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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1589년 9월 청 태조 누르하치가 명나라로부터 용호 장군의 이름을 얻는 데서부터 1639년 12월 삼전도에 승전비를 세우는 데까지 50여년간의 세월을 담은 일기문이다. 인조 임금과 산하들의 성 안에서 겪은 일, 병사의 진퇴양상 등 병자호란 당시에 있었던 당시에 참담한 우리역사를 날짜의 순서에 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산성일기』는 누르하치를 이은 홍타이지가 청淸을 세우고, 두 번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여 치욕의 삼전도비를 세우기까지, 그 고통스런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전쟁을 기록한 이는 왕과 함께 산성에서 50여 일을 보냈다. 그는 피눈물을 삼키며 청에 무릎꿇는 과정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적어 내렸다. 한때 용맹했던 우리 군사, 주화파와 척화파의 갈등, 청과 조선을 오가던 국서들,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한 왕과 왕자, 변절과 충절, 강자의 오만함……. 한마디로 이 책은 전쟁이라는 큰 사건을 통해 인간의 참모습과 역사의 진실을 되짚어 오늘을 돌아보게 한다.
1. 전쟁 조선은 일찍이 1592년과 1597년에 일본을 ‘왜倭’라 하며 깔보다가 침략을 받은 적이 있다.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발발한 것이다. 앞서 류성룡이 왜란을 겪고 『징비록』이란 책을 남긴 것은, 깊이 반성하고 깨우쳐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후 채 50년도 되지 않아 이번엔 대륙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500년 조선 역사의 최대 치욕으로 기록되는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전쟁은 왕을 비롯해 나라를 이끄는 소수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런 오판은 무지와 게으름과 자만에서 연유한다. 정묘호란 후 조선은 꾸준히 청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수축하고 군비를 하였다. 그것은 한창 정복전쟁을 벌이며 힘을 키워 나가던 청에 비하면 극히 미약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청을 오랑캐라 깔보며 자만했던 조선의 왕 인조는 먼저 청과의 단교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전쟁을 예견하며 각 군사요지에 장수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막상 청이 국경을 침입했을 때, 안일하게 성을 지키고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말했다. “도적이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
2. 사람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은 드디어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산성일기』를 통해 보여지는 당시 조정도 그러하다. 가속의 피란을 위해 아들을 피란지인 강화도 검찰사를 시킨 김류, 저 먼저 살겠다고 강화로 피란한 후 배를 내어주지 않아 왕의 가속들을 애타게 했던 그 아들 김경징, 척화를 주장하다 화의로 돌아선 윤황, 임금 가까운 곳에서 척화신을 내놓으라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장수들, 왕이 언급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청나라에 보내는 국서에 ‘신臣’을 써 넣어 조선을 청나라의 신하로 끌어내리는 사신들, 신하들을 원망하다 못해 스스로 적에게 나아가 화의를 청하겠다는 왕세자, 적에게 항복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자살을 기도하는 신하들, 적들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왕의 의복을 벗고 진흙 바닥에서 절을 하며 항복하는 왕,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면서도 꼿꼿했던 삼학사…… 그들을 통해 오늘의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참다운 나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3.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와 조정의 주요 신하들이 50여 일간 피란하여 청군과 대치한 곳이다. 또한 인조가 청에 항복을 고하기 위해 청의를 입고 직접 걸어 나온 곳이기도 하다. 훗날 인조의 아들 효종은 그 치욕을 잊지 않고 북벌을 계획했다. 그리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영조는 병자호란의 치욕과 효종이 북벌을 계획했던 그 마음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수어장대(남한산성의 서장대)에 ‘무망루無妄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뿐만 아니라 종종 남한산성을 들러 그 다짐을 늘 새로이 하였다. 오늘 다시 찾은 남한산성은 산책이나 조깅을 즐기는 인근 사람들과, 멀리서 사찰을 찾아온 불교신자들로 붐볐다. 그리고 간간이 수어장대까지 올라온 아저씨가 같이 온 아이에게 말한다. “이곳이 말이야, 예전에 왕이 군대를 호령하던 곳이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