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시수르 메노르(續)
언덕 경사면에 들어선 마을의 왼쪽 높은 등성이에 12c에 건립되었다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미겔 교회'(Iglesia de San Miguel)가 작은 요세처럼 서있는 곳.
수긍은 가지 않지만 팜프로나 교외의 부유한 주택지역이라는 이 곳.
해발 473m, 인구 2.000명 정도의 큰 마을 시수르 메노르는 옛부터 좋은 알베르게가
있는 곳으로 소문이 나있어서 순례자들의 관심지역이라나.
그래서 인지 아직 붐빌 때가 아닌 4월 초(8일)인데도 알베르게가 매우 북적거렸다.
마리벨 론칼(Maribel Roncal) 가족이 운영하는 사설 알베르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일손이 모자란지 널따란 정원이 산란한데다 리셉션 테이블(reception table:순례자
등록소)이 밖에 나와 있어서 안정감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연중 무휴로 순례자들에게 헌신적이라는 소문이지만 상이한 문화의 탓일까.
초로의 여주인 론칼이 내게는 상술이 뛰어난 여인으로만 이해되었으니까.
시설에 비해 8유로는 적은 금액이 아닌데도 외국어(영어, 프랑스어 등)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순례자들을 편하게 함으로서 점수를 따는 것 아닐까.
(5월 24일 나바라대학교에서 대학인 순례자증서를 받은 후 시수르의 다른 알베르게
(Order of the Knights of Malta)에서 1박할 때 부러 들렀다가 더욱 그리 느꼈다)
아무튼, 붐비는 론칼가(家)의 알베르게에 든 대부분이 구면이다.
론세스바예스와 라라소아냐에서 만난 순례자들이다.
따라서 스스럼 없이 대화하는 분위기라 편했다.
특히 내가 최고령자임을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은 내가 아직 낙오되지 않고 자기네와
함께 있는 것이 여전히 신기한 듯 바라보며 내게 다가와 격려(?)의 말을 하기도.
그럴 때마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들에 대하여 내가 짐짓 겁먹은 표정을 지어보이면
"피레네 산맥도 넘어온 영감님인데 문제 없이 잘 해낼 것" 이라고.
(그러나, 그들 중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야고보 대성당(Cathedral / Praza do
Obradoiro)에 나보다 먼저 도착하거나 나와 동행한 순례자는 아무도 없다)
한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영어가 무척 고생한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는 영미 계통 순례자들 외에는 세계 각나라에서 온 모두에게 외국어다.
그러니까, 영어를 잘 한다는 이들도 어휘 부족으로 표현에 한계가 있어 애를 먹는데
하물며 서투른 이들이야 말 할 나위 없다.
그래서 마치 마임(mime)을 하듯 손짓 발짓, 온 몸으로 말을 한다.
그 과정에, 영어는 반신불수가 되더라도 단어 몇개로 의사가 통해 히히대는 것 보면
좀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때로는 나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어차피 외국어이며 브로큰 잉글리쉬(broken english)이기는 그들이나 나나 매일반
인데 기죽을 것도 없지 않은가.
주방있는 최초의 알베르게이므로 저녁과 아침 식사로 누룽지와 라면을 끓여먹었다.
이 알베르게는 내가 카미노에서 최초로 끼니를 만들어 먹은 집이다.
나는 김치광(狂)이지만 집을 나설 때 이미 김치와 밥을 내 식단에서 지워버렸다.
그러니까 지참한 누룽지와 라면 등은 식습관의 애로 해결용이 아니라 식당 이용과
먹거리 구매(購買)에 적응될 때까지의 과도용(過渡用)일 뿐이다.
(누룽지는 6. 25동란과 대학생활에서 뿐 아니라 반세기가 넘는 산(山)생활에서 필수
불가결의 식량이기도 했으며 누룽지에 얽힌 사연 또한 무수하다)
마비러스 파노라마 페르돈 봉(marvellous panorama Alto del Perdon)
내 위층 침대 주인공의 잠버릇이 너무 험한가 2층용 침대가 부실한가.
신경이 무딘 편인데도 침대의 잦은 삐걱소리에 잠못이루고 밖으로 나왔을 때다.
요염한 초승달이 사라진 하늘에서 어제의 그 별들이 다시 나를 부르는 듯 했다.
이제는 저 초롱초롱한 별들을 외면하고 잠을 청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간과 정맥 탈 때 통비닐 속에서 잠들려는 날 저 별들이 불러내면 으레 잠을 설치게
되고, 그러면 새벽같이 길 떠나곤 했는데 이 카미노에서도 매한가지다.
새벽의 한 동안은 어제 왕복했던, 노란 유채꽃이 만발한 밭길을 다시 걸어야 했다.
이 나라의 유채밭은 우리가 으뜸으로 삼는 제주도를 규모로 압도하고 있다.
신흥 주택단지를 지나면 해발 626m 사리키에기(Zariquiegui)까지 꼬불꾸불 밭길을
따라 서서히 올라가야 한다.
밭 한가운데에서 얌전하게 뜨는 해를 맞았다.
밤의 달과 아침 해가 곱게 뜨고지고, 별도 예쁘게 반짝이는 것이 맑은 공기 덕일까.
몹시 부럽도록 간밤의 달과 별이 그랬던 것 처럼 아침의 해도 그랬다.
왼쪽 언덕 너머의 갈라르(Galar)마을도 바야흐로 진통중인데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문명의 악귀(고공크레인)가 마을을 휘젓고 있으니.
샤를 마뉴의 기독교군과 이슬람군 간의 싸움에서 기독교군이 패한 격전지였다지만
지금은 평화롭기만 한 마을인데 저 놈들이 행패를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오른쪽 언덕의 요새같은 유적이 숲으로 인해 보이다 말다 한다.
16c에 지은 전형적 바로크(baroque) 양식의 겐둘라인(Guendulain) 궁전이라고.
한데, 이정표 기둥에 쓰인 'GENDULAIN'의 국적은?
나바라 지역의 공용어인 바스크어 또는 철자의 누락?
혼란스러운 것은 조금 전 표석의 'GUENDULAIN'에서 누군가 'U'자를 지워버린 것.
갈 길 바쁜 늙은이가 떠오르는 해를 맞느라 적잖이 지체하는 사이에 함께 밤을 보낸
이들이 속속 앞질러 갔다.
나무가 그늘을 만드는 곳에는 순례자들이 편히 쉬어가게끔 벤치가 적당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는 고마운 길이 얼마쯤 계속된다.(어쩌면 밭일 하다가 쉬는 곳?)
오리송에서부터 한집(Albergue)에 묵은 젊은 브라질이안(Brazilian)이 조금 전 떠난
자리에 남겨진 스틱이 스틱 놓고 떠나기를 반복했던 내 정맥탈 때를 불러왔다.
찬찬치 못한(내게 비친 그의 이미지) 그의 것이 확실하거니와 다른 이의 것이라 해도
스틱 찾으러 되돌아오는 주인의 발품을 덜어주려면 들고 가는 것이 정석이다.
얼마 가지 않아 허겁지겁 되돌아 오고 있는 그가 나의 예전 모습 같아 고소를 지었다.
인구 200명 미만의 미니 마을 사리키에기를 통과한 후에는 가파른 산길이다.
해발 1.037m인 페르돈 산맥(Sierra del Perdon)의 우측 어깨를 밟고 넘어야 한다.
걷는 듯 서있는 듯 힘겹게 오르는 땅딸막한 이가 당연히 내게 따라잡혔다.
내 배낭과 같은 상표 OSPREY(28L)를 멘 카나디안(Canadian) 노파다.
동 연배의 영감을 만났다고 생각했는가.
반기면서 캐러멜(caramel) 2개를 내게 건네준 그녀의 거주지는 다행히 영어권인 듯.
오순도순 얘기하며 그녀에게 보조맞추어 오르는 것도 괜찮았으니까.
하지만 60이라는 그녀 역시 내 나이를 알고는 아연하여 말을 잇지 못하지 않은가.
해발771m 페르돈 봉(Alto del Perdon:관용의 언덕)을 어떤 이는"마비러스 파노라마
(marvellous panorama)를 제공하는 봉우리" 라고 표현했다.
과연 장관을 이루는 조망이다.
긴 능선 따라 끝 모르는 풍력발전기들이야 저 먼 아래에서 부터 눈에 익어 새삼스럴
것 없지만 철판으로 된 중세 순례자상(像)들이 시선을 끈다.
뒤로는 팜프로나가, 앞으로는 우거진 관목지역과 광대한 들,작은 우테르가(Uterga)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후의 가야할 길까지 어림된다.
멀리 서북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들이 궁금했지만 아는 이가 없지 않은가.
훗날 알게 된 프랑스 국경으로 이어지는 레이레 산맥(Sierra de Leyre)과 솜포르트
고개(Somport pass)다.
생태공원(parque ecologico)으로 조성된 듯 한데 안내판 글을 소화하지 못한 것과
좀 더 세심하게 준비했더면 여기에서 아라곤 길(Camino Aragones)도 짚어보았을
것인데 그냥 지나치고 만 것이 유감이다.
여길 넘을 때만 해도 내게 솜포르트에서 시작하는 아라곤 길은 없었다.
5주(35일)를 예상했던 프랑스 길인데 1주일을 단축, 28일 만에 끝냄으로서 걷게 된
행운의 행복한 덤 길이므로.
애초의 계획에 아라곤 길이 포함되었더라면 팜프로나에서 프랑스 길을 멈추고 하카
(Jaca)로 직행하여 아라곤 길부터 마쳤을 것이다.
그랬으면 산티아고에서 24시간 이상 열차에 시달리며 어렵살이 하카로 가는 물심신
(物心身)의 삼중고(三重苦)는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니까.
페레그리노에게만 실재하는 카미노
이동식당 차가 페르돈 봉까지 올라와 있다.
페레그리노를 위한 미니 바르(PEREGRINOS MINI BAR) 란다.
허기진 순례자들에게는 오아시스에 다름 아니겠다.
그러나 30여분을 머무는 동안 이 바르를 이용하는 순례자를 나는 보지 못했다.
수요와 공급의 선후 관계를 나는 모른다.
다만, 젊은 주인은 이 무료한 현실을 얼마나 오래 감당할 수 있을까.
꼬치를 요기 겸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던 낙동정맥의 간월재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산들에서 임도를 이용해 등성이까지 올라오는 유사한 경우들과 대비된다.
급경사 내리막 길에 이어 들길을 돌고돌아 완만한 오름을 하면 우테르가다.
마을 한가운데로 난 길이 너무 낡았는지 새 포장공사가 한창인 길을 걸어야 했다.
사라키에기와 우테르가는 작은 마을들인데도 알베르게가 있다.
우테르가 알베르게는 페르돈 산밑이라 해서 인가 이름도 카미노 델 페르돈이다.
다시 평화롭고 맛깔스런 들길을 한가로이 걸으면 무루사발(Muruzabal)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성 야고보 상이 있는 산 에스테반 교회(Iglesia de San Esteban)
덕에 알려진 마을이란다.
시수르에서 무루사발까지는 약 15km다.
몇개의 마을 통과와 몇번의 도로 가로지르기, 한번의 도로 따르기와 산넘기가 있을
뿐 완만한 오르내림의 들길이다.
해발400m대에서 700m대인 이 광활한 들도 개간되기 전에는 모두 산이었을 터.
우거진 숲길과 파란 들길 중 어느 쪽이 더 지루한 줄 모르게 감칠맛 날까.
아무튼, 카미노가 모두 이랬으면 얼마나 행복한 걸음이 될까.
그러나 800km 카미노 프랑세스에서 겨우 10분의 1 남짓 걸었을 뿐인데도 카미노에
대한 의구심이 팽배해 가고 있지 않은가.
사도 야고보가 걸었을 리 없지만 설영 걸었다 하더라도 2천년 전의 그 길이 여태껏
남아 있겠는가.
도로에 먹히거나 도로 때문애 쫓겨나기 일쑤고 목장과 농장, 과수원 등 때문에 이리
저리 우회해야 하는데 유목민, 부족사회 시대의 길이 보존될 리 없을 뿐더러 그래야
할 가치는 있는가.
그러니까, 경제적 동물인 인간의 동물적 욕구에 카미노는 끊임 없이 휘둘려 왔으며,
그 일은 지금도 진행형이고 앞으로도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카미노의 객관적 실체는 없다고 단언적이어도 되겠다.
그러나, 기독교 페레그리노들에게 카미노는 영원한 실재(實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임을 믿는 그들이니까.
페레그리노스(Peregrinos)의 다른 이름은 콘체이로스(Concheiros)다.
콘체이로스는 산티아고 순례자의 상징인 콘차(concha 조가비/가리비)에서 비롯된
용어이므로 팔메로스(Palmeros 팔레스타인/예루살렘 순례자))나 로메로스(Rome-
ros로마 순례자)와 구분돼야 한단다.
야고보의 길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콘체이로스임을 자처한다면 모순같지만 나는
분명히 순례자이고 이 길은 내게 순례길임이 틀림 없다.
야고보를 만나거나 그가 걸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을 나의 '브니엘'(Peniel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여 이긴 요단 동쪽 압복강 언덕)이라 믿으니까.
고백컨대 내 몸은 성한 곳이 별로 없다.
반세기가 훨씬 넘는 산(山) 생활중 당한 추락사고를 비롯해 무수한 사고들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두 발로 걷고 있는 것을 불가사의로 정의할 수 밖에 없다는 서울대학교 병원측의 말
대로 구제불능의 척추협착증 때문에 언제 어디에 주저앉게 될지 모르는 몸이다.
이 밖에도 엘보, 발바닥, 치아 등등 무수한 문제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서 나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이 모든 것을 일괄해서 걸고 나를 지배하는 그 분과
끈질기게 씨름한다.
마치 철면피처럼 두둑한 배짱으로 그 분을 붓들고.
백두대간과 정맥들, 내가 오르는 모든 산들 뿐만 아니라 10대로를 비롯한 모든 길이
나의 브니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바로 이 길(카미노)이 늙은山나그네가 사모곡을 마냥 힘차게 부를 수 있으며
마음 터놓고 그 분과 겨루기 하기 안성맞춤인 길이다.
여왕의 다리(Fuente la Reina)
NA-601도로 때문에 생긴 긴 지하로를 벗어나면 제법 큰 마을이 저만치에 나타난다.
오바노스(Obanos)다.
한데, 마을 입구에 버티고 서있는 고공크레인에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몹시 덥게 느껴지는 날씨에 쉴만한 그늘도 있고 아직 여유로운 한낮인데도 관심깊게
살피지 않고 알베르게와 광장, 교회 등을 카메라에 담으며 지나쳐 버렸다.
이같은 경솔을 자책하기는 카미노들을 돌고돌아 오바노스에 2번째 도착하게 된때다.
다른 프랑스 국경인 해발1.640m 솜포르트에서 시작한 아라곤 길의 끝이 오바노스인
사실을 뒤늦게 알고 차분한 준비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따라서 오바노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카미노 아라고네스 때에 하기로 한다)
오바노스에서 약2km의 평범한 길을 걸으면 가레스(Gares)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는
인구 2.500명 이상의 대형 마을 푸엔떼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다.
팜프로나의 막달레나 다리와 함께 카미노 프랑세스에서 아르가 강에 놓인 카미노의
전통적 상징으로 알려진 다리란다.
옛날에 팜프로나에 들어가려면 아르가강을 건너야만 했던 것처럼 이 마을에 가려면
역시 아르가강을 건너야 했으므로 다리를 놓아야만 했을 것.
산초3세(Sancho 3/Alfonso 1?)때 왕비가 순례자들을 위해 다리를 놓았단다.
그래서, 왕비를 기려 '왕비(Reina)의 다리'라 했는데 지명으로도 사용하게 된 듯.
시수르를 떠난 순례자들이 레이나에서는 분산현상이다.
초입의 사설 하쿠에(Jakue)와 좀 더 가서 있는 레파라도레스 신부회(Padres Repa-
radores)가 운영하는 알베르게로.
더 늦게 도착하는 이들은 마을끝의 산티아고 아포스톨(Santiago Apostol)까지 가고.
태양열이 워낙 거세어 아직 대낮인데도 더 걷기를 포기하고 레파라도레스 신부회의
알베르게에 머물게 되었다.
별들에 홀려 연 이틀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인지 좀 지친 듯도 해서.
교포청년을 비롯해 시수르 메노르에 함께 묵었던 구면들 대부분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기도 했다.
나는 2층 침대를 배정받고 잠시 난감했다.
하지만 배정을 차레대로 하는 알베르게 사무실 수사의 공정성을 탓하겠는가.
오르내리기가 거북하지만 앞으로 종종 있을 것이기에 적응해 보리라 맘 먹었다.
한데, 내 아래층을 차지한 70세 영국 노인이 연상을 위층에 모시기가 거북했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알베르게 수사에게 부탁을 했나 보다.
딴 방의 1층으로 옮기겠느냔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다는 내게 괜찮겠냐(no problem?)고 거듭 다짐두는 그들.
그러나 일은 우리 방 안에서 벌어졌다.
2층 침대에 올라가는 내 모습이 좀 버거워 보였는가.
밧줄에 매달려 암벽을 오르내리는 나를 아무도 동정하지 않는데(아직은 자신있다는
뜻) 2층 침대 오르기가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한 젊은이가 자기 침대(1층)와 바꾸자고 제의해 왔다.
라라소아냐, 시수르 메노르 알베르게와 카미노에서 낯익은 청년이다.
잠자리를 옮긴 후 우체국부터 찾아갔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우표가 필요했으니까.
이미 써놓은 엽서(본 메뉴 2번 참조)를 보낸 후 마을 답사에 나섰다.
레파라도레스 신부회의 신학교(Colegio-Seminario)와 돌 아치로 연결된 '십자가의
교회(Iglesia del Crucifijo)는 11c에 건립 이래 이름과 운영 주체가 3번이나 바뀌는
기구한 교회란다.
마을 중앙에는 12c~14c에 걸쳐 세워졌다는 산티아고 교회(Iglesia de Santiago)가
있고 마을 끝 아르가 강 다리 이쪽에는 산 페드로 교회(Iglesia San Pedro)도 있다.
그런데, 알베르게 맞은편 신학교 건물 남쪽 끝에서 작은 강 로보(Robo)를 건너 이어
지는 노란 화살표가 있다.
알베르게 수사에게 물었으나 동문서답이다.
좀 더 주의깊게 관찰했다면 아라곤 길(Camino Aragones)인 것을 알았으련만.
<계 속>
평화로운 갈라르 마을을 휘젓고 있는 고공크레인이 밉다.
얌전히 뜨고 있는 아침 해.
겐둘라인 궁전 유적이 숲에 가려 보일락 말락 하지만 Guendulain인가 Gendulain인가?
완만하게 올라가는 파란 들길(1~3)은 순례길이라기 보다 낭만의 길이다.
저 벤치(2)는 순례자를 위해 있는가 일꾼의 휴식처인가.
이 묘한 철십자가(2)를 이해하려면 세운 벨기에(Belgie)의 순례자 콕스 프란스(Koks Frans)에게 직접 물어볼
수 밖에 없겠는데 이름 외에는 남겨놓은 것이 없으니....
정면에는 풍력발전기들이 아스라이 보인다.
해발 626m에 자리잡은 사리키에기 마을의 거주자는 200명도 못되는데 순례자들에게는 고마운 마을이다.
알베르게가 있으니까.
풍력발전기들을 향해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1) 철판 조각품인 중세 페레그리노스 상(像/2)과 생태공원탑이(3)
서있는 해발 771m 관용의 언덕(Alto del Perdon)이다.
우리나라의 산들에서도 흔히 보게되는 이동 바르(Bar 4)
서쪽 멀리 아스라한 산군(山群 5)은 레이레 산맥과 카미노 아라고네스의 시발점 솜포르트 고개라고.
(40여일 후 아라곤 길을 걸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급한 관목지대를 내려가 평탄한 들길을 걸으면(1. 2. 3) 마리아상(4)이 우테르가 마을(5)앞에서 순례자를 반긴다.
계속되는 파란 낭만의 밭길(1. 2)은 잠시 무루사발(3)과 지하통로(5)를 지나 오바노스 한하고 이어진다.(4. 6)
오바노스 알베르게(1)와 교회(2) 및 광장(3)(오바노스에 대해서는 아라곤 길 때 자세히 얘기하기로.)
오바노스를 벗어나면(1) 곧 푸엔떼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하쿠에 알베르게(2)다.
마을로 조금 더 가면 레파라도레스 신부회가 운영하는 알베르게(3. 4)와 신학교(5좌)와 교회(5우)다.
신학교와 교회로통하는 아치 밑길을 지나 팜프로나와 앞으로 지나갈 에스떼야(Estella)를 잇는 N-111
도로(6)를 건너 직진하면 마을의 중심가 마요르 카예(Mayor Calle 7)다.
신학교 건물 남쪽 끝에서 노란 화살표 따라 앞의 다리를 건너가면 솜포르트로 이어지는 아라곤 길 역(逆)코스다.
(이 때는 궁금했을 뿐이고 아라곤 길을 거의 마칠 때쯤에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