 이에 참여하는 상황에서, 그가 결
성한 결사는 도탄에 빠진 현실을 무시하고 오직 내적 수행의 길에만 정진
하고자 하여, 현실 도피적인 지식층의 결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한
다.그러나 지눌은 권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청정한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지향
하였고, 무신정권에 자력이든 타력이든 이용되긴 했지만, 선교융합의 창조적
노선을 추구함으로써 고려 불교를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임에
는 틀림없다. 그리고 지눌과 혜심에 의한 간화선(看話禪), 그 외에 지눌
에 의한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 節要幷入私記), 그리고 선(禪)문학을 집대성한 혜심의 선문염송(禪門念頌)은 불교강원의 교과목으로써 우리나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불교의 주류가 선과 교를 병행하면서, `마음'을 찾는 내적 수양에 치
중하고, 사회 참여보다는 은둔 수도를 지향하는 것이 약간은 그의 영향이 아
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천태종의 요세(了世;1163-1245)는 지눌과 같은 시기에 백련결사를 결성하
여 불교계 내부의 분열대립과 타락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중앙 집권력
에 결탁하지 않고 오직 지방민중의 기반 위에서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백련
결사의 성장은 이내 지배계층의 눈에 띄어 요세(了世)도 말년에 중앙 지배
권력층의 회유책에 휘말려 끝내 부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백련결사는 지
눌의 정혜결사와 함께 고려 불교의 중요한 신앙결사로서 자리잡았고 불교발
전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4. 민중불교 항쟁과 귀족불교
몽고의 침략에 대한 민중 불교의 항쟁으로, 충주성과 개경에서의 노비와
승려들의 항쟁이 있었고, 특히 승려 김윤후의 투쟁을 들 수 있다. 그는 명리
와 계율을 뛰어 넘어 민중을 구제하는 민중 불교적 입장에 서서, 몽고침략군
철수에 앞장 섰다. 그에 비해 이 시기의 귀족 불교는 대장경 조판과 호국기
도등의 기복불사로 몽고 침략에 대처하였는데 이 때 새겨진 대장경이 현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팔만 대장경' 인 것이다.
공민왕에 이르러서도 불교 숭상 정책이 계속되는데, 초기에 보우(普愚
1301-1382)를 왕사로 추대했다. 보우는 현재 선종의 종조로 받아들여
지는 승려로서 당시 대립.분열하고 있던 선종 각파의 통합을 꾀하였다. 그는
승직임명권을 차지하여 고려 불교 전체를 장악, 통제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서 구산선(九山禪)을 통합하고 임제선(임제선) 계승하였으며 많은 시와 노래
를 제작했다. 그리고 보우도 당시의 정치와 불교의 개혁을 절감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5. 고려의 미륵신앙
고려의 미륵 신앙은 건국 초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차원에서 왕실의 지
원으로 미륵불이 많이 만들어 졌던 옛 후백제 땅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래서 고려의 어수선한 정세와 함께 말세 의식과 관련되어 미륵불이 땅 속에
서 솟아 나오기를 기원하는 하체 매몰불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것은
대부분 민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실적인 생활상 요구에 따른 신앙
대상이 되었다. 득남(得男)을 기원하거나 자연 재해, 전쟁 따위의 재난이 일
어나는 것을 막는 등의 기원으로 밀교 신앙은 전개 되었다. 그리고 운주골의
천불천탑은 아직 수수께끼적 요소가 많아서 확신 할 수는 없지만, 미륵 신
앙을 배경으로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민중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불교강좌26] 한국불교사4 (조선의 불교)
26. 조선의 불교
4.조선왕조 시대의 불교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흔히 지적되는 것이 산중불교(山中佛敎)라는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산 속에 숨어서 사람들을 멀리하는 불교라는 뜻이다. 우리나
라의 유수한 사찰들이 산 속에 자리잡고 있는 현상의 설명적 표현이다.((그
러나 황룡사나 불국사는 절 이 아니라 제정 일치 시대에 현저하게 대중의 신
앙 생활과는 유리된, 그리고 국가권력의 철통같은 비호속에서 이루어진 강압
적이고 위압적인 특수권력조직이며 오늘날의 제도로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청와대이며 중앙청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왜 합천 가야산 촌구석에 그
다지도 거대한 해인사가 있으며 왜 승주군 조계산 허리에 그다지도 거대한
송광사가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그 규모의 장대함과 거기에 들어간
인간 예술품의 에너지가 후대 조선왕조이 한양 한복판안의 궁궐의 규모를 능
가하면 능가했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영락교회나 순복음교회가 산속에
들어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할것이다. 고대 사찰규
모의 장대함에 있어서 가장 반동적인 사실은 당대 그 사찰이 성립하고 있었
던 場인, 민중의 삶의 현실이다. 당시 대중들이 사는 집이란 정말 형편없는
것이었다.주변은 모두 황량한 들판의 논밭뿐이며 그 대중들이 사는 집이란
나무 마루도 없이 땅을 파고 짚이엉을 얹은 매우 소략한 토굴이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지은 그 엄청난 건축물들을 보면서 그 건축물을 짓
게한 지배자의 어마어마한 권세와 그 영력에 벌벌 떨 뿐이었고 당대의 왕이
사는 건물이 사찰에 비하면 매우 소박할 정도였으니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야 좋을까 ? 과연 {원래 사찰은 중생의 교화를 사명으로 하고 있음으로 번창
한 도시보다는 가까운 아름다운 자연속에 자리잡는다.} 라는 말로 받아 들여
야하는 것이 옳을까?)) 어찌되었건, 우리의 경우 대찰(大刹) 뿐만 아니라 군
소 암자까지 산 속에 위치한다는 것은 조선조 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승
려들의 도성 출입이 금지 되었들 때 자연히 사찰이 산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
라고 이해할 수 있다.
1. 건국 초기의 불교
고려 시대에 전성의 극에 달하던 불교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상황이 완
전히 달라 졌다. 건국 초 부터 유교국가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계획적인
불교 정비사업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국가의 재정과 인적인 자원을 확보하
려는 현실적인 요구에서 일어났던 것이며, 결코 사상적인 극복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즉 유학 자체를 진흥하려는 적극적인 사상운동이었다기 보다
는 오히려 불교의 현실적인 폐단인 경제적 세력을 몰수하는 데 주요한 목적
이 있었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주의자들의 열의에 찬 숭유정책( 崇儒政策 )에
도 불구하고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는 좀처럼 청산되지를 않아 때로 유
교주의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고려말기에 있어서의 유교의 진흥운동은
불교 배척을 계기로 그 척불 운동이 정치적 또는 행정적인 방면의 주장에 의
해서 힘을 얻었던 것이며 결코 순전한 학문적인 이론 투쟁과 같은 정신 운동
의 소산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는 유교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불교
를 완전히 물리치고 사상과 행정의 여러면에 완전히 독점적인 지위를 바라기
는 어려운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만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불교의 폐해가 지적되고 의론이 있을
적에는 민심에 큰 충격을 주지 않을 한도내에서 척불정책을 채용하려 했으나
그의 개인 생활이나 종교적 신앙 면에선 오직 한 사람의 불교도로서 일관 했
다.
이성계는 즉위 초에 무학(無學)을 왕사(王師)로 모시는등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리고 군역의 면제자인 승려의 수를 억제하는 한편 승려
의 질적인 향상도 아울러 꾀하기 위해 태조때 부터 도첩제(도첩은 국가가 승
려에게 그 신분을 인정해 주는 증명서인 동신에 군역의 면제증이기도 했다.)
를 강화하여 실시하였다.
이렇듯 태조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불교의 부패청산에 손을 대었지만
일부 유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불교의 근절이라는 것은 그로서는
염두에도 두지 아니하였다. 그것도 그런것이 삼국시대로부터의 불교는 국가
를 이롭게 하고 국민을 복되게 하여 주는 신앙으로서 여전히 대중에 대한 교
화력을 유지하여 가고 있었고 특히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처음으로 실시된
수륙회(水陸會)(물이나 땅위에 음식을 던져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법
회)만 보더라도 그의 유연성을 알 수 있다.
2. 억불정책 (1) - 태종과 세종
태종이 왕에 즉위하면서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태종은
태조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결국 숭유억불(崇儒抑佛)의 방침을 시
종 견지하여 정책상으로는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역(役)의 부담자인 민정(民丁)의 확보와 공천(公賤)의 보충이라는 인적 물
적 국가 재원(財源)의 재확보를 위해 도징(道澄)과 설연(雪然)의 비행(사노
간음사건)을 기회로 불교사원의 정리에 손을 대었다. 이리하여 사원의 재산
을 동결 시키고 사전(寺田)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남겨둘 공인사찰
(公認寺刹)로 242사(寺)를 정하였고 여기에 상주(常住) 할 승려의 정원수도
책정하여 그 정원수에 따라 전지(田地)와 노비가 책정되었다.
이러한 일들로 지배층에서는 오히려 조세원을 확대 할 수 있었고 환속당
한 승려들과 사원의 노비들은 양인이 되어 부역과 조세의 부담을 져,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단단히 하는데 한 몫을 담당한다.
결국 전국에 242개의 사찰만이 남게 되었고 왕사.국사 제도도 폐지 되었으
며 능사(稜師)의 제도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종전의 11개의 불교 종단을 7개
로 축소시킨것은 불교의 발전을 저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세종에 이르러서는 억불보다 더한 훼불(毁佛)정책이 강행되었다. 태종 때
의 불교 종단이 11개에서 7개로 통폐합 되었던 것이 세종 때 다시 선.교양종
(禪.敎兩宗)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전국의 사찰 수도 제한 하여 태종 때의
242寺 법정 사찰에서 36寺로 축소 되어 선.교 양종에 배속 되었다. 그리고
세종은 한성부내에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수도의 경영을 위해 한때는 승려들
을 노동에 참여하게 하여 노동력을 이용했지만 그 이후로는 승려의 파계를
이유로 도성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이 때 세종의 친형이 효령대군이 불교를 숭신하여 천태종 승려 행평(行平)
에게 사사,제자가 되어 노승의 사실(師室)에 귀의하고 승려들이 하는 모금운
동에 참여하여 탑등의 사찰건립이나 중수에 사용할 기부금을 모았다. 세종이
이를 묵과해 준 까닭은 왕실에서 불교 신앙에 젖은 대비(大妃)를 비롯한 여
성뿐만 아니라 궁녀들이 삭발하고 승려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적인 불교 억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은 집안의 복을 위해 재를 올
리고,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제사 때에는 승려를 초청하였다. 그리고 민
중들사이에서는 초파일 연등행사가 나라의 억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매년 행
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감화 받은 세종은 점차 숭불의 왕으로 변신해 갔다.
말년에는 세종도 불교를 신봉하게 되어 석가불의 일대기를 엮도록 명하였
고 우리글자 훈민정음으로 불교 서사시 [월인천강지곡]을 짓기도 했다.
3. 세조의 불교 장려정책
조선의 대호불왕(大護佛王)이라 할 수 있는 세조는 유신(儒臣)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독실한 신자로 자처하며 불교를 중흥시켰다.
세조가 호법 사업을 편 이유는 다음의 3가지 측면에서 파악될수 있는데 첫
째,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친족과 정적을 많이 살해한 데서 오는 죄책감에서
일수도 있고 둘째, 그의 집권과정상의 약점을 극복하기위해 현재의 야당격이
었던 불교를 수용하는 측면 셋째, 정변에 따른 민심의 동요를 불교의 보호와
장려로서 수습하고자한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불교 신자였던 세조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법화경, 선종영가집,
금강경, 반야심경등의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배포한 것이다. 그리고 세
종의 명에 따라 수양대군(세조)이 김수온(金守溫)과 승려들의 후원으로 귀중
한 불교서적들이 많이 간행되었다. 세조는 금강반야경을 직접 썼으며 대규모
의 왕실 원찰 원각사를 창건하였고, 세종때 금지했던 승려의 도성출입을 재
허용하는등 많은 호법사업을 했다.
4. 억불정책 (2)
성종은 세조 당시 불교를 신봉하던 훈구파(勳舊派) 세력을 억제하기 위
해 유교정치를 지향하고 사림파를 대거 등용 하였다. 성종의 즉위로 억불정
책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도첩을 가지지 않은 승려들이 증가 하는 것은 - 군역제도의 문란으
로 국역을 기피하려는 수단으로 승(僧)이 된 양민이 많았다. - 민정(民丁)
의 확보라는 점에서 국가의 중대한 관심이었다. 그러므로 유신(儒臣)들은 도
첩이 없는 승려들을 색출하여 도첩제를 엄격히 시행하고 불교 자체도 뿌리
뽑아 없애려는 급진적인 억불책을 서둘렀고 급기야 성종 23년에 도첩제 자체
를 폐지(승려가 되려는 자의 길을 국가가 공적으로 말았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시킨다.
성종은 간경도감을 폐지하고 출가를 완전히 금했고 승려들을 환속시켜 절
이 텅텅비는 사태가 곳곳에서 도출되었다.
이러한 강력한 불교 억압정책으로 인해 사대부 양반들의 개인적 불교
신앙 마저도 극도로 위축 되어 그나마 유지 되던 불교식 장례나 제사법은 점
차 사라져 갔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도 억불정책을 폈다. 그는 사
찰에 있던 승려들을 쫓아내어 관노로 삼았고 토지도 몰수 했으며 승과(僧
科)도 폐지 하였고, 선.교 양종의 본사도 폐지 시켰다. 이로인해 승려들은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불교의 부패상에 대한 의
식적인 조치보다는 단순히 성종의 불교 배척정책을 계승했던 것으로 파악 할
수 있다.
연산군에 이어 중종에 이르러 억불정책은 최고조에 다달았다. 그는 지난
날의 사화(士禍)로 거세되었던 사림파 유학자들을 적극 등용하여 그들에 의
한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불교는 더욱 억압 받게 되었다. 그는 승과를 합법
적으로 폐지 시켜 선.교 양종의 종단 자체까지 그 존재가 무의미 해졌고 마
침내 선명치 않은 無종파의 혼합적 현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상
히도 절과 승려는 계속 늘어 났는데 - 봉건 지배계급의 가혹한 수탈로 파산
한 민중이나 도적들, 부역 기피자등이 절(寺)로 들어온 것이었다. 이는 한
마디로 불교 억압정책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과 착취당한 민중들이 이해관계
를 같이 하여 결합하기 시작한 것이었으며 불교의 적극적인 반항이었다. 이
에 대해 지배층에서는 유교의 이른바 [미풍양속]을 퍼뜨리고 [미신]을 타파
하려는 명분으로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 지배이념을 지방까지 퍼뜨려 민중의
오랜 신앙이었던 불교를 타파하고자 하였다. 특히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민중
의 오랜 신앙이었던 민중의 불교적 공동체 생활조직인 향도(香徒)나 계를 말
살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지배층의 억불책에 의해 끝내는 거의 말살되
고 말았다.
5. 문정대비(文定大妃)의 불교부흥
인종의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한 탓으로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어머니 문정대비가 섭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불교는 다시 부흥
의 기운이 감돌았다. 대비는 지나친 억불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불법적인 불
교의 반항이 커짐을 알고 불교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약간 부흥시켜
주었다.
그녀는 중종의 배불정책을 바꾸어서 6년(1551년)에는 중흥불사의 대임을
보우에게 맡기고 보우의 진언에 따라 양종과 승과를 다시 시행하고, 도첩을
주어 봉은사를 선종으로, 봉선사를 교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승과를 통해 휴
정(서산대사), 유정(사명대사)등의 후대의 뛰어난 불교 지도자를 발굴했다.
명종때 활약한 보우(普雨)는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과 아울러 선교일치론
(禪敎一致論)을 주장했다. 유교와 불교는 국가 사회에 나타난 면에서는 각기
다르지만 그 이치의 근본을 따지자면 서로 일치하여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다. 다같이 인간의 본심과 본성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禪은 行의 철학이며 華嚴은 理의 철학이라고 하면서 선과 화엄의 융합을 꾀
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1565년 4월에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친히 정사에 임하고, 보우
를 탄핵하는 여론을 받아들여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그후 보우는 창살당하여
목숨을 잃었고, 그 다음 해에 양종의 승과제도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연산군 이전의 제도를 부활시켜 왕이 승하한 15년 간은 조선불교의
중흥기라 할 수 있으며 보우의 업적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6. 청허휴정(淸虛休靜)과 당시의 구국흥법(救國興法)
산간총림에 축소된 불교는 그 속에서 수도와 전법에 힘쓰면서 자활의 길을
모색했다. 하지만 문정대비의 승하 후 배불정책은 날로 심해 갔다.
그러던 중 조선 후기에 일어난 임진 왜란을 계기로 의승군들이 왜적과의
싸움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자, 선조는 조직적 역량이 있는 승려들을
전투에 이용하고자 했다. 이때 휴정과 유정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휴정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33세에 승과에 급제했었고 임진왜란때 나라
의 부름에 부응하여 73세의 노승으로 승군 오천여명을 이끌고 유정과 함께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실천으로 보여준 현실 참여 의식과 민
중 구제의 사상은 [청허집]과 [선가귀감]등의 저술로 나타났고 억불로 쇠
퇴의 극에 달하던 불교를 중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명당 유정(四溟堂 惟政)은 휴정과 마찬가지로 명종 때의 승과출신으로,
휴정을 도와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는 전란 후에도 민생문제와 국력회복
에 관한 방침을 건의하였고, 사명집(四溟集)등의 저술을 남겼다.
휴정이나 유정은 당시 선종의 대표자의 지도자였다. 그들 둘다 승과에 합
격하여 명리를 누릴 수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참선 수도의 길을
걸었다. 이는 이전의 선사들과 다르게 형식주의적,계율주의의 속박과
지배이념과 신분을 뛰어넘어 자유인의 경지로서 사회참여와 실천에 앞장
선 것이라 할수 있다.
7. 조선 말기의 불교
청허휴정과 유정 이후 중흥된 교단은 조계임제(曹溪臨濟)계통의 선종이었
다. 그렇다고 선수(禪修)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교학연구에도 힘써 화엄
대가(華嚴大家)가 많았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조선불교에서 원효
이래로 그를 뛰어 넘는 인물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조선 말기의 불교는 두가지 형태로 나뉜다. 어수선한 정세와 맞물려 민
중의 편에 서서 왕실에 저항하기도 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서 있는 한가지
형태와, 현실과는 동떨어져 지배층의 불교 배척에도 불구하고 상류지향적 문
화를 추구하면서 지배층에 아부하는 자들이 그것이다. 후자는 나중에 참선
과 염불을 구하는 이판승(理判僧)과 절의 사무와 제반 역입에 종사하는 사판
승(事判僧)으로 나뉘어 교단의 명맥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조선의 억불 정책
은 국가적 귀족적 불교를 소멸 시키고 대중들의 종교로 정착하게 되는 계기
를 만들었다. 특히 미륵 신앙이 민중과 밀착 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을 겪으면서 末法 시대의 고통을 구제 할 당대 불교로서의 미륵 하생을 고대
하는 미륵신앙이 민중을 중심으로 깊숙히 침투하였다. 이러한 미륵 신앙은
조선의 임꺽정의 난, 정여립의 난, 이몽학의 난, 홍경래의 난등의 민중 세력
과 불교세력의 형태로 그 흐름이 이어졌다. 그리고 줄곧 승려들이 입성금지
의 법령에 묶여 있던 것이 일본승려의 상서(上書)에 의해 1895년 입성 금지
가 완전히 해제 되었다.
[불교강좌27] 한국불교사5 (근대불교)
27. 근대 불교
1. 불교의 영향
근대 불교의 시기는 편의 상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1895년)에서 8.15해방
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여기에서 입성해제의 의미를 한 번 살펴보자. 입성해
제는 1895년 일본의 승려 사노의 상서(上書)하에 이루어졌다. 조선 건국이래
500여년산 줄곧 핍박받으며 입성금지가 되었던 승려들에게는 이보다 더 고마
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노의 근본 목적은 파악 하지 못하고 마냥
고마워하기만 할 뿐 민족종교로서의 불교의 책임과 역할을 인지하지 못하고
日人의 손에 의해 풀린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로부터 친일 불
교는 시작되었는데, 그 계기는 이것 뿐만 아니라 당시 한일합방 이후 각지에
서 일어난 의병의 공격에서 사찰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본불교와 제휴하거
나 일본종파에 귀속하기도 했고, 또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하는 경우도 있었
다.
승려의 도성 출입 허가 이후 일본 승려와의 교류는 더욱 빈번해졌고, 그들
과 제휴함으로써 자신의 신분도 높이고 사찰도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
과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불교종파에 자신들의 사찰을 예속 시키는 것이 최
선책이라 믿었다. 늦게나마 정부에서는 억불책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체
계를 계획하여, 1899년 서울 창신동에 원흥사( 도성 출입을 가능하게 해 준
日僧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회광이 설립.)를 세워 한국 불교의 총종무소로
삼았다. 하지만, 원흥사는 원종 종무원과 함께 친일을 상징하며 한일 불교합
방의 요람이 되었다. 원흥사에 불교연구회가 설립되었고, 1908년에 전국 승
려 대표자 52명이 여기에 모여 원종(圓宗) 종무원을 세워, 억불책 500여년만
에 없어졌던 종명(宗名)을 다시 회복했다.그러나 대종정(大宗正)으로 추대되
었던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과 손을 잡고 매불행위를 한 것에 대한
거센 반발로 광주 증심사를 중심으로 승려 대회를 열고 송광사에서 임제종을
세웠다. 하지만 1911년, 일본의 사찰령과 함께 이 두 종파마저 없어지게 된
다.
교권에 관심이 있어서 일본불교 임제종에 한국불교를 귀속시키고자 한 이
회광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 불교는 다른 불교와 같이 사회에 대한 자선사
업이 없어 이 세상에서 환영 못 받는다. 이런 식으로 가면 한국의 불교는 진
흥하지 못할 것이니 한국 불교의 종명을 개종하고 사찰의 재산을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한국 불교를 일본에 귀속시켜 그 대가로 교권을 장
악하고자 했다.
한국 불교를 소생시킨다는 명분으로 내려진 사찰령은 승단의 좋은 옛 관습
을 파괴했다. 특히 사찰의 주지 임명의 문제에 대해서 이다. 주지 임명 방법
으로는 相承, 法類相續,招待 席의 3가지 였다. 불교가 시작되어 조선 시대
에 이르기까지 주지의 임무는 藷般 사무를 관장하는 것이어서 자신의 수행에
방해되기 때문에 사양하는 것이 통례였고, 설사 주지직을 맡은 후에도 수행
하는 스님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수행하도록 보살필까 하는 데 직무의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일본 사원의 지주 제도를 그대로 도입한 사찰령에 의해 주지
권한이 상당히 비대해졌다.
이로 인해 주지는 그 자리를 고수 하여, 더 나아가 종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 불교에 동화하거나 귀속하는 일을 획책했던 것이다. 사찰의 공의제도
(公議制度)가 없어지고 주지의 전횡시대(專橫時代)가 되자 일반 승려와 주지
와의 거리는 멀어졌고, 민중과는 더욱 멀어지제 되었다. 주지의 관심은 오직
총무부 -본산주지의 임무권자가 총무 였다.-에 쏠려, 사찰 재산의 처리에 공
정치 못했던 일이 허다했다.
어쨌든 사찰령으로 인한 지주 권한 비대에 대한 비판으로 젊은 승려 백여
명이 각황사에 모여 조선불교 청년회를 창립하고 8개의 개혁안을 건의했다.
그리고 조선 불교유신회가 사찰령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서기도 했으나 이 모
두 무산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사찰령에 의해 불교 교단은 조선 불교 선.교
양종이라는 이름으로 일제 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사로 나뉘어졌다. 이에 30본
사 주지들이 임명되고, 주지들의 화합하에 각황사에 연합사무소가 설치되었
다. 그러나 본사 주지 권한과 세력의 확대로 좀 더 강력한 중앙 통치의 재구
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政.敎분리의 혁신을 주장한 승려들이 각황사에서 중
앙 교무원을 설치했다. 이로써 중앙통제기구로서의 모습은 갖출 수 있었다.
그러다가 선명한 종명(宗名),종지(宗旨),종헌(宗憲)등의 제정의 필요성을 느
껴 1941년 태고사(현,조계종)를 세워 31本山의 총 本山으로 삼고, 좀 더 강
력한 유기적인 중앙 통제적 역할을 하는 조계종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
는 해방과 더불어 대한 불교 조계종으로 재정비하려 새로운 출발을 맞이하게
되었다.
2. 항일 불교운동
이 시점에서 조선 불교의 당면 과제는 두 가지로 분류 시킬 수 있다. 즉
한일 합방의 현실에서 일본의 정치적 간섭과 일본불교의 영향에 대해 조선
불교의 주체성을 어떻게 확립 할 것인가와, 급변하는 사회정세 및 세계조류
에 어떻게 부응 할 것인가였다. 이를 둘러 싸고 조선 불교는 민족 종교로서
의 불교의 책임과 역할을 망각하고 일신의 영달과 안일를 위해 일제와 타협
하는 매불적인 행위를 하는 반민족적 세력과, 소위 산중 불교의 맥락을 이어
은둔 생활을 일삼는 무기력한 보수 세력, 나머지 하나는 민중의 소통에 귀
기울이고 외세의 침입에 맞서 구국투쟁의 대열에 동참하는 세력으로 3가지
형태로 구분 할 수 있다. 조선 불교의 사회 운동이 표면화하여 업적을 남긴
것은 독립운동에의 참여와 청년 운동의 촉진 등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때
나타난 조선 불교의 선구자가 만해 한용운 이었다.
그는 일제 침략기인 그 시점에서 유신을 외치면서 그의 혁신 이념을 알리
고 실천했다. 그가 식민지 조선의 역사적 현실을 발견하는 계기 역시 실천적
투쟁속에서 이루어 졌는데 그것이 바로 해인사 주지였던 친일파 승려 이회광
일당의 음모를 분쇄하는 운동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회광은 불교 확장이
라는 미명하에 일본 조동종과 결탁하여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종교의
분야에 까지 확대 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만해는 여러해 승려 대회를 열어
일본 불교와의 연합 획책을 규탄하여 결국 친일 흉계를 백지화 시켰다. 또한
그는 구국 독립 실현을 위해 지극히 인도 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불교
의 근본이념을 실천으로 보여 주면서도 총 종교적인 이념구현에 압장섰다.
그야말로 조선 불교의 은둔주의와 몽매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던 열렬한 승려
이자 시인이었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지눌과 원효의 사상과 전통을 이어받은
진정한 인물 이었다.
불교는 3.1운동과 신간회등의 항일 투쟁에 동참한다. 3.1운동의 민족대표
의 자격으로 백용성,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참여하고 전국 사찰에서 독립 선언
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주도 하였다. 민족 연합전선인 신간회가 만들어
지자 조선불교 청년회와 불교 여자 청년회의 회원들은 신간회와 그자매 단체
의 근우회에 각각 참여 했다. 또한 비합법적 비밀결사운동으로 만당(卍黨)을
결성했다.
******* 참고 *******
日帝下에서의 대처승
日帝의 침략은 이 땅의 불교에도 비극의 씨앗을 뿌렸다. 소위 內鮮一體라는
구호 하에 한국 불교의 왜색화 경향이 노골화된 것이다. 일본 불교는 생활불
교를 표방하면서, 승려의 결혼.육식등에 대해서 관대하였다. 반면 한국 불교
는 참담한 현실속에서도 청정한 율행(律行)을 생명처럼 지켜오고 있었다. 또
당시의 33本山을 중심으로 하여 스님들의 도쿄 유학이 시도된 적이 있다. 그
때 한국에서 파견된 이들의 대부분은 대처승(帶妻僧)의 신분이 되어 되돌아
왔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야기된 이른바 비구 대처의 갈등은 이렇게 시작되었
다. 1945년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에 대한 특별유시가 있었다. [왜
색(倭色) 승려는 사찰에서 물러나라. ] 는 내용이었다. 왜색 승려는 구체적
으로 대처승을 가리킨 용어였다. 그 해 선학원에서는 비구승을 중심으로 하
는 승려 대회가 열렸다. 대통령의 유시내용 대로 전국의 사찰에서 대처승을
몰아 내기 위한 결의 대회였다. 이 회의를 주도한 이들로는 曉峰(효봉), 金
鳥(금조), 東山(동산), 靑潭(청담)등을 들 수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당시 비구의 숫자는 전국을 통틀어 200여명을 넘
지 못했으리라는 추정이다. 따라서 이들은 전국 사찰 1천2백여개소를 관할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레서 당시의 기성교단과의 타협이
불가피 했다.
당시 태고종(지금의 조계종) 종무원 (지금의 총무원)에서는 중재안을 냈
다. 즉 전국의 사찰을 궁극적으로는 비구승들에게 양도하지만 현재의 대처승
들에게 그 당대만은 사찰 거주를 허용 할 것, 비구승들의 수도처를 20여군데
지정하여 단독으로 수행에 전렴토록 할 것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
로 자신의 사찰을 비구 도량으로 선뜻 내 놓는이가 없었다. 양측은 서로 빼
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계속 벌여 나갔다. 1960년의 불국사 난투극은 이 갈
등의 절정이었다. 드디어 양자는 결별을 선언하고 비구승들은 통합 종단으로
서 [대한 불교 조계종]을 탄생시켰다.
한편, 대처 승단은 태고종으로 발족하게 된다. 이 때가 1962년 이였다. 이
와중에서 망실된 재산과 토지는 그 양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과적으
로 불교에 대한 정부 관권의 개입이라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형태를 낳게 된
다. 또 5.16 쿠데타 직후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서 불교계의 여러 종파들을
등록 시킨 것도 문제 였다. 비슷비슷한 종풍(宗風)을 내건 불교 단체들이 문
공부에 등록하였다. 이 때를 전후 하여 한국 불교에는 26개의 종파가 난립하
게 된다. 조계종의 첫번째 수행 과업은 태고종이 소유하던 사찰들의 합법적
인 접수 였다. 정화라는 기치아래 거의 모든 사찰들이 조계종으로 등록하게
된다. 이 접수 과정에서 무자격한 승려들이 대거 조계종안으로 스며든다. 이
들은 수행이나 사회제도에는 관심이 없고 재산권의 이득만을 노리는 이들이
승복을 걸치게 된 것이다. 조계종단 안에서 폭력이 활개를 치게 된것이다.
오늘의 비극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악연(惡綠)이 뿌린 인과응보이다. 정화
불사를 주도 했던 청담(淸潭) 스님은 이점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다음으로 조계종에 주어진 문제는 총무원의 재정적인 독립이었다. 분규에
따른 소송은 해당 사찰이 감당하는 것보다는 총무원이라는 대표성 있는 단체
가 맡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총무원에는 자금 동원 능력이 없었다. 따라
서 각 본사를 통한 분담금 납부 제도가 실시 된다. 특히 전국의 명찰이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막대한 입장료 수입이 생겼다.
물론 그 돈의 일부는 문화재 보수등을 위하여 지방 단체장이 관리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사찰의 운영에 쓰이게 된다. 이 이권을 둘러 싼 잡음들도 끊
일 사이가 없었고 그래서 조계종 총무원의 자리는 늘 단명(短命)일 수 밖에
없었다.
지난 18년 동안 24명이 총무원장직을 거처 갔다. 평균 수명이 8개월 밖에
안되는 것이다. 본사 주지의 임면권을 총무원장이 장악하지만, 돈은 본사 주
지가 쥐고 있기 때문에 이 마찰은 피할 길이 없다. 서의현 총무원장은 86년
에 취임하였다. 그는 현대 조계종사에서 유일하게 임기를 채웠을 뿐만 아니
라 연임을 거쳐 3선까지 바라보았던 인물이다. 그가 재직한 8년은 아마 당분
간은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을 듯 싶다.
[불교강좌28] 한국불교사6 (5,60년대)
28. 5, 60년대 불교
1.정화운동 ( 잘못 끼워진 단추 )
1) 정화운동의 태동 - 1차 혁신운동
일제국주의의 대한(對韓)불교정책은 한국불교의 왜색화와 총독부로의 종권
이양책을 그 골자로 하였으며 이는 대처승의 육성과 사찰령의 실시로 현실화
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조치를 통하여 일제국주의는 불교를 식민통치의 수단
으로 효율적으로 이용했고, 불교는 자율성이 말살되고 전통성이 거세되어 갔
다. 사찰령은 주지전횡제도를 가능케 하였으며 주지임명권을 총독부가 지님
으로써 종권을 완전 장악하는 수법이 관철되던 상황이 바로 해방직전의 상황
이었다.따라서 해방후 불교계의 과제는 식민잔재의 청산과 민족불교의 전통
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친일매국,보수파 타락승, 매교승의 제거와 교단의
정화, 또한 불교계에 뿌리박혀 있는 일제 불교정책의 잔재청산이 가장 긴급
한 과제였던 것이다.불교내의 반민족적,반불교적 요소들은 척결하고 불교의
순수성을 되찾고자 하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전개된 것이 불교정화운
동이었다. 불교정화운동은 '불교혁신 총연맹'에 의해 전개되어진 1차 혁신운
동에서 그 태동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잠시 1차 불교혁신운동을 살펴보자. 제1차 불교혁신운동은 '불교
혁신회','불교혁신동맹'.'불교여성 총동맹','혁명불교도연맹','선학원','불
교청년회'의 7개 단체가 모여 결성된 '불교혁신 총연맹'에 의해 전개되었는
바 그들이 내세웠던 목표들은 네가지로 압축요약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사찰령에 의한 주지 전횡의 폐지
둘째, 불교의 대중화
셋째, 부패된 교단의 혁신
네째, 사찰재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수도에만 전념하는 승려상 확립
이와 같은 1차 혁신운동의 주요 목표들을 살펴보면, 이 운동이 민족적 각
성과 종교적 양심을 자기 출발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1차 혁신운동은
,불교혁신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일
조해야 한다는 지향점을 파악해 내었다. 자연히 혁신운동은 주체적 실천으로
전개되었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면
서 그 세력을 넓혀 갔다.이러한 불교혁신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되자 위협을
느낀 미군정과 보수,어용 총무원은 불교내의 진보세력을 좌경,용공으로 매도
하면서 탄압을 가하였으며 불교혁신 총연맹은 47년 11월 해산 당하고 만다.
관권의 탄압을 피해 혁신연맹의 중요인물 56명이 월북하게 됨으로써 1차 불
교혁신운동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2) 정화운동의 왜곡및 변질 - 이승만의 정화유시
정치적 혼란과 6.25의 민족사적 비극은 불교계의 민족적 역할 모색의 미진
한 기운마저도 끊어버리기에 충분했던 것일까? 역사적 격변기에 불교계는 붓
다 가르침의 전파와 그 실천이라는 대의를 역사공간에 실현해 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제가 심어 놓고 간 상처의 씨앗은 너무나 질긴 생명
력을 지녔었다. 일제가 한국불교에 뿌려놓은 씨앗은 ,대처승의 급속한 증가
와 그로 인한 청정비구 승풍의 무너짐이라는 상처로 남았다. 상처의 생체기
는 쉬이 아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4년 당시 한국불교의 승려 분포를
보면 대처승이 7000명이었는데 반해 비구승은 200여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비구측의,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정기 고양은 대처승의 추방으로
귀결되어지는 듯한 기운이 감돌고 있을 무렵,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정권
은 불현듯 정화유시를 내린다. 이것이 1차 정화유시였으며 그 내용은 '처자
를 거느린 사람은 승려가 아니므로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한마디
로 대처승 추방유시나 다름없었다. 불교에 각별한 애정도 갖지 않고 있었던
독실한 크리스챤 대통령이 왜 하필 이런 미묘한 문제에 대한 발언을 서슴없
이 하였을까? 대통령은 크리스챤이었기에 당연히 불교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
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돌출한 사건이라고 여기면 될까? 아니면 의도된 정
치적 계산이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결론은 앞으로의 서술 속에서 명백해 지
리라 본다. 계속해서 그 때의 정황을 살펴 보자. 이후, 이승만은 3차례에 걸
쳐 정화유시를 내리게 되고 불교계는 비구-대처의 확연한 대치선이 그어지게
된다. 이승만의 1차 유시이후, 대처승에 대한 비구승의 요구가 '수행사찰 분
배요구'에서 '종권인계'로 비약했던 것이다.1차 혁신운동의 좌절 이후 뚜렷
한 진전이 없던 정화의 의지는 이승만의 정화유시를 도화선으로 하여 비구-
대처의 종권다툼으로 변질하였던 것이다.
3) 정화운동에서 비구-대처의 종권분규로의 변질
불교 내의 비민족적,비불교적인 일제의 모순들을 척결하고 불교의 순수성
을 되찾고자 한 정화운동은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자 한국불교의 과제였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와 의지를 지녔던 정화운동은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거니
와 6.25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운동'으로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던
처지에 놓여 있었다. 바로 이때 단행되었던 것이 이승만의 1차 정화유시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땅의 불교세력들은 이승만의 유시를 정화운동의 계기
점으로 포착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서술을 통하여 밝혀질 것이지만 이것은
역사의 잘 못 끼워진 단추가 되어 버렸다. 첫번째 단추를 잘 못 끼워 버리면
우리는 끝까지 잘 못 끼워버리는 파국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이승만의 정
화유시및 정권개입이라는 계기점에서 출발한 정화운동은 한국현대불교사를
왜곡되고 뒤틀리게 만든, 그래서 잘 못 끼워진 단추의 구실을 하여 버린 것
이다.
4) 비구 - 대처의 종권분규
이승만의 유시가 있은 1개월 후인 1954년 6월 24일, 대처승들에게 눌려 지
내던 열세의 비구승들이 서울 선학원(禪學院)에 모여 대처승 추방결의를 하
였다. 이로써 불교정화운동은 '불교정화'라는 순수동기가 대의명분으로 전락
해 버리고 실제에 있어서는 비구-대처 싸움의 양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비구측의 대처승 추방결의를 종권도전으로 인식한 대처승 중심의 기성교단
은 1954년 7월, 1945년에 제정되었던 '조선불교 교헌'을 '불교 조계종 종헌'
으로 바꾸고 종단 대표직명을 다시 교정(敎正)에서 종정(宗正)으로 환원시켜
만암스님을 종정에 추대하였다. 계속해서 비구측에서는 두차례에 걸친 전국
비구승대회(1954.8.24 와 9.27)를 열고 대처승측에 자진 환속과 종권 이양을
요구했으며 그 해 10월 9일에는 조선불교의 총본산인 태고사(太古寺)를 강제
접수하고 사찰간판을 조계사(曹溪寺)로 바꾸어 걸었다. 대처측은 11월 23일
조계사 탈환을 시도하였으며 조계사 접수를 둘러 싼 공방은 1년동안 계속되
었다. 그 해 비구측은 4차례에 걸쳐 경무대를 방문하여 대처승 추방 협조를
거듭 호소하였다. 불교정화가 비구-대처의 종권다툼으로 변질,왜곡되면서 종
권쟁탈을 위해 정권에 의존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이다.
1955년 8월 11일 비구측은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조선불교 교헌'을 제
정하고 비구 독자적인 종단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조선불교는 두개의
총무원으로 갈라졌으며, 비구-대처의 대립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종단이
비구,대처로 두조각이 나자 대처측은 조계사 승려대회(1955.8.11)를 무효라
고 주장하면서 서울 민사지법에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 확인 소송'
을 제기(1955.8.15),법적투쟁을 시작했다. 이 소송제기는 계속해서 맞소송을
불러 일으키며 불교내 문제를 법정으로 번져 놓게 했으며 이는 앞에서 지적
했던 것처럼 정권과의 공생관계를 노리는 종권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0 여개월만에 내려진 법원의 판결은 대처승측의 승소판결로 끝났고
(1956.6.15) 서울 고법항소에서도 공소기각이 되어 대처승의 승소였
다.(1957.6.15) 서울 민사 지방법원에서 패소한 비구측은 패소의 원인을 집
행부의 능력부족이라 판단내리고 청담 총무원장을 인책 퇴진시켰
다.(1956.10.27) 그 후 비구 내분으로 인해 총무원장은 단명하였으며 끊임없
는 종권불안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1960년에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정부의 비호를 받은 비구측에
밀려 대부분의 사찰에서 물러가고 대처측은 조계사 탈환을 시도했으나
(1960.4.27) 실패로 돌아 갔으며 5월 3일 석가탄신일 기념행사 후 다시 '비
구승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비구측
은 '불법에 대처승 없다'(1960.11.19)는 구호를 내걸고 가두시위를 했다. 시
위의 공방이 계속되던 중 이청담스님을 위원장으로 하는 '불교정화 대책위'
를 구성하고 승려대회를 열었다. 승려대회에서는 대법원에 계류중인 '사찰정
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 확인 소송'을 오판할 경우 순교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11월 24일 대법원이 서울고법에서 내린 대처측 패소판결을 파기하고 환
송판결을 내리자 비구,비구니 500여명이 대법원에 난입, 집단시위를 벌였으
며 6명이 할복을 기도하였다. 검찰을 대법원 난입과 관련하여 비구승 24명을
구속,기소하였다.(1960.12.21)
1960년 한 해가 저물고 대법원 난동을 몰고 왔던 상기(上記)의 소송은
1961년 3월 대법원이 비구승단을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비구측의 승소로 결
론지어졌다. 그러나 전국 사찰 쟁탈전은 오히려 더욱 가속화 되어 아침마다
주지가 바뀌는 사태가 속출하고 이런 사태들은 곧장 법정투쟁으로 이어졌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종헌 쟁탈전이 지루하게도 이어질 무렵, 5.16군사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1,2차 불교정화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고
(1961.11.9 , 12.9) 문교부는 '불교재건위원회 조례안'을 양측에 제시하나
거부되었다. 이에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 명의의 담화를 발표하였는 바 그
것은 "불교계의 분규를 조속히 종속하고 대동단결하여 불교자체의 융성과 민
족문화의 향상에 힘쓰라. 정부는 불교재건위원회를 만들어 국민의 여론
에 따라 이를 시정하려고 했으나 거두지 못하였음은 유감된 일 분쟁관
계자들은 대국적인 견지에서 해결을 모색하라. 이와 같은 분쟁사태가
계속된다면 단연코 묵과하지 않겠다." 는 요지를 담고 있었다.(1962.1.13)
박정희의 담화가 있은 며칠 후 비구-대처 양측 대표들은 문교부에서 주선
한 '불교재건위'구성에 극적으로 합의했다(1962.1.18) 1월 22일 양측 대표들
은 중앙공보관에서 문교부장관 참석하에 재건위 결성식을 가지고 1월 31일
제 4차 회의에서 통합종단을 구성키 위한 '불교재건 비상 종회 회칙'을 확정
하고 종회의원을 선임한 후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불교재건 비상종회는 새 종단(비구.대처 통합종단)의 명칭을'대한불교 조
계종'으로 하고 교조는 태고 보우국사로 하는 등 종명,종지 등에 완전히 합
의하고 2월 28일 종헌을 제정했다. 비상종회에서 승려 자격문제에 '대처승
기득권 문제는 문교부의 해석에 따른다'는 단서에 대해 대처측이 반발했으나
표결결과 가(可)-15 , 부(否)-14 , 무효-1 로 패배했다. 비구측은 3월 6일
대처측의 반발을 묵살하고 재 종헌을 제정, 21일 공포하였다. 5.16쿠테타 후
비구.대처 분규수습을 위해 구성된 불교재건 비상종회는 제 8차 회의에서 출
가독신 수행자만을 승려로 인정할 것을 의결하고 제 9차 회의에서는 종정에
이효봉스님을, 총무원장에 임석진 스님을 추대하는 등 새 종단 구성에 착수
하였으며 4월 11일에는 조계사에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비구.대처
통합종단인 조계종의 출범이 선포되었다. 이어 4월 14일 문교부에 정식 등록
함으로써 비구중심의 조계종이 한국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로써 비구-대처의 지루했던 종권분규는 일단락 되었다. 한때 대처측이
비구측과 다시 투쟁할 것을 선언하면서 서울 민사지법에 '조계종 종헌 무효
확인 및 종정추대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함으로써(1962.10.4) 새로운 분규를
예고하는 듯 하였으나 정부당국에 의한 대처측 반발 강력 억제 입장으로 사
그라들었다. 이 후 대처측은 대처측 제30회 중앙종회(1968.11.18)에서 통합
종단 백지화를 선언하고 대처측 제9차 전국 대의원회의 (1970.4.16)에서 '한
국불교 태고종'으로 독자노선을 선언함으로써 비구-대처는 각각의 종단을 가
지게 되었다.
5) 정화운동의 실패와 그 폐해
이승만의 유시를 계기로 50년대 이후 진행된 정화운동의 양상은 (불교혁신
운동 당시의 진보적 정신은 흐려져 버리고) 비구-대처의 종권분규로 왜곡되
어 나타났으며 그 전개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① 정부수뇌(이승만과 박정희)의 유시와담화로 시작되어 문교부가 개입하여
적극 중재를 시도 ② 양측대표가 일단 화합해서 통합문제를 의논하다가 '승
려'의 자격문제와 이에 따른 이해 관계로 대립 ③ 결국 문화부는 대처측의
완전 동의 없는 비구측의 통합종단 구성을 인정 ④ 대처승은 다시 이탈해서
법정에서 통합종단의 불법성(不法性)을 호소 ⑤ 1차에서 대처승 승소, 2차
에서 비구승 승소 등 법정판결의 번복을 계속 ⑥ 그 방법에 있어 단식,데
모,할복,법원 난입,유혈난투 등의 수단을 동원 ⑦ 문교당국은 물론 법원마
저도 불교정화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려 한다는 등등이 그것이다.
살펴 보았던 것처럼 불교정화운동은 민족사적 관점에서 일제잔재의 청산과
불교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이승만의 정화유시로
왜곡,변질되어 전개되고 내부의 자율적,자주적 정화운동은 말살되어 버렸다.
그 폐단을 살펴보면, ① 한국불교계에 제도적 규제와 계속적인 분쟁을 야기
시켰으며 ② 분쟁해결을 관권과의 결탁을 통해 해결하려는 악습을 조장하였
고 ③ 이로 인해 한국불교를 소수권력의 시녀로 전락시켜 버렸다. 또한 분
규과정에서 사찰재산의 유실과 임의적 처분,인적.물적 손실을 초래함으로 인
해 ④ 불교발전의 족쇄를 채우게 하는 '불교재산관리법'(현재,'전통사찰보
존법'으로 명칭만 변경되어 있을 뿐이다.)이라는 악법을 제정케 하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뿐만아니라 한국불교가 현대사를 관통하는 동안 내내 모순과 질
곡으로 몰아 넣는 원인인 ⑤ 종단과 승려의 자질 저하 ⑥ 종단의 분열과
종파의 분열 등의 폐해를 안겨다 주었다.
안타깝게도 비구-대처분규는 비구 종단내의 분규로 이어진다. 이제 비구
종단내의 분규를 살펴보자.
[불교강좌29] 한국불교사7 (7,80년대 불교)
29. 7,80년대 불교
2. 통합종단 조계종내의 분규
50년대 정화운동에서부터 잘 못 끼워진 단추는 통합종단이 들어 선 이후에
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한국불교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비구-대처
분쟁을 통해 비구 중심의 조계종이 한국불교의 최대종단으로 자리잡은 이후
에는 조계종 내의 종권분규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조계종 분규의 전체적 양상은 종단을 대표하는 종정과 종단의 행정을 책임
지는 총무원장과의 대립으로 일관된다. 명목상 종권을 대표하는 종정과 실질
적으로 종단을 대표하는 총무원장간의 반목은 종단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각
사찰별 문중,법맥의 대립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분규는 청담스님계와 경산스님계의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분규는 조계사측과 개
운사측의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통합종단 조계종내의 종권분규
를 이 양자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1) 60년대 말 - 70년대 초까지의 조계종 내분
통합종단 조계종은 종정에 효봉스님을 추대하고 총무원장에 임석진 스님
(대처측)을 선출함으로써 그 출범을 알렸다.(1962.4.11) 그러나 얼마가지 않
아서 대처측 임석진 총무원장 이하 집행부는 취임 5개월만에 조계종 초대 중
앙종회 의원의 구성비율(비구 32 : 대처 8)에 이의를 제기하고 전원 사임했
다.(1962.9.10) 이로써 통합종단의 초대 총무원장은 그 해 12월 30일자로 퇴
진하게 되고 비구측은 바로 당일 대처측의 김법룡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
하고 새 집행부를 구성하는 신속성을 발휘했다. 김법룡 충무원장은 계속되는
비구-대처의 알력 속에서도 3년 3개월이라는 조계종 사상 최장수의 재임기간
을 채우고 66년 4월 물러갔으며 김법룡스님의 후임으로 비구측의 손경산스님
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1966.4.12) 이로써 그 동안 - 외형적으로나마
- 균형을 이루어 오던 비구-대처의 균형은 무너지고 조계종의 실권은 완전히
비구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이 조계종의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손경산 스님은 통합종단 조계종에
가담한 대처측 화동파(和同派)에 대한 처리에 있어서 온건론을 유지하였다.
이에 반해 초대 종정인 이청담스님은 곪은 손가락은 절단해 버려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치고 있었다. 이들은 잦은 의견대립을 보이면서 청담-경산 이라
는 새로운 대립구도를 서서히 표면화시키기 사작하였다. 조계종 14회 중앙종
회(1966.11.30)는 통합종단의 제2대 종정으로 이청담스님을 재추대하게 되고
종정-총무원장의 잦은 의견대립은 문중,파벌의식이 개입됨으로써 종권다툼의
양상으로 번질 기운을 안으로 삭이고 있었다. 급기야 1967년 7월 해인사에서
열린 제16회 임시종회에서는 이 문제가 표면화 되었다. 여기서 당시 총무원
장 손경산 스님이 동국대학교 재단을 운영함에 있어서 종단이 4천여만원의
빚을 지게 된데 대한 규탄이 있었고 청담스님은 경산스님의 사퇴만이 해결책
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경산스님이 이에 불응하자 청담스님은 사표를
던졌으며 이에 경산스님도 어쩔 수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해인사 종회를 계
기로 청담,경산 두 거두가 종권의 정당에서 물러가자 조계종은 제3대 종정에
윤고암스님을, 총무원장에 박기종스님을 선출하였다.(1967.8.9)
1969년 8월 12일 한동안 조계종권에 멀어져 있던 청담스님이 "불교정화 이
념과 제반 불사가 부진함을 참회하여 대한불교 조계종을 탈퇴한다." 고 하여
조계종 탈퇴선언을 함으로서 조계종단은 다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들끓었
다. 청담스님의 조계종 탈퇴선언은 당시 총무원장 박기종스님에 의해 자신의
불교유신재건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등 총무원장과의 불화에서 기인한 것이
었다. 탈퇴선언이 있은 지 10여일이 지난 후 (1969.8.23) 청담스님의 탈퇴선
언에 자극을 받은 선학원(청담스님 지지파)측은 9월 1일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청담스님을 지지하는 선학원측과 총무원측의 대립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던 지점이었다. 청담스님탈퇴의 책임 문제에 대한 선학원
측의 강력한 공세를 받은 당시 총무원장 박기종스님은 사퇴할 뜻을 밝혔다
(1969.8.26) 이처럼 청담스님 탈퇴선언으로 본격화 된 종단분규는 청담스님
측과 경산스님측의 총무원 실권장악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으로 집약되었던
것이다. 이어 9월 1일 개최된 제21회 비상종회는 선학원측의 최월산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츨하였으나(1969.9.13) 봉은사 땅 매각사건으로 10개월만에
물러나게 된다. 최월산 총무원장 후임으로 다시 청담스님이 선출되어 청담
총무원장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1970.7.22)
새롭게 구성된 청담 집행부는 총무원장 외유중에 김경우 총무부장이 관악
산 염주암을 임의로 매각해 버림으로 인해 집단사퇴하게 되고 청담 총무원장
만이 임시중앙종회(1971.7.27)에서 재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15일
청담스님이 갑자기 입적함으로써 조계종 내분은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청담스님의 입적 후 그 후임을 놓고 조계종단은 다시 파란이 이는
듯 하였으나 비교적 파벌색이 적은 강석주 스님을 후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
였고(1971.11.23) 강석주 집행부는 청담스님 입적 열흘 후인 11월 25일 출범
하게 되었다. 강원장은 재임 1여년만인 1973년 1월 25일 손경산 총무원장에
게 종권을 넘겨 주고 물러났다.
2) 70년대부터 80년대 까지의 종권분규
봉은사 염불암 땅 매각사건으로 총무원 집행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때
손원장은 젊은 승려들의 옹립을 받으며 등장했다.(1973.1.25) 그러나 손원장
집행부는 73년 5월 윤고암 종정의 사회국장 해임 거부를 발단으로 종정 권한
문제를 둘러싼 종권다툼을 시작했다. 윤종정이 물러나고(1974.7) 문중배경도
없고 대처측 출신이라 종권을 전혀 넘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파벌색이
없는 이서옹스님이 종정으로 추대됨으로써(1974.8.3) 지루한 종권다툼은 일
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서옹 종정은 예상을 뒤엎고 종정 친정체제를 주장하면서 종단 실
무를 관장하겠다고 나서게 되고 이에 손경산 집행부는 정면 도전했다. 이 종
정과 손 원장의 종권다툼은 종정취임 두달만인 1975년 9월 30일 손 원장의
구속사태를 빚었다. 손 원장은 경기도 양주 대성암 토지 매각 대금을 다른
항목에 전용해 썼다는 '유용' 혐의로 조계종 사상 현직 원장이 구속되는 충
격적인 첫 사례를 남겼다. 손 원장의 구속사태로 새 총무원장에 송서암스님
이 선출되었다.(1975.10.6) 그러나 종권안정 여망과는 달리 송서암 집행부는
종단 행정 경륜의 일천함으로 혼미를 거듭하였고 이어 박기종 스님
(1975.12.5 - 1976.10.4) - 고경덕 스님 (1976.10.4 - 1976.12.3) - 김자운
스님(1976.12.3 - 1977.3.23)등이 차례로 총무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물
러나게 됨으로 종권은 불안하기만 하였다. 김자운 집행부에 이어 김혜정 총
무원장 집행부가 새로 구성되었다.(1977.7.23) 김혜정 총무원장 집행부는 서
옹 종정측으로서 실무친정의 근거지가 되고 이에 반기를 든 종회 중심의 재
야세력은 김혜정 집행부에 강경히 맞섰다.
종권다툼의 양상은 종회측의 이 종정 불신임안 통과(1977.10.7), 종정직
해임 확인 청구소송(1977.11.9), 이 종정의 종회 해산 명령(1977.11.11)의
공방을 벌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종회측은 해인사 종회후 채벽암 스님
을 종정 직무대행으로 추대하고 서울 개운사에 임시 총무원 간판을 내달게
되었다.(1978.3.10) 마침내 조계종단이 조계사 총무원(종정)측과 개운사 총
무원(종회중심의 재야)측으로 양분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조계사측과 개운사측으로 양분된 조계종의 내분은 80년에 들어서면서 재판
판결과 승단 지지도가 개운사측으로 확연히 기울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은 대립구도 탈피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협상에 임한 결과 분규종식을
위한 종회의원 총선에 합의하게 되었다.(1980.3.30) 합의에 따라 제 6대 종
회의원 선거가 전격적으로 실시되었으며(1980.4.17) 새로 구성된 제 6대 의
원의 표대결로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과 종회의 정.부의장을 선출하였는데 모
두 개운사측이 독점하였다(1980.4.26 - 4.27) 이에 조계사측이 반발하여 종
정추대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의 출범이라는 성과를 얻은 당시 상황은 3년
동안 계속된 조계사,개운사 만의 종권분규를 완전 종식시키지 못하였다. 조
계종단은 법적인 통일만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이 당시 종정 추대에 실패한
종회가 다시 5월 7일 종회를 열어 종정추대를 재시도했으나 총무원장, 종회
정.부의장 등을 모두 개운사측이 독점한 것에 반발한 조계사측이 다시 송월
주 총무원장의 자격미달을 들고 나와 당선 무효를 주장하였고 이를 계기로
양측의 공식 대회는 두절되고 와해 상태로 돌입했기 때문이다.
5월 13일 개운사측이 조계사측의 총무원을 강제로 점거하면서 양 조계종단
은 다시 내분상태로 되돌아 가게 되었고 이를 주시하고 있던 사찰 당국은 조
계종단이 더 이상 자체 정화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무력으로 조계종단을 정
화하려 했다. 이것이 이른바 한국불교 1600년 사상 가장 치욕적인 10.27법난
이었던 것이다.
조계종은 1980년 11월 8일 '정화중흥회의'를 발족시켜 법통을 잇고 이어
종헌을 개정하고 이성철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고 이성수 스님을 총무원장
으로 선출하였다.(1981.1.7) 조계종 '정화중흥회의'가 총무원 중심제의 종헌
을 탄생시킴으로써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는 여러 형식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그 효력을 발휘하였다. 총무원장은 본,말사 주지 임명에 개입하면서 파벌,문
중의식을 확대,재생산해 내고 그 과정에서 각종 비리,부패의 진원지가 되었
다. 이로써 81년 이후 1년동안 4번이나 총무원장이 교체되는 난맥상(성수 >
초우 > 법전 > 진경)을 노출하였다. 1982년 4월 6일 총무원장으로 새롭게 선
출된 황진경 스님 역시 - 10.27법난이후 실력파로 부상해 있었던지라 종권불
안정을 종식시키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 당시 동맹관계에 있던 서의현 종회
의장으로부터 종권도전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1983년 8월 6일 신흥사
주지 교체 인사를 둘러싸고 전대미문의 승려살인 사건을 유발하였다. 이에
황원장은 책임을 지고 자진 사임했다.(1983.9.3) 이에 앞서 원로스님들은 봉
은사에서 원로회의를 열어 '조계종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신흥사 사태에 대
한 책임을 물어 당시 총무원 집행부와 종회의원 모두를 사퇴시키고 총무원과
종회를 해산키로 결의하였다.(1983.8.27)
1983년 9월 5일에는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되고 여기에서 비상종
단운영회의설치가 결의되었다. 신흥사 사태수습을 명분으로 출범한 비상종단
은 김서운 총무원장을 내세우고 평화적 종권 인수인계를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서울 봉은사에 임시 총무원 간판을 걸었다. 비상종단은 그 동안
소장승려와 '불교사회문화연구소'에서 꾸준히 준비해 온 개혁안을 토대로 개
혁작업을 실행해 나갔다. 비상종단의 개혁작업은 혁신적이고 구체적이었으나
종단 내의 보수기득세력과 권력의 공작에 의해 좌초되고 말았다. 즉 1984년
8월 1일 재야측이 이성철 종정의 지지를 받으면서 소집한 전국승려대회가 만
장일치로 비상종단을 불신임하고 오녹원 총무원장을 선출하였고 2일에는 총
무원을 접수하였던 것이다.
[불교강좌30] 한국불교사8 (90년대초 불교)
30. 90년대초 불교
3) 88년 봉은사 분규
1988년, 서의현 총무원장과 봉은사 주지였던 변밀운 스님간의 종권다툼으
로 인해 봉은사 분규가 발생했다. 당시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하에
서 그들의 종권다툼은 폭력적 물리력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당시 민정당
후보였던 노태우를 당선시킴으로써 그 이후 종권을 보장받는 형식으로 나타
났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로 앞다투어 노태우 당선기원법회를 열었던 것이
다. 87년 대선 이후 정권이양 이후 종권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서의현 체제에
반기를 든 세력들이 밀운스님을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총무원 체제를 꾸리
면서 분규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권을 등에 업고 중앙승가대 발
전을 담보로 하여 학인스님들을 전면에 내세워 폭력으로 봉은사를 접수하는
사태로 이어졌으며 접수의 성공으로 봉은사 분규는 일단락되었다.
4) 91년 종정 선출을 둘러싼 분규
한편, 1991년 2월로서 임기가 만료된 성철스님의 후임을 놓고 성철스님의
연임을 주장하는 범어문중과 원산스님의 추대를 주장하는 덕숭문중간의 대립
으로 새로운 분규가 시작되었다. 8년 종헌 개정시 종정선출권한이 원로회의
에 있는가 종회에 있는가를 놓고 대립하던 양 세력이 각기 '비상수습대책위'
와 '전국교구본사주지연합회'로 조직을 꾸리면서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때 서의현 총무원장이 범어문중에 가담하게 되고 이에 '교구본사
주지연합회'로 반 서의현세력이 결집하면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각각의 총
무원을 구성하게 되었다. 반대측 역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성철스님을 종정
으로 재추대하였다. 이는 뿌리깊은 문중,파벌의식이 초래한 한국불교의 또
하나의 뒤틀린 모습이 아닐 수 없다.
5) 종단분규의 원인과 그 해결
이상에서 본 고는 한국현대불교사를 다루면서 청산해야 할 역사를 조명해
보았다.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한국불교는 종권다툼의 각축장화 되었고 그것
은 끊임없는 종단분규,종권불안으로 이어졌음을 살펴보았다. 과히 '현대한국
불교사는 종단분규사'라는 명제를 실감할만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종단분규
의 양상을 좀 정리하고 넘어가자. 종단분규는 주로 3가지 유형으로 표출되었
다. 즉 주지임명에 관한 분규, 총무원장 선출 혹은 정통성에 관한 분규, 종
정선출 혹은 종정과 총무원장간의 갈등에서 일어난 분규가 그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종단분규의 원인은 무엇일까? 종단분규의 원인을 묻는 한
설문조사에서 스님들은 ① 일부 기득권 스님들의 종권욕, 이권다툼(65.5%)
② 불교사상의 혼란과 수행정진의지 부족(20.6%) ③ 종단제도의 미흡과 운
영의 불합리(8.1%) ④ 정치권력의 불교계 이간책(5.6%) 등의 순으로 인식하
고 있었다. 위 4개항은 불자들의 의식문제에서부터 교육,수행,포교 등 제도
개혁의 문제 나아가 종단 내의 비민주적 요소를 온존케 하는 악법제도, 정권
에의 예속성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요인들은 서로가 서
로에게 원인 - 결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어느 하나의 요인을 절대적으로
지배적인 요인이라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종단분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종단분규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으로 만나는 지점이 정화운동이다. 정화운동의 폐해
가 현재의 종단분규의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던 바에 의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정화운동 역시 다른 원인의 작용이었다. 그것은 바로 일
제 잔재의 온존이며 일제 잔재의 온존은 일제국주의의 조선 지배정책의 일환
이었던 '사찰령'의 온존을 의미한다.
사찰령은 한국불교의 여러 전통을 파괴하면서 한국불교 모순의 원인으로서
작용하여 모순을 확대, 재생산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즉, 사찰령은 전국의
사찰을 본사와 말사로 구분하고 본,말사 주지의 임명을 총독부가 담당케 함
으로써 불교를 식민지적 지배하에 놓이게 했으며, 일제에 의해 임명되는 주
지에게 권한을 극대화시켜 줌으로서 '주지 전횡제도'를 가능케 했다. 일제가
물러가고 난 후부터 총독부의 역할을 총무원이 대신하고 있고 총무원은 다시
정치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왜곡된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주지전횡
제도와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로 귀결되는 제도적 악법이 현대불교사를 규정
한 종단분규의 원인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단분규의 또 하나의 원인은 정권의 재창출, 정통성 확보를 위해 종단분
규의 씨를 뿌리고 개입하기도 하는 역대 정권의 기만성이다. 이승만 정권의
정화유시로부터 10.27법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5, 6 공화국 下에서의 정권
과 총무원과의 관계는 이를 잘 증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91년 이후 종단분규의 한 양상으로 나타난 종정선출을 둘러싼 종권다
툼은 문중간의 파벌의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자기 문중하에 보다 많은 사
찰을 운영하기 위하여 문중들은 종정과 총무원장을 자기 문중하에서 배출하
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실제 초탈해야 할 재산권과 인사권의 확
보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문중간의 파벌의식은 종단분규의 한 원인으로서
충분히 작용해 왔던 것이다.
종단분규의 원인이 이러할진대 그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그 해결방안은
개혁일 수 밖에 없다. 오직 새로 태어남으로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밖에 없
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유신(維新)이란 것은 무엇인
가? 그것의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신의 어머
니이다."라고 갈파하였다. 과거 모순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파괴해 버릴 때만
이 유신과 개혁은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의 방향을 살펴보면 ① 정권
으로부터의 '자주'를 획득해야 하며 (불교의 자주화) ② 총무원장 1인 독재
체제, 주지전횡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제도적 개혁) ③
한국불교 모순의 책임자는 불자 대중 자신이라는 의식으로 전환해야 하며
(의식개혁) ④ 불교사상을 현대적으로 정립해야 하며 (사상의 혁신) ⑤ 청
정,화합의 승풍을 진작시켜야 (승풍진작,인물개혁) 하는 것으로 압축될 것이
다.
3. 끊이지 않는 탄압과 훼불
누누이 강조하는 바 한국불교의 모순은 한국의 민족모순이 불교적으로 전
이된 것이다. 현대사에 있어서 한반도의 민족모순은 일제국주의와 미제국주
의의 뿌리깊은 식민정책에 의해 그 골은 깊고 넓어만 갔다. 제국주의의 식민
정책은 문화정책에도 일관되게 흐르며 문화정책은 종교정책을 포함시킨다.
제국주의적 문화침탈에 의해 민족종교인 불교의 모순은 극도로 심화되어 왔
다. 그 모순들의 현실태로서의 종권분규를 앞에서 다루었다. 이제 그 모순의
또 다른 현실태인 탄압과 훼불을 개략해 보려한다.
탄압은 주로 자체 정화능력의 결여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정치적 계산에 의
해 개입하면서 불교의 정치권력에 대한 예속성,의존성 심화를 조장하는 형태
로 나타난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승만의 정화유시와 10.27법난이다.
뿐만 아니라 탄압은 민족세력화, 진보세력화의 조짐을 보일때 정권은 철퇴를
가함으로서 민족,민중의식 고양의 저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원각사 법
당 난입사건, 각종 집회방해로 나타난다. 훼불은 ① 제반정책에 있어서 소
외시키는 유형 ② 기독교 편향의 사회,문화 속에서 왜곡,변질 시키는 유형
③ 군 내의 불교탄압 유형 ④ 이교도들에 의한 불교비방, 훼불유형 등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끊이지 않는 탄압과 훼불은 근본적으로 불자 대중의 각성을 바탕으
로 불교의 자주화, 불교의 혁신, 민족문화의 고양을 통해 극복되어질 수 있
으리라 본다. 이것은 단순히 불교중흥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 중흥의 계
기로 작용한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불교강좌31] 한국불교사9 (개혁불사)
31. 90년대 불교
1. 종단개혁투쟁의 발단과 그 전개
1) 종단개혁투쟁의 발단 - 서의현 반대투쟁
종단개혁투쟁은 서의현 반대투쟁을 그 촉발지점으로 하여 개혁회의의 출범
과 해체, 개혁종단의 출범, 개혁종단의 지속적인 개혁작업을 포괄한다. 그러
한 의미에서 종단개혁투쟁은 여전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종단개혁투쟁의 촉발지점으로 작용하였던 서의현 반대투쟁을
살펴본다. 1994년의 벽두 상무대 이전공사 자금유용에 대한 국방부 특검단의
수사발표(1994.1.27)가 있은 다음 날 조기현은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및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수감 되었다. 이를 전후로 하여 상무대 이전
공사 자금과 관련하여 각종 소문이 나돌고 있었는데 이때 민주당 정대철의
원이 '상무대 비자금 조성'의혹문제를 폭로하였다. 폭로의 내용인 즉,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던 청우종합건설대표 조기현이 상무대 이전사업의 대
금으로 받은 금액중 223억원을 비자금으로 조성하고 이 중 80억원을 동화사
대불공사에 시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화사 대불공사에 시주했다는 80억
원은 서의현을 통해 대선시기에 김영삼후보쪽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상무대 비리사건은 ① 서의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으며 ② 여전히
불교계 종단권력이 정치권력과 결탁해 있으며 정치권력 역시 종단권력과의
모종의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이 드러 났으며 ③ 서의현으로 상징되는
부패,비리 기득권 세력의 제거가 필연적이며 ④ 이러한 일련의 이유로 인하
여 불교의 개혁이 필연적이라는 불자대중의 인식이 급속히 확산되어 가는 계
기가 된 사건이었다.
한편 서의현은 '상무대 비리사건'이 자신의 차기 종권장악에 막대한 타격
을 입힐 것이라 예상하고는 이 사건을 조기에 진압하고 종권을 장악하기 위
해 3월 18일에 차기 총무원장선거를 3월 30일 개최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같은 불교개혁을 꾸준히 모색해 온 종단개혁세력은
이와 같은 서의현의 불법적이고 도발적인 3월 30일 종회개최설에 반대하여
하나로 세력화 되는 바, 그 세력화의 결과가 바로 '범승가 종단개혁 추진회
(범.종.추)'의 결성(1994.3.23)이었던 것이다.
상무대 비리사건과 3월 30일 종회개최발표는 범종추를 종단개혁투쟁의 구
심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종단개혁투쟁의 구심점이 된 범종추는 3월 26일
부터 '구종법회'를 이끌어 나아갔으며 이에 앞서 3월 25일에는 한국대학생불
교연합회와 동국대 불교학생회 학생들이 농성에 돌입하였다. 종단개혁의 열
기는 승,속을 불문하고 불자대중의 가슴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던 것이
다. 3월 28일에는 종단개혁을 위한 결의대회를 가지며 '서원장 3선음모 결사
반대'를 결의하고 '상무대 80억 비리의 진상규명'을 촉구하였다. 이후 3월
29일 새벽 6시 30분 서의현 총무원장은 조직 폭력배 300여명을 사주하여 총
무원에서의 농성스님및 재가불자들을 습격하였으며 경찰들은 농성자들을 강
제연행하기에 이르렀고 종단개혁세력은 이 날의 강재연행,폭력을 3.29법난으
로 규정하고 불교개혁을 가로막는 정치권력과의 일대격전도 불사할 것을 선
언하였다.
3.29법난 당시 범종추 소속스님들 뿐만 아니라 대불련 소속법우들 역시
(대.경지부에서도 30여명이 참가하였다.)강제연행,폭행을 당하면서 불교자
주,불교개혁의 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한 열의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비
호를 받은 서의현 세력은 3월 30일 제 112회 임시중앙종회를 개최하여 서의
현의 3선을 결의하였다. 바로 다음 날 재가불자들의 조직적이고 한층 더 강
력한 투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불교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재가불자연합'이
창립을 선언하고(1994.3.31) 범종추와 함께 종단개혁완수를 위해 투쟁할 것
을 결의하였다. 이후 몇번의 양심선언이 서의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고
이에 맞서 서의현 세력의 강제로 추측되는 서암스님의 승려대회 중지교시가
발표(1994.4.9) 되는 등 혼미를 거듭하면서 결국에는 4.10 전국승려대회 개
최로 이어졌다. 전국승려대회에서는 ① 서암종정 불신임 결의 ② 서의현
원장 공직박탈 결의 ③ 개혁회의 출범선언 ④ 개혁회의 의장에 월하스님
선출 등이 이루어졌고 곧 이어 총무원 접수를 시도했으나 경찰은 다시 이를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스님및 재가불자들을 강제연행하였다. 이에 원로스님 6
명이 단식농성에 돌입하고 4월 11일 원로회의는 조계종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개혁회의는 3.29, 4.10법난을 책임지고 김영삼 정부 퇴진, 최형우 내무장관
구속을 촉구하였다. 4월 13일에는 공권력이 철수하였고 개혁회의는 총무원을
접수하였으며 이어 새벽 5시에는 서의현 원장이 사퇴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날 오후 2시 조계사에서는 1만여명의 대중이 참가하여 범불교도 대회를 개최
하였고 개혁회의 현판식이 이루어졌다. 원로회의는 4월 10일의 전국승려대회
의 결정을 추인함으로써 서의현 반대투쟁은 승리로 결론지어졌다.
2) 종단개혁투쟁의 전개 - 개혁회의의 출범과 개혁작업
개혁회의는 ① 불교의 근본정신 회복및 승단 위계질서 확립 ② 교단의
자주성 확립 및 불교관련 악법폐지 ③ 교단의 민주적 운영과 재산공개 ④
여법한 주지인사 실시 및 무분별한 불사 지양 ⑤ 파벌적 문중의식 타파 및
승가 후생복지 증대 ⑥ 승가교육제도 정립 ⑦ 의식,법복,의제 정비 및 통
일 ⑧ 포교활성화 및 사회복지사업 추진 ⑨ 재가불자 종단 참여모색 ⑩
인권,환경 등 사회역할 증대 등 10가지 공약을 제시하면서 출범하였
다.(1994.4.13)
개혁회의의 출범은 개혁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의 시작을 의
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서의현 반대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개혁의 토대를
일정부분 이루어 놓았으며 개혁의 물꼬를 튼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서의현으로 상징되는 기득권 세력의 몰락 그 자체가 불교개혁의 완수일 수
없을 뿐더러 서의현 반대투쟁의 승리 이후에도 여전히 보수기득권세력이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종권에 도전하는가 하면 일부는 시기를 노리며 잠복하고
있는 실정이기에 불교개혁은 너무나 멀고 험난한 길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서의현 반대투쟁을 촉발로 전개 된 불교개혁투쟁은 종단 권력구조의 개편
이라는 차원에서 머무르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 1600년 동안 축적되
어온 모순의 총체적 해체와 그를 통한 한국불교중흥이라는 불자대중의 염원
을 실현시키는 일련의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이 되어야한다. 그러하기에
개혁은 총체적일 수 밖에 없다. 그 총체성은 제도개혁, 인적 청산 ,의식개혁
등 모든 개혁의 내용과 대상을 포함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임무를 자기 임무로 설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개혁회의였고 개
혁의 총체성은 개혁회의의 임무임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개혁회의는 출범 이후 6월말까지 ① 개혁회의의 존립근거를 마련해 줄 개
혁회의법 마련 ② 월하스님을 종정으로 추대 ③ 훼종조사 특별위원회를 열
어서 기간의 부패승려에 대한 조사와 사찰에 대한 감사실시 ④ 대체 권력체
계에 대한 법안 마련과 공청회 개최 ⑤ 재적 본사별 승적 재정비 ⑥ 법난
책임을 물어 김영삼 대통령의 사과와 최형우 내무장관의 해임요구 운동 전개
⑦ 동화사,은해사,선본사,보문사 등의 기존의 반개혁세력이 잔존하고 있는
사찰에 대한 직할사찰 운영 등의 일들을 해 왔었다.
개혁회의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불자대중과 국민들에게 보여 줌으
로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혁종단의 출범을 머리 속에 그려보게 만들었
다. 그도 그럴 것이 개혁회의는 1차부터 마지막까지 공개회의의 원칙을 지켰
으며 방청을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방청하게 한 것이며 법제화의 과정에
서 각종 공청회의 개최를 통하여 불자대중의 참여를 유도한 것과 '열린마당'
을 통하여 종도들의 의견을 수렴한 것, 그리고 개혁회의의 진행과정을 '개혁
회의 뉴스', '불교신문' 등의 지면을 통해 공개하여 의견을 수렴한 것 등은
분명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한 개혁회의는 산하에 '법난 대책
위'를 설치하여 법난에 대한 대 정권 규탄투쟁을 멈추지 않으며 '불교 자주
화'의 당위를 지속적으로 천명하였다.
그러나 개혁회의의 개혁작업들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개혁회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은 물 건너갔다'는 등의 비아냥을 받아야 했으며 이는 잠복해
있던 보수세력의 결집이라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개혁작업이 중도에서 표류
하게 된 원인들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며 그것은 개혁완수를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개혁표류의 원인은 종단개혁투쟁에 참여했던 진보세력이
종권을 얻어내면서 변절을 시작했고 재가불자들의 고립이 결국 대중이 아닌
소수세력에 의한 종단 운영을 유도하였으며 진정한 개혁에 대한 의식결여 등
등의 개혁회의의 자체적인 원인과 외부적인 원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나
세부적인 평가들은 이후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경위들을 먼저 살펴보
자.
개혁회의가 다각도로 개혁을 추진하긴 하였으나 개혁의 구체적인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반개혁세력은 자신들의
복권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혁회의가 반개혁세력이 온존하며
그들의 물적토대가 되고 있는 사찰을 직영사찰로 하여 새로운 주지를 발령한
것에 대해 반개혁세력이 집단적인 소송을 전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다 우여곡절 끝에 개혁회의에서 통과된 종헌이 (1994.8.11) 원로회의에 의해
서 인준이 보류(1994.8.23)되면서 위기감은 고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출범
하면서 기존 종회를 끌어안기 위해서 기존 종회의원 39명을 포함함으로 인해
서 내부적 진통에 시달리던 개혁회의가 외부적 도전까지도 받는 상황에서 원
로회의의 개혁회의 입안 종헌에 대한 인준거부는 개혁회의의 입지를 위축시
킨 결과로 작용하였다.
3) 개혁종단의 출범
내.외적 요인으로 인해 결정적 위기를 맞은 개혁회의는 9월 1일 개최된 원
로회의가 제안한 내용을 9월 3일 , 제 8차 개혁회의의 본회의를 개최하여 수
용함으로 인해 위기를 일정부분 벗어나게 되었다. 이어 9월 27일에는 제 9차
개혁회의의 본회의가 개최되어 개정종헌이 심의,의결되었으며 9월 29일에는
원로회의에 의해 개정종헌이 인준되고 개혁회의 의장은 개정종헌을 선포하였
다. 새 종헌 ,종법에 의해 11월 7일에는 11대 중앙종회의원 55인이 각 교구
별로 직접 선출되고 8일에는 직능별 중앙종회의원이 직능선출위에서 선출되
었으며 11월 14일에는 각 교구별로 총무원장 선거인단 240명이 선출되었다.
이어 11월 21일에는 총무원장 선출을 위한 319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새로운
총무원장이 선출(월주스님)되었고, 개혁회의의 뒤를 이어 개혁작업을 수행해
나갈 개혁종단이 출범하였다.
2. 종단개혁투쟁의 성과와 한계
서의현 반대투쟁으로 촉발되어 개혁회의의 출범에서부터 어려운 과정을 거
치면서 마침내 개혁종단의 출범에까지 이르른 종단개혁투쟁은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전개과정에서 많은 한계와 오류점들을 드러내었다. 이제 그 성
과와 오류,한계를 명확히 짚어냄으로서 여전히 미완인 개혁의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서의현 반대투쟁이 촉발될 당시 국민대중뿐만아니라 일부 불교대중들의 눈
에도 종단개혁투쟁은 새로운 종권다툼의 모습으로 비춰졌고 따라서 그들의
눈에 서의현 반대투쟁에 결집한 세력들(보수,기득권이나 진보를 막론하고)은
곱지않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놓았던 것은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였으며 미리 개혁을 모색한 개혁,진보세력들의 주도면밀함으로
인해 획득되어진 명분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서의현 반대투쟁은 서의현 독재
체제의 해체라는 직접적인 성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개혁회의를 출범시킴으로
서 개혁의 지속적 추진을 가능케 했다. 개혁회의의 지속적인 개혁작업의 추
진은 ① 제도개혁을 일정부분 이루어 냄으로서 이후 종단운영의 여하에 따
라 제도개혁의 큰 틀을 만들 수 있는 시안을 마련하였다는 점 ② 불자대중
의 불교개혁에 대한 염원과 열의가 가히 폭발적이었음을 확인했다는 점 ③
불자대중의 개혁에 관한 관심과 염원은 향후 불교중흥의 인적토대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점 ④ 개혁과정에서 개혁은 불교의 자주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확인함으로서 불자대중의 정치적 각
성이 이루어졌다는 점 ⑤ 개혁과정에서 개혁적,진보적 승려들이 종단 내로
대거 진출함으로서 개혁세력의 원내 교두보를 확보함은 물론, 전체 승가의
세력재편이 진보적으로 이룰 소지를 제공한 점 등의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혁회의가 개혁작업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몇몇
오류와 한계점을 드러냈는 바, ① 개혁 초기 주도세력이 분열함으로서 제도
개혁의 불완전(총무원장 직선제 관철 실패)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의 진전에 차질을 가져다 주었으며 개혁회의가 또 다른 이해관계에 의한
집단으로 오인 받기도 했다는 점 ② 구종회의원 39명을 개혁회의에 끌어안
은 것은 끝끝내 개혁회의의 부담으로 작용하여 일정부분 개혁의 주도권을 그
들에게 내줘야 했던 점 ③ 개혁세력의 물적토대의 부족 ④ 불교개혁투쟁이
폭발적으로 고양된 것은 불교대중의 광범위한 지지에 힘입은 바였음에도 불
구하고 불교대중의 종단운영참여를 배제했던 점(재가대중과 비구니 스님들의
배제는 앞으로 개혁회의의 한계로 집중적으로 비판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
다.) ⑤ 그로 인하여 출가비구대중들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던 점 등이 바
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