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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제7강 - 1(2010. 9. 6.)
世主妙嚴品-七, 大衆의 得法과 讚佛-2, 十廻向位衆 -
(9) 第二廻向의 迦樓羅王-偈頌讚歎(此是堅法所持說)
一心頂禮(일심정례) 盡十方三世(진시방삼세) 一切諸佛(일체제불)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일체존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일체현성승)
我弟子等(아제자등) 講論三藏(강론삼장) 唯願三寶(유원삼보)
爲作證明(위작증명)
南無本師釋迦牟尼佛(나무본사석가모니불)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무상심심미묘법) 百千萬劫難遭隅(백천만겁난조우)
我今聞見得受持(아금문견득수지) 願解如來眞實意(원해여래진실의)
스님께 죽비에 맞추어서 삼배 올리겠습니다.
잠깐 입정을 하겠습니다.
날씨가 이렇게 궂은데, 스님들 먼 곳에서 궂은 날씨를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오셔서 공부하시는데 대해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공부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승려로서ㆍ수행자로서 본분이지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또 근래에 너 나할 것 없이 모두 편안하게 살고, 편리하게 살다 보니까 공부하는 열정이 옛날 같지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 문수경전연구회에서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우리가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이 사실이 불교계에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고, 또 불교를 염려하는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안도를 갖게 하는 그런 일이 되기도 합니다.
화엄경은 그렇습니다. 강원 이력으로 화엄경이 있지만, 사실은 야무지게 제대로 공부할 기회는 못되고, 정말 원력을 세우고 마음 놓고, 또 이런 기회가 됐을 때 공부를 해보고 내용을 들어 봐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참 이, 걸핏하면 우리가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축생들을 보면 축생 업 면하라고 그렇게 읽어주면서도 정작 그 화엄경의 진정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쉽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스님들의 원력으로 이러한 시간을 갖게 돼서, 첫째 저에게 큰 다행이고, 여러 스님들에게도 큰 다행이지요?
화엄경은 옛날 스님들이 인용하는 글에 보면, 화엄경이라고도 인용하지만 大經이라고 인용을 합니다. 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 해서 大經이 아니라, 경전 중에서는 가장 위대한 경ㆍ큰 경이라는 뜻에서 大經에 云. ←이렇게 하면 으레 화엄경에 말씀하셨다 하는 그런 의미인데, 그 만치 화엄경은 참, 품수도 많지요. 흔히 우리가 39품, 하지만 제가 편집한 이 책에는 보현행원품. 정말 소중한 불교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보현행원품까지 합해서 40품으로 편찬을 했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오늘 일곱 번째. 달수로 7개월이 됩니다만, 아직도 서론에 해당되는 第一 世主妙嚴品. 40품 중에 世主妙嚴品을 지금 하고 있고, 앞으로도 두 달은 더해야, 두 달이 뭡니까? 네 달은 더해야 서론에 해당되는 世主妙嚴品이 끝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본론인 第二 如來現相品(여래현상품)에 접어들 정도로, 그 만치 서론이 길지요. 권수로 다섯 권이나 됩니다. 그 전체적인 구조를 우리가 생각 하면 정말 그 구성이 어떤 경전하고도 비교가 안 될 그런 아주 참 조직이라든지ㆍ방대함이라든지 이런 것이 아주 대단한 경전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아직도 부처님을 찬탄하는, 그리고 또 그 찬탄하는 내용은 법회를 위해서 모여든 소위 법회청중이지요. 世主妙嚴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주인들이 아름답게 장엄을 했다.’ 하는 그런 뜻이지만, 정말 법회를 위해서 모여든 대중들의 특징과 장점과 그리고 그들이 깨달으신 내용들, 그리고 얻은 해탈들, 또 그들이 부처님을 이해하는 내용들, 이런 것들을 쭉~ 끊임없이 시로써, 그것도 詩 형식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는 이 내용을 지금 우리는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은 어떻게 생각하면 좀 지루한 감이 없진 않지만, 또 이것을 잘 음미해보면 이 부처님의 찬탄은 이 노래같이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내용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참 좋은 내용입니다.그러니까 끈기를 가지고, 그저 묵묵히 한 10년 공부한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유인물, 이것은 며칠 전 신문에서 제가 읽은 내용인데요. 그 동안 화엄경에 대한 이런 저런 화엄경외적인 것들을 유인물로 전해드렸습니다만, 이번에는 아, 이것 한 번, 신문에서 보신 분도 있고 안 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이런 문제를 우리가 한 번 이럴 때 같이 짚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요.
여러분 잘 아시겠습니다만, 스티븐 호킹이라고 지금 세계에서 제일가는 영국의 물리학자지요. 지금 이 시대의 제일가는 물리학자인데, 이 분이 우주는 神이 아니라 물리학 법칙이 만들었다. 아주 공공연하게 이러한 내용을 자기가 오는 9일 출간될 새 저서 거대한 설계(원제: The Grand Design)라고 하는, 내용 속에 있는 것을 미리 읽고, 각 신문에 기사가 났습니다. 이것은 워낙, 이 시대의 물리학자로서 물리학을 대표하는 교수고요. 또 이 내용은 지금 창조설을 믿는, 창조설을 주장하는 그런 기독교 내지 천주교 숫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람이 서양종교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유럽에서 이렇게 당당한 이런 표현을 했다고 하는 것. 정말 학자는 어떤 신앙이 우선이 아니라, 말하자면 자기의 학설이 우선입니다. 학설을 위해서는, 과거에 사형집행 당한 사람도 있지만, 아무리 뭐라고 하더라도 역시 “지구는 돈다.” 라고 주장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역시 이 분도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물리학자인데 우주는 신이 아니라 물리학 법칙이 만들었다. 이 물리학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적으로 이야기 하면 이것이 緣起說(연기설)입니다.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전부 그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緣起라고 그래요. 불교에서는요.
부처님 말씀에는 연기를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다. 본래 모든 사물에게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 원리다.” 이렇게 말하지, 결코 “누가 만든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런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호킹 교수는 중력의 법칙과 같은 물리학 법칙이 있기 때문에 우주는 無로부터 스스로 창조 될 수 있었다. 또 자발적 창조로 우주와 인간이 존재하게 됐다. 말하자면 또 빅뱅이 일어나고 우주가 팽창하기 위해 神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이렇게 당당하게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기독교 학설이 진리냐 아니냐를 가지고, 불자의 입장에서 새삼스럽게 논하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일들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 시대에 와서 이런 학자들이 당당하게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이제는 누구나 다 알지요? 어지간한 神학자들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물리학이 발달하고 세상이 아주 발전하면 할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의 세계에 차츰차츰 접근하게 되고, 물리학이 발달 할수록 더욱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다. 라고 하는 것을 더욱 더 확연히 이해하게 되는 이러한 것이 말하자면 불교의 가르침인데도 불구하고, 왜 불교는 타 종교에 비해서 그 교세라든지, 이것이 형편없이 미약한가? 한국은 말 할 것도 없고, 저 서양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미약한가?
물론 진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지만, 그러나 지금 대다수의 어떤 사회현상들을 볼 때, 너무나도 불교세가 약하다고 하는 것. 왜 그런가? 이것도 우리가 연구해서 밝혀내야 될 일입니다. 이것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진리와 방편이라고 하는 문제가 있는데, 불교의 가르침은 진리임에는 틀림없어요. 화엄경의 내용이 전부,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 그렇지 전부 진리의 말씀입니다. 어떤 이야기라도 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진리의 말씀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왜 세력은 없는가? 불교세가 그렇게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는가?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사실은 진리는 아니면서도, 우리 불교 입장에서 보면 진리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거든요. 왜 그런가? 그들은 사람을 위하는 방편을 잘 씁니다. 爲人方便(위인방편)이라고 하는데, 사람을 위하는 방편을 잘 써요. 사실은 옳다ㆍ그르다. 참이냐ㆍ가짜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데는 맞다ㆍ틀리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맞다ㆍ틀리다. 옳다ㆍ그르다. 진리다ㆍ비 진리다. 여기에 우리는 상당히 신경을 쓰는 반면에 다른 종교는 그것이 아닙니다. 옳다ㆍ그르다. 진리다ㆍ비 진리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사람에게 접근 하느냐?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해 주느냐? 여기에 주력을 한다고요.
인과관계ㆍ인연관계. 이것을 잘 하는 겁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가끔 어떤 기회가 되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불과 200년 정도밖에 안 되고, 우리는 1600~1700년에 가까운 긴 세월인데 그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어떻게 보면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그렇게 우리가 미약하다고요. 그런데 그들은 불교의 이치대로 보면 근세에 와서, 처음 들어오자마자 복을 많이 지었어요. 이것은 순전히 불교논리입니다. 진리로써 복 짓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라도 인연ㆍ사람관계를 어떻게 맺어 가느냐? 6ㆍ25 전쟁이후에 전쟁고아들을 거의 8ㆍ90% 기독교단체에서ㆍ카톨릭 단체에서 거두었습니다. 얼마나 큰 복이 되었습니까?
불교에서는요? 물론 전쟁고아 몇을 거뒀습니다만, 열 명중에 불과 한 두 사람 될까 말까 했습니다. 나머지는 거의 기독교단체에서 거뒀습니다. 딱 한 가지 예만 가지고도, 의료문제라든지ㆍ교육문제라든지ㆍ복지문제라든지ㆍ이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비교해보면 불교에서는 너무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복을 그 사람들이 다 지었습니다. 진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복을 그렇게 많이 지었기 때문에 복 지은 데로 가는 겁니다. 전부 복 지은 데로 가는 겁니다. 이것 불교논리입니다. 사실은 진리다ㆍ진리 아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관계는 옳다ㆍ그르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옳으냐?ㆍ그르냐? 진리냐?ㆍ진리가 아니냐? 도냐?ㆍ도가 아니냐?ㆍ사도냐?ㆍ정도냐? 이것가지고 신경 쓰는 사이에 한 쪽에서는 진리 아니라도 좋다. 그냥 물량공세를 막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50대는 안 그런지 모르지만, 60대ㆍ70대 되는 사람들은 어릴 때 구호물자 한두 가지 안 받아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60대ㆍ70대 사람들은 구호물자 다 받았어요. 전 국민이 구호물자 다 받아썼습니다. 그것이 전부 기독교단체를 통해서 들어온 겁니다. 옳다ㆍ그르다가 문제가 아니고, 물량공세로써 사람을 그냥, 말하자면 어떻게 인연을, 꼼짝하지 못하게 인연을 그렇게 맺어놓은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 이치를 알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치를 모르고 그냥 한 겁니다. 하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돌아간 겁니다.
우리는 지금 종교편애 문제 가지고 그저 자나 깨나 신문에 떠들어대고, 라디오에 떠들어대고 그러는데 그것 지금 그렇게 떠드는 시간에 복을 지어야 됩니다. 세상에다 복을 지어야 됩니다. 옳다ㆍ그르다. 진리다ㆍ비 진리다. 큰 문제 아닙니다. 그런 것들도 이런 것을 통해서 보면서 이렇게 세상에 이런 물리학자가 소위 하나님의 창조설을 뒤엎고, 이것은 물리학 법칙이라고 했지만,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緣起의 법칙에 의해서 창조되고ㆍ소멸되는 것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거든요. 이것이 물리학에서 증명하는 이런 정말 중요한 사실이거든요.
최초에 이 우주가 어떻게 해서 생겼고ㆍ사람은 어떻게 해서 생겼고ㆍ생물들은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 불교는 딱 간단한 겁니다. 연기의 법칙에 의해서ㆍ인연의 법칙에 의해서 생겼다는 겁니다. 그런 아주 중요한 진리를 발견한 불교임에도 불구하고ㆍ그런 중요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불교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사회에서 그렇게 크게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 진리가 먹혀드는 것은 아닙니다. 人情(인정)이 먹혀드는 것이지요. 人情이... 그래서 이런 것들은 여러 가지로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는데, 이것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함께 한번 생각하는 그런 기회를 가졌으면 싶어서 화엄경외적인, 크게 보면 화엄경 안에 있는 이야기지요. 가져와서 여러분에게 보여 드렸습니다.
오늘은 54쪽
(9) 第二廻向의 迦樓羅王(제이회향 가루라왕)
가, 迦樓羅王衆의 得法(가루라왕중 득법): 법을 얻은 것이다.
復次大速疾力迦樓羅王(부차대속질력가루라왕)은
得無着無碍眼(득무착무애안)으로
普觀察衆生界解脫門(보관찰중생계해탈문)하고
不可壞寶髻迦樓羅王(불가괴보계가루라왕)은
得普安住法界(득보안주법계)하야
敎化衆生解脫門(교화중생해탈문)하고
淸淨速疾迦樓羅王(청정속질가루라왕)은
得普成就波羅蜜精進力解脫門(득보성취바라밀정진력해탈문)하
고 不退心莊嚴迦樓羅王(불퇴심장엄가루라왕)은
得勇猛力(득용맹력)으로
入如來境界解脫門(입여래경계해탈문)하고
大海處攝持力迦樓羅王(대해처섭지력가루라왕)은
得入佛行廣大智慧海解脫門(득입불행광대지혜해해탈문)하고
堅法淨光迦樓羅王(견법정광가루라)은
得成就無邊衆生差別智解脫門(득성취무변중생차별지해탈문)하
고 妙嚴冠髻迦樓羅王(묘엄관계가루라왕)은
得莊嚴佛法城解脫門(득장엄불법성해탈문)하고
普捷示現迦樓羅王(보첩시현가루라왕)은
得成就不可壞平等力解脫門(득성취불가괴평등력해탈문)하고
普觀海迦樓羅王(보관해가루라왕)은
得了知一切衆生身(득료지일체중생신)하야
而爲現形解脫門(이위현형해탈문)하고
龍音大目精迦樓羅王(용음대목정가루라왕)은
得普入一切衆生歿生行智解脫門(득보입일체중생몰생행지해탈
문)하시니라
1. 復次大速疾力迦樓羅王(부차대속질력가루라왕)은 得無着無碍眼(득무착무애안)으로, 집착도 없고 걸림이 없는 눈으로써 普觀察衆生界解脫門(보관찰중생계해탈문)하고, 널리 중생계를 관찰하는 그런 해탈문을 얻었다. 그렇습니다. 집착이 있으면 사람이나 사물을 바로 보지 못 합니다. 걸려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예를 들어서 우리 누구하고 친하다ㆍ불교인이다ㆍ나하고 아는 사람이다. 그것이 이미 집착이거든요. 그러면 제대로 못 보는 겁니다. 無着無碍眼. 참 중요한 말입니다.
無着無碍眼으로써 우리 불교를 이해하고, 또 타종교를 이해하는데도 사실은 불교인이지만, 볼 때는 최소한도 집착심이 없어야 바로 본다는 것. 불교를 바로 보고ㆍ다른 종교도 바로 보는 겁니다. ‘내 종교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집착심이거든요. ‘내 종교다.’하는 것도 일종의 집착심이고요. 화엄경은 그야말로 온 우주적 경계입니다. 우주적 경계... 우주 그 자체를ㆍ만물 그 자체를 경으로 생각 하고 결집된 그런 내용이기 때문에 우리가 좁은 소견들이지만 조금이라도 이렇게 좀 닮아 갈 수 있으면 큰 다행이지요. 그 다음에
2. 不可壞寶髻迦樓羅王(불가괴보계가루라왕)은, 무너뜨릴 수 없는 보배 상투 가루라왕. 그 이름도 낱낱이 이렇게 해석해보면 아주 재미있고, 의미심장하게 있습니다. 得普安住法界(득보안주법계)하야 敎化衆生解脫門(교화중생해탈문)하고, 널리 안주해서 중생을 교화하는 해탈문을 얻고,
3. 淸淨速疾迦樓羅王(청정속질가루라왕)은 得普成就波羅蜜精進力解脫門(득보성취바라밀정진력해탈문)하고, 널리 바라밀정진력을 널리 성취하는 해탈문을 얻고,
4. 不退心莊嚴迦樓羅王(불퇴심장엄가루라왕)은 得勇猛力(득용맹력)으로 入如來境界解脫門(입여래경계해탈문)하고,
용맹한 힘으로써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는 해탈문을 얻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우리 공부하러 오는 것도 어느 정도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마음을 좀 이렇게 다 잡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조그만 마음을 다 잡는 것도 일종의 용기지요.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공부하고 자기발전 자기성장을 위해서는 뭔가 용기가 있어야 어떤 새로운 세계ㆍ또 보다 나은 자기성장을 위한 것을 도모 할 수가 있지, 생각만으로, ‘아이고 내가 이것을 배워야 되는데,’ ‘붓글씨를 배워야 되겠다.’ 그러면 생각만 1년ㆍ2년ㆍ3년 하다 보면 세월 다 가 버립니다. 일을 저질러 놓고 봐야 돼요. 그것이 勇猛입니다. 勇猛力. 이 화엄경 공부하는데도 그렇고 다른 것을 하는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뭘 하나 하려면 잠깐이지만, 그런 어떤 말뚝 신심이지만 한 번 그런 신심을 내 보는 것. 이것이 勇猛力이 아닐까? 勇猛力으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해탈문을 얻고,
5. 大海處攝持力迦樓羅王(대해처섭지력가루라왕)은 得入佛行廣大智慧海解脫門(득입불행광대지혜해해탈문)하고, 佛行廣大智慧海. 부처의 행, 그것은 결국은 뭔가? 廣大한. 넓고 큰 지혜다 이 말입니다. 부처의 행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삶이다. 거기에 들어가는 해탈문을 얻었다. 아주 참 좋은 표현입니다. 불교이야기를 이 한 마디에 다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부처는 뭘 행하는 사람인가? 佛行은 廣大智慧海. 그 다음에
6. 堅法淨光迦樓羅王(견법정광가루라왕)은 得成就無邊衆生差別智解脫門(득성취무변중생차별지해탈문)하고, 무변중생차별지혜를 성취하는 해탈문을 얻었다. 無邊衆生. 사람 사람마다 생각이 얼마나 생각이 차별합니까? 얼마나 각각 다릅니까?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도“세 사람만 모이면 문수지혜가 생긴다.” 그랬어요. 많고 많은 중생이라 하더라도 그 차별지혜는 대단합니다. 그 다음에
7. 妙嚴冠髻迦樓羅王(묘엄관계가루라왕)은 得莊嚴佛法城解脫門(득장엄불법성해탈문)하고, 佛法城. 재 성자ㆍ도시 성자지요? 불법이라고 하는 도시를 장엄하는 해탈문을 얻었다. 불법의 세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불자로서, 특히 스님으로서는 불법의 세상을 장엄해야 됩니다. 그 장엄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말고, 비록 작은 한 모퉁이만 비추는 30촉짜리 전등이 되어도 좋습니다. 그 30촉짜리 전등이면 동네 골목 한 모퉁이는 비춥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훌륭합니다. 큰 밝은 써트라이트가 되어가지고 1킬로ㆍ2킬로를 비추려고 생각할 필요 없이 최소한도 자기가 처해있는 그 어떤 그 자리ㆍ그 동네ㆍ그 지역만이라도 하나의 불법으로 장엄하는 그런 자세ㆍ그런 마음가짐. 그것이 중요한 겁니다. 젊은 때는 대개 욕심을 많이 내지요. 저는 늘 그럽니다. “최소한도 30촉짜리 전등만 돼도 한 모퉁이는 비춘다. 마을 골목의 한 모퉁이는 비춘다.” 골목 한 모퉁이만 비춰도 그 사람은 세상에 나온 보람이 있습니다 사실은...
8. 普捷示現迦樓羅王(보첩시현가루라왕)은 得成就不可壞平等力解脫門(득성취불가괴평등력해탈문)하고, 무너뜨릴 수 없는 평등한 힘을 성취하는 해탈문을 얻고,
9. 普觀海迦樓羅王(보관해가루라왕)은 得了知一切衆生身(득료지일체중생신)해서, 일체중생들의 몸을 了知. 잘 알아 가지고서 而爲現形解脫門(이위현형해탈문)하고, 그들을 위해서 형상을 나타내는, 중생의 몸이 없다 하면 그 사람에게 맞추어서 형상을 나타내는 그런 해탈문을 얻었다.
10. 龍音大目精迦樓羅王(용음대목정가루라왕)은 得普入一切衆生歿生行智解脫門(득보입일체중생몰생행지해탈문)하시니라.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일체중생의 생사입니다. 歿生이라고 하는 말은죽을 歿. 태어날 生자니까 생사의 行智. 생사를 말하자면 영위해 가는 그런 어떤 지혜에 들어가는 해탈문을 얻으시니라. 그랬습니다.
나, 偈頌讚歎(게송찬탄)
爾時(이시)에 大速疾力迦樓羅王(대속질력가루라왕)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普觀一切迦樓羅衆(보관일체가루라중)하고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
佛眼廣大無邊際(불안광대무변제)하사
普見十方諸國土(보견시방제국토)하시니
其中衆生不可量(기중중생불가량)이어늘
現大神通悉調伏(현대신통실조복)이로다
佛神通力無所碍(불신통력무소애)여
遍坐十方覺樹下(변좌시방각수하)하사
演法如雲悉充滿(연법여운실충만)하시니
寶髻聽聞心不逆(보계청문심불역)이로다
佛於往昔修諸行(불어왕석수제행)에
普淨廣大波羅蜜(보정광대바라밀)하사
供養一切諸如來(공양일체제여래)하시니
此速疾王深信解(차속질왕심신해)로다
如來一一毛孔中(여래일일모공중)에
一念普現無邊行(일념보현무변행)하시니
如是難思佛境界(여시난사불경계)여
不退莊嚴悉明覩(불퇴장엄실명도)로다
佛行廣大不思議(불행광대부사의)라
一切衆生莫能測(일체중생막능측)이니
導師功德智慧海(도사공덕지혜해)여
此執持王所行處(차집지왕소행처)로다
如來無量智慧光(여래무량지혜광)이여
能滅衆生癡惑網(능멸중생치혹망)하사
一切世間咸救護(일체세간함구호)하시니
此是堅法所持說(차시견법소지설)이로다
法城廣大不可窮(법성광대불가궁)이여
其門種種無數量(기문종종무수량)이어늘
如來處世大開闡(여래처세대개천)하시니
此妙冠髻能明入(차묘관계능명입)이로다
一切諸佛一法身(일체제불일법신)이여
眞如平等無分別(진여평등무분별)이어늘
佛以此力常安住(불이차력상안주)하시니
普捷現王斯具演(보첩현왕사구연)이로다
佛昔諸有攝衆生(불석제유섭중생)하사대
普放光明遍世間(보방광명변세간)하사
種種方便示調伏(종종방편시조복)하시니
此勝法門觀海悟(차승법문관해오)로다
佛觀一切諸國土(불관일체제국토)가
悉依業海而安住(실의업해이안주)하사
普雨法雨於其中(보우법우어기중)하시니
龍音解脫能如是(용음해탈능여시)로다
爾時(이시)에, 그 때에
大速疾力迦樓羅王(대속질력가루라왕)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普觀一切迦樓羅衆(보관일체가루라중)하고, 일체 가루라왕 대중들을 널리 관찰하고,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 게송을 설해 말씀하사대,
1. 佛眼廣大無邊際(불안광대무변제)하사普見十方諸國土(보견시방제국토)하시니, 부처님의 눈은 廣大하기가 邊際가 없다. 끝이 없다. 여기 佛眼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눈ㆍ눈.” 자꾸 그럴 것이 아니라, 안목이니까 “불교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佛敎. 불교는 十方諸國土에 다 해당된다.→ 普見. 불교가 해당되지 않는 곳은 없다. 일체 다 해당된다. 하는 것입니다. 무슨 상업이나ㆍ농업이나ㆍ공업이나ㆍ정치나ㆍ교육이나ㆍ어떤 분야든지 다 해당되는 겁니다. 普見十方諸國土입니다. 其中衆生不可量(기중중생불가량)이어늘, 그 가운데 있는 중생들을 가히 헤아릴 수 없거늘 現大神通悉調伏(현대신통실조복)이로다. 대신통을 나타내서 모두모두 다 調伏한다. 그랬어요. 調伏.
이것은 우리가 그 중생심을 조복하는 입장에서 표현을 했습니다만, 門門可入(문문가입)이라는 말을 가끔 쓰는데 불교의 다종다양한 그런 가르침 속에서 낱낱, 어떤 문이든지 낱낱이 들어가서 전부 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 現大神通悉調伏. 모두 다 調伏한다. 어디서든지 우리가 그 나름대로요? 부처님 모셔놓은 무당도 그 나름대로 다 거기에서 이익을 얻는 겁니다. 그 나름대로 살 길을 찾아요. 불교라고 하는 그것은 여기 표현한 대로 廣大無邊際입니다. 佛眼廣大無邊際라고 했듯이 너무너무 이 불교는 廣大하기 때문에, 경전에서도ㆍ또 조사스님 어록에서도 미처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불교라고 하는 간판 밑에서 별별 일이 다 행해지는 겁니다. 세상이 복잡다단해지니까 또 그 나름대로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내요. 불교라고 하는 간판 밑에서 그렇게 한다고요. 그런데 그 나름대로 다 영험이 있어요. 그 나름대로 다 소득이 있어요. 그 다음 두 번째
2. 佛神通力無所碍(불신통력무소애)여, 부처님의 신통의 힘은 걸림이 없으며遍坐十方覺樹下(변좌시방각수하)하사, 두루두루 十方覺樹下에 앉아있다. 보리수지요. 보리수를 번역하면 覺樹가 됩니다. 각자 앉은 데가 다 보리수하입니다. 왜냐? 十方覺樹下니까요. 무슨 저~기 부다가야, 석가모니부처님이 앉았던 그 자리. 그 보리수. 그것만이 보리수가 아니지요. 어디든지 우리가 한 생각 돌이키면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입니다. 그 보리수도요. 본래 보리수가 아니었어요. 이름이 달라요. 인도에서는 그 이름이 달라요. 불교에서만 보리수라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해서, 그 나무 밑에서 깨달았다고 해서 그 후부터 보리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눈을 뜨고 깨달음을 얻으면 그 자리가 바로 보리수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바로 도량입니다. 道場. 우리가 도량이라고 하는 말도 그런 뜻입니다.
演法如雲悉充滿(연법여운실충만)하시니, 법을 연설하는 것이 마치 여름날 구름이 막 몰려오듯이, 온 세상을 구름이 다 덮듯이 悉充滿이라. 다 충만 하시니 寶髻聽聞心不逆(보계청문심불역)이로다. 寶髻迦樓羅王이 聽聞해서, 들어서 心不逆. 마음에 거슬리지 않도다. 세 번째
3. 佛於往昔修諸行(불어왕석수제행)에, 부처님이 옛날 여러 가지 수행을 닦음에 普淨廣大波羅蜜(보정광대바라밀)하사, 廣大한 波羅蜜을 널리 청정하게 하시사, 천만 가지 바라밀을 모두모두 닦는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뭐라고요? 供養一切諸如來(공양일체제여래)라. 一切諸如來에게 공양하시니 此速疾王深信解(차속질왕심신해)로다. 이것은 速疾迦樓羅王이 깊이 믿고 이해했더라 그랬어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6바라밀이 있고 또 화엄경에서는 10바라밀을 이야기 하는데, 그 가운데 보현행원 품에도 공양여래원 이라고 하는 것이 있듯이 여기도 供養一切諸如來라고 했는데요. 그야말로 천만 가지 바라밀 중에서 공양이 제일입니다. 요즘 보면 독거노인들에게 반찬도 해드리고, 무료급식도 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단 거기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을 겸해서 그런 일을 하면 더욱 불자다운 공양이고, 불자가 말하자면 급식 하는 일이 된다는 그 이야기를 저는 늘 하는데요. 그것을 가능하면 겸해서 해야 됩니다. 그래야지 그냥 뭐... 그냥도 좋은 일이지요. 좋은 공양입니다. 무료급식ㆍ독거노인들 반찬 해드리는 것. 참으로 고맙고 좋은 일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단순하게 좋은 일인데, 이왕 승려가 하고 불자가 하려면 거기에 부처님 뜻을 담아서 하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 하는 그런 말씀을 자주합니다.
4. 如來一一毛孔中(여래일일모공중)에 一念에 普現無邊行(일념보현무변행)하시니, “이것은 여래의 낱낱 모공 가운데” 그랬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여기서 보면 佛身ㆍ如來身ㆍ如來ㆍ佛眼ㆍ낱낱 모공 가운데. 이런 표현을 해가지고, 구체적인 어떤 형상을 가진 여래의 몸. 또는 불신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좋도록 그렇게 되어있는데요. 화엄경의 이러한 내용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든 존재의 본성입니다. 모든 존재의 本性. 꽃도 포함되고ㆍ책상도 포함되고ㆍ책도 포함되고ㆍ연필도 포함되고ㆍ저 흘러가는 구름ㆍ청청한 저 나무ㆍ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本性이 말하자면 여래다ㆍ불신이다. 그것은 또 존재의 원리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존재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그 근원적인 實體ㆍ實相. 그것이 화엄경에서 말하는 진짜 佛身은 그런 것입니다. 역사적인 석가모니부처님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좁게 설명하는 것이 절대 아니지요.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경전을 통해서 如來一一毛孔中 하지만, 우리 자신도 如來一一毛孔中 이라고 말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 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 모두가 다 포함됩니다.
사람만 포함 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생물ㆍ모든 존재가 다 포함됩니다. 그러면서 또 때로는 어떤 특수한 어떤 존재로써의 어떤 부처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습니다 사실은. 一念에 普現無邊行이라. 한 순간에 無邊行을, 가없는 행을 널리 나타내시니,
如是難思佛境界(여시난사불경계)여, 이와 같이 思義하기 어려운ㆍ정말 생각하기 어려운ㆍ헤아리기 어려운 부처님의 경계여. 그렇지요. 부처님의 경계ㆍ본성의 경계ㆍ모든 존재의 실상으로서의 부처님. 그것을 꼭 기억해야 됩니다. 모든 존재의 실상.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게 하고ㆍ책상은 책상대로 이렇게 존재하게 하고ㆍ또 비가 오는 것은 비가 오게 하고 하는 그런 모든 것 속에 다 포함되어 있는 그런 존재의 실상.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화엄경의 佛身 觀. 화엄경에서 말하는 불신을 이해하기가 제일 좋지요. 不退莊嚴悉明覩(불퇴장엄실명도)로다. 不退心莊嚴迦樓羅王이 다 밝게 보았더라.
5. 佛行廣大不思議(불행광대부사의)라. 부처님의 행은 광대해서 불가사의라. 一切衆生莫能測(일체중생막능측)이니, 일체중생에게 능히 측량하지 못함이니, 이것을 어떤 큰스님은 강의하는 것을 들어보면 존재의 원리ㆍ존재의 실상. 이런 것을 말하면서 현대적인 표현으로 “원각활동이다.” 사물 하나하나의 내면에 내재해 있는 그 어떤 “원각의 활동이다.” 이런 표현까지도 합니다. 어떻게든 이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佛行廣大不思議라. 부처님의 행은 광대해서 불가사의라. 그런데 그것을, 그 어떤 존재의 실상을 우리 보통 사람들의 안목으로는 사실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형상에 가려져 있어요.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만치만 알아요. 그러기 때문에 성인들의 안목, 깨달은 사람들의 안목까지 미쳐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一切衆生莫能測이라. 일체중생들은 능히 측량하기 어렵다라고 하는 이런 말이 그렇습니다. 세상사에도 그렇지요. 어떤 물건 하나를 이해하는데도, 예를 들어서 도자기 하나를 이해하는데도, 그 도자기 전문가적인 안목이 없으면 그것이 진품인지 가짜인지 몰라요. 진품 명품에 보면 얼토당토않은 것 가지고 나와서 “이것은 가짜다.” 라고 이렇게 퇴짜를 맞는 경우를 더러 보잖아요. 그런데 안목 없으면 전혀 모르는 겁니다. 그런 물건 하나도 안목이 없으면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ㆍ모든 존재의 실상자리. 우리 인간을 위시해서 모든 존재의 실상자리는 정말 그 나름의 깨달음의 안목이 없으면 알기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一切衆生이 莫能測이라. 측량하기 어렵다라고 이런 표현을 합니다. 이런 말이 여러 번 나오지 않습니까? 導師功德智慧海(도사공덕지혜해)여, 導師. 부처님의 공덕과 지혜의 바다여 此執持王所行處(차집지왕소행처)로다. 이것은 執持迦樓羅王이 행한 바의 곳이더라. 그 다음에 여섯 번째
6. 如來無量智慧光(여래무량지혜광)이여, 여래의 한량없는 지혜의 빛이여, 그 지혜의 빛은 뭐라고요? 能滅衆生癡惑網(능멸중생치혹망)이라. 중생들의 癡惑. 어리석고 미혹한 그런 그물을 능히 소멸한다. 불교는 가장 간단하게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어떤 지혜의 빛으로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을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 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구절이지요. 여래의 한량없는 지혜의 빛. 불교의 가르침이 얼마나 여러 가지입니까? 정말 다종다양합니다. 그것은 모두가 결국은 중생들의 어떤 그 어리석음과 미혹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一切世間咸救護(일체세간함구호)하시니, 일체 세간을 다 구호 하시니 此是堅法所持說(차시견법소지설)이로다. 이것은 堅法迦樓羅王이 所持說이라. 가려서 설한 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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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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