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기(閔箕, 1504~1568 ) 撰 백자청화안위묘지(白磁靑畵安瑋墓誌)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묘지명1,2 朝鮮 墓誌銘 (역사자료총서 11,12) - 안원(安瑗) 묘지명
이글루
안위(安瑋, 1491~1563) 인명사전 : 이 묘지에 의하면 1563년 66세로 졸하므로 1498년생이 맞는 것 같다.
안위(安瑋) 문과방목
안순필(安舜弼,1477~1514) 묘비명 - 소세양(蘇世讓) : 안위, 안현 부친
순흥 안위(安瑋), 안현(安玹)은 탐진 안지(安止)의 외현손(外玄孫)
--------------------------------------
조선 묘지명1,2 朝鮮 墓誌銘 (역사자료총서 11,12)
조선 묘지명1,2 朝鮮 墓誌銘 (역사자료총서11,12)
국립중앙박물관 지음 | 그라픽네트 | 2011년12월16일
606페이지 크기21×29㎝ 판매가1,2권 90,000원
원문
1판
有明朝鮮國資憲大夫兵曹判書安公墓誌文
公諱瑋字伯珍順興人少孤自知爲學與弟左
相公講劘不喜出門交遊雖隣里莫知有才學
辛巳兄弟同擢第分校書館六年遷成均館典
籍歷養賢庫主簿司憲府監察工禮刑曹佐郞
全羅道都事成均館直講工戶曹正郞爲漢城
府庶尹自是 朝廷知有辦事才每有興設公
必與爲郞僚又歷承文院校理成均館司藝禮
賓寺僉正及庶尹拜司憲府掌令尋陞執義因
事遆爲軍資監奉常寺副正未幾復授執義平
生自守其身不求推挽之勢仕不淸顯幾二十
2판
年至是入于臺時論美之出牧忠州以治最聞
賜書褒加一資後爲坡州 賜表裡一襲所至
皆有聲績以司宰監副正轉內贍寺正再轉通
禮院右通禮尋陞于左 朝廷以經國大典語
多未曉建撰註解以公該識典故俾主之庚戌
階加通政出爲驪州牧未幾大臣以註解非公
莫可 白遆爲上護軍還朝書成覽者如示諸
掌用法之官不迷所從歷判決事戶兵曹參議
淸洪道觀察使同右左副承旨戊午以右承旨
陞嘉善爲兵曹參判時倭寇未息兩南監司擇
人以授公往全羅軍政修明邊備克完中國邊氓
3판
被倭搶去海路遭風飄到境上者多公戒邊將
勿害生得數十百人以聞解送 帝悅錫賚本
國幷公銀段入爲同知中樞府事陞嘉義兼五
衛都摠府副摠管庚申以刑曹參判陞資憲爲
判書尋移兵曹未幾遆爲知中樞府事秋拜戶
曹癸亥復爲兵曹數年間連判三曹職務煩浩
剖決如流奸猾老吏莫能欺蔽律己公淸不通
餽謝人莫敢干以私晩承 天寵驟秉重任苟
利於國知無不爲盡心供職早夜勤苦不以暑
雨少懈積勞成疾已不可救遆爲知中樞府事
癸亥十二月乙巳卒年六十六訃聞輟 朝朝
4판
野嗟惜以甲子閏二月甲申葬于黃海道白川
郡虎山洞先塋之側父舜弼承義副尉 贈議
政府領義政祖珹天文習讀官 贈議政府左
贊成曾祖仁厚忠淸道兵馬節度使 贈兵判
高麗時僉議中贊文成公珦有功學校至今從
祀文廟卽公十代祖也妣趙氏郡守康門之女
公先娶陳氏後娶成氏俱無子女弟玹官至議
政府左議政先公卒公以其次子宗善爲後宗
善娶幼學李讓之女生一男幼
資憲大夫吏曹判書兼同知 經筵成均館
事弘文館提學閔箕 撰
번역문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안공(安公)의 묘지문(墓誌文)
공의 이름은 위(瑋), 자(字)는 백진(伯珍),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여 동생 좌상공(左相公), 안현(安玹)과 함께 학문을 익히고 닦았다. 문 밖을 나가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비록 이웃 사람들도 재주와 학식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신사년(1521)에 형제가 함께 과거에 합격하여 교서관(校書館)에 6년을 지냈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옮겼다. 양현고 주부(養賢庫主簿),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공조좌랑(工曹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 형조좌랑(刑曹佐郞,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공조정랑(工曹正郞), 호조정랑(戶曹正郞)을 거쳐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이 되었다. 이때부터 조정(朝廷)이 일을 주관하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아, 일이 있을 때마다 공이 반드시 간여하여 낭료(郞僚가 되었다.
또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 및 서윤(庶尹을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다. 잠시 뒤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는데 일로 인하여 체직되어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 봉상시 부정(奉常寺副)正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 평생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키고 높은 관직에 오르고자 하지 않아 청현직(淸顯職)에 임명되지 않은 지가 거의 20년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간에 들어가니 당시의 공론이 아름답게 여겼다.
외직으로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나아가 가장 잘 다스린다고 조정에 알려져 왕으로부터 책을 하사받고 자급이 한 등급
더 올라가게 되었다. 뒤에 파주목사(坡州牧使)가 되어 표리(表裡) 한 벌을 하사받았다. 부임한 곳마다 모두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에서 내섬시 정(內膽寺正으로 옮겼다가 다시 통례원 우통례(通禮院右通禮)로 옮겼다가 잠시 뒤 통례원 좌통례로 승진하였다.
조정朝廷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용어가 명료하지 않아 주해서(註解書)를 편찬하려 하였는데, 공이 전고(典故)에 해박하다 고 하여 주관하게 하였다. 경술년(1550) 품계(品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여주목사(驪州牧使)가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대신(大臣)이 주해(註解) 작업은 공이 아니면 명백하게 만들 수 없다고 하여 체직되어 상호군(上護軍)으로 조정에 돌아와서 책을 완성하였다. 열람한 사람들이 손바닥을 보는 것 같이 명확하여, 법을 적용하는 관리들이 용어의 뜻에 헷갈리지 않게 되었다.
관직을 거친 것이 판결사(判決事), 호조참의(戶曹參議), 병조참의(兵曹參議), 청홍도 관찰사(淸洪道觀察使),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였다. 무오년(1558에 우승지(右承旨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병조참판(兵曹參判)이 되었다. 당시 왜구가 영・호남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관찰사목숨을 건진 사람이 수 백명이었다. 조정에 보고하여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황제가 기뻐하여 본국에 하사품을 하사하고 아울러 공에게 은과 비단(銀段을 주었다.
조정에 들어와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가의대부(嘉義大夫)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兼五衛都摠府副摠管)으로 승진 하였다. 경신년(1560)에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판서(判書)가 되었다. 잠시 뒤에 병조(兵曹)로 옮겼다. 얼마 되지 않아 체직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가을에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임명되었고 계해년(1563)에 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몇 년 사이에 연이어 삼조(三曹)의 직무(職務)를 관장하였다.
번거럽고 귀찮은 일을 물처럼 자연스럽게 판결하여 교활 하고 노회한 이속들이 속이거나 은폐할 수 없었다. 자신을 다스리기에 공정하고 청렴하여 사례로 보낸 것이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것으로 간섭할 수 없었다. 만년에 임금의 신임을 얻어 갑자기 중임(重任)을 맡아 진실로 나라에 이롭게하고자 하였는데, 알면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직무를 살피는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하였고, 더우나 비가 오나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피로가 쌓여 병이 들었는데 이미 목숨을 구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체직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계해년(1563) 12월 을사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 66세였다. 부고를 듣고 조회를 멈추고 조야(朝野)가 애석해 하였다. 갑자년(1564 윤2월 갑신일에 황해도(黃海道 배천군(白川郡 호산동(虎山洞 선영 先塋의 옆에 장사지냈다.
아버지 순필(舜弼)은 승의부위(承義副尉) 증 의정부 영의정(贈議政府領義政)이고, 할아버지 성(珹)은 천문습독관(天文習讀官) 증 의정부 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이고, 증조(曾祖) 인후(仁厚)는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증 병조판서(贈兵曹判書)이다. 고려시대 첨의중찬(僉議中贊) 문성공(文成公) 향(珦)은 학교(學校)에 공이 있어 지금까지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어 있는데, 바로 공의 10대 조이다. 어머니 조씨(趙氏)는 군수(郡守) 강문(康門)의 딸이다.
공의 첫 번째 부인은 진씨(陳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성씨(成氏)인데 모두 자녀가 없다. 동생 현(玹)은 관직이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이르렀고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은 동생 현의 둘째 아들 종선(宗善)을 후사로 삼았다. 종선(宗善)은 유학(幼學) 이양(李讓)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동지경연(兼同知經筵) 성균관 사(成均館事)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민기(閔箕)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