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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 간, 당신의 사소한] 조정주
S#1. 서울 근교 국도 (낮)
다니는 차들 없이 한적한 도로. 느긋하게 지나가는 택시 한 대.
S#2. 택시 안 (낮)
뒷좌석에 앉은 용심(61세, 여), 가방에서 입술연지 꺼낸다.
작은 손거울 보면서 옅은 색의 연지 바른다. 늦바람 난 여자처럼 곱디곱게.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누나', 흥얼거리는 용심, 백미러에 비친다.
기사 : 어디, 좋은 데 가세요?
용심 : 그럼요.
기사 : 어디요?
용심 : (미소) 기사님이 맞춰보시구랴.
기사, 멋쩍게 웃는다.
다 바른 입술연지를 가방에 넣은 용심, 창밖을 본다.
잠시 후.
백미러로 보이는 용심, 꾸벅꾸벅 졸고 있다.
용심 뒤로 중앙선을 넘나들며 위태위태한 덤프트럭 보인다.
기사 : (혼잣말) 저 자식 저, 왜 저래?
어느새 잠에 빠진 용심, 온화하게 웃는 상이다.
그 얼굴, 참 평화롭다. 서서히 암전.
S#3. 타이틀
암전 화면 위로 타이틀, “십분 간, 당신의 사소한” 타이틀 한 글자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안,
택시를 덮친 불의의 사고, 소리로만, 들린다.
끼익, 브레이크 한껏 밟는 소리.
쾅, 차체 사정없이 부딪는 소리.
엥~ 사이렌 울리는 소리.
구급대원들의 다급한 발소리. 말소리.
혼란스럽고 불안한, 소리, 소리, 소리들.
S#4. 응급실 앞 (낮)
사이렌 소리 들리는 가운데 화면 서서히 밝아진다.
서둘러 도착한 응급차, 멈춘다. 응급차에서 들것으로 옮겨지는 용심, 피범벅이다. 중태 상태.
S#5. 호철의 아파트, 주방 (낮)
화면 밝아지면 냉장고에 붙은 메모 보고 있는 호철(66세, 남) “오늘 좀 늦어요. 국만 데워 드세요. - 아내”
노부부만 사는 조그만 아파트 주방. 살림살이, 단출하고 정갈하다.
호철, 식탁 위 상보 들추면 반찬 몇 안 되는 성의 없는 상차림. 좀 언짢아지려는데 전화벨 울린다.
호철, 거실로 나간다. 통화소리만 들린다.
호철 : (E) 여보세요. (듣고) 도용심 씨 댁은 맞는데, 지금 외출중이에요. (듣다 놀라) 뭐요? 어디라구?
S#6. 아파트 단지 놀이터 (낮)
규완(38세, 남), 심란한 얼굴로 그네에 앉아 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다가온 영주(37세, 여), 아무 말 없이 규완 옆 그네에 앉는다.
두 사람, 잠시 애들처럼 그네를 놀린다.
규완 : (멈추고) 그만 집에 가자.
영주, 반항의 뜻으로 그네를 더 높이 구른다.
벌떡 일어난 규완, 억지로 영주의 그네를 잡아 세운다.
영주, 규완을 노려본다. 매섭다. 마주 보지 못하는 규완, 시선을 돌린다.
규완 : 언제까지 처형 집에 있을 거야?
영주 : 당신 죽을 때까지.
규완 : 나 맘 잡았다. 다신 딴 데 안 봐.
영주 : (안 믿는) 뭐 하러 입 아프게 말로 해? 녹음해 놨다 철마다 틀지?
규완 : 이번엔 진짜야, 여보. 애들, 학교도 안 갔어.
애들, 이라는 말에 흔들리는 영주.
규완 : 가자, 여보. 일단 집에 가서 애들 먼저 잘 달래구-
영주 : (괴로워서 버럭) 안 간다니까!
용심(E) : 니가 안 들어가면, 애들은?
S#7. 영주 언니의 아파트/ 현관/ 하루 전/ 흑백 (낮)
영주, 세상이 다 귀찮은 얼굴로 현관문을 연다.
잔뜩 음식을 싸들고 온 용심, 일부러 더 환하게 웃는다.
S#8. 영주 언니의 아파트/ 주방/ 흑백 (낮)
식탁에 마주 앉은 용심과 영주
용심, 데운 죽 그릇을 숟가락으로 헤집으며 호호 불고 있다.
알맞게 식은 죽, 영주 앞으로 쓱 밀어 준다.
용심 : 시에미 정성이다. 몇 술만 떠.
영주 : (귀찮지만 억지로 숟가락 움직인다)
용심 : (혼잣말처럼) 남편 그늘이 왜 그늘인 줄 아니?
영주 : (본다)
용심 : 여름 그늘은 시원해도 겨울 그늘은 추운 법인데, 인생이 어디 여름만 있어?
그저 겨울 왔구나, 생각하고 참다보면 여름이지. 그때 되면 또 그늘이 미덥고 시원하고.
영주 : 저 안 들어가요.
용심 : 니가 안 들어가면, 애들은?
영주 : (입맛 가신다. 수저 놓는다)
S#9. 아파트 단지 놀이터 (낮)
말도 없이 천천히 그네를 구르는 두 사람
생각에 잠겨 있던 영주, 그네에서 일어난다. 슬슬 눈치를 보는 규완.
영주 : 차는 어디다 뒀어?
규완 : 지하주차장. 왜?
영주 : 가서 기다려. 짐 가지고 갈게.
규완 : (좋지만 내색 않고) 알았어. 빨리 챙겨와.
영주 : (못 박는) 착각 마. 당신 용서한 거 아냐.
규완 : 알아.
묵묵히 고개 숙이고 걸어가는 영주.
S#10. 지하주차장 (낮)
차안. 운전석에서 죽어라 진동 울리는 핸드폰. 액정에 ‘아버지’라고 떠 있다.
규완, 휘파람 불면서 리모콘으로 도어 연다.
차에 오른 규완, 핸드폰 받는다.
규완 : 웬일이세요? 아버지. (듣다가 놀라서) 네? 어머니가요?
S#11. 응급실 일각 (낮)
호철, 칸막이 사이로 용심을 본다.
이마에 땀이 밴 응급의1, 한창 심폐소생술 중이다.
응급의2는 제세동기(심장 충격기)에 겔(전도제)을 바르고 있다.
저절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호철.
규완과 영주, 서둘러 응급실에 들어온다.
규완 : (큰소리로) 엄마, 엄마 어딨어? 엄마!
영주, 달려가 호철을 일으킨다.
규완, 의료진도 상관 않고 용심을 끌어안으려고 한다.
규완 : 엄마! 엄마, 왜 이래? 우리 엄마가 왜 이래?
의료진들, 규완을 말려 밖으로 내보려고 한다.
아랑곳하지 않는 규완, 또 달려든다.
규완 : (믿을 수 없는) 아버지, 우리 엄마 맞아요?
영주, 규완을 붙들러 들어오다가 처음으로 용심을 봤다. 충격적이다.
영주, 소리라도 지를까봐 제 입을 막는다.
영주, 감정을 추스르고 재빨리 규완을 끌어낸다.
심박동 측정기 숫자, 100에서 145로 뛴다.
응급의2 : 손 떼.
응급의 1, 심폐소생술 멈추면 응급의 2가 전기충격을 가한다.
응급의 1, 가족들 모인 걸 보고 서둘러 나온다.
호철 : 선생님, 어떻습니까?
응급의1 : 시간이 너무 지체됐어요. 심장 멎은 후 10분 안에 응급조치를 받아야 정상 가깝게 회복되는데....
지금으로선 심장이 돌아온다 해도 혈압이 안 잡힐 확률이 높고...아무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규완 : 선생님, 무조건 살려주세요. 우리엄마 좀 살려 주세요~ (애처럼 엉엉 운다)
응급의2 : (응급의 1에게) 오 선생!
응급의 1, 서둘러 칸막이 닫고 안으로 들어간다.
규완 : 아버지, 도대체 어디서 사고가-
호철 : (얼이 빠져서) 택시 타고 국도 가던 걸, 음주 트럭이 받았대.
영주 : 어디 가시던 중이었대요?
호철 : 모르겠어. 기사 둘 다 즉사해서.
영주 : (말이 없다)
규완 : 수완이는요?
호철 : (손 내저으며) 전활 안 받아.
규완 : (화가 나서 눈물 닦으며) 내 이 자식을!
S#12. 영화관 안 (낮)
스크린에 엔딩 크레딧 올라간다.
수완(32세, 남)과 은경(29세, 여), 나란히 앉아 있다.
눈에 촉촉이 눈물이 고인 은경, 영화에 감동했다.
수완, 그런 은경이 예뻐서 자꾸만 흘깃거린다.
S#13. 영화관 앞 (낮)
수완과 은경, 사람들에 묻혀 나온다.
은경이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켜면 수완도 따라 한다.
은경, 핸드폰을 가방에 넣으면 수완도 따라 가방에 넣는다.
은경, 장난으로 핸드폰을 다시 꺼내면 수완도 마찬가지.
푹 웃는 은경. 따라 웃는 수완.
S#14. 까페 (낮)
수완, 미니케이크에 꽂힌 촛불 한 개를 불어 끈다.
마주 앉은 은경, 작게 박수 친다.
은경 : 김수완 작가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수완 : 한 십년 굴러먹다 데뷔한 건데, 좀 쑥스럽다.
은경 : 어때요? 단편도 아니구 장편소설로 폼나게 데뷔했는데. 고생했잖아요. 몸고생, 맘고생, 돈고생. 내가 선배 증인인데, 뭐.
수완 : 너 때매 버텼지.
은경 : 그건 좀 오바다. 가끔 밥 사고 술 산 게 단데.
수완 : 작가 지망생한테 밥, 술보다 중요한 게 어딨냐?
은경 : 그건 그래.
수완 : 이젠 다 내가 살게.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은경 : 아직은 내가 은행 잔고 더 많을 걸요?
수완 : 그런가?
은경 : 당연하죠. 내 직업이 은행원인데. 어머님...많이 좋아하시죠?
수완 : (웃지만 얼굴 어둡다)
S#15. 수완의 자취방/ 하루 전/ 흑백 (낮)
좁고 지저분한 지하방.
용심, 신문에 얼굴 묻고 있다. 다 늙은 여자 어깨, 우느라 소리도 못 내고 들먹거린다.
수완 눈에도 눈물 맺혔다.
수완 : (조용히) 엄마.
용심 : (신문 보며 힘주어) 당선작가 김, 수, 완. 너 맞지? 동명이인 아니지?
수완 : 저 맞아요, 엄마.
수완, 픽 웃음 난다.
용심의 코에 신문에서 묻어난 인쇄잉크. 문질러 닦아주는 수완.
용심 : 뭐 묻었어?
수완 : 잉크요.
용심 : 내비둬. 내 아들 이름 찍어준 잉큰데 묻으면 좀 어때? 들이마시기라도 하겠다.
수완 : 엄마도 참.
용심 : (정색하고) 수완아.
수완 : 예.
용심 : (망설인다)
수완 : (농담) 울 엄마, 상금에 눈독들이시나?
용심 : 이제 그만 해라.
수완 : (?)
용심 : 여기까지 했으니 됐어. 헛짓거리 아니란 거 알았으니, 그만해 이제.
수완 : 뭘요?
용심 : 아버지가 너까지 연 끊네 어쩌네 하실까봐 그동안 목숨 걸고 막았다. 니 나이 아직 안 늦었어. 이제 어디든 취직하자.
수완 : (답답하다) 엄마-
용심 : (매정하게) 엄마 말 끊지 말고 들어. 너 이 좁아터진 방에서 글 쓴다고 속 버린 지 십년 됐지?
남들은 삼사 년 만에도 되고 오륙 년 만에도 되는 걸, 넌 딱 십년 걸렸어. 엄마가 무식해서 잘은 몰라두,
이런 일엔 하늘이 내려준 게 있어야 돼. 수완아. 넌.... (잔인한 줄 알지만) 모자라.
수완 : (자존심 상한) 자식이라도 막말하시면 안 돼죠, 엄마. 엄마가 뭘 안다구 그러세요?
용심 : 그 일은 몰라두 세월은 잘 안다. 그만 허비하자. 응? 수완아. 넥타이 매구 직장 나가 참한 색시한테 장가두 가구.
이 일은 그저 취미처럼, 잡기처럼. 그렇게. 응?
수완 : 그럼 왜 늘 열심히 하라구, 넌 꼭 될 거라구 그러셨어요?
용심 : (눈물난다) 너 죽일까봐! 사는 거 포기할까봐. 그렇게 죽자구 매달렸는데 사내가 끝은 봐야지.
이제 너 더 잘할 수 있는 거 찾아 남들처럼 살자. 제발.
수완 : (순식간에 차가워진 얼굴)
S#16. 까페 (낮)
수완, 엄마 생각에 심란하다.
은경 : 선배.
수완 : 넌, 내 소설 어때?
은경 : 뭘 확인해요? 열렬한 팬인 거 알면서.
수완 : (역시) 고맙다. 그래서 말인데...
은경 : (본다)
수완 : 이제 좀 자신이 생겼다. 나... 결혼하고 싶다, 너랑.
은경 : (예견하고 있었다. 침착하게 물을 마시고) 선배, 나 오늘 저녁 선봐요.
수완 : (놀란다)
은경 : (안타까운) 수상소식 들었을 때, 참 기쁘고 참 슬펐어요. 아, 이제 이 사람은 이 길을 가겠구나.
남들 같은 길은 틀렸구나, 그래서. 나, 선배 소설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만두길 바랬나봐. 이중적인 거 알아요.
(눈물 어린) 욕은 나 가고 난 담에 해줘요. 평범하게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까 그거라도 잘 하고 싶어.
안정적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나. (울먹이는) 혼자 술 먹지 말아요. 안주, 꼭 챙겨 먹구. (일어서는)
수완 : 그래서 그렇게, 예쁘게 하고 나온 거니?
그 말에 멈칫한 은경, 이내 조용히 나간다.
예상치 못한 말에 머릿속이 복잡한 수완, 은경을 잡지 않는다.
그 순간, 시끄럽게 울리는 수완의 핸드폰.
S#17. 거리 (낮)
정신없이 달려가는 수완.
규완(E) : 엄마 돌아가시면, 다 니 탓인 줄 알아. 이 자식아!
반대로 가던 은경, 고개를 돌려 달려가는 수완의 뒷모습 본다. 걱정도 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래도 모진 맘먹고 발길을 돌린다.
빨리 가지 못한다. 등 뒤에서 뭔가가 잡아당기듯.
S#18. 응급실 일각 (낮)
응급의1과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가족들.
응급의1 : 일단 심박동은 안정 됐습니다. 하지만 안심하실 단계는 아니에요.
뇌가 돌아올 확률도 낮고, 심장에 문제가 또 생길 수도 있구요.
규완 : (진정 됐다) 만일 그렇게 되면...
응급의1 : 심폐소생술을 다시 시도할지, 그냥 보내드릴지 가족들이 결정해주셔야 합니다.
영주 : (울먹인다) 어머니....
응급의1 : 면밀히 관찰하다가 이상 생기면 말씀드릴 테니까, 계속 대기해주세요. 희망, 버리시지 말구요.
호철 : 예.
응급의1, 다른 환자를 보러 간다.
수완, 달려 들어온다. 숨이 차다. 헉헉.
호철, 규완, 영주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다.
진정된 수완, 조용히 칸막이 커튼을 들춘다.
용심, 인공호흡기를 달고 누웠다. 수완, 용심 옆에 선다. 엄마 얼굴을, 조용히 매만진다. 잉크가 묻었던 코 쓰다듬는다.
수완 : (조용히) 잉크 다 지웠네. (...) 나 때매 그래? 잘못했으니까, 일어나요 얼른. (감정 격해지며 주룩, 흐르는 눈물)
S#19. 대기실 (저녁)
넋이 빠진 가족들, 서로 간격 두고 여기 저기 앉았다. 말이....없다.
수완 : 양숙이는?
규완 : (호철 눈치 보며) 지금 걔 얘기가 왜 나와?
수완 : 이럴 때 연락하는 게 가족 아냐? (떠보듯) 안 그래요, 아버지?
호철 : (묵묵부답)
영주 : (말리는) 삼촌, 아가씨한테는 나중에-
수완 : 형수, 엄마가 혹시 이대로...
호철 : (눈 감고) 말 아껴라. 생각도 아끼구. 나쁜 생각은 그대로 되기 십상이야.
수완 : 걔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구 여기두 못 와요?
규완 : 어차피 연락도 안 닿잖아. 괜히 애쓰지 마.
수완 : 형은 걱정도 안 돼? 좋아하는 남자 찾아간 게, 그렇게 죽을죄야?
규완 : 지금 걔 걱정할 때야? 나, 걔 문제로 더 골머리 썩기 싫어. 글 씁네 하고 콕 틀어박힌 십년 골칫덩이, 너 한 개루 족해.
영주 : (말리는) 당신, 자꾸 막말 할 거예요?
규완 : 집 싫어 뛰쳐나간 애 만나기두 싫고, 와도 안 만나. 됐냐?
수완 : (눈에 불이 인다)
호철 : 그만들 두지 못하겠니?
수완 : (확 나가버린다)
S#20. 병원 밖 (저녁)
수완, 통화 시도 중이다.
기계음(E) : 고객의 전화기가 꺼져 있사오니....
한숨 난다. 통화를 포기한다. 수완,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
용심(E) : 넥타이 매구 직장 나가 참한 색시한테 장가두 가구.
은경(E) : 안정적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나.
전화벨 울린다. 급히 받는다.
수완 : 양숙이냐? (아니다) 어, 두진이구나. (듣다가) 축하는 무슨...암튼 고맙다.
(듣다가) 나 지금 병원이야. 나 말고 우리 엄마가...
수완을 찾아 나오는 호철. 수완, 얼른 전화를 끊는다.
호철, 수완의 옆에 앉는다.
수완 : (...) 엄마, 괜찮으실 거에요.
호철 : 안다.
두 사람, 별로 할 말이 없다.
호철 : 너 당선됐다고, 어제 니 엄마 춤까지 췄는데.
수완 : (?)
S#21. 호철의 아파트/ 하루 전/ 흑백 (아침)
쇼파에 앉아 TV 뉴스를 보는 호철,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의 단정한 모습.
안방 문 왈칵 열리고 다다다 뛰쳐나오는 용심, 신문을 들었다.
들뜬 용심, 남편 앞에 보란 듯이 불쑥! 신문을 들이민다.
용심 : 내가 뭐랬어요? 수완이 무시하지 말랬죠? 여기, 여기 좀 봐요.
호철 : (불쾌한) 단정치 못하게 왜 이래?
용심 : (감격에 겨워) 둘째 이름 났잖아요.
호철 : 뭐? (들여다본다)
용심 : 보여요? 한국문학상 수상 김, 수, 완.
호철 : ...보여.
용심 : ...그게, 다에요?
호철 : 뭐가?
용심 : 당신 아들이 신문에 날 만큼 장한 상을 받았는데, 보여, 그게 다냐구요?
호철 : 선한 위인이든 악한 위인이든, 사람 끌만한 일이면 죄다 갖다 쓰는 게 신문이야.
용심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호철 : (버럭) 뭐 특별난 일 났다고 식전 댓바람부터 이래? 상을 좀 탔으면?
타도 벌써 타야 할 상을 다 늦게 받은 게, 그게 그렇게 대수야?
용심 : 당신, 그러다 천벌 받아요.
호철 : 뭐야?
용심 : 당신 속으로 난 자식이라도, 함부로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한 번이라도 걔한테, 고생 많구나, 버티기 힘들지?
그렇게만 다독였어도 벌써 됐을 애예요, 걔가.
호철 : 걔가 십년 동안이나 무위도식한 게, 내 탓이란 거야? 허튼 소리 말구 밥이나 차려내.
용심 : 못 차려요! (오기로) 난 너무 좋아서 춤사위가 나오네! (정말 춤을 추며) 아이구 좋네, 아이구 좋아.
호철 : (어이없다) 벌써 죽을 때 됐어? 뭐 하는 짓이야!
용심 : (못 들은 척) 얼씨구 좋네~ 지화자 좋아~
호철 : (못 박는) 허파에 공기바람 넣을 만큼 넣었으면, 지금부터 성실하게 살 궁리 하라고 해. 흠흠!
호철, 화장실로 들어가 버린다. 용심, 야속해서 호철의 뒷모습을 째려본다.
들으라고, 더욱 더 목청 키워 ‘좋네’를 연발하며 춤을 추는 용심.
S#22. 호철의 아파트/ 하루 전/ 흑백 (낮)
화장실 변기에 앉은 호철, 아들 기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한편 대견하고, 한편 걱정 되고. 한숨, 푹 난다.
호철 : (신문에 대고) 장하다.
S#23. 병원 밖 (저녁)
호철과 수완, 어색하게 앉아 있다.
호철 : 엄마 깨어나면...
수완 : (본다)
호철 : 뭐든 엄마 좋은 대로 해 주자.
수완 : (선뜻 대답 못한다)
호철 : 글 쓰는 것도 니 맘 흐르는 대로 하고.
수완 : (?)
호철 : 소설 쓰는 일 잘 될 거 같냐?
수완 : ...모르겠어요.
호철 : (보고 피식) 솔직해서 좋다. (...) 힘, 안 드냐?
수완 : ... 들어요.
호철 : 그 대답 들을까 싶어 묻고 싶어도 참았다. 진짜 힘들다면 어쩌나...애비가 큰 도움 줄 형편도 아닌데...
수완 : (이 참에) 아버지!
호철 : 왜?
수완 : 저, 이렇게 허락 받는 건 싫어요.
호철 : (보면)
수완 : 엄마 때문에 얼렁뚱땅 인정받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아직은 모자라지만 더 노력해서, 꼭 제 실력으로 아버지한테 인정받을 게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호철 : (예상외의 모습에 웃음 난다) 복수냐?
수완 : (당당한) 예.
잠시 말 없는 두 사람.
호철, 시선을 머언 데 두고 한숨 푹 쉰다.
호철 : 니 엄마, 똥도 버릴 게 없는 사람이야.
수완 : 예.
호철 : (눈물 글썽) 저렇게 누워 있을 사람, 아니다.
수완 : 알아요.
호철, 말해 놓으니 가슴이 뭉근하게 아파온다.
수완, 어색하게 호철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위로 차원으로.
소원했던 부자간, 조금은 괜찮아지는 것 같다.
S#24. 응급실 일각 (저녁)
인공호흡기와 각종 기계에 매인 용심, 애처롭다.
칸막이를 열고 들어온 호철, 아직도 아내의 상태가 믿기지 않는다.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보기만 한다.
호철 : 이렇게 생겼나.... 이렇게나 늙었어...
용심의 오른 쪽 볼 한 쪽에 굳은 핏자국 보인다.
호철, 손수건을 꺼내 침을 묻혀 닦아 준다. 정성스럽게.
닦은 그 볼을, 쓰다듬는다.
S#25. 호철의 집/ 7년 전/ 흑백 (밤)
호철, 매섭게 용심의 오른쪽 뺨 갈긴다.
5씬의 아파트가 아닌 마당 있는 낡은 집.
마당에 서 있는 양숙, 고개 떨군 뒷모습만 보인다.
마루에 있는 용심, 호철의 바짓가랑이를 잡는다. 옆에 잘 차려진 밥상 놓여 있다.
호철 : 한 번만 더 내 집에 들여놔봐! 그땐 다릴 끊어 놀 테니.
용심 : (아픈 뺨을 참고) 여보, 애 가진 거 밥이나 먹여 보냅시다, 예? 소원이에요.
호철 : (밥상 엎어버린다) 부모 말 안 듣는 자식 소용없어! (방으로 들어간다)
용심 : 당신은 다 잘 하구 사셨어요?
호철 : (멈칫)
용심 : 부모가 하란대로만 하고 사셨냐구요? 하늘을 우러러, 정말 한 점두, 자식들한테 부끄럼이 없어요?
호철 : (놀랐다) 이 사람이-
대문 소리, 덜컹 난다. 휑한 마당. 이미 양숙은 없다.
맨발로 달려 나간 용심, 대문 앞에서 애타게 찾지만 양숙은 이미 멀어졌다.
맥없이, 천천히 도로 들어와 양숙이 서 있던 딱 자리에 서보는 용심.
용심, 눈물난다. 절망적이다. 더 이상 돌이키기 힘들다는 걸 안다.
마루로 돌아와 쪼그려 앉아 엎어버린 밥상을 뒤집고, 밥을 공기에 쓸어 담고, 흩어진 반찬을 상 위에 올리고,
그러다가 마늘장아찌에 손이 간다.
용심 : (눈물 참으며) 이젠 장아찌 담글 일 없겠네. 우리 집에 이거 먹는 식구, 저거 하나였는데.
냉정하던 호철,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려버린다.
S#26. 응급실 일각 (저녁)
응급의1, 2 들어온다.
호철, 용심의 얼굴에서 손을 떼는데 꼭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 같다.
서둘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는 호철.
S#27. 대기실 (저녁)
나란히 앉아 있는 규완과 영주, 수완 각자 생각에 잠겨 있다.
응급실에서 나온 호철, 세 사람보다 뒤쪽에 앉는다. 기척도 내지 않는다. 피곤해서 눈이 아리다.
잠시 눈을 감는 호철.
규완 : 택시 방향이 어디였다구?
수완 : 춘천. 춘천 국도.
규완 : (혼잣말) 춘천 국도라....왜 거기 계셨을까?
영주 : (묵묵부답)
규완 : 뭐 아는 거 있어?
영주 : (지나친 정색) 아니. 내가 어떻게 알아?
세 사람, 각자 생각에 잠긴다.
영주, 자기 손에 낀 반지를 내려다본다.
영주 : 당신, 이 반지 나한테 언제 줬지?
규완 : (귀찮다) 몰라.
영주 : 일 년쯤...됐나?
규완 : 그랬겠지, 뭐.
영주 : (의심) 혹시 걔한테만 사주기 미안해서 하나 더 샀니?
규완 : (펄쩍) 뭐? 너 제정신이야? 그게 얼마짜린데 두 개를 사냐?
영주, 펄쩍 뛰는 규완이 우습다. 흥, 코웃음 나온다.
규완도 억울해서 씩씩대고.
이 부부가 한심한 수완,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부부의 대화를 듣던 호철, 눈을 뜬다. 불안한 눈빛. 뭔가....생각이 났다.
용심(E) : 지금은 어디 사세요?
이선생(E) : ....춘천이요.
S#28. 번화가/ 일년 전/ 흑백 (낮)
호철과 용심, 차려 입고 모임에 가는 중이다.
용심, 호철의 팔짱을 끼려고 하면 호철은 자꾸만 뺀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코 팔을 꿰는 용심, 귀엽다.
잠시 내버려 둔 호철, 또 팔을 빼려는데,
이 선생(E) : 김 선생님, 안녕하세요?
50대 초반 여자 이 선생, 인사를 해온다. 차림새, 단정하고 우아하다.
잠시 누군가 싶던 호철, 이내 알아본다. 슬쩍 팔짱을 뺀다.
용심, 누군가 싶어 본다.
호철의 얼굴에 만감이 서린다. 기쁘고...안타깝다.
S#29. 찻집 안/ 일년 전/ 흑백 (낮)
이선생과 호철, 마주 앉아 있다.
왼쪽 손에다 반지를 낀 이선생의 손.
호철, 시선이 간다.
호철 : 그걸...여태...
이선생 : (고개 숙이며) 네. 그냥... 버리기...아까워서...
호철 : 결혼은?
이선생 : 아직....
호철, 이 선생 모습을 새삼 눈여겨본다. 참 곱다.
이선생도 호철을 본다. 안타깝고 슬픈 눈빛.
그 때, 화장실에서 나오는 용심. 허리춤을 여미며 호철 옆에 앉는다.
이 선생, 슬쩍 왼쪽 손을 아래로 내린다.
용심 : 아유, 많이 기다리셨죠? 주책없이 신호가 와서. 애들 아버지 평교사 시절에 같이 계셨다구요?
이선생 : 예.
용심 : 그러고 보니 본 것도 같네. 어디 사세요?
이선생 : ....춘천이요.
용심 : 이이 따라 춘천에 살 때, 이 양반이 호랑이 선생이라구 소문 났잖아요. 애들이 우리 집 담벼락에
호랑일 그려 놓구 도망갔는데, 그 그림이 어찌나 우습구 맹랑한지... (호철을 치면서 까르르 웃는)
호철, 용심이 창피하다.
S#30. 병원 앞 (밤)
입구에서 나오는 호철, 벤치에 앉는다. 지난 일들 때문에 상념이 많아진다.
S#31. 응급실 일각 (저녁)
용심,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평온해 보인다.
용심이 낀 반지, 오래 된 디자인에 흠집도 많다. 앞씬의 이 선생 것과 같은 반지다.
70에서 80사이를 오가던 심박동 수, 점점 올라간다.
S#32. 대기실 (밤)
규완, 일어서서 왔다 갔다 반복한다. 초조해서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영주 : 앉아, 좀.
규완 : 울 엄마 잘못 되면 나 어쩌냐? 제대로 여행도 한 번 못 보내드렸는데...
영주 : 그러게 전화 좀 자주 드리라니까.
규완 : (앉아서 얼굴 묻고 괴로워한다)
영주 : (그래도 안됐다) 괜찮으실 거야. 괜찮으셔야 하구.
규완, 영주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한숨쉬고 토닥여주는 영주.
하필이면 규완의 핸드폰, 울린다. 액정 본 규완, 굳는다. 그 여자!
영주, 직감으로 안다. 어쩔 줄 모르는 규완. 영주, 전화 뺏어 받는다.
영주 : (잠시 듣다가) 좀 나중에 하세요. 여기 병원이니까.
툭, 끊어버리는 영주. 핸드폰 규완에게 던지다시피 한다.
규완, 영주의 눈치를 본다.
영주 : 딱 5초 동안 당신 말 믿었는데, 그 5초도 아깝다.
규완 : (?)
영주 : 아주 통곡을 하면서 당신 사랑한댄다.
규완 : 이 여자가 정말. (영주에게) 난 아냐, 여보. 진짜 정리했다니까.
영주 : 왜, 당신도 정리하고 헤어진 다음에 길바닥에서 우연히 만났냐?
규완 : (짜증난) 만나긴 누굴 만나? 도대체 언놈 얘길 자꾸 나한테 갖다 붙여?
들어오던 호철, 영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충격. 며느리가 알고 있나. 발이...떨어지질 않는다.
영주, 호철을 봤다.
영주 : (피한다) 나, 어머님 좀 보고 올게. (얼른 간다)
S#33. 금은방/ 25년 전/ 흑백 (낮)
반지들을 꺼내 진열장 위에 늘어놓는 주인
호철, 그 중 현재 용심이 낀 반지를 유심히 본다.
직접 들어 요리 조리 살펴본다. 예쁘다. 흐뭇한 호철.
S#34. 호철의 집/ 25년 전/ 흑백 (밤)
아무 말 없이 반지 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용심, 감격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다.
애들 셋, 옆에서 나란히 자고 있다.
용심 정말, 나 주겠다구 사셨어요?
호철 ...그럼. 시집올 때 반지 하나 못해줘, 미안하다.
용심 (도리도리) 아니에요. 아니에요. 나두 이불 한 채 못해왔는데, 뭐.
호철 ...끼워줄까?
용심 (들여다보느라 바쁘다) 윤이 빤딱빤딱하는데,
아껴 놨다 나중에 껴야지.
S#35. 호철의 집/ 25년 전/ 흑백 (저녁)
변두리 낡은 집 마당. 퇴근하고 들어와 마당에서 세수하고 있는 호철
반지가 마당에 팽개쳐져 또르르 구른다.
호철, 보면 용심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
호철 기껏 사다준 걸 왜 그렇게 굴려?
용심 미끄러졌나 봐요.
호철, 씻기만 한다.
지켜보던 용심, 뭐라고 물으려는데 안에서 애들 싸우는 소리 들린다.
용심 얼른 들어와서 식사하세요.
용심, 잠시 망설이다가 반지 줍는다.
들어가려다가 씻고 있는 호철 뒷모습 본다.
밉다. 미워 죽겠다. 반지를 쥔 손, 부들부들 떨린다.
손을 홱 치켜든다. 당장이라도 호철 등에 반지를 내던질 기세다.
S#36. 응급실 일각 (밤)
영주, 용심의 팔 다리를 열심히 주무르는 중이다.
용심의 손에 낀 반지를 만져보는 영주.
영주(E) 그래서 어떻게 하셨는데요?
용심(E) 어떻게 하긴 야, 도로 손에 끼웠지.
아깝잖냐? (무안한 웃음) 호호호-
영주 어머니도 참. 한 번 팽개친 걸 뭐 하러 도로 주워 끼셨대?
(한숨) 얼른 일어나세요. 그래야 어머님한테 아범 욕도 실컷 하죠.
용심, 답이 없다. 미소 짓는 듯한 얼굴.
칸막이 사이로 들어오려던 수완, 영주를 보고 돌아나가려고 한다.
영주 정말 그분 만나려고 춘천 가시던 거예요?
(한탄조) 내 남편은 못 믿어도 어머님 남편은 믿었는데...
어떻게 아버님 같은 분이 딴 여자를 다 맘에 두셨을까?
그것도 딸 같은 여자를. 남자들, 다 못 믿겠다. 그죠, 어머니.
수완, 고개를 홱 돌려 용심을 본다. 놀란 얼굴.
S#37. 호철의 집/ 일년 전/ 흑백 (밤)
소파 위에 앉아 텔레비전 뉴스 보는 호철과 수완
용심, 바닥에 앉아 과일을 깎고 있다.
다 깎은 과일 접시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뉴스 끝나자 방으로 들어가려는 호철
용심 좀 잡수고 들어가요.
호철 (냉정하게) 남들 앞에서 팔짱 끼고 그러지 마.
다 늙어 창피하지도 않아? (들어가 버린다)
용심 (치!) 당신만 늙었지, 난 청춘이네 뭐.
부모의 일에 전혀 관심 없는 수완,
리모콘을 돌려 드라마를 본다.
나이 든 여자와 젊은 남자의 포옹 장면이 나온다.
용심, 유난히 집중해서 본다.
용심 (혼잣말) 젊은 애랑 자면...그렇게 좋으까?
수완 (경악) 엄마, 지금 뭐라 그랬어요?
용심 (심드렁한) 왜, 너도 엄마가 창피하냐?
수완, 어이없다.
S#38. 공중전화 부스 (밤)
호철, 쪽지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이고 있다.
쪽지에는 ‘춘천’이라는 단어와 전화번호가 단정한 글씨체로 쓰여 있다.
결국 전화번호 버튼을 누르는 호철.
한참을 신호가 가고 저쪽이 받았다.
호철 거기 이화인 선생, 계십니까? (듣다가) 아, 그래요...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나, 김호철이요.
(듣다가) 오래 됐지. 우연히, 한 일 년 됐나?
음..뭘 좀 묻고 싶어서... 질문이 뜬금없어도 이해해요.
혹시...우리 애들 엄마랑 연락한 적, 있나?
호철, 답을 듣는데 어느새 옆에 수완이 와 있다.
당황한 호철,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고 한다.
호철 아, 그래요? 잘 알았습니다. 건강 조심해요. (끊는)
수완 (기가 막힌) 이화인..선생님이요?
S#39. 초등학교 3학년 교실/ 25년 전 / 흑백 (낮)
이, 화, 인이라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칠판에 쓰는 이 선생
20대 중반으로 풋풋하고 상큼하다.
이름을 다 쓰고 아이들을 보면서 해맑게 웃어주는 이 선생.
어린 수완, 이 선생이 좋아 입이 헤 벌어진다.
꼭 자기를 보고 웃어주는 것만 같다.
S#40. 호철의 집/ 25년 전/ 흑백 (낮)
부엌 안. 먹음직스런 계란말이, 후라이팬 위에 올려져 있다.
규완, 수완, 양숙, 그 앞에서 군침을 흘리고 있다.
규완 엄마, 우리도 좀 주면 안 돼?
용심 아버지 저녁까지 일하신대잖아. 니들은 담에 해줄게.
에이~ 실망하는 아이들.
계란말이를 뒤집으려던 용심, 기름이 튈까 무서워 반지를 빼놓고 한다.
심심한 양숙, 반지를 껴보려고 한다.
용심 가만 안 둬? 그게 얼마짜린데!
양숙 (안 그래도 서러운데~ 우앙~)
수완 엄마, 도시락 내가 가져갈까?
우리 선생님도 아직 계실지 모르는데...히~
용심 (웃으며) 됐어. 엄마가 갈 거야. (양숙에게) 뚝 그쳐!
안 그치면 계란 안 준다.
바로 헤- 거리는 양숙. 못 가게 해서 삐죽거리는 수완.
규완 나두! 엄마, 나두 줘!
용심, 지 새끼들이 예뻐 웃음이 난다.
S#41. 초등학교 교무실 앞/ 25년 전 /흑백 (낮)
용심, 복도에서 교무실 들여다본다. 아무도 없다.
바리바리 싸온 보자기를 내려놓는다.
반지 생각이 난다. 주머니에서 꺼내 들여다본다.
좋아서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쓱쓱 옷에 닦고 껴보려는데, 저쪽에서 오는 이 선생
용심, 반지 도로 넣는다.
이 선생, 용심을 보고 멈칫했지만 금세 반가운 표정이 된다.
이선생 오셨어요?
용심 예.
이선생 김선생님...금방 오실 거에요. 잠깐 나가셨거든요.
용심 예.
이선생 (도시락 보고) 아유, 뭘 이렇게 많이 싸오셨어요?
하면서 도시락을 만지는 이 선생의 손.
용심, 눈이 번득 한다. 이선생의 손에 끼워진 반지! 용심 것과 같다.
이선생 맛있겠다. 저도 좀 얻어먹어도 되죠?
용심 (사태 파악 안 된다) 그, 그럼요. 울애기 담임선생님이신데.
반지, 반지, 반지...용심의 눈에는 그것만 들어온다.
갑자기, 도망치듯, 복도를 달려 도망치는 용심
조용한 복도에 용심의 발소리 울린다.
용심의 뒷모습 보는 이 선생 표정, 복잡하다.
S#42. 초등학교 일각/ 25년 전/ 흑백 (낮)
복도 끝에서 숨을 고르는 용심
그럴 리 없어, 도리도리 고개 젓는다.
다시 교무실 쪽을 본다. 저 끝에서 호철이 온다.
호철, 고개 숙이고 있는 이 선생 앞에 선다.
이 선생, 눈물 흘리고 있다.
안타까워서 이 선생의 눈물을 닦아주려다가,
주위를 의식하고 이 선생과 함께 저쪽 복도 쪽으로 사라진다.
손을...꼭 잡고서.
용심, 부들부들 떨면서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본다.
S#43. 공중전화 부스 (밤)
수완, 호철을 노려보고 있다.
호철, 분노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낸다.
수완 그 분이 춘천 사세요?
호철 ...그래.
수완 지금까지 만나오신 거에요?
호철 그런 일 없다.
수완 부끄러울 일 하지 말고 살라면서요?
호철 (마지막 자존심) 니들한테 부끄러울 일은 안 하고 살았어.
수완 엄마한텐요?
호철 마음만 준 게 부끄럽다면, (하다가 고개 숙이며) 아니다.
수완 ...정말 이거 밖에, (더 하려다가 참는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
서로를 쳐다보지 못한다.
S#44. 응급실 일각 (밤)
용심에게 엎드려 있는 영주,
의료진 들어오는 소리에 서둘러 일어난다.
심박동 90을 넘어 가파르게 상승한다.
응급의1, 2. 안 좋다는 눈빛 교환한다.
영주, 겁에 질려 용심을 쳐다본다.
S#45. 대기실 (밤)
응급의1, 가족들을 모아놓고 설명 중이다.
응급의1 결정을...해 주셔야겠습니다.
곧 심장이 견디기 힘든 상황이 올 겁니다.
어떻게, 심폐소생술을 더 해보시겠습니까?
규완 (감정 주체 못하고 울기 시작한다) 엄마, 엄마-
영주 (짜증난다) 조용히 좀 해!
(응급의1에게) 가능성은, 얼마나 되나요?
응급의1 (고개 떨구며)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심폐소생술 자체가 워낙 강하게 흉부를 압박하기 때문에,
갈비뼈도 많이 손상됐고...
침울한 분위기.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호철 결정할 시간이..얼마나....
응급의1 얼마, 안 됩니다.
수완 선생님, 당연히 심폐소생술을, (하는데)
호철 (말 자르며) 십분만, 주십시오.
모두 (호철 본다)
수완 아버지! 끝까지 해봐야,
호철 (단호하다) 딱 십분만... 안 되겠습니까?
응급의1 (갈등하는) 알겠습니다.
혹시 그 사이 환자 상태가 위험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호철 (끄덕끄덕)
응급의1, 응급실 안으로 들어간다.
모두들, 마음이 무겁다. 잠시 침묵.
영주 아버님....어떻게 하시겠어요?
호철 (도리도리) 모르겠다. 해라, 말아라...말이란 게 너무 무섭구나.
수완 (좋지 않은 감정) 돌아가시게 내버려둘 작정이세요?
호철 ...엄마 좀 봐야겠다.
호철, 응급실 쪽으로 들어간다.
나머지 가족, 전부 생각에 잠겨 있다. 어째야 하나, 어쩌는 게 좋을까.
규완의 전화벨 울린다. 규완, 액정 본다. 신경 쓰이는 영주.
규완, 전화를 끊는다. 또 울린다. 또 끊는다.
또 울리면 아예 배터리를 빼버린 규완,
그러다가 신경 쓰이는지 병원 밖으로 휑하니 나간다.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아버리는 영주
S#46. 병원 앞 (밤)
규완, 통화중이다.
규완 그래, 우리엄마 돌아가시게 생겼는데 니가 나한테 이러면 되냐?
나도 괴로워. 제발 그만하자, 응?
어느새 나온 영주, 규완을 노려본다.
규완 (의식하며) 끊어. 절대, 절대 다시는 전화하지 마. 알았지?
진짜 끊는다. 나 거짓말 아냐. (뚝 끊는다)
영주 (억누르며) 무시가 안 돼?
규완 그게 아니라...자꾸 할 거 같아서...서로 괴롭잖아.
영주 괴로우시겠지. 좋아죽겠는데 못 만나니 오죽하겠어?
규완 (피곤하다) 그만 좀 하자. 여기까지 와서 계속 이래야겠냐?
영주 (눈물 어린) 알겠어. 다 알아버렸어.
규완 또 뭘? 도대체 뭘 알았다는 건데?
영주 됐어. 전화나 줘.
애들한테, 할머니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얘긴 해줘야지.
규완 놔둬!
영주 왜 놔둬! 걔들도 알 건 알아야지.
누가 죽는지, 누가 배신하는지, 누가 떠나는지!
쪼그리고 앙- 눈물을 쏟아버리는 영주
규완, 답답하기도 하고 영주가 창피하기도 하다.
S#47. 대기실 (밤)
수완, 핸드폰 단축키 1번을 누른다. ‘은경’이라고 뜬다.
그러다가 끊어버린다. 감정이 북받쳐서 앉아 있을 수 없다.
벌떡 일어난다.
수완(E) 엄마가 뭘 안다구 그러세요?
괴로워 미치겠다. 벽에 콩, 콩, 머리를 박는 수완
수완 엄마, 엄마, 제발, 제발...
S#48. 응급실 일각 (밤)
응급의들, 심박동 숫자를 주시하고 있다.
들어온 호철, 용심 옆에 선다. 응급의들, 옆으로 조금 비켜준다.
아내를 애틋하게 보던 호철, 그 반지를 빼낸다. 서서히.
곡소리(E)
S#49. 용심의 집/ 38년 전/ 흑백 (밤)
용심 어머니의 영정. 울지도 못하고 그 옆에 멍- 앉아 있는 용심
마당에서 곡하는 용심의 이모들
호철과 다른 선생들, 들어선다.
이모1 아이고- 우리 언니 단골 선생님들 오셨네.
용심아, 뭐하냐. 귀한 분들 오셨다!
용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호철, 울지도 못하는 그녀가 안타까워 죽겠다. 애틋한 눈길.
잠시 후.
용심과 호철 영정 앞에 나란히 앉아 있다.
넋이 빠진 용심의 모습, 처연하다.
호철, 서두르지 않고 용심의 손을 그러쥔다.
놀란 용심 빼려고 하면 결연한 호철.
호철 (쳐다보지 못하고) 반지도...못해줄지 몰라요.
용심 (무슨 얘긴가)
호철 애 셋 낳고 난 담에 꼭 예쁜 걸로 해줄게요.
용심, 이제야 알아들었다. 기쁜데 눈물이 왈칵 난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눈가가 촉촉한 호철, 용심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준다.
용심 (엄마 영정을 보며) 엄마처럼요...
호철 (보면)
용심 나중에 꼭, 울 엄마처럼 가고 싶어요. 곱게. 깨끗하게.
용심의 입에서 울음소리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감정을 닫아버렸던 여자, 남자 앞에서 서서히 무너진다.
한꺼번에, 둑이 무너지듯 오열하는 용심
호철, 말없이 용심의 손을 꽉 쥐고 있다. 손이 하얘질 지경이다.
S#50. 응급실 일각 (밤)
반지 뺀 용심의 손을 앞씬처럼 꽉 그러쥐는 호철.
심박동 수, 120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응급의1 (부드럽게) 보호자분.
호철 알아요. 내 알아요.
응급의1 (더 이상 말하지 못한다)
호철 여보. 내 다시 예쁜 반지 끼워줄게.
(울음 난다) 용서도 말고, 기억도 말아.
(의료진에게) 그냥...이대로...
응급의1 알겠습니다.
호철, 격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다.
S#51. 대기실 (밤)
울음이 터진 호철을 보고 벌떡 일어난 가족들
가슴을 부여잡고 우는 호철을 보고, 짐작한다.
수완 (절망적인) 아버지,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들어가려는데)
호철 (겨우) 규완아, 둘째 좀, 둘째 좀-
규완, 영주 (줄줄 울면서 수완을 막는다)
호철 보내 주자. 그게 맞다.
견디기 힘든 수완, 아악- 소리 지르며 주저앉는다.
영주 (덜덜 떨면서) 여보, 가 보자. 마지막 인사는 드려야지.
규완 (겁먹었다) 못 가. 난 못 가.
영주, 덜덜 떨면서도 혼자 안으로 향한다.
S#52. 응급실 구석 (밤)
막 들어온 수완, 멀리서 용심을 본다. 사무치는 울음 새어나온다.
용심 옆에는 영주가 있다.
수완의 핸드폰 울린다. 액정 보면, ‘은경’ 이다.
전화 받는 수완.
수완 (눈물 참으며) 은경아. 잘 들어갔니?
은경(F) 네, 선배.
수완 좋은 남자였으면...좋겠다, 그 사람.
(울먹거리는) 사람을 보낸다는 게... 너무...힘들다.
어디서든...잘 지내구...오래 살아...
감정이 격해져서 전화를 끊고 웅크려 앉은 수완, 끅끅끅 운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보면 은경이다.
핸드폰 귀에 대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은경 두진 선배한테 들었어요.
수완을 안아주는 은경. 가슴으로 깊숙이 안는다.
S#53. 응급실 일각 (밤)
영주, 울면서 용심의 머리를 가지런히 해 준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보면 손에 반지가 없다. 선명한 반지 자국.
S#54. 영주 언니의 아파트/ 하루 전/ 흑백 (낮)
8씬 대화의 연장이다.
용심 니가 안 들어가면, 애들은?
영주 (입맛 가신다. 수저 놓는다.)
용심 (반지 보며) 이 반지, 이 세상에 두 개다.
영주 (?)
용심 나, 니 아버지 맘에 뒀던 여자.
영주 (경악한다)
용심 일부러 보란 듯이 하고 다녔다.
니가 나한테 잘못한 거, 이거 볼 때마다 생각나라고.
영주 (...)
용심 아가.
영주 예.
용심 일단 들어가서 애들부터 돌봐라. 살겠는지, 못 살겠는지는
니 맘 가는 대로 하구. 결정 되면 애들한테도 말해줘야 한다.
어린 것들이라고 무시하면 큰 코 다쳐.
영주 (의외다)
용심 아까 그늘 얘기했지? 그늘이 싫으면 나와도 된다는 걸 난 몰랐다.
뜨거우나 시원하나 견디는 건 줄만 알았지...
내 속으로 난 자식도 내 맘대로 안 되는데, 니가 내맘 같겠냐?
영주 (그랬구나...고맙고 미안하다)
S#55. 응급실 일각 (밤)
영주, 지그시 용심을 바라본다.
영주 (작게) 어머님, 죄송해요. 그늘, 벗어날래요.
영주, 눈물이 쏟아진다. 편안한 용심의 얼굴 위로
심박수 급격히 상승하고 띠띠- 위험하다는 기계음 들린다.
응급의1 빨리 가족들 불러 모으세요.
다리가 덜덜 떨리는 영주, 급히 나간다.
S#56. 응급실 구석 (밤)
뛰쳐나가는 영주 보고 사태 파악한 수완.
천천히 엄마 쪽으로 다가간다. 은경도 따라간다.
S#57. 응급실 앞 (밤)
망연자실하게 앉아 울고 있던 호철과 규완.
응급실에서 뛰쳐나온 영주, 두 사람을 본다. 말없이.
호철, 알고 정신없이 뛰어 들어간다.
S#58. 응급실 일각 (밤)
가족들, 용심을 둘러싸고 있다.
애써 온화하게 웃고 있는 호철, 애틋하게 용심 본다.
용심의 얼굴 매만지고, 다 센 머리 쓰다듬는다.
S#59. 용심 어머니 식당/ 39년 전/ 흑백 (밤)
새카만 단발머리에 핀 꽂은 용심, 수줍게 인사한다.
허름한 밥집. 막 들어온 호철, 말없이 답인사하고 식탁에 앉는다.
용심의 어머니, 주방에서 밥 준비 중이고,
용심, 밑반찬 가져와서 놓기 전에 행주로 식탁 닦는다.
유난히 더러운 부분이 신경 쓰이는 용심,
자기도 모르게 침을 묻힌 손가락으로 빡빡 닦는다.
아차, 선생님 앞이었지! 낭패한 얼굴로 호철의 눈치를 본다.
호철, 웃음 난다. 무안할까봐 참는다.
용심 (삐졌다) 그냥...시원하게 웃으세요.
호철, 그 말에 웃음이 더 난다.
무안한 용심, 문을 열고 후다닥 나가버린다.
어머니 선생님, 저년이 왜 저런대요?
호철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밥 주세요.
호철, 자꾸 신경 쓰여서 밖을 내다본다.
S#60. 용심 어머니 식당 앞/ 39년 전/ 흑백
벽에 기대서 발로 흙을 탁탁 차는 용심,
금방이라도 울 것 같지만 꾹 참는 중이다.
호철, 문을 열고 나온다. 모른 척하는 용심
호철 (웃으면서) 화 나셨어요?
용심 (뾰루퉁) 아뇨. (...) 드럽죠?
호철 (보면)
용심 (손가락으로 시늉) 침 묻혀 닦는 거.
호철 아뇨. 용심씨가 하면 안 드러워요.
용심 진짜요? 거짓 아니구?
호철 (끄덕끄덕)
용심 (삐죽삐죽 웃음) 후라이, 해드릴까요?
호철 (또 끄덕끄덕)
발로 또 흙을 탁탁탁. 기분 좋아 경쾌한 동작의 용심이다.
용심, 문을 드르륵 힘차게 연다.
용심 (우렁차게) 어머니! 후라이 한 개~
호철, 해맑은 용심이 예뻐 죽겠다.
또 탁탁탁 땅을 차는 용심의 발.
S#61. 응급실 일각 (밤)
마지막으로 용심의 발을 만지는 호철.
굳은살, 주름, 각질이 가득한 세월이 새겨진 용심의 발.
톡, 톡, 웃으려고 애쓰는 호철의 눈물방울 용심의 발 위에 떨어진다.
한참을 매만지던 호철, 발등에 깊이 입을 맞춘다.
띠- 심장 정지음. 심장 박동수 0.
응급의1 (확인하고) *월 *일 *시 *분, 운명하셨습니다. (나간다)
적막해진 실내. 심장 정지음만 가득하다.
규완 (난데없이) 엄마,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울기 시작하는)
나머지 가족들의 입에서도 울음이 터져 나온다.
울음소리 가운데 누워 있는 용심.
S#62. 대기실 (밤)
진이 다 빠져 앉아 있는 가족들.
호철, 수완 옆에 앉은 은경을 본다.
은경, 목례를 한다. 호철, 끄덕끄덕.
규완, 대놓고 은경을 보면 영주 눈치 준다.
규완 엄마, 진짜 어디 가시는 길이었을까?
영주 (짜증나지만 참고) 그게 뭐가 중요해, 지금.
규완 (무안한)
호철, 여섯 살 정도 되는 여자 아이 눈에 들어온다.
창구에서 수속 밟고 있는 30대 여자의 손 꼭 잡고 있는 아이.
누가 아픈지 울고 있는 엄마 때문에 아이도 울먹거리고 있다.
수완의 핸드폰, 울린다.
액정, 모르는 번호다. 어? 누구지?
은경 (조심스럽게) 받아 봐요.
수완 (받는) 여보세요? (듣고) 어, 강 서방! 지금 어디야?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뭐? (한참 듣다가) 알았어. 일단 끊어.
규완 강 서방? 양숙이 신랑?
수완 (멍한) 딸을 낳대네. 양숙이가.
영주 어머, 둘째 낳았나보네.
(번뜩) 혹시 춘천이래요, 도련님?
수완 아뇨. 수원이요.
며칠 후에 엄마 오시기로 했었다는데, 예정보다 일찍 나왔다구.
말이 없는 가족들.
호철, 여자 아이 또 본다. 호철을 빤히 보는 여자아이의 귀여운 얼굴.
용심어머니(E) (애타게 찾는) 용심아~ 용심아~
S#63. 논두렁길/ 54년 전/ 흑백 (저녁)
어둑어둑할 무렵, 어린 용심 길 한가운데 앉아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다.
멀리서 용심을 부르는 용심 어머니.
몰두한 용심, 듣지 못한다.
찾았다, 용심 어머니, 용심의 등짝을 후려친다.
용심어머니 얘 이년아! 어둑어둑해지는데,
밥도 안 쳐먹고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 동넬 열 바퀴는 돌았네.
용심 (심각하게) 어머니.
용심어머니 왜?
용심 개구린 몇 년이나 살아요?
용심 어머니 이상해서 보면, 용심이 들여다보던 건 개구리 시체다.
용심어머니 (또 등짝 후려갈기며) 밥 나오냐? 이런 걸 들여다보구 있게?
용심 (아프지만) 불쌍해요.
용심어머니 뭐가 불쌍해, 이년아! 뭐든 태어나면 다 죽는 거야.
용심 (경악) 어머니도요?
용심어머니 (픽 웃음) 그럼. 난 사람이 아니라드냐?
용심 (공포) 안돼요. 어머닌 죽지 마요.
내 말 잘 들을게. 죽는 거 싫어요.
용심어머니 (싫진 않다) 미친 년. 알았다, 이년아.
헤- 그제야 환히 웃는 어린 용심.
암전.
S#64. 신생아실 앞 (낮)
면회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 양숙, 강 서방,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
커튼이 열리고 양숙, 번호표를 보여준다.
간호사, 아이 데리고 온다.
고물거리는 두 손, 다들 감회에 젖었다.
호철 지 외할머닐, 많이 닮았네..
양숙, 엄마 얘길 듣자 울음을 터뜨린다.
애 때매 웃었다가, 용심 때문에 울다가,
그렇게 울다 웃는 가족들.
암전.
S#65. 호철의 아파트/ 거실/ 일 년 후 (낮)
양숙, 막 아기의 기저귀를 다 채웠다.
소파에 앉은 호철, 양숙에게 아기 받아 어른다.
부엌에서 나오는 은경, 반찬통 가지고 나온다.
은경 장아찌 넉넉하게 담아왔는데, 좀 가져갈래요?
양숙 시집오기도 전에 시아버지, 시누이 반찬부터 해 날라요?
은경 (웃고) 좀 오반가?
양숙 오바는 오반데, 나한테 유리한 오바니까 좋죠, 뭐. (받아 들고)
엄마 장아찌 생각난다. 잘 먹을게요.
후다닥, 방에서 나오는 수완.
수완 아버지, 이거 좀 들어보실래요?
호철 애기 놀랠라. 뭐 때매 호들갑이야?
수완 (오디오에 테잎 넣고 플레이 누른다)
은경 (나오며) 뭐예요?
수완 엄마 노래. 노래방에서 녹음한 거.
양숙 정말?
테이프 안에서 흘러나오는 용심의 노랫소리. 2씬의 ‘봄날은 간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웃음소리, 즐거운 비명소리.
잠시 상념에 잠기는 가족들.
호철, 자기 손톱을 본다. 꽤 길다.
S#66. 호철의 아파트/ 안방 (낮)
방으로 들어온 호철.
호철 (혼잣말) 손톱 깎기가-
도대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여기 저기 서랍을 뒤지는 호철, 드디어 찾았다. 손톱 깎기.
깎으려는데 문득,
용심(E) 내가 깎아드릴게.
호철(E) 스- 됐다니까.
용심(E) (웃음기) 이리 줘보라니까요.
잠시 눈물 어리는 호철, 애써 누르고 손톱을 깎기 시작한다.
벽에 붙어 있는, 환히 웃는 용심의 사진.
용심의 노랫소리 들리기 시작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S#67. 택시 안/ 흑백 (낮)
여전히 노래 부르며 창밖보고 있는 용심
2씬과 동일하다. 사고 나기 전의 상황.
기사, 아무래도 궁금하다.
기사 진짜 어딜 가시는 거예요?
용심 (농담) 왜요? 궁금해서 몸이 막 다시나?
기사 네에!
용심 ... (창밖 보며 잔잔한 미소)
늙으면 가끔 옛날 생각이 나요. 없었을 때, 힘들었을 때.
내가 여기까지 살아왔구나 신기하기도 하고.
볕이 좋고 해서 그냥 뛰쳐나와 버렸지, 뭐.
기사 하하- 참 엉뚱하시네.
흘러가는 자연풍광을 보는 용심,
따신 햇볕에 눈이 저절로 감긴다.
나오는 하품을 입을 가려 누그러뜨린다.
용심 기사님.
기사 예?
용심 나 좀, 잘게요. 이상하게 잠이 쏟아지네.
기사 그러세요.
눈 감은 용심. 자는 것 같기도 하고 꿈꾸는 것 같기도 하고.
S#68. 호철의 집/ 25년 전 (낮)
어느 볕 좋은 하루.
마루. 어린 양숙을 안고 재우는 용심.
수완은 옆에서 숙제 하고 있고, 규완은 늘어져 자고 있다.
마당에서 세숫대야에 물 담아 어푸, 어푸 세수하는 호철.
호철의 등짝 바라보는 용심.
이 모든 게 조금은 행복하다.
부끄럽게 수줍게 웃는 용심에서. [完]
첫댓글 고맙습니다.