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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내골에서 파래소폭포로 향하는 산행객. 맞은편으로 마늘 쪼가리 모양의 준봉이 우뚝 솟아있다. |
- 호랑이·늑대·표범 등 맹수 소굴
- 간월재 오를 땐 7명 이상 모여 이동
- '하늘억새길'의 시발점이기도 해
- 화전민들의 삶터 돼준 억새밭 훌륭
- 배내구곡 중 하나인 왕방골
- 박해받던 천주교인, 의병, 빨치산 등
- 깊고 깊은 원시림에 쫓기는 이 품어줘
■맹수의 정글이었던 간월재 옛길
형제봉인 신불산(1159m)과 간월산(1083m) 사이의 갈마처럼 잘록한 간월재는 영락없는 여필종부의 부푼 왕가슴이다. 어루만지고 싶은 이 왕고개의 잿길과 잿마루(峴)를 일러 선인들은 '왕방재(王峰峴)' 또는 '왕뱅이 억새만디'라 불렀다. 배내오재의 세 번째 령(嶺)으로, 울주군 등억에서 이천 백련마을로 연결되는 유서 깊은 재이다.
이번 간월재 탐방에는 토박이 두 사람의 재치 있는 구담이 채꾼(길잡이)이 되어 주었다. 간월재 억새만큼이나 만고풍상을 겪은 비단장수 장득욱(98세) 씨는 면포를 등에 지고 간월재를 넘었고, 산판꾼 조치남 씨는 미군이 남기고 간 지에무시(GMC) 군용트럭을 몰고 한때 간월재를 누볐다.
간월재를 오르는 잿길은 신불산 동자골과 간월산 천상골을 가로지른 홍류계곡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88년 등억온천 개발로 작수천 징검다리는 사라졌지만 다행히 초입은 요즘의 등산로와 비슷하다. 간월산장에서 계곡을 건너 잿길에 오르면 고즈넉한 숲길이 이어진다. 간월재 억새를 짊어지고 내려오던 소가 돌부리와 나무뿌리를 피해 발을 디딜 수 있도록 공동 부역으로 다진 자갈 덜겅이길이다.
과거 간월재 일대는 맹수들의 정글이었다. 신불산에는 호랑이, 간월산에는 늑대, 배내봉에는 표범이 우글거렸는데, 사람들은 지축을 흔드는 괴성을 들으며 간월재를 올랐던 것이다. 간월재를 오르는 사람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맹수 때문에 일곱 사람 이상이 모여야 출발할 수 있었다. 모이는 장소는 간월마을 당수나무 아래로, 일제강점기에 제재소(일명 나무공장)가 있었던 인근이었다. 제재소는 일제강점기에 산림을 관리하던 '영림지청'으로부터 벌목 허가를 받은 일본인이 운영하였다. 해방 후 간월재 산판에서 지에무시를 몰았던 조씨는 "홍류폭포 입구까지 차를 몰고 올라가 아름드리나무를 끌어내렸다"고 말했다.
■간월재 억새밭을 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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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석을 녹여 쇠를 굽던 쇠부리꾼이 살던 돌막. |
구슬땀으로 멱을 감으며 간월재 잿길을 오르다 보면 펑퍼짐한 묘 터를 만난다. 오래전에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절터꾸미'라 전해오는 곳으로, 지금은 동래 정씨 묘 터가 되었다. 그러나 '절터꾸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임도에서부터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1980년대 후반에 간월재 임도를 개설하면서 이곳부터는 옛 잿길이 사라졌으며, 임도는 자그마치 스물아홉 고개나 된다.
'왕뱅이 억새만디'라 불리는 간월재 잿마루에 올라서면 하늘이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하늘에 맞닿은 간월재는 영남알프스의 하늘마루이다. 지상에서 가장 걷고 싶은 산악탐방로인 '하늘억새길'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모여 사는 억새를 헤집고 다니는 이곳 간월재 동풍(東風)은 살을 에어내는 칼바람으로 유명하다. 거센 바람에 산불감시초소가 연중행사처럼 날아다니곤 한다. 이곳에서 신불산과 간월산으로 길을 잡으려면 좌우 산등을 타야 하고, 배내골 하류나 밀양, 원동으로 가는 길손들은 왕방골로 내려가야 한다. 또한 배내골 상류로 가려면 간월산 북능에 있는 선짐재로 향한다.
과거 간월재를 넘나든 사람들은 배내골 주민과 언양 장꾼들이었다. 언양 면포장수, 울산 소금장수, 강동 건어물장수, 서생 미역장수, 밀양 개다리소반 장수, 똥장군 따위의 생활용기를 만드는 배내골 목기꾼과 언양 소 장수 등이 간월재를 넘나들었다. 목청 좋고 오지랖 넓은 언양 소 장수와 자주 간월재를 넘나들었던 비단장수 장 씨는 "왕뱅이 억새만디를 내려온 소 장수는 소가 배가 터지도록 겨랑 물을 먹였다. 배가 큰 황소는 오줌을 질질 싸면서 언양 소장(우시장)으로 가더라"고 얘기했다. 또 원석을 녹여 쇠를 뽑아내는 달천 쇠부리꾼과 걸빵을 맨 떠꺼머리 숯장이, 숯을 나르는 짐꾼들의 발길도 잦았다. 언양장은 울산에서 팔십 리, 경주에서 팔십 리, 양산에서 팔십 리의 요충지로, 없는 게 없는 큰 장이었다. 특히 언양장의 나물과 목물은 팔십 리 떨어진 고을 사람들도 알아주었다. 비단장수 장씨는 "신불산 나물은 부드럽고, 고헌산 나물은 질겼다"고 기억을 했다.
■파래소폭포로 이어진 철의 로드 왕방골
간월재 억새밭 서쪽 아래로 열린 '왕방골'은 배내구곡(梨川九谷) 중의 하나로, 우리 민족사의 아픈 길이다. 간월재에서 발원한 왕방골 계곡 물길은 죽림굴~신불산자연휴양림 상단~파래소폭포~백련마을로 흘러간다. 왕방골 중간 지점인 신불산자연휴양림 상단 계곡을 건너면 파래소폭포를 잇는 아름다운 오솔길이 열린다. 한 사람이 걷기에도 좁은 소로이지만 아슬아슬한 계곡을 끼고 도는 오솔길은 수백 년을 이어온 철(鐵)의 길이다. 울산 달천에서 가져온 광석을 녹여 쇠를 뽑아내던 쇠부리터와 아연을 채굴하던 폐광이 길섶에 남아있다.
한편 신불산과 간월산을 가르마처럼 가른 왕방골은 민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협곡이다. 좀체 속을 드러내지 않는 원시림이라 쫓기는 자의 은신처가 되곤 하였다. 억압받는 민중, 박해를 받던 천주교인, 조국을 잃고 입산한 의병이 은둔하였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빨치산 지휘부의 아지트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저항자들이 은신할 수 있었던 것은 산으로 에워싸인 천혜의 요새, 사위를 관찰할 수 있는 마늘 쪼가리 형태의 준봉들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늘 쪼가리 준봉 중에는 묘를 쓰면 역적이 난다는 '역적치발등'도 있다.
■동짓달이면 억새밭에 불을 지른 화전민
고을 사람들은 소를 몰고 간월재에 올라와 억새를 베었다. 갓 자란 풋새(초입 억새)는 질기지 않은 칠월에 베기 알맞았고, 지붕을 이으려면 시월 마른새(건조 억새)를 벴다. 벤 억새는 다발로 묶어 소 질매에 지우고, 사내들은 지게에 한 짐씩 지고 내려왔다. 억새로 이은 초가삼간은 족히 10년을 견뎠으니, 당시로써는 그만한 지붕감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간월재를 지고 사는 화전민들은 동짓달이면 억새밭에 불을 지르곤 하였다. 간월재에서 지른 불은 영축산 억새평원까지 번졌다. 사방 팔십 리가 불바다로 훨훨 타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산판꾼 조씨는 "겨우 내내 타들어가는 밤하늘의 불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고 기억을 했다. 매년 불을 질러야 억새가 제대로 자랐고, 산등의 풍부한 거름으로 마을에는 꽃이 핀다고 믿었다. 화전민이 지른 불은 필요악이자 촉매제였다. 불을 지른 이듬해에는 잘 자란 고사리, 반달비 따위의 산나물이 지천으로 깔렸다.
떠돌이 시인이 발품을 팔며 알아본 바로는 간월재뿐만 아니라 영남알프스 여러 억새군락지에도 불이 잦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간월재 왕뱅이 만디, 신불재 운구지 만디, 영축산 백발등 못본디 만디, 재약산 산들분지, 천황산 사자평분지가 대표적인 곳이다. 대개가 자연 발화였지만, 화전민들이 불을 지르기도 했었다. 선인들은 천황산에서 간월산까지의 긴 산등을 두고 천화현(穿火峴)이라 하는데, '하늘이 막혀 불로 뚫었다'는 의미가 있는 불등(火登)은 이 억새 불길에서 번졌을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