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에서 보내는 강은교 시인의 문학편지 Ⅱ유혹들 4
닭 우는 소리
강은교
1)
일어나 보니, 한밤중이다. 먼 데서 닭이 운다. 한 번, 두 번, 세 번, ~~~ 세어 보니 총 아홉 번이나 운다.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육사를 생각한다. 그의 유명한 시 「광야」,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끈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즈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지금 눈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나는 육사가 어디에서 이 시를 썼을까, 를 생각한다. 그의 고향인 안동에서? 독립운동활동 중 북경으로, 상해로 가던 길에 만주에서? 왜냐하면 이 시에서는 실재의 공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채 부재의 공간으로 얼른 나아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다 나는 또 이 시에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하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이미지는 어떻게 달려오게 되었을까, 를 생각한다. 그가 그 암울한 시대에서 분명 초인을 생각하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짐작이 간다. 그런데 그 초인의 이미지는 닭의 이미지와 어떻게 어울리게 되었을까.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는 만주의 광야를 생각하곤 했다. 말하자면 ‘게릴라’이던 이육사는 북경으로, 상해로 가는 길에 분명 만주의 광야에서 하룻밤이라도 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만주의 광야에 닭 우는 소리라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의 이미지는 오지 않는다. 거기엔 곧 시인과 시 사이의 다리 위엔 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 상관물___ 바로 닭이다. 시인은 이 시를 안동에서 썼으리라는 확신이 들게 한다. 그래서 따지고 보니, 그의 고향인 안동에는 특히 닭을 키우는 집이 많았다고 한다. 새벽이면 닭이 끊임없이 울었으리라. 그러니까 초인이 탄 백마의 말발굽 소리는 닭 우는 소리이다. 한밤중의 그 순간, 그 닭 우는 소리는 초인의 이미지를 불연 듯 가져왔으리라. 그러니까 초인의 밑바닥에는 가난한 닭, 조그만 닭, 있는 것이라고는 새벽을 찢는 소리 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그런 닭 한 마리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순간 그것이 시라는 생각을 한다. ‘닭 우는 소리’와 ‘초인이 탄 백마의 말발굽 소리’와의 거리, 차원이 다른 그 두 대상에서 오는 긴장의 은유. 순간적인 이동, 변신의 흐르는 화살.
그런데 오늘 왜 그 화살은 내게 오지 않는 것일까. 그 이질적인 ‘불현듯’의 연결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2)
시가 되는 순간을 알 것 같다.
순간적인 이동의 긴장이 일어나는 순간. 실재와 부재 사이에서 뜻밖의 변신이 일어나는 순간,
이미지로 시작하여 사유 도는 의식의 지향이 그 이미지 사이 사이에 앉는 순간, 또는 이미지가 사유로, 저항하는 인식으로 전환하는 순간.
3)
그런데, 그렇다면;
이미지인가, 허영虛影인가
닭의 이미지를 백마의 말발굽 소리로 바꾸는 그 순간의 지향, 그것은 허영虛影일 뿐인가. 시인은 허영虛影의 밥을 먹는 자인가.
그런데, 그렇다면;
이육사가 실제로 게릴라 활동을 전혀 하지 못한 것, 그것이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의 이미지가 되었을 것이다. 한 번도 총을 쏘아보지 못한 것, 그것이 ‘초인’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결국 불편한 상황이 시를 만든다. 결핍의 상황이다. 너에게 지금 그런 결핍이 있는가. 인생은 따로, 시는 따로 놀고 있지 않는가.
4)
멀리 있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
마당에 나갔다가 왔어. 데크 지붕을 벗어나자마자 소복이 모여있는 별들이 달려들었어. 마치 서로 소곤거리기라도 하듯 동그맣게 모여서 빛을 내고있는 그것들을 보면서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을 생각해.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하나씩 불러봅니다./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들을 불러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생각했어. ‘왜 이런 이미지, 이런 소리가 안 나올까 하고 나를 꾸짖으면서 말야. 나는 자꾸 시를 만들려고 해. 하긴 poetry의 어원이 making이라지. 그러니까 서양시는 곧 ‘만드는 것’이 그 기본이야. 그러나 우리 시는 흘러나오지. 소리가 넘쳐. 윤동주에게 그 소리는 바로 시가 되고 있어. 비단결 같은 그의 호명呼名의 운율. 말하자면 서양시라는 자유시의 원피스 혹은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서도 그의 시는 이토록 우리의 판소리처럼 ‘넘치는 소리’를 품고 있는지, 마치 밤이 어둠을 품듯 말야. 오늘 밤 마당에서 나는 아프게 반성해. 아직도 making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어쩌면 갈수록 그 굴레는 더욱 ‘시적’이 되어 나를 옥죄고 있다고. ‘시’와 ‘시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간다고. 우리의 현대시에서 making이 아닌, 아니 ‘어렵게 배운’ making과 ‘넘치는 소리’를 ‘함께’ 오늘, 우리의 시에 가져올 수는 없을까?
나는 언제까지 making의 유혹에만 빠져 허우적일 것인가? 반성하고 또 아프게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