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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전후기 모든 정변
조선전기의 정변
공양왕 교살
1398년(태조7) 8월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왕자 이방원이 일으킨 정변이다. 당시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지향하던 정도전 계열은 같은 해 진법훈련의 실시를 계기로 전국의 군사들로 구성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그 군사력을 국가로 귀속하고자 했다. 마침내 진법훈련에 불참한 왕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가 정도전 일파를 중심으로 일어나자, 수세로 몰린 이방원은 한씨 소생 왕자들과 함께 8월 25일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남은 등의 일파를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도 아울러 살해했다. 이를 통해 이방원은 자신과 정치적으로 대결 관계에 있던 인물들을 대부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1400년(정종2)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형제간에 벌어진 권력투쟁이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치적 입장을 고려한 방원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오른 정종에게 소생이 없자 세자의 지위를 놓고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방간과 다섯째 아들인 방원은 또다시 미묘한 갈등에 싸였다. 이 무렵 1차 왕자의 난 때 3등공신으로 책봉된 것에 대해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朴苞)가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방간에게 거짓밀고를 하였다. 그러자 방간은 사병을 동원하여 1400년(정종 2) 1월 개경의 시가지에서 방원과 무력충돌을 벌였다. 이 싸움은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의 승리로 끝이 났는데, 박포는 사형되고, 방간은 유배 되었다. 이후 지위가 확고해진 방원은 같은 해 2월 마침내 세자로 책봉되고,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太宗)이 되었다. 결국 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왕위계승을 촉진하고, 사병의 혁파를 통한 중앙집권정책의 추진을 가능하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 등 반란을 일으킴
세자를 폐하여 추방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 조선 세종)을 세자로 책봉함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일으킨 정변이다. 대신들은 어린 단종의 보위를 내세우며 권력을 자신들에게 집중시켰고, 안평대군을 내세워 수양대군과 대립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야심이 대단했던 수양대군은 이들이 정치를 주도하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수양대군은 김종서(金宗瑞)를 가장 먼저 죽인 후, 한명회의 살생부에 따라 황보인(皇甫仁)·조극관·이양 등을 살해하였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 반대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 이조·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임하며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하였고, 결국 1455년(세조 1)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조선 7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이징옥(李澄玉), 함길도 종성에서 난을 일으켜 대금황제(大金皇帝)를 칭하다가 사형됨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발각 처형됨(사육신)
봉석주(奉石柱)·김처의(金處義)·최윤(崔閏) 등, 모반을 꾀하다 잡혀 처형됨
1467년(세조 13) 5월에 전회녕절제사(前會寧節制使) 이시애(李施愛)가 길주에서 일으킨 난이다. 세조는 지방 관리의 역모방지 차원에서 그 지역 출신 지방관을 중앙 문신으로 대체하였으며, 유향소의 감독도 강화하게 하였다. 또한 호구조사와 호패법을 통해 백성을 단속하였는데,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지방호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시애는 다른 토호들과 결탁해 농민들을 선동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4개월 동안 지속되었던 이시애의 난은 관군에 의해 지도부가 체포되고 농민군이 진압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 결과 세조의 중앙집권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함경도에 대한 통제가 심해졌으며 함경도는 지역적인 차별을 받게 되었다.
남이(南怡, 1441~)·강순(康純, 1390~) 등, 반역죄로 처형당함
사초가 발단이 되어 훈구파에 의해 신진사류가 화를 입은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남
폐비윤씨와 관련된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남
1506년(연산군 12) 중추부지사 박원종(朴元宗)이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군자부정 신윤무 등과 함께 연산군의 학정(虐政)에 반기를 들어 일으킨 난이다. 그들은 왕이 장단(長湍)석벽(石壁)에 유람하는 날에 연산군 측근인 임사홍과 신수근 등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대궐을 장악한 후 연산군에게 옥새를 받아내고 진성대군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였으니 그가 조선의 11대 왕 중종이다. 반정 자체가 철저하게 신하 주도로 이루어짐에 따라 중종이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중종은 공신이 중심이 된 정치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고, 집권 초기 권력은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이과(李顆) 등이 반란을 계획하다가 처형됨
기묘사화(己卯士禍)
신사무옥(辛巳誣獄)
을사사화(乙巳士禍)
봉성군(鳳城君) 완(琓)·송인수(宋麟壽)를 사사함(정미사화(丁未士禍)
이홍윤(李洪胤)의 옥이 일어남(을유사화(乙酉士禍)
경원부(慶源府) 아산번(阿山蕃)의 야인들이 난을 일으킴
정여립(鄭汝立), 모반실패후 자결함
충청도 학생 이성남 등이 역모를 꾀함
1596년(선조 29) 7월 초순, 충청도 일대에서 발생한 민중봉기이다. 임진왜란 직후 한현의 부하로 들어갔던 이몽학(李夢鶴)은 그와 함께 반란을 모의하여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승속군(僧俗軍)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몽학의 난은 결국 홍주목사 홍가신의 활약에 의해 진압되고, 이몽학 역시 부하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이몽학의 난은 당시 임진왜란이 충청도 지방에 남기고 있었던 부작용과 그 때문에 신음하고 있던 백성들의 고통의 실체가 드러난 민중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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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정변
조령(鳥嶺)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한 박응서(朴應犀)를 체포함(계축옥사(癸丑獄事)의 발단) 1623년(인조 1) 3월, 김류·이귀 등 서인(西人)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창덕궁을 공격·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광해군의 조카 능양군(綾陽君)을 새로운 군주로 추대했던 사건이다. 광해군과 대북일파에 의해 정권에서 배제되었던 서인 이파는 광해군 정권의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빌미로 정변을 성공시켜 대북 일파를 완전히 숙청하는데 성공하고 새로운 정치주도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624년(인조 2)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 이괄(李适)이 영변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던 사건이다.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그를 정권이 오히려 위협 요소로 여겨 견제하자 이괄은 1624년(인조 2) 1월 22일, 그를 체포하여 압송하기 위해 영변으로 찾아온 금부도사 일행을 살해하고 1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한명련 등이 이끄는 반란군은 이후 승승장구하여 남하했고, 2월 8일 서울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괄은 비록 곧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패하여 살해되었지만, 그처럼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던 경우는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박홍구(朴弘耉), 역모가 발각되어 심문 중 자살함 강원도 횡성의 이인거(李仁居), 척화(斥和)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 일으킴 김진성(金振聲) 등의 고변으로 허유(許?)·허정(許挺)·유효립(柳孝立) 등 50여 명 처형됨 임경사(任慶思)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됨 전병사(前兵使)김환(金煥)등, 허새(許璽)·권대운(權大運)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 승려 여환(呂還) 등 11인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됨 박업귀(朴業貴), 모반이 발각됨 세자책봉문제로 서인 실권, 남인 집권 (기사환국(己巳換局)) 이만초(李晩初), 유배지에서 역모를 꾸미다 발각됨 업동옥(業同獄) (장형(張炯)[희빈 장씨(嬉嬪 張氏)의 아버지]의 묘에 흉물(凶物)이 묻혔다고 장희재(張希載)의 가노 업동 등이 고변) 장길산(張吉山)이 이끄는 농민란이 일어남 전라도 장흥에서 민란이 일어남 김창집(1648~)·이이명(1658~)·이건명(1633~)·조태채(1660~) 노론 4대신, 김일경(金一鏡)의 논핵으로 유배. 다음해 모두 사사됨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이후 옥사(獄事)가 크게 일어남, 신임옥사(辛壬獄事)) 1728년(영조 4) 정권에서 밀려난 이인좌(李麟佐)·박필현·이유익 등 정권에서 배제된 유력 가문의 후손들이 영조에 반대하며 노론을 제거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일으킨 반란이다. 영조는 이 사건에서 큰 충격을 받아 강력한 왕권을 내걸고 붕당을 억누르는 탕평책을 한층 강화하였다. 반란의 중심을 차지하였던 소론 세력은 이 사건 이후 정국 주도력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16세기 말 이후 계속된 전통적인 붕당은 정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제천인(堤川人) 이석효(李錫孝)의 역모사건 일어남 황해도에서 민란이 일어남 강원도에서 민란 발생 영풍(永豊)지방에서 민란 발생 김포(金浦)에서 민란 발생 경상도 거창과 개령에서 민란 발생 황해도 장연지방에서 어영청 장교 살해 사건이 일어남 홍철능(洪哲能) 역모사건(은전군(恩全君) 찬(?) 추대) 서명원(徐命元)의 고변 사건 성진진(城津鎭) 전패작변(殿牌作變) 발생 이진후(李鎭厚)의 흉서(凶書) 사건 경주민들, 환곡에 불만을 갖고 봉기함 김하재(金夏材) 역모 원주의 김동익(金東翼)·정진성(鄭鎭成)과 제천의 유득겸(柳得謙) 등 역모사건 영월(寧越)에 향전 발생 봉산(鳳山)에 향전 발생 경상도 인동(仁同)에서 장시경(張時景) 등이 작변 하동(河東) 말재장 및 창원(昌原)에 괘서 광주(廣州) 사람 노성인(盧城人)의 흉언사건(凶言事件)안악의 이달우(李達宇)·장의강(張義綱) 등 역모사건 북청(北靑)에서 김치정(金致貞) 등이 주동이 된 민란 발생 양근 사람 조경(趙儆), 감영에 흉언 투서 개성부민들이 관아에 투석 춘천에서 전패 작변 곡산(谷山)에 민란 발생 1811년(순조 11) 12월 18일 평서대원수 홍경래가 평안도 청천강 북쪽의 가산 다복동에서, 부원수 김사용은 곽산과 선천 지역에서 군대를 일으키며 발생한 민란이다. 이후 홍경래의 남진군은 안주로, 김사용의 북진군은 의주로 진격하면서, 가산·박천·태천·정주·곽산·선천·용천·철산 등 8개 군을 장악하였다가 정부군에 밀려 정주성으로 들어가 저항을 계속하였다. 1812년(순조 12) 4월 19일, 홍경래는 전사하고 우군칙 등 다수가 체포되면서 진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 평안도에서 상업과 교육의 발전을 배경으로 성장해온 그 지역의 하층민이 주도하는 가운데 그 지역의 상층민까지 두루 참가하여 중앙정부를 타도하려 한 반란이었다. 양주인 박동직(朴東稷), 포청(浦廳)에 투서 제주 풍헌(風憲) 양제해(梁濟海) 등, 부역이 무거워 모반 채수영(蔡壽永)·안유겸(安有謙) 등의 역모 발생 김재묵(金在默)과 이철이(李哲伊), 화성(華城)에 괘서 연풍현(延豊縣) 전패 작변 황주(黃州) 사람 이인백(李仁白), 흉서(凶書), 남산(南山)에서 거화(擧火) 김치규(金致奎) 등, 청주에서 괘서 경주민들, 장기현감 폭행 청주 괘서 사건 재발 경강(京江) 일대에 해서 김수온(金守溫)의 변란 발생 포청죄수 곽필주(郭必周)의 요언(妖言) 선동 사건 서울에서 쌀값 등귀로 파괴·방화 사건 발생 역모를 꾸민 남응중(南膺中)·남경중(南慶中)을 사형에 처함 역당을 결성하여 흉언을 퍼뜨린 민진용(閔晉鏞)을 능지처사 서울에 도적이 횡행 뚝섬에서 민요(民擾) 발생 황해도민 채희재(蔡喜載), 역모를 꾀하다가 처형됨 영양(英陽)의 정우용(鄭禹龍) 등이 울릉도의 도적과 연결하여 봉기를 시도하다가 발각됨 모반죄인 김수정(金守禎) 등을 추국 파주(坡州) 유업(儒嶪) 박유풍(朴有豊)의 투서 서울에서 목수들이 폭동 돈의문에서 괘서 사건 임금 행차 때 조만준(趙萬俊)이 투석, 다음날 대역부도죄로 처형됨 정주목사의 탐학에 항의하는 사민(士民)들이 연장(聯狀) 제출 선산민란(善山民亂) 1862년(철종 13) 2월 경상도 단성을 시발로 하여 발생한 임술민란 중 민란의 전국적 확산을 이끌만큼 규모가 컷으며 성격이 뚜렷했던 민란이다. 항쟁에 불을 당긴 직접적 원인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백낙신(白樂莘)의 포악한 정치였다. 몰락 양반, 농촌 지식인, 지방의 명망가(名望家)들이 농민들을 조직하여 봉기를 주도하였으며, 이에 조정에서는 백낙신 등을 처벌하고 민심 수습책을 적극적으로 펴 이를 진정시킨 다음, 봉기의 주모자들을 효시(梟示)하였다. 농민항쟁은 봉건적 사회모순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회모순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농민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쟁한 반봉건항쟁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요구는 봉건국가와 지주층이 자행하는 조세수탈과 탐학의 해소에 머물렀을 뿐 봉건적 토지소유의 철폐 및 신분제의 해체와 같은 근대적 변혁을 담고 있는 요구는 제시하지 못하였다. 전라도 익산에서 농민 봉기. 이후 전국 각지로 확산 김순성(金順成) 등, 이하전(李夏銓)을 추대하는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처형됨 제주도의 농민 봉기 중앙정부에 보고됨 풍천(豊川)에 민란 양요를 틈타 역모를 꾸미려던 정덕기(鄭德基) 등 처형 경상도 칠원(漆原)에 민란 전라도 과양현(光陽顯)에 민란 발생 김병립(金炳立), 진천(鎭川)에서 이홍(이필제)(李泓(李弼濟))·김낙균(金洛均) 등의 작변 모의를 고변 진주(晉州)에 <정감록(鄭鑑錄)>을 이용한 민란 신계(新溪)에 전패 작변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언비어를 퍼뜨린 김학수(金鶴壽) 처형 영해(寧海)에 민란 오페르트 사건 때 서양인들을 등에 업고 반란을 꾀한 서학교도 이돈호(李敦浩) 등을 처형 진주·영해민란의 주모자로 지목되던 이필제(李弼濟), 단양(丹陽)의 정기현(鄭岐鉉) 등과 모역하다가 조령(鳥嶺)에서 체포됨 안동(安東)의 김청용(金廳龍) 등 종사(宗社)를 저훼하는 말을 하다 처형됨 울산민란(蔚山民亂) 발생 월정사(月精寺) 사고(史庫)의 번증(番憎)들이 작변 경기·삼남지방, 가뭄과 서리로 인한 기근을 틈타 일부 농민들이 세금 감면과 납포(納布) 거부운동을 주도 경상도 문경의 모반대역죄인 이방연을 능지처참하고 기타 죄인 이계풍·이영준을 처형 영암군 송시장(松市場)을 중심으로 활동한 장혁진 등 34명을 체포했다는 보고. 전라감영에 갇힌 역모죄인 장혁진·이우수·최봉주 등 죄인을 처형 일본인 군관 60여명, 동래부 관청 습격 평안도 구성(龜城)에서 민란 발생 황해도 장연에서 현감 원준상(元俊常)의 탐학으로 농민 봉기 발생 황해도 장연에서 농민봉기 목차
1613년 4월 25일 조선후기-변란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조선후기)-정변
1624년 1월 24일 이괄의 난(조선후기)-정변
1624년 11월 8일 조선후기-정변
1627년 9월 29일 조선후기-변란
1628년 1월 3일 조선후기-변란
1629년 윤4월 19일 조선후기-변란
1682년 10월 조선후기-변란
1688년 8월 1일 조선후기-변란
1688년 10월 12일 조선후기-변란
1689년 2월 조선후기-정변
1693년 1월 9일 조선후기-변란
1696년 4월 조선후기-변란
1697년 1월 조선후기-변란
1708년 10월 조선후기-민란
1721년 12월 6일~1722년 조선후기-정변
1722년 3월 27일 조선후기-정변
1728년 3월 이인좌의 난(조선후기)-정변
1729년 8월 조선후기-변란
1730년 12월 조선후기-민란
1742년 8월 조선후기-민란
1747년 조선후기-민란
1752년 조선후기-민란
1755년 조선후기-민란
1764년 3월 조선후기-변란
1777년 8월 조선후기-변란
1778년 7월 조선후기-변란
1778년 10월 조선후기-변란
1779년 3월 조선후기-변란
1782년 4월 조선후기-민란
1784년 8월 조선후기-정변
1787년 6월 조선후기-정변
1791년 2월 조선후기-민란
1791년 3월 조선후기-민란
1800년 8월 15일 조선후기-변란
1801년 8월 조선후기-변란
1804년 9월 조선후기-정변
1808년 1월 조선후기-민란
1809년 1월 조선후기-변란
1809년 6월 조선후기-민란
1810년 3월 조선후기-변란
1811년 2월 조선후기-민란
1811년 12월 18일 홍경래의 난(조선후기)-변란
1813년 4월 조선후기-변란
1813년 12월 조선후기-민란
1817년 3월 조선후기-변란
1819년 6월 조선후기-변란
1821년 4월 조선후기-변란
1824년 12월 조선후기-변란
1826년 4월 조선후기-변란
1826년 5월 조선후기-민란
1826년 10월 조선후기-변란
1829년 11월 조선후기-변란
1830년 3월 조선후기-변란
1833년 2월 조선후기-민란
1837년 12월 23일 조선후기-정변
1844 8월 21일 조선후기-변란
1850년 11월 조선후기-민란
1851년 2월 조선후기-민란
1851년 10월 조선후기-변란
1852년 7월 11일 조선후기-변란
1853년 10월 22일 조선후기-변란
1858년 7월 조선후기-변란
1860년 5월 조선후기-민란
1860년 9월 조선후기-변란
1861년 3월 6일 조선후기-변란
1861년 10월 조선후기-민란
1862년 조선후기-민란
1862년 2월 14일 진주민란(조선후기)-민란
1862년 4월 1일 조선후기-민란
1862년 7월 조선후기-정변
1862년 12월 14일 조선후기-민란
1864년 1월 16일 조선후기-민란
1868년 8월 3일 조선후기-정변
1868년 11월 30일 조선후기-민란
1869년 3월 23일 조선후기-변란
1869년 4월 21일 조선후기-변란
1870년 8월 10일 조선후기-민란
1870년 9월 24일 조선후기-민란
1871년 1월 6일 조선후기-변란
1871년 3월 10일 조선후기-변란
1871년 4월 9일 조선후기-변란
1871년 8월 2일 조선후기-변란
1872년 4월 24일 조선후기-변란
1875년 4월 18일 조선후기-민란
1875년 8월 2일 조선후기-민란
1876년 9월 10일 조선후기-민란
1877년 6월 9일 조선후기-변란
1877년 7월 21일~11월 6일 조선후기-변란
1879년 3월 25일 조선후기-정변
1880년 4월 16일 조선후기-민란
1880년 12월 조선후기-민란
1881년 3월 25일 조선후기-민란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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