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원공소 → 진안성당 교우촌 도보순례
○ 순례 일자 : 2014. 09. 20. 토요일
○ 순례 인원 : 37 명 (이영춘 요한 지도신부, 이동수 안드레아 안내)
○ 순례 일정 : 총 21km, 소요시간 6시간 55분 (이동 5시간 55분, 휴식 1시간)
1. 09:35 : 두원공소 출발 -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 두원마을


두원공소
1897년에 세워졌다. 1918년 11월 21일에 드망즈 주교 (플로리아노, 초대 대구 대목구장, 1875-1938)가 사목방문 하였으며 1957년 10월에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다. 1988년 8월 10일에 성모상을 축성하고 담장을 설치하였다. 8~9년 전에 함석지붕을 강판으로 교체하였고 담장을 헐고 꽃나무 울타리를 조성하였다. 현재 4명의 어르신 신자들이 살고 있다. (2011년 9월 18일 숲정이에서)
두원 마을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 아래 해발 350m 고지에 위치한 진안군 백운면 30개 마을 중 하나로, 진안, 장수, 임실 4개군의 경계지점에 위치하여 백제시대에는 삼원(三元)이라 불리다 언젠가 두원(斗元)으로 바뀌었다 한다.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느티나무는 조선 15대 광해군 때인 1610년경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우뚝 자리잡고 있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태화정(泰和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2. 09:42 : 원반 마을

만육 최양선생 유허비 (晩六 崔瀁先生 遺墟碑) - 전라북도 기념물 제81호
이곳에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둔하였던 고려 말 충신 최양의 자취가 남아있다. 그는 정몽주의 조카로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높은 벼슬을 지냈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자, 최양은 벼슬을 버린 뒤 잠시 이곳에 머물다가 진안 팔공산으로 들어가 3년간 은거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따르지 않았는데, 훗날 최양이 죽자 세종이 그를 추모하는 글을 짓도록 하였다. 전주의 서산서원, 공주의 고암서원, 임실의 덕암서원, 그리고 진안의 영계서원에서 최양을 모시고 있다.
3. 10:00 : 흙두개재 (해발 395m)
흙두고개
원반송마을과 은안 마을을 잇는 고개. 걸어서만 다닐 수 있는 고개로 솔가리가 가득 쌓이는 늦가을 경관이 멋지다. 고개 밑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다.
4. 10:08 : 은안 마을
은안 마을
웃뫼실이라고도 부른다. 은안이 고개로 이어지는 번데미와 함께 행정리 ‘은번’을 구성한다. 마을을 들고 나는 길목에 1935년에 축조된 화산 저수지가 있고, 골짜기 안으로는 수신사가 있다
5. 10:25 : 상백암 마을
상백암 마을
상백암 마을은 백운동 아래에 위치하는 마을로 밀양 박씨에 의해 형성되었다. 마을 주위에 차돌이 많아 ‘흰바우’라 불리다가 ‘백암’으로 불러졌는데, 백암리 마을 중에서 제일 위에 위치한다고 해서 상백(上白)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배고개
상백암 마을과 신전 마을을 있는 고개 (해발 400m)
6. 10:40 : 신전 마을
신전 마을
신전마을은 소가 가로 누운 ‘와우혈’이어서 가루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전한다. 마을 입구에는 수령 100년 이상 된 소나무숲 송림원이 있으며 마을의 안녕을 비는 비보풍수림으로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 남쪽 어귀에는 당산목이 있는데 매년 정월 대보름날 당산제를 지낸다.
7. 11:30 : 영모정


영모정 (永慕亭) -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5호
영모정은 미계(美溪) 신의련(愼義蓮)효행을 기리고자 1869년(고종 6년)에 세워졌다. 지붕은 너새(돌너와)을 얹었다. 마루 아래 각각의 기둥 밑에는 거북머리 모양의 둥근 주춧돌을 놓았다. 건물 안 남쪽 가운데에 영벽루(影壁樓)라고 쓰인 현판과 윤성진(尹成鎭)의 상량문이 있다. 영모정 주변에는 신의련의 효자정려각, 비석군이 있다. 옆에 미룡정이 있다.
신의련(愼義蓮)
자(字) 의숙(宜叔), 호(號)는 미계(美溪),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아버지를 왜병(倭兵)이 칼로 찌르려 하매 의련(義蓮)이 몸으로 가려 왜적이 불쌍히 여겨 죽이지 않아 천년(天年)을 마치니 정려(旌閭)했다. 진안(鎭安) 충효사(忠孝祠)에 향사(享祀)했다.
왜장(倭將)을 감동케 한 효자 신의련(愼義蓮)
호는 미계(美溪), 본관이 거창(居昌)인 공은 1581년(선조 14년) 백운 노촌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의 병구완을 위해 한 겨울에 꿩과 잉어를 구하여 간호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난중에도 부친의 간호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인근 주민들은 물론 멀리 경향각지에서 난을 피하여 공이 살고 있는 동편 깊숙한 산골로 모여들었으니 오늘의 비사동 골짜기였다. 노략질에 혈안이 된 왜군은 이곳까지 침입해 와서 마침내 공의 집에 몰려 들었다.
이 때 공은 방문 앞을 가로 막으며 "나는 죽어도 좋으니 병석에 누워계신 우리 부친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공의 효도에 감동한 왜장은 해를 끼치지 않고 다만 공의 효성을 실제로 보기위하여 손가락을 깨물어 「효자 신의련」다섯자를 써 보라고 했다. 공이 다섯자의 혈서를 써서 왜장에게 주니 뜰에 불을 피워 살랐으나 「효자 신의련」 다섯 자는 불타지 않고 종이만 타버리고 글자가 하늘로 올라가 버리지 않는가? 이를 본 왜장은 하늘이 내신 효자라고 감탄하면서 귀중품을 주고 표방을 써 붙였다 한다.<이 곳은 하늘이 아는 효자가 살고 있으니 침범하지 말라> 동구 밖에다 이렇게 써 붙이고 왜군이 물러가니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1만여 명이 무사히 피난을 하였다 하여 그 후부터 이 골짜기를「만인동」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정유재란에도 왜적이 침범하지 않았는데 이 역시 공의 덕이라 했으며 미계촌 앞에 높이 솟아있는 산을 덕태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미계촌은 지금의 백운면 노촌이라고 한다. 나라가 평온해지고 공이 죽은 후에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고을 원님이 임금님께 고하니 선조임금은 종팔품에 해당하는 수의부위(修義副尉)란 벼슬을 증직으로 내리셨으며 효자각을 세우게 하였다.
1869년(고종6년)에 효자각 바로 밑에 정자를 건립하고 영모정이라 이름 지어 공의 후손 신씨 문중에서 보호하고 있다. 영모정에는 참새가 많은데 참새도 효심을 아는지 영모정에는 똥을 싸는 일이 있지만 효자각에는 똥을 싸지 않은 것을 보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더욱 경탄하고 있다.

8. 11:43 : 원노촌 마을
9. 12:00 : 신기 마을
10. 12:10 : 마치 마을
11. 13:20 : 선인동 마을
12. 14:00 : 성인동 마을 모정에서 점심 식사
13. 14:05 : 선인동 공소


선인동 공소
마이산 남쪽 진안읍 가림리에 위치한 선인동 공소는 어은동 성당 김양홍 신부 (金洋洪, 스테파노, 후에 초대 전주교구장, 1874-1945) 재임때인 1901년에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초가였던 공소 건물은 후에 목조에 함석지붕으로 바뀌었고, 1990년대초 진안성당 이사정 신부 재직 때 조립식 패널에 강판 지붕으로 교체되었으며, 3년 전 고해실과 주방을 새로 들였다. 성모상은 1988년 12월 19일에 세워졌다. 1970년대만 해도 50세대가 넘는 신자들이 살았으나 이농으로 현재는 15세대 25명이 생활하고 있다. 매달 첫째주만 공소예절을 바치고 나머지는 진안본당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2011년 7월 11일 숲정이에서)
14. 14:30 : 가림 마을
15. 15:00 : 반월제 전망대 - 반월 저수지에 마이산이 비치는 곳


사진찍기 좋은 녹색 명소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지정
이곳은 세계 최고의 여행안내서인 프랑스의 ‘미슐랭그린가이드’에서 별 3개(★★★)의 만점을 받아 대한민국 최고의 명소로 각광받는 마이산을 조망할 수 있다.
16. 15:20 : 고속도로 밑 통로
17. 15:40 : 홍삼연구소 (홍삼한방 농공단지)
18. 16:00 : 진안읍 단양 마을 게이트볼장
19. 16:25 : 진안읍내 대성교
20. 16:30 : 진안 성당


첫댓글 올리신 자료를 통하여 교우촌 순례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카페를 통하여 순례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언제 한번 가보고 싶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