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물음으로 찾아야 하는 살아있는 눈빛, 동심
김 종 헌
1. 동시인들의 ‘물음’
거뭇거뭇하던 가지가 연둣빛 새순을 틔우고 나니 더욱 검게 보인다. 햇살은 두터워졌고. 이젠 그 검은 가지들이 푸른 잎에 다 가렸다. 그래서 잎사귀들의 푸릇푸릇함이 싱그럽게 느껴진다. 이렇게 봄이 무르익은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여러 잡지에 발표된 봄노래 동시들을 읽는다. 그런데 시인들은 한 철을 앞당겨 사나보다. 벌써 봄노래를 불렀으니. 그래서 나의 게으름이 부끄러워진다. 그러면서 시인들의 부지런함과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작가는 동시를 쓰고 나서(혹은 쓰면서) 이 동시가 ‘독자들에게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떤 재미를 줄까’ 등을 자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필자는 페리 노들먼의 생각을 빌려 이 물음의 내용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한다. 첫째는 이 작품이 어린이들에게 적합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다음은 이것이 어린이들이 즐길만한 것인가, 혹은 어떤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어떤 점이 어린이문학(동시)으로서 특별한가를 물어 보는 경우이다.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은 첫 번째의 물음에 치중하여 작품을 써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시어의 선택 문제와 더불어 이 시에 대한 어린이들의 판단이 어떠할까를 염려하여 어린이를 ‘일반화’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따라서 작품의 소재와 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상상력이 제한될 수 있다. 그리고 시인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어릴 때의 경험을 시적대상으로 삼아 창작하게 된다.
그러나 두 번째의 질문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독자(어린이)가 즐거움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또 그 속에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독자는 시를 읽고 난 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적화자의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 자신을 화자와 동일시하여 정서를 공유하게 된다. 그래서 창작은 개인적인 감정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문학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더라도 그것이 시인의 상상력과 만나서 시적상황과 분위기가 객관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나아가서는 사회적인 만남을 통해서 그 의미가 확대된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이때 비로소 독자는 즐거움과 의미를 깨닫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독자(어린이)에 대한 지적 이해의 문제를 고려하기 보다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관찰과 상상력 그리고 시인의 의식이 함께 어울려 있어야 한다.
2. 리얼리티가 확보한 정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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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면밀한 관찰과 동심적 상상
톡
톡
한
방울
두
방울
마른 땅에
빗방울이 떨어지네
떨어진 자국마다
송이
송이
비꽃이
비꽃이 피어나네.
- 하청호, 「비꽃」, 월간문학, 2011. 5.
미시적인 감각을 가진 시인의 눈은 순간의 감각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빗방울이 듣기 시작할 때면 흔히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뛰기 일 수다. 그러나 시인은 그 순간에도 빗방울의 모습을 관찰해 냈다. 이 동시는 지금 막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그 순간을 스케치하였다. 이 시의 끝에 “비꽃”은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성기게 떨어져 꽃잎처럼 보이는 빗방울이라는 주를 달아 놓았다. 그러고 보면 비가 처음으로 내리는 그 순간의 모습을 더 뚜렷이 떠 올릴 수 있다. 이 순간을 시인은 행갈이를 통해서 성긴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모습을 시각화하였다. 대상의 특징을 관찰하는 시인의 눈이 참 밝다. 사물과 세계의 관계를 면밀히 관찰함으로써 비에 대한 관습적인 관념과 식상한 발상을 뛰어 넘고 있다. 하청호의 감각은 생명의 활기를 띠는 시적사유로 승화되고 있다. “마른 땅”이라는 척박한 공간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비꽃”이라는 생명을 피어나게 하는 원천이다. 그의 미시적 감각은 생명을 잉태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동심의 순수를 안고 있다.
다음은 동심적 상상이 빚어낸 상생의 분위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동심은 세계를 보는 시적인식으로 시와 동시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풀잎 만나
무슨 이야기 나눴길래
빗방울 지난 자리마다
초록이 짙어 가는 걸까.
꽃잎 만나
무얼 보여주었길래
빗방울 지난 자리마다
세상이 맑아지는 걸까.
비 온 뒤
해님은 궁금해서 두리번거린다.
- 박희순, 「빗방울 지난 자리」 전문, 열린 아동문학, 2011. 봄호
비 온 뒤의 상쾌함과 풀빛이 짙어 가는 계절의 분위기를 절제된 표현으로 나타냈다. 비 온 뒤의 풍경을 다룬 시들은 참으로 많다. 그러나 이 동시는 빗방울이 풀잎과 꽃잎에게 이야기를 하고 또 무언가를 보여주어서 풀빛이 더 푸르고 세상이 맑아진다는 상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비 온 뒤의 화창한 날씨와 상쾌한 느낌뿐이다. 이것을 동심으로 읽고 있다. 도대체 빗방울은 풀잎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그 이야기가 궁금한 것이 곧 동심이며, 동심적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이토록 맑은 이유를 화자는 비와 연관 지어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봄이니까 풀빛이 더 짙고 날씨가 맑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동심이 빠진 현실인식 방법이다. 그러나 비가 온 이후의 날씨가 전날과 달라져 있음을 구별하는 인식과 그것을 빗방울의 어떤 행위 속에서 찾으려는 동심적 상상력이 만나 이 동시가 살아나고 있다. 화자는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물활론적 입장에서 상상하고 있다. 빗방울과 풀잎, 빗방울과 꽃잎은 상생의 관계에 있으며 이러한 세계인식은 동심을 둘러싼 순수를 잃어가게 하는 오늘날의 물질적 관계에 대한 동심의 경고로도 읽혀진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해님이 “궁금해서 두리번거린다”는 표현은 지금 햇살이 퍼져 있는 상황의 묘사이지만 한편으로는 맑은 세상을 되찾은 것에 대한 기쁨의 어리둥절함으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그리고 이것은 동심이 지향하는 시적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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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살아 있는 눈빛을 찾아
최근에 참으로 많은 동시가 발표되고 있다. 일일이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이번 봄호에 실린 작품도 그 수가 어느 때 보다 많은 듯하다. 창작집의 출간도 엄청나다. (지난해 가을부터 지금까지 필자에게 보내온 동시집만 해도 수없이 많다. 아직 고맙다는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빚을 진 듯 죄송한 마음뿐이다. 두고두고 새기며 빚을 갚을 작정이다.) 그래서 좋은 시를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는 자리가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해졌다. 동시는 어린이들의 삶에 대한 문제보다는 동심적 발상으로 대상을 보는 눈과 아기자기한 말의 재미를 중심으로 한 것도 사실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동심이어야 하지만 그 시선으로 응시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어른과 어린이 모두)의 삶이어야 한다. 즐거움과 희망 가득한 삶을 바라보며 노래하여야 하지만 때로는 낮은 곳으로도 향해야 한다. 그리고 어둠과 절망을 차분한 목소리로, 분노의 현장을 따뜻한 눈빛으로 안아야 한다.
동시인들은 동시에서 어린이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 어린이들은 ‘아름답게 일반화’한 박제된 어린이가 아니라 삶의 공간에 있는 실제의 어린이들이어야 한다. 그 어린이들의 살아 있는 눈빛을 서정적으로 풀어내고 또 물질과 속도로 대변되는 디지털의 문명 속에서 동심을 지키는 것은 지금까지 동시에 깔려있는 동심을 해체하고 재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동시인들의 몫으로 돌리며 무책임하게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