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은 대부분 '체'에 관심이 많다. 따라서 전시장에서 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이런 글씨를 무슨 체라고 합니까?'라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반문하는 것으로 설명을 시작한다
'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서체입니다. 지금 물으시는 체는 자체와 서체 중 어느 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자의 글꼴을 자체와 서체로 나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해 한다. 분명 서체와 자체는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 서예를 좀 안다는 분들도 둘을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거나 서로의 차이점을 가리지 않고 혼용하다보니 종종 혼란을 가져온다.
우선 자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글자의 모양으로 구분한 것이 자체이다. 한자는 발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글자의 모양이 변해왔다. 그 과정에서 필획의 가감이나 曲直등으로 글자의 기본구조에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이런 차이를 기준으로 분류한 모양새를 자체라고 한다. 전서체,예서체,해서체,행서체,초서체 등 흔히 5체라고 분류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서체란 한마디로 말하면 같은 자체에서 나타나는 스타일의 차이에 따라 분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가지 자체로 쓴 같은 글자라도 어느 시대에 누가 썼느냐에 따라 당시의 시대성과 개인의 예술성의 차이 때문에 글자 스타일이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같은 예서체나 해서체로 썼다고 하더라도 석봉 한호의 스타일과 추사 김정희의 스타일은 분명히 다르다. 이런 차이에 따라 '석봉체' '추사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서체인 것이다.
문자를 이루는 기본단위는 획이다. 이 획의 성격에 따라 그것이 단순한 書寫인지 아니면 예술인 서예인지가 판가름난다. 각 획이 그저 단순하게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부호가 됨으로써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신호체계를 이룰 때 그것을 '서사'라고 한다. 그러한 서사 기능뿐 아니라 획 하나하나가 다 살아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서예라고 부른다. 이런 서예 작품에 살아 있는 획들을 보면 붓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다. 그래서 단순히 획이라고 부르지 않고 '붓의 흔적'이란 의미에서 '필획'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서예작품을 감상할 때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은 바로 이 필획이다. 필획이 살아 있으면 예술적 가치가 높은 서예작품이 되고 필획이 죽어 있으면 아예 서예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생명력은 글씨로 썼을 때만이 아니라 그 글씨를 돌이나 나무에 새길 때도 그대로 이입되어 나타난다. 원래의 필획에 담겨 있는 생명력을 잘 살려서 새기는 목공이나 석공이 바로 名匠이다. 이렇게 획을 살려서 새겨놓은 석각문이나 목각문, 금문등은 세월이 흘러 심하게 풍화되어도 고색창연함이 더해질 뿐 원래의 필획이 지닌 생명력은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따라서 서예를 감상할 때는 이 필획의 생명력을 놓치지 말고 잘 볼 수 있어야 한다.
서예학을 오래 연구하면 바로 필획에 깃든 이러한 생명력을 바로 알아보는 안목이 생긴다. 반대로 이식된 살이 생명을 위장하고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감식안도 갖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안목과 감식안이 대부분 주관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를 객관적인 언어로 번역해서 서예에 대한 안목이 없는 일반인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이 글은 전북대학교에 제직중이신 김병기 교수님의 글을 옮긴 것입니다.
김병기(金炳基)
중국문화대학 박사 - 논문《황정견의 시와 서예에 대한 연구》
국립공주사범대학, 공주대학교수 역임
대한민국 문화재청고문서 감정위원 역임
중국 시학 ·미학 ·서예학 논문 50여 편, 서예 평론문 130여 편
중국, 일본, 미국 등 국내외서예전 다수 초대출품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현)
국제서예가협회 부회장(현)
한국서예학회 회장(현)
세계서예全北Biennale 총감독(현)
북경대학 서법연구소 해외 초빙교수(현)
국립 전북대학교 중어중문과 교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